슬라이드1

“부활의 복음”

<마태복음 28:1~20> 

2019 부활절

 

 

 

조금 전, 영상의 내레이션을 통해서 우리가 듣고, 본 바와 같이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은 3년 반 동안 배와 그물과 생업까지 포기하고 오직 예수님만을 따랐던 제자들에게는 충격적인 날이었습니다. 제자들은 예수님께서 메시야이심을 믿었고, 그 분을 통해 그 땅에 메시야 왕국이 건설될 것을 믿었습니다.

그런데 그 날이 흐느껴 울어야 하는 날이 되었고, 패배의 날이기도 했고, 예수님을 믿지 않는 이들에게 ‘너희 구원자는 사기꾼 이었다’라고 조롱당하는 날이 되었습니다. 왜냐하면 예수님께서 아무런 기적도 일으키지 못하고 너무나도 무력하게 십자가에 달려 죽으셨기 때문입니다. 그는 죽어 무덤에 묻히셨습니다. 더 이상 제자들 앞에는 예수님이 없었습니다. 그렇게 예수님은 한 때 유대 땅을 기대와 흥분으로 들뜨게 했던 한물간 영웅이었습니다. 시간이 지나면 사람들의 기억 속에서도 그는 잊혀 질 것입니다. 그리고 그를 전부인 줄 알고 따랐던 제자들에게 감당하기 어려운 슬픔과 고통과 절망만이 가득했었습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는 죽은 지 사흘 만에 무덤을 깨뜨리고 다시 살아나셨습니다. 슬픔과 절망을 기쁨과 소망으로 가득 채우신 것입니다. 예수님의 부활은 제자들을 조롱하던 이들이 도리어 두려움에 떨게 하셨습니다. 제자들이 믿던 예수님은 그들을 실망시키지 않았습니다. 제자들의 믿음은 틀리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그 제자들은 부활의 증인이 되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이것을 우리는 ‘부활의 복음’이라 말할 수 있는 것입니다.

 

1. 너는 두려워 말라

안식 후 첫날(지금의 주일) 이른 새벽에 막달라 마리아를 비롯한 몇몇의 여성들이 지난 금요일 십자가에 달려 죽으셨던 예수님의 무덤을 찾아 갔습니다. 그런데 그 때 큰 지진이 나고, 그 형상이 번개 빛과 같이 밝고 빛나는 천사가 하늘로부터 내려와 무덤의 돌을 굴려내고 앉아 있었습니다.

 

4절을 보시면,

“지키던 자들이 그를 무서워하여 떨며 죽은 사람과 같이 되었더라”

예수님을 죽였던 대제사장을 비롯한 종교지도자들은 총독인 빌라도에게 요청해 무덤을 지킬 군병들을 지원해 달라했습니다. 왜냐하면 ‘나사렛 예수가 죽은 지 사흘 만에 다시 살아난다’는 말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그 사실을 믿지 않았고, 예수를 추종하던 이들이 시체를 훔쳐 숨겨놓고, 예수가 부활했다는 헛소문을 퍼뜨릴 것이라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로마의 군병들을 통해 공권력으로 철저하게 그 무덤을 파수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큰 지진이 일어나고, 번개 빛과 같은 천사가 하늘로부터 내려와 돌문을 굴려내고 그러니깐 군병들은 공포와 두려움 속에 쇼크로 기절해 버렸던 것입니다.

 

그리고 5절입니다.

“천사가 여자들에게 말하여 이르되 너희는 무서워하지 말라 십자가에 못 박히신 예수를 너희가 찾는 줄을 내가 아노라”

 

막달라 마리아를 비롯한 여자들은 그 사건이 일어난 뒤에 무덤에 왔던 겁니다. 도착해 보니 군병들은 죽은 사람들처럼 무덤 앞 여기저기에 쓰러져 있고, 커다란 무덤의 돌문은 굴려 옮겨져 있었습니다. 뭔가 엄청난 일이 벌어진 것을 직감한 여인들은 두려운 마음을 갖고 허리를 굽혀 열려진 무덤 안을 들여다봤습니다. 그랬더니 그 무덤은 비어 있었습니다. 예수님의 시신을 찾을 수가 없었습니다. 요한복음에 보면 마리아는 누군가 예수님의 시체를 훔쳐간 것으로 생각했습니다.

