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느헤미야 5:8~9>
리더(leader)가 있으면, 그를 따르는 팔로워(follower)가 있다는 말입니다. 리더에게 팔로워가 없다면 그는 리더가 아닙니다. 혼자라면 리더라는 자리도 필요 없고, 리더도 될 수 없는 겁니다. 어떤 사람이 대단한 능력이 있고 아무리 잘 났다고 해도 팔로워가 있어야 함께 큰일을 이루어갈 수 있는 것입니다. 혼자서 할 수 있는 일에는 한계가 있는 법입니다. 어떻게 해야 팔로워를 얻을 수 있을까요?
세계 최강의 국가 미국을 2009년부터 지금까지 7년째 이끌고 있는 버락 오바마(Barak Obama) 대통령의 지지율은 아직까지 50%대를 유지하고 있습니다. 간혹 인터넷에 오바마의 모습과 태도가 화제가 되기도 하는데, 2011년 5월에 알카에다 소탕 작전 중에 오바마 대통령은 백악관 상황실에서 그것을 지켜보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오바마 대통령은 중앙의 자리에 앉지 않고, 작전 부사령관 옆에 쭈그리고 앉아 있었는데, 그 모습에 우리 네티즌들이 감동을 받았던 거 같습니다. 아무래도 우리나라와 같이 권위적 리더의 모습에서는 보기 힘든 모습이었기 때문인 거 같습니다. 또 백악관의 한 청소부 옆을 지나갈 때는, 미국 사람들이 친한 사람들과 하는 주먹인사를 그 청소부와 하는 사진이 올라온 적도 있었구요. 어떤 흑인 꼬맹이가 오바마 대통령의 머리가 자기와 같은지 한번 만져보고 싶다고 하니깐, 90도로 허리를 굽혀 꼬마 아이가 오바마 대통령의 머리를 만져보게 했습니다. 일상의 이런 모습들이 국민들에게는 감동을 주는 겁니다.
특히 지난 6월 백인우월주의자 청년이 한 흑인교회에 들어가 총기를 난사해서 9명이 숨졌고, 그 중에 그 교회의 담임목사님이자, 주 상원의원인 ‘클레멘타 핑크니(41세)’목사님도 숨졌습니다. 오바마 대통령은 그 목사님의 추도식에 참석해서 연설을 하던 도중에 ‘찬송가305장 Amazing Grace(나 같은 죄인 살리신)’을 부르기 시작했는데, 그 자리에 함께 있었던 6천명이 울면서 그 찬송을 함께 불렀습니다.
오바마 대통령이 국민들의 지지를 입고 국정을 잘 이끌어 갈 수 있는 것은 그가 평소에 국민에게 감동을 주는 리더이기 때문에 가능 한 것입니다. 탁월한 능력이 있어도 국민들이 움직이지 않고 지지하지 않는다면 그가 미국의 대통령이라 할지라도 무엇을 할 수 있겠습니까?
느헤미야는 유다의 총독으로 부임했습니다. 그에게는 힘이 있었고, 권위가 있었습니다. 그에게 주어진 권력으로도 어떤 일들을 추진해 나갈 수 있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는 백성들의 마음을 움직일 수 있는 리더였습니다. 리더는 무분별하게 권력을 쓰기보다, 사람들의 마음을 움직이는 리더가 진정한 리더인 것입니다.
8절 말씀을 보시면,
“그들에게 이르기를 우리는 이방인의 손에 팔린 우리 형제 유다 사람들을 우리의 힘을 다하여 도로 찾았거늘 너희는 너희 형제를 팔고자 하느냐 더구나 우리의 손에 팔리게 하겠느냐 하매 그들이 잠잠하여 말이 없기로”
바벨론 포로였던 이스라엘 백성들이 B.C.538년에 1차 귀환했습니다. 그리고 B.C.458년이 에스라와 함게 2차 귀환이 있었고, B.C.444년에 느헤미야가 페르시아에서 3차로 유다의 백성들을 데리고 귀환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면 1차 귀환 시점부터 느헤미야의 귀환 시점까지 약 94년간의 세월이 흘렀던 겁니다. 거의 100년 가까운 세월이 흐르는 동안 유대 사회 안에서 힘과 재물과 지위를 갖게 된 사람들과 가문들이 생겨났던 겁니다.
7절에서 그들을 ‘귀족들과 민장들(150명)’이라고 지칭하고 있습니다. 느헤미야가 와서 예루살렘 성벽 재건이라는 위대한 비전을 이뤄가고 있는데, 예루살렘에 도착한지 얼마 안 된 느헤미야가 미처 알지 못했던 유대 공동체 안의 심각한 사회적 문제점들이 있었던 겁니다.
