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느헤미야 2:1~4>
– 느헤미야처럼 기도하라(3) –우리가 ‘기회’라는 말의 영어단어를 보통 두 가지를 쓰고 있는데,
첫 번째로 우리나라 사람들이 가장 많이 쓰고 있는 단어는 아마도 <Chance>라는 단어일 겁니다. 또 다른 하나는 <Opportunity>라는 단어가 있습니다. 이 두 가지 모두 ‘기회’라는 단어로 번역은 되지만, 의미는 약간 다르게 쓰여 지고 있습니다.
첫 번째로 <Chance>라는 단어는 ‘결과를 장담할 수 없는 가능성’을 말합니다. 질 수고 있고 이길 수도 있는 또는 장사가 잘 될 수도 있고 안 될 수도 있는, 성공할 수도 있고 실패할 수도 있는… 그 결과를 모르지만, 어쨌든 ‘기회’라는 거죠.
두 번째 단어인 <Opportunity>라는 단어는 ‘긍정적이고, 진취적 의미의 기회’를 말합니다. 정말 몹시 원하던 것을 얻거나, 정말 하고 싶었던 그 일이나 그 자리에 올라간 것을 말합니다.
Chance는 어떻게 될 지 아직 모르는 것이고, Opportunity는 정말 원하던 그 기회를 잡은 겁니다. 그래서 두 단어는 약간 다른 의미가 있는 겁니다. 우리에게도 이 두 가지 기회의 때가 있는데, 오늘 본문의 경우 느헤미야에게도 어떤 기회가 온 겁니다.
느헤미야는 4개월이 넘도록 기도하고 있었습니다. 지금 예루살렘의 상황, 동족인 유다인들은 주변 여러 민족들로부터 큰 환난과 능욕(수치)을 받고 있습니다. 페르시아 제국에서 왕을 섬기는 관직을 맡고 있었던 느헤미야는 어찌하든지 동족인 유다의 파괴되어져 버린 예루살렘의 성벽을 재건하고, 불탄 성문을 복구하기를 원했습니다.
그런데 느헤미야가 할 수 있는 게 없는 겁니다. 과거에 페르시아 왕의 명령으로 유다인들의 예루살렘 성벽을 재건하려는 모든 시도에 대해서 ‘중단 및 금지 명령’이 있었기 때문입니다(에스라 4:21). 일개 신하였고 유다인이었던 느헤미야가 어떻게 왕명을 거부하고 예루살렘 성벽 재건이나 유다인들을 도울 수 있겠습니까?
불가능한 겁니다. 방법이 없는 겁니다. 금식과 기도는 4개월 넘도록 하고 있었지만 페르시아 아닥사스다 왕의 한 신하에 불과하던 느헤미야가 할 수 있는 일은 아무것도 없었습니다. 그러니 느헤미야는 점점 애가 탈 수 밖에 없는 겁니다. 예루살렘과 동족 유다인들의 환난을 생각하면 먹먹해지고 마음이 답답해지는 겁니다.
그러니 얼굴에 수심이 가득 찰 수밖에 없었던 겁니다. 그러던 중에 왕궁에서 잔치가 열렸는데, 느헤미야는 그 직분에 따라 왕 앞에 포도주를 올렸습니다. 그런데 아닥사스다 왕이 우연히 느헤미야의 안색을 살피게 되었습니다.
2절 말씀입니다.
“왕이 내게 이르시되 네가 병이 없거늘 어찌하여 얼굴에 수심이 있느냐 이는 필연 네 마음에 근심이 있음이로다 하더라 그 때에 내가 크게 두려워하여”
사실 페르시아의 황제가 잔치석상에서 일개 신하의 안색을 살피고 그럴 이유가 전혀 없는 겁니다. 그런데 아닥사스다의 왕의 눈에 느헤미야의 안색이 들어온 겁니다.
느헤미야에게 드디어 ‘기회’가 온 겁니다. 하지만 여기서의 기회는 Opportunity 라기 보다는 Chance라는 단어가 더 잘 어울립니다.
기회는 기회지만 어떻게 될지 모르는 겁니다. 그래서 2절에서 아닥사스다 왕이 “네가 병이 없거늘 어찌하여 얼굴에 수심이 있느냐?”라고 묻자, 느헤미야의 마음의 상태가 어떠했어요? 왕의 물음에 느헤미야는 “내가(느헤미야) 크게 두려워하여”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 말은 분명 기회는 기회지만, 앞으로의 상황이 어떻게 될지 모르기 때문에 크게 두려움이 엄습한 것입니다.
왜 느헤미야의 마음속에 두려움이 임했겠어요?
느헤미야의 꿈(소원)이 뭐겠어요?
첫 번째는 ‘예루살렘 성벽(성문) 재건’ 그리고 두 번째는 ‘유다인들을 환난에서 구원’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이미 살펴봤듯이 아닥사스다 왕의 재위 초기에 왕명(국법)으로 ‘예루살렘 성벽 재건 중단 및 금지 명령’이 떨어졌었습니다.