그 때 천사가 여자들에게 나타나 “너희는 무서워하지 말라”라고 말하고 있는 겁니다. 4절에서 무덤을 지키던 군병들이 천사들이 나타났을 때 무서워하여 떨며 기절해 버렸었는데, 4절에서도 그리고 5절에서도 동일하게 ‘무서워하다’는 단어를 사용하고 있습니다. 군병들도 무서웠고, 마리아를 비롯한 여인들도 무서워했습니다.

그런데 군병들은 큰 지진과 함께 번개와 같은 강렬한 빛으로 하늘로부터 임하는 천사를 보고 충격과 공포와 두려움 속에 쇼크로 기절해 버렸습니다. 누구라도 그런 상황 속에서는 그렇게 될 가능성이 큽니다. 더더구나 군병들은 예수를 거부하고 믿지 않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런데 예상치 못한 엄청난 역사가 눈앞에 나타난 겁니다. 그러니 공포와 두려움 속에 기절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못 박아 죽이고, 그를 믿지 않고, 그를 반대하고 있었는데 지축이 흔들리며 큰 지진이 일어나고, 하늘로부터 천사가 번개와 같은 강렬한 빛과 함께 내려오는데 군병들은 ‘이젠 죽었구나’하며 기절해 버린 것입니다.

이렇게 생각하시면 이해가 쉬우실 겁니다. 어떤 사람이 사사건건 교회 일에 반대를 합니다. 뒤에서 목사님을 비난하고, 교회를 분열하고, 목회자와 성도 사이를 이간질 하고, 온갖 불신과 부정적인 말들로 교회 공동체를 어지럽히고, 예수 믿는 자를 핍박하고, 하나님의 이름을 욕되게 하고, 주의 말씀을 멸시하는 사람이 있다고 합시다.

그런데 어느 날부터 몸이 시름시름 아프기 시작하고, 멀쩡하던 자녀가 갑자기 사고를 당하기도 하고, 잘 나가던 사업장이 흔들거린다고 한다면… 어떤 마음이 들겠습니까? 하나님이 두렵지 않겠습니까? 뭔가 보이지 않는 강한 손길이 심판의 칼로 임하는 것 같지 않겠습니까? 그런데 그 때는 이미 늦는 겁니다. 세례요한이 선포했던 것처럼 그 때는 이미 도끼가 나무뿌리에 놓여 있는 상황인 것입니다. 두려움과 공포가 그를 덮어버릴 것입니다. 군병들은 지금 그런 상황 속에서 쇼크로 기절해 버린 겁니다.

그러나 5절에 보면, 여자들도 무서워했습니다. 그런데 군병들과는 다른 두려움이었습니다. 군병들에게 공포와 두려움의 대상이었던 천사들과 대화를 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하지만 그 신비로운 상황들이 여인들에게도 두려웠을 겁니다. 그러나 천사들은 그녀들에게 “너희는 무서워하지 말라”라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은 주님의 임하심이나, 주님의 재림이 믿지 않는 자들에게는 재앙과 심판이지만, 믿는 우리들에게는 하나님의 위로와 축복이라는 것을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또 주님의 부활 역시 믿지 않는 자들에게는 충격과 쇼크로 기절할 일이었지만, 주님을 믿고 따르던 이들에게는 슬픔이 기쁨으로 변하고, 눈물과 절망이 기쁨과 소망으로 변하는 것입니다. 무서워 할 일이 아닌 것입니다. 그래서 천사는 두려워하지 말라고 말씀하시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때때로 인생의 가장 깊은 어두움을 경험하게 될 때가 있습니다. 부부의 관계가 도저히 회복될 거 같지 않을 정도로 깊은 상처로 아파하고, 이렇게 이 관계가 끝날 거 같기도 할 겁니다. 하루하루 산다는 것이 내게 너무 힘겨운 일이기도 할 것이고, 하는 일들마다 실패하고 도저히 앞이 보이지 않을 상황들이 내 앞에 있습니다.

다른 사람들은 잘만 사는 거 같은데, 나는 인생의 실패자처럼 느껴질 때도 있습니다. 하루하루가 소망이 없고, 우울하고, 죽고 싶은 생각에 자녀들을 보며 마음을 다잡아야 할 때가 많을 것입니다. 재정적인 문제, 질병의 문제, 가정의 문제, 인간관계의 문제, 시시각각으로 변하는 내 감정에 관한 문제, 심지어 교회생활에 관한 문제까지… 뭐 하나 만만한 것이 내게는 없습니다. 언제쯤 이 고난이 끝이 날지, 나는 이 무덤과 같은 깊은 어둠에서 탈출할 수 있을지 절망적인 하루하루를 보내고 있기도 할 것입니다.