힘과 지위와 재력이 있었던 이들의 횡포였습니다. 가난한 백성들은 도저히 그 가난을 벗어날 길이 없었습니다. 그 이유는 7절에서 느헤미야가 지적하고 있는 것처럼 ‘고리대금(高利貸金)’이 원인이었습니다. 귀족과 민장들은 백성이 어려울 때, 백성을 돕지는 못할지언정 오히려 그것을 이용해 더 큰 부를 축적하고 있었던 겁니다.
느헤미야를 더욱 분노케 했던 원인은 8절에서 말씀하고 있는 것처럼 동족인 유대인들 간의 노예매매가 성행했던 것입니다. 빚을 갚을 길이 없어 밭도 빼앗기고, 포도원도 빼앗기고, 나중에 더 이상 빼앗을 게 없으니깐 채무자의 어린 자녀들을 노예로 끌고 가거나, 노예가 필요한 사람한테 팔아넘기는 노예매매가 성행했던 겁니다.
느헤미야는 8절에서 “이방인의 손에 팔린 우리 형제 유다 사람들을 우리의 힘을 다하여 도로 찾았거늘”이라고 말합니다. 느헤미야가 페르시아에서 귀국할 때, 페리시아 사람들의 종으로 있었던 유대인들을 힘을 다해(마땅한 댓가를 지불하면서까지) 도로 찾아온 것입니다. 동족인 유대인이 이방인들의 종으로, 노예로 비참한 삶을 살아가는 것이 너무나도 마음이 아팠던 겁니다. 그래서 느헤미야와 그 일행은 힘을 다해 유대인들을 노예상태에서 건져온 겁니다.
그런데 “너희는 너희 형제를 팔고자 하느냐? 더구나 우리의 손에 팔리게 하겠느냐?”라고 느헤미야는 탄식하며 책망하고 있는 겁니다. 바벨론과 페르시아 이방 사람들의 노예 상태에 있는 이들을 힘을 다해 풀어 자유케 해서 그들이 꿈에 그리던 예루살렘으로 돌아와 귀환한 유대인들이 그 약속의 땅에서 살았던 겁니다. 그런데 그 땅에서 세월이 지나 힘을 갖게 된 유대인들이 동족 유대인 형제들을 사고파는 모습은 이해하기 힘든 노릇이었던 겁니다.
이런 느헤미야의 탄식과 책망에 “그들이 잠잠하여 말이 없기로…” 그들은 한 말도 할 수가 없었습니다. 하나님의 선민이었던 유대인들이 이방인들과 똑같이 살고 있을 뿐만 아니라, 하나님을 아버지로 부르는 신앙공동체요, 한 형제와 자매 사이에 있어서는 안 될 너무나도 부끄러운 모습이었던 겁니다.
여기에 느헤미야가 한 가지를 더 말하게 되는데, 9절을 보시면
“너희의 소행이 좋지 못하도다(What you are doing is not right)” 그들의 행위는 옳지 않은 일입니다.
그들의 행위는 하나님 앞에서의 ‘죄’였던 겁니다. 왜냐하면, 출애굽기 22:25절에서 “네가 만일 너와 함께 한 내 백성 중에서 가난한 자에게 돈을 꾸어 주면 너는 그에게 채권자 같이 하지 말며 이자를 받지 말 것이며”라고 말씀하시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들이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당시의 그런 기근과 식량난 상황 속에서 높은 이자를 받으며 부를 축적하는 것은 하나님 앞에서 ‘죄’였던 것입니다.
또 “우리의 대적 이방 사람의 비방을 생각하고” 지금 귀족들과 민장들의 모습은 개념이 없는 사람들과 같습니다.
우리나라가 지난 주간부터 어제까지 남북은 첨예하게 대치하고, 전쟁의 위기를 보내고 있었습니다. 전역을 앞둔 장병들까지도 전역을 연기하고 군에 남아서 나라를 지키겠다고 할 정도 였습니다. 그런데 몇몇의 국회위원들이 그런 상황 속에서 술파티를 열었다는 겁니다. 어떤 국회의원은 22일 밤 지역구 향우회 회원180여명과 함께 야유회 및 술자리를 가졌고, 또 어떤 국회의원은 23일에 보좌관 및 가족들과 함께 술자리를 가졌다는 겁니다. 22일, 23일은 남북이 지금 전쟁을 하느냐 마느냐의 긴장감이 여전히 돌던 때였기 때문에, 그 소식을 접한 국민들은 그들의 상황이 어찌되었건 그들을 이해할 수 없었던 겁니다.
