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빌립보서 3:1~11>
남유다 왕국의 훌륭한 왕들 중에 한 사람인 히스기야 왕의 시대에 앗수르의 산헤립 왕이 군사 185,000명을 이끌고 유다를 침공합니다. 그는 예루살렘을 포위했고, 온갖 협박을 통해 유다인들을 공포에 떨게 했습니다. 또한 유다의 왕 히스기야는 절박한 상황에 처하게 됩니다. 방법이 없었던 히스기야 왕은 하나님 앞에 나아가 엎드려 통곡하며 하나님의 은혜를 구하게 됩니다. 하나님께서는 선지자 이사야를 보내 응답하셨고, 그 밤에 천사가 나와 앗수르 진영에서 군사 185,000명을 치게 되어 히스기야와 유다 왕국을 구원하셨습니다(왕하19장).
그 이후에 히스기야가 병들어 죽게 되었는데, 히스기야는 얼굴을 벽으로 향하고 하나님께 다시 통곡하며 기도하게 됩니다. 하나님께서는 히스기야의 기도를 들으시고 그의 생명을 15년이나 연장시켜 주십니다. 히스기야는 위기의 때마다 항상 하나님을 의지했고, 하나님은 히스기야의 기도를 들으시고 놀라운 기적과 역사로 응답하셨습니다(왕하20:1~11). 그는 기적의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때 바벨론 왕이 히스기야가 병 들었다는 소식을 듣고, 왕의 편지와 예물들과 함께 사신들을 보내 히스기야를 위로했습니다. 히스기야는 바벨론 같은 강대한 나라의 왕이 자신에게 사신을 보낸 것에 고무되었던 거 같습니다. 그래서 그 바벨론의 사신들에게 왕궁의 보물 창고와 군기고와 온 나라 안에 모든 것들을 다 보여주며 자랑했었던 겁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사야 선지자를 보내셔서 히스기야 왕이 자랑하던 왕궁의 모든 것이 장차 바벨론으로 옮겨지게 될 것을 예언하게 하셨습니다(왕하20:12~15).
하나님만 바라보던 믿음의 사람 히스기야가 왜 이랬을까요? 사람은 자신이 믿는 것을 의지하고, 그 의지하는 것을 자랑하게 되어 있습니다. 그렇다면 그는 앗수르 왕 산헤립이 쳐들어왔을 때에도, 그가 죽을병에 걸렸을 때에도 하나님만 믿고 의지했었습니다.
하지만 그렇게 모든 일들이 다 잘 되고, 그에게 영광과 부와 귀가 임하면서부터 그는 하나님보다 다른 것에 마음이 가기 시작했던 것입니다. 강대국이었던 바벨론 왕이 그에게 잘 보이려고 할 정도로 그는 세계적인 명성을 얻게 되었고, 부와 영광과 귀함이 따랐던 것입니다. 그때부터 그는 하나님보다 물질적이고, 이 세상의 영광을 의지하고 바라봤던 것입니다. 그래서 그런 게 자랑하고 싶어서 바벨론 사신들에게 왕궁의 모든 것들을 속속들이 보여줬던 것입니다. 때문에 우리의 일들이 잘 풀려 나갈 때, 오히려 더 엎드리고 더욱더 하나님만 의지해야 하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의 바울 사도는 3절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하나님의 성령으로 봉사하며 그리스도 예수로 자랑하고 육체를 신뢰하지 아니하는 우리가 곧 할례파라”
진정한 신앙은 이 땅의 것들을 자랑하지 않습니다. 오직 예수를 자랑한다는 것입니다. 당시의 율법적 유대인들의 경우는 육체의 할례와 같은 율법에 관해 매우 강조했고, 율법적 행위로 구원이 임한다고 주장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자신들의 율법적 행위를 자랑하고, 그것으로 구원 받는다고 믿고 의지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이렇게 사람은 자신이 믿는 것을 의지하고 그 의지하는 것을 자랑하게 되어 있는 것입니다. 대체로 돈이 많은 사람은 돈을 믿고, 돈을 의지하고, 돈을 자랑하게 되어 있습니다. 지식이 많은 사람은 자신의 지식을 믿고, 의지하고, 그것을 자랑합니다. 여러 가지 능력이 많은 사람은 그 보잘 것 없는 능력을 믿고, 의지하고, 그걸 자랑하는 겁니다.
그러나 아무리 돈이 많은 사람도 불치병에 한 번 걸리고 나면 다시 일어나기가 쉽지 않습니다. 때로 돈이 전능할 거 같은데, 그런 상황에서는 꼭 그렇지만도 않습니다. 아무리 공부를 많이 했고, 명문대학의 석사, 박사를 했다고 하더라도 그 잘난 머리로 십자가의 구원의 도리를 깨닫는 것도 아닙니다. 아무리 대단한 능력을 갖고 있어도 그 능력으로 천국에 갈 수 없는 것입니다.
사도행전 4장 12절에서
“다른 이로써는 구원을 받을 수 없나니 천하 사람 중에 구원을 받을 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음이라 하였더라”
바울 사도는 이 사실을 너무나도 잘 알고 있었습니다. 과거 그 역시 철저하게 육체적인 자랑을 갖고 있었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뼈 속까지 혈통적으로 이스라엘 족속이요, 히브리인이었던 것입니다. 또한 교회까지 박해했던 열심분자였습니다(4~6절). 하지만 그는 다메섹의 예수 그리스도 앞에서 육신의 눈이 멀었었던 적이 있었습니다. 그의 지식도, 행위도, 혈통도, 출생도, 행위도, 그 어떤 스펙도… 그 순간 아무 소용이 없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7절, 8절을 보시면
“그러나 무엇이든지 내게 유익하던 것을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다 해로 여길뿐더러, 또한 모든 것을 해로 여김은 내 주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하기 때문이라 내가 그를 위하여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배설물로 여김은 그리스도를 얻고”
바울은 이제 예수 그리스도 외에 과거 자신이 자랑하던 모든 것들을 쓰레기와 배설물과 같이 여긴다는 것입니다. 구원 받는데 그것들은 오히려 더 장애물이 되었던 것입니다. 왜냐하면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이 이 세상 어떤 지식보다 가장 고상하기 때문이었습니다.
『오직 주로 인해』라는 찬양이 있습니다. 그 후렴 가사에 “여호와 이레 날 채우시네, 여호와 닛시 승리로 날 이끄시네, 여호와 샬롬 평화의 왕 나 경배하리 오직 주로 인해”라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이 가사와 같이 다른 것이 우리의 인생을 이끌고, 채우고, 살리는 것이 아니라 오직 주의 은혜로 우리를 이끄시고, 채우시고, 회복시키시고, 살리시는 것입니다. 때문에 오직 주님만 자랑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무엇을 믿고, 무엇을 의지하고, 무엇을 자랑하며 살고 있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