그 절망의 무덤 앞에서 두려움에 떨고 있는 우리를 향해서 주님께서 오늘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 너는 두려워하지 말라.

– 나는 사망의 권세를 깨뜨린 하나님이다.

– 나는 너를 다시 일으킬 것이다.

– 나는 너를 다시 살릴 것이다.

– 나는 너를 회복시켜 줄 것이다.

– 너는 반드시 재기하게 될 것이다.

– 너는 부활의 복음을 증거하게 될 것이다.

– 나는 너를 통해 반드시 영광을 받을 것이다.

– 너는 인생의 무덤에서 밖으로 나오라!

 

이사야 53:4절 말씀을 보시면,

“그는 실로 우리의 질고를 지고 우리의 슬픔을 당하였거늘 우리는 생각하기를 그는 징벌을 받아 하나님께 맞으며 고난을 당한다 하였노라”

 

이 구절의 구약 성경에 나오는 대표적인 메시야 예언구절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의 질고를 지고 우리의 슬픔을 당하였다’라고 말씀하시고 있습니다. 여기서 ‘질고’라는 것은 ‘질병과 고통’을 말합니다. 궁극적으로는 우리의 죄를 의미하기도 하고, 광의적으로는 인생 속에서 겪게 되는 모든 슬픔과 고통을 말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신 것은 우리의 죄 뿐만 아니라, 우리의 모든 슬픔과 고통과 질병과 문제들까지도 모두 포함한다는 것을 말합니다.

 

갈라디아서 2:20절 하반절에서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자신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

 

오늘 인생의 무덤 앞에서 절망하는 이들에게 주님은 이렇게 말씀합니다. ‘내가 너를 얼마나 사랑하는 줄 아니? 내가 너를 위해 십자가까지 진 거야. 나는 너를 위해 내 몸을 버렸단다. 내가 너를 이렇게 사랑한다. 이제 이 믿음으로 살아야 한다.’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실수가 많고, 자주 넘어지고, 무능력해서 실패하고, 또 실패할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여전히 나를 사랑하시는 이 믿음으로 사시길 바랍니다.

분명 나를 두렵게 하는 것들이 내 앞에 있습니다. 인생의 무덤 앞에서 쾌쾌한 냄새가 올라오고, 으스스한 기분 나쁜 느낌이 있을 수도 있습니다. 앞으로 내 인생이 어떻게 될지 모를 두려움이 느껴질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부활의 주님은 우리에게 ‘너는 두려워 말라’고 말씀하십니다. 그 죽음의 무덤은 이미 비어있다고 말씀하십니다. 이것이 부활의 복음인 것입니다.

 

2. 너의 갈릴리로 가라

천사를 만난 여자들이 무덤을 떠나 이 부활의 소식을 전하기 위해 제자들을 향해 달음질 했습니다. 그 때 예수님께서 그 여자들을 찾아오셨습니다.

 

10절 말씀을 보시면,

“이에 예수께서 이르시되 무서워하지 말라 가서 내 형제들에게 갈릴리로 가라 하라 거기서 나를 보리라 하시니라”

 

이 구절에서도 역시 ‘무서워하지 말라’고 거듭 말씀하시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무서워하다’는 표현은 4절, 5절, 8절, 10절 등 여러 구절에서 쓰여 지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 표현 외에 10절에서 ‘갈릴리로 가라(go to Galilee)’는 비슷한 표현 역시 7절과 10절과 16절 등 세 차례에 걸쳐 반복하고 있는 것을 보게 됩니다.

이 말씀은 예수님께서 제자들과 함께 최후의 만찬을 하신 후에 감람산으로 가시면서 이미 예고하셨던 말씀입니다.

 

마태복음 26장 32절에서 “내가 살아난 후에 너희보다 먼저 갈릴리로 가리라”하셨습니다.

 

그러나 이 말씀을 귀담아 들었던 제자는 없었던 거 같습니다. 예수님께서 부활하신 후에야 제자들이 그 때 말씀하셨던 것을 깨달았던 거 같습니다.

 

 

참고적으로 이스라엘의 지도를 보시면, 갈릴리는 이스라엘의 북쪽 끝부분에 위치한 커다란 갈릴리 호수를 중심으로 한 지역을 말합니다. 남쪽으로는 사해바다가 있구요. 예루살렘은 사해바다의 서북 방향에 위치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공생애 사역의 대부분을 갈릴리 바다의 어촌마을들을 중심으로 활동하셨었습니다. 예루살렘은 특별한 절기 기간에 주로 방문하셨던 것으로 보입니다. 예루살렘은 이스라엘의 수도였고, 갈릴리는 변방이었고, 당시 비천한 어부들이 생계를 위해 고기를 잡으며 생활하던 곳이었습니다.

