<마태복음 22:34~46>
저는 예수 믿기 전부터 모든 일에 어떤 자신감 같은 게 없었습니다. 또 누군가로부터 사랑을 받아본 경험이라든가, 칭찬 속에서 자라지도 않았고, 성장기 내내 누군가에게 주목 받아본 적도 별로 없었던 거 같습니다.
저는 성장기의 끝, 열아홉 살에 예수님을 처음 마음에 영접하고, 그 후 몇 년 지나지 않아서 목회자로의 부르심을 받고 신학교에 들어갔습니다. 세례 받은 지 얼마 안됐고, 신앙생활한지도 몇 년 되지 않았고, 성경에 대해서, 하나님에 대해서도 아직 많이 알지 못하던 때에 목회자로의 소명 때문에 덜컥 신학교에 들어간 것입니다. 신학교에 들어갔더니 정말 대단한 사람들이 많이 있었습니다. 입학 오리엔테이션을 하는데 어떤 형제는 마태복음을 통째로 외우고 있다고 하기도 하고, 어떤 형제는 세계 선교에 대한 큰 그림을 갖고 있기도 했고, 모든 일과 사역에 자신감들이 넘쳐 보였습니다.
제 성향 자체가 소극적이고 그렇게 자신감이 넘치는 사람이 아니었기 때문에 여러 가지 면에서 저는 부족함을 많이 느꼈습니다. 그러던 중 어느새 저는 신학대학원까지 졸업하고, 강도사고시에 합격해 1년간 강도사로서 사역하다가 목사고시까지 패스했습니다. 그리고는 목사안수를 받아야 하는데, 그 당시 목사가 된다는 것에 두려운 마음이 들었습니다. ‘나처럼 부족한 사람이 목사가 되어도 되는가?’에 대한 물음이 저 스스로에게 있었습니다.
그래서 제가 부교역자로 섬기던 교회 담임목사님께 ‘목사님, 아무래도 이번에 목사 안수는 못 받겠습니다.’ 그랬더니 목사님께서 ‘왜 안 받으려 하느냐?’ 물으셔서, ‘제가 너무 부족한 거 같아서요…’ 그랬더니 목사님께서 이런 말씀을 해 주셨습니다. ‘무슨 소리냐 부족하면 주님이 채워주시는 거지 이번에 목사 안수 받아라’ 하셨습니다. 사실 그 말씀에 용기를 얻어 제가 그 때 목사 안수를 받고 사역할 수 있었습니다.
베드로전서 5:5절 말씀에 보시면,
“하나님은 교만한 자를 대적하시되 겸손한 자들에게는 은혜를 주시느니라”
하나님 앞에서는 차라리 부족한 게 좋은 겁니다. 왜냐하면 부족하면 하나님께서 하실 일이 있으신 것입니다. 하나님은 부족한 사람의 부족을 채워주십니다. 그러나 넘치는 교만을 갖고 있는 사람에게는 하나님께서 주실 것이 없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그를 대적하신다는 것입니다.
사두개인들의 부활에 관한 까다로운 질문이 있었지만, 예수님은 그들로 하여금 대답할 수 없게 만드셨다는 소식을 바리새인들이 듣게 됩니다. 그리고 바리새인들은 그 중에 탁월한 율법사 한 사람을 앞세워 예수님을 시험하기 위해 질문합니다. 36절에 보면, “선생님 율법 중에서 어느 계명이 크니이까”라고 묻습니다. 예수님이 어떤 대답을 하든지 율법사는 논쟁할 준비가 되어 있었습니다.
그런데 37절부터 40절을 보시면,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셨으니, 이것이 크고 첫째 되는 계명이요. 둘째도 그와 같으니 네 이웃을 네 자신 같이 사랑하라 하셨으니, 이 두 계명이 온 율법과 선지자의 강령이니라”
바리새인들 사이에서도 율법 중에 가장 큰 계명에 대해서 서로 논쟁이 있기도 했었기 때문에 사실 이 질문에 대한 답이 쉽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너무나도 명확하게 율법을 압축 요약해 주셨던 것입니다. 십계명의 1~4계명은 하나님을 사랑하라는 것이고, 5~10계명은 이웃을 사랑하라는 것이었습니다. 마음과 목숨과 뜻을 다해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자신 같이 사랑하라는 말씀이었습니다. 그 동안 어떤 율법사도, 어떤 바리새인도 이렇게 명확한 답을 말했던 적이 없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는 오히려 바리새인들에게 묻습니다. 42절에서 “너희는 그리스도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느냐 누구의 자손이냐”라고 하시니, 그들은 “다윗의 자손이니이다”라고 답을 말합니다.
43절부터 44절을 보시면,
“이르시되 그러면 다윗이 성령에 감동되어 어찌 그리스도를 주라 칭하여 말하되, 주께서 내 주께 이르시되 내가 네 원수를 네 발 아래에 둘 때까지 내 우편에 앉아 있으라 하셨도다 하였느냐.”
유대인들은 메시야가 다윗의 자손으로 오실 것을 믿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다윗은 성령에 감동되어 그 메시야를 ‘주님’이라고 부르고 있는데, 예수님은 45절에서 “다윗이 그리스도를 주라 칭하였은즉 어찌 그의 자손이 되겠느냐”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그랬더니 바리새인들은 한 마디도 대답을 못하는 것으로 오늘 본문은 끝맺습니다.
바리새인들은 예수님께 무엇인가를 배우고자, 깨닫고자, 어떤 은혜를 받고자 왔던 것이 아닙니다. 그들은 자신들의 전공분야인 율법적인 지식과 능력을 갖고 예수님을 굴복시키려 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이 논쟁을 통해 그들의 지식과 깨달음과 이해의 한계와 부족을 깨우쳐 주시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사람입니다. 사람은 하나님 앞에 부족하고 연약합니다. 알고 있는 것보다 모르는 게 더 많습니다. 할 수 있는 것보다 할 수 없는 게 더 많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하나님이 필요한 것입니다. 우리가 부족한 마음으로, 가난한 심령으로 주님 앞에 나아갈 때 주님은 우리의 모든 부족을 채우시고, 연약함을 강함으로, 미련함을 지혜로움으로 바꿔주시는 것입니다. 오늘도 가난한 심령으로 주님 앞에 나아가십시다. 우리가 부족하다고 할 때, 주님은 싱글벙글 하십니다. 왜냐하면 이제 주님이 우리에게 뭔가 해 주실 게 있기 때문입니다. 내가 부족하면 주님이 채우십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