지금 예루살렘 성벽 재건에 온 백성이 집중하고 있는 때에, 귀족들과 민장들의 태도는 개념이 없는 사람들과 같은 겁니다. 느헤미야는 그들에게 ‘상황을 직시하라’고 말하고 있는 겁니다. 엊그제 말씀 드렸지만, 그들은 자신들의 부를 축적하기 위해 정신없지만 ‘너와 내가 없으면, 우리가 없고, 우리가 없으면 나라도 민족도 없는 것’입니다. 우리는 함께 가야 하는 겁니다.
세 번째로 느헤미야는 그들에게 “우리 하나님을 경외하는 가운데 행할 것이 아니냐”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유대민족은 신앙공동체였습니다. 그들은 그 누구보다 하나님을 경외하며, 하나님을 잘 섬기며, 믿음과 신앙으로 살아가야 하는 사람들이었던 겁니다. 느헤미야는 그들이 ‘믿음의 삶’을 살 것을 촉구하고 있는 것입니다. 신앙이 습관이 되고, 신앙이 종교적 의식이 되기 시작하면 그 신앙은 병들기 시작합니다. 죄를 짓고 살면서도 그것이 죄인 줄도 모르는 겁니다. 어느 순간 그는 영적으로 병든 자가 되어 버리는 겁니다.
지금 귀족과 민장들이 돈을 좇다 보니 그들의 믿음은 그렇게 병들어 버렸던 겁니다. 돈 보다 믿음의 삶이 앞서야 합니다. 돈 보다 하나님을 경외하는 삶이 더 앞서야 하는 것입니다. 느헤미야는 지금 그들에게 그것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설교 서론에서 오바마 대통령의 예를 잠시 말씀드렸지만, 오바마라는 사람은 연설을 잘하기로 유명한 사람입니다. 그는 연설을 통해 국민들에게 큰 감동을 주는 사람입니다.
느헤미야 역시 명 연설가였습니다. 그러나 그는 연설만 잘 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것을 삶으로 먼저 보여주었습니다. 8절에서 이미 말하고 있는 것처럼, 페르시아에 노예로 묶여있었던 동족인 유다족속의 형제들을 힘을 다해 데려왔던 겁니다.
‘공감(共感)’이란 말이 있습니다. ‘함께 공(共)’자에 ‘느낄 감(感)’자를 사용하고 있습니다. ‘함께 느낀다’는 뜻이지만, 이 단어는 ‘간접적 의미로 이해하고 느끼는 경우’에 사용되는 말입니다.
이 말과 비슷한 말이 ‘동감(同感)’이란 말이 있습니다. ‘같을 동(同)’자와 ‘느낄 감(感)’자를 사용하고 있습니다. ‘공감’보다는 좀 더 적극적으로 ‘같은 느낌과 같은 생각을 갖는 것’을 말합니다. 공감은 느끼기는 하지만 소극적일 수도 있는데, ‘동감’은 ‘공감’보다는 좀 더 적극성을 갖게 됩니다.
여기에 ‘감동(感動)’이란 말은 ‘느낄 감(感)’자에 ‘움직일 동(動)’자를 쓰고 있습니다. 사전적인 의미는 ‘크게 느껴 마음이 움직인다’라는 뜻을 갖고 있습니다. 마음이 움직이기 시작하면, 시선이 움직이고, 몸이 움직이기 시작하는 겁니다.
리더는 결국 마음을 움직일 수 있어야 진정한 리더가 될 수 있는 겁니다. 상사의 지위에서 나오는 불이익 때문에 움직이는 것은 리더 때문에 움직이는 게 아니라, 불이익이 두려워 움직이는 겁니다. 그러나 진정한 리더는 마음을 움직일 수 있어야 하는 겁니다.
느헤미야는 페르시아 노예로 잡혀있었던 유다 형제들을 힘을 다해 풀어 데려오는 솔선수범의 리더였습니다. 또 그는 귀환한 유다인들의 문제(죄, 상황직시, 믿음의 삶)를 깨닫게 하고, 그들의 마음을 움직인 진정한 리더였던 겁니다.
하나님께서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을 가정과 직장과 교회와 사회 속에서 리더로 세워 가실 것이고, 리더가 되어 있기도 합니다. 우리 광명의 성도들이 느헤미야와 같이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는, 감동을 일으키는 리더들이 되시기를 축복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