그런데 예루살렘에서 갈릴리까지는 약 140km 정도 떨어져 있었기 때문에 특별한 교통수단이 없었던 당시에는 결코 가까운 거리는 아니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왜 부활하신 예루살렘에 계시지 않고, 나사렛으로 먼저 가 계실 것이라고 하셨을까요?

당시 대제사장을 비롯한 종교지도자들은 예수를 따르는 이들을 정치적 권력을 갖고 박해하고 있었습니다. 예수님이 부활했다고 하면 그들은 더욱 더 거세게 박해를 해올 것입니다. 때문에 권력이 집중되어 있었던 예루살렘보다는 비교적 안전한 변방 갈릴리로 제자들을 부르신 거로 보입니다. 부활의 주님께서는 갈릴리에서 제자들을 다시 격려하고, 믿음을 새롭게 하시고, 그들에게 새로운 사명을 주시길 원하셨던 것입니다.

이런 이유들 외에 또 다른 이유들도 있었습니다. 갈릴 리가 어떤 곳입니까? 예수님께서 공생애 사역을 시작하시고, 공생애 대부분을 갈릴리 지역에서 활동하셨습니다.

갈릴리는 제자들이 예수님을 처음 만난 곳이었습니다. 처음 예수님을 만났을 때의 그 감격과 은혜가 있는 곳이었습니다. 그들은 배와 그물을 다 버려두고, 생계문제까지 포기하고 주님을 따를 정도로 자신의 인생을 주님을 위해 헌신했습니다.

주님의 뒤를 따르면서 예수님을 통해 일어난 수많은 기적을 생생히 목격한 곳이었습니다. 질병으로 고통 받던 이들이 치유되었습니다. 귀신에 매여 있었던 이들이 자유함을 얻게 되었습니다. 굶주림에 고통 받고 있던 이들이 배부를 수 있었습니다. 제자들의 빈 그물이 찢어질 정도로 가득 찼던 경험이 있었던 곳입니다. 먹고 살기 위해서 살던 그들이 사람을 낚는 어부로 부르심을 받은 곳이었습니다. 그들의 생각이 변하고, 가치가 달라지고, 꿈이 바뀌고, 하나님 나라의 비전을 갖게 된 곳이었습니다.

 

요한계시록 2장 4절, 5절을 보시면

“그러나 너를 책망할 것이 있나니 너의 처음 사랑을 버렸느니라. 그러므로 어디서 떨어졌는지를 생각하고 회개하여 처음 행위를 가지라”

 

이 말씀은 에베소교회의 성도들을 책망하시던 말씀입니다. 그들이 처음 순수하고 뜨거웠던 주님을 향한 사랑과 믿음을 잃어버렸던 것입니다.

지금 제자들의 모습이 그런 겁니다. 예수님은 그래서 갈릴리로 제자들을 다시 부르신 것입니다. 우리가 과거의 좋았던 추억의 길을 걷게 되면 그 때의 감정과 마음으로 돌아갈 때가 있습니다. 주님께서 제자들에게 처음의 그 뜨거웠던 믿음과 마음으로 돌아갈 것을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주님께서도 우리에게 오늘 동일하게 말씀하시고 있습니다. ‘너의 갈릴리로 돌아가라’는 것입니다. 지금 우리의 신앙을 점검해 보십시오. 마치 박제되어 있는 동물과 같이, 겉모양은 그럴듯한 모습을 하고 있지만 그 속은 비어 있고, 죽어 있고, 생명력을 잃어버린 것은 아닙니까? 부활절이라고 해서 부활을 이론적으로는 말할 수 있지만, 내 삶 속에서 부활의 능력을 전혀 경험하지 못하고 있는 것은 아닙니까?

주님께서 여러분을 처음 만나주셨던 그 갈릴리로 돌아 가야합니다. 어디서 떨어졌습니까? 어디에서부터 문제가 생긴 것입니다. 지금 이 모습이 주님이 기뻐하실 만한 모습입니까? 주님께서 지금 내 모습을 보시고 칭찬하시겠습니까? 주님과 함께 동거 동락하던 나의 갈릴리로 돌아가야 합니다. 그 믿음으로, 그 신앙으로, 그 순수함으로, 그 사랑으로 돌아갈 때 내 삶에 부활의 능력이 나타나게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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