그것은 예루살렘 주변 여러 민족들이 페르시아 각 도에서 포로 귀환한 유다의 중흥을 경계했고, ‘성벽 재건이 페르시아로부터의 독립하려 하고, 더 이상 페르시아 왕을 섬기지 않으려고 하고, 세금도 내지 않으려는 시도이다’라고 모함을 했었고, 왕에게 고소장도 제출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런 상황에 당연히 아닥사스다 왕은 국법으로 ‘예루살렘 성벽재건 중단 및 금지’를 명했던 겁니다.
그런데 만약에 느헤미야가 그런 사실을 잘 알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왕에게 ‘예루살렘의 성벽을 재건을 할 수 있도록 해달라’고 한다면 그것이 당시 절대군주 시대에는 가당치도 않을 요청이었던 겁니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왕명이나 국법을 개정하거나 수정해야 한다는 얘긴데, 일개 신하의 개인적 요청으로 그것은 있을 수 없었던 일이었던 겁니다. 그래서 2절에서 느헤미야는 “내가 크게 두려워하여”라고 그 마음의 상태를 말하고 있는 겁니다.
기회는 기회지만 앞 일이 어떻게 될지 모르는 상태인 겁니다. 왕이 크게 노하여 느헤미야를 내치거나 목을 칠 수도 있고, 또는 기적적으로 왕이 느헤미야의 요청을 들어 줄 수도 있는 겁니다.
하지만 느헤미야는 용기를 내서 왕에게 느헤미야가 근심하고 있는 이유를 말하게 됩니다. ✓ 3절입니다.
“왕께 대답하되 왕은 만세수를 하옵소서 내 조상들의 묘실이 있는 성읍이 이제까지 황폐하고 성문이 불탔사오니 내가 어찌 얼굴에 수심이 없사오리이까”
느헤미야는 지혜롭게 처음부터 왕의 심기를 건드리지는 않았습니다. 처음부터 왕의 명령과 국법을 개정하거나 수정해달라고 요청하면, 왕이 느헤미야에 대해 얼마나 도전적으로 생각하겠습니까? 어떤 왕이든 “요놈 봐라?” 할 수 있는 겁니다.
당시 고대 문화 속에서 가장 중요하게 생각했던 것 중에 하나가 ‘조상들의 묘실’에 관한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동서양을 막론하고 고대의 모든 왕들과 귀족들이 묘지 또는 묘실에 대해 중요하게 생각하고, 그것을 역사에 남을 만한 큰 건축물(피라밋, 진시황의 무덤, 우리나라 임금들의 능)로 준비했던 것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느헤미야는 아닥사스다 왕 역시 동감할 수 있고, 그 왕의 생각을 존중하면서 동시에 자신의 요청 사항을 말했을 때도 왕이 수용할 수 있는 내용을 말하는 지혜를 활용했던 겁니다.
아닥사스다 왕 입장에서도 자신이 총애하던 신하가 근심하고 있는데, 그 이유가 ‘조상들의 묘실’이 있는 성읍이 황폐해졌고, 성문이 불탔다는 내용이기에 충분히 동감할 수 있는 내용이었던 겁니다.
그래서 ✓ 4절을 보시면,
“왕이 내게 이르시되 그러면 네가 무엇을 원하느냐 하시기로 내가 곧 하늘의 하나님께 묵도하고(Then I prayed to the God of heaven)”
아닥사스다 왕의 마음이 움직이고 있었던 겁니다. 느헤미야에게 “네가 무엇을 원하느냐?”라고 물었던 겁니다.
그런데 느헤미야는 바로 대답을 하지 않고 어떻게 해요? “내가 곧 하늘의 하나님께 묵도하고” 즉, 그 순간, 그 기회의 때에 느헤미야는 하늘의 하나님께 기도했던 겁니다.
느헤미야는 4개월간 끈질기게 기도했습니다. 막막하고 전혀 앞도 보이지 않는 상황이지만, 그것 외에는 방법이 없었습니다.
그 기도는 ‘기회(Chance)’를 만들었습니다. 드디어 아닥사스다 왕에게 뭔가를 요청할 수 있는 기회를 얻게 된 것입니다. 하지만, 그것은 Chance일 뿐입니다. 어떻게 될 지 모르는 상황입니다. 오히려 상황이 더 안 좋아질 수도 있는 겁니다.
그 때 느헤미야는 그 짧은 순간이라도 ‘기도’하게 됩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구한 것입니다. 그 기도는 기회를 만들 뿐만 아니라,
느헤미야의 그 상황에 놀라운 ‘변화(Change)’를 가져오게 되었던 것입니다.
여기에서 우리가 중요한 영적 원리를 하나 배우게 됩니다.
<Chance : 기회>라는 것이 <Change : 변화>가 되기 위해서 느헤미야가 했던 것은
끊임없이 순간순간마다 <기도>했다 라는 것을 우리가 볼 수 있습니다.
우리 인생 속에 여러 가지 기회(Chance)가 주어질 것입니다. 그 기회들은 여러분의 인생을 완전히 뒤바꾸어 놓을 축복도 될 수 있지만, 우리의 인생을 망쳐놓을 위기도 될 수 있는 것입니다. 그것이 잘 될지, 안 될지에 대해서 누구도 장담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느헤미야가 ‘기회의 때, 기도했던’ 이 영적 원리를 기억하십시오. 기회의 때, 더욱 기도하십시오. 더욱 엎드리십시오. 여러분 앞에 있는 Chance는 여러분 인생의 놀라운 Change가 될 것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