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느헤미야 5:10~13>
<방글라데시>라는 나라는 세계에서 가장 가난한 나라 중에 하나입니다. 1인당 국민소득(GDP)이 $1,000 정도 되고, 2011년 아시아개발은행의 조사에 의하면 방글라데시 국민의 75%는 하루 $2 이하로 생활하는 빈곤층에 속합니다.
유복한 가정에서 태어나 자란 ‘무하마드 유누스’라는 사람은 한 대학의 경제학 교수였습니다. 그런데 방글라데스 국민 대부분이 가난을 벗어나지 못하고 살아가는 모습을 보니, 고리대금이 그 원인이었습니다. 가난한 사람들이 돈을 빌리는데 하루에 이자가 10%라는 겁니다. 이자에 이자가 붙어 대나무 의자 하나를 만들어 팔아서 얻는 돈 ‘5타카 50페이다’ 중에 5타카는 원금과 이자를 내고, 나머지 50페이다(40원 정도)를 가져가서 생활하더라는 겁니다.
은행에서는 가난한 사람들에게 돈을 빌려주지 않습니다. 담보도 없고, 신용도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깐 그 나라의 극빈층은 절대 빈곤을 벗어날 수가 없는 겁니다.
그래서 유누스는 1976년 직접 <Grameen Bank>라는 은행을 설립하고, 담보도 필요하지 않고 신원보증도 요구하지 않고, 가난한 하위25%에 속하는 사람들에게 최대 150달러씩을 빌려주기 시작했습니다.
그래서 가난한 사람들은 아주 적은 이자를 내고, 1년이고 2년 뒤에고 상환하는 것을 목표로 그라민은행에서 대출을 받았습니다. 그들은 그 자본금 150달러로 중고 재봉틀을 샀고, 작은 송아지 한 마리를 샀고, 중고 손수레를 샀습니다. 그들은 더 이상 고리대금을 이용하지 않아도 되었습니다. 그들이 스스로 돈을 벌어 은행에서 빌린 돈을 상황하며 생활했는데, 상환이 잘 안 될 것 같았던 상환율은 98%였다고 합니다. 이것을 통해 많은 사람이 극빈 상황에서 어느 정도 벗어날 수 있었습니다.
이 공로를 인정받아 2006년 유누스는 <노벨평화상>을 받게 됩니다. 그라민은행은 2007년 기준으로 18,000여명의 직원이 있고, 2천여개의 지점을 갖게 된 대형은행으로 성장했습니다. 유누스는 ‘사업의 시작은 이익을 위해서가 아니라 문제 해결을 위해 시작되었다’고 말합니다.
유누스는 또 “나만을 위한 이기심은 문제를 만든다. 그러나 남을 위한 이타심은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라고 말했습니다. 우리는 나의 이익에 초점이 맞춰져 있어 나만을 위한 이기심을 고집합니다. 하지만 그러면 그럴 수록 문제는 계속 더 커지고 문제가 반복될 뿐입니다. 반면, 남을 위한 이타심을 갖기 시작하면서 우리 사회에 있는 문제들은 점점 사라지게 되어 있는 것입니다.
이것은 성경이 우리에게 가르치고 있는 비밀이고, 경제 원리인 것입니다. 오늘 본문 10절 말씀을 보시면
“나와 내 형제와 종자들도 역시 돈과 양식을 백성에게 꾸어 주었거니와 우리가 그 이자 받기를 그치자”
느헤미야는 유대 사회 속에 어느 순간 깊게 뿌리 내려있는 고리대금에 대한 문제를 해결해야 한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것이 해결되지 않는 한 대부분의 백성들이 겪고 있는 극심한 식량난과 빈곤을 해결할 수 없음을 알았고, 백성들 간의 분열된 마음은 결코 치유할 수 없음을 깨닫고 있었던 겁니다.
느헤미야는 페르시아 아닥사스다 왕으로부터 유대의 총독으로 임명되어 예루살렘에 온 것입니다. 그러나 느헤미야는 총독이라면 마땅히 누려야 할 특권도 누리지 않았습니다. 14절, 15에 보면, 그는 총독으로 있는 동안 아닥사스다 왕으로부터 월급을 안 받았습니다. 또 그 필요를 유다백성들로부터 세금을 거둬들여, 백성들로부터 빼앗는 일도 하지 않았습니다.
아마도 그는 페르시아에서 높은 관직에 있었기 때문에 어느 정도의 재정적 여유가 있었던 것으로 보이고, 그것을 정리해 예루살렘으로 와서 그것을 가지고 생활했던 것으로 보여 집니다. 자비량 선교와 같은 겁니다.
그런데 유대 사회는 고리대금과 같은 문제로 빈곤의 악순환과 요즘말로 양극화와 같은 일로 인한 백성의 분열이 심각한 상황인 것입니다. 그래서 느헤미야는 그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지금 자신의 이야기를 하는 겁니다. 자신과 자신의 형제들 그리고 수행한 사람들도 유다의 귀족들이나 민장들과 같이 돈과 양식을 유다 백성들에게 빌려주었습니다. 하지만 이자를 받지 않았다는 겁니다. 백성들의 빈곤이 너무 극심해서 그런 이들에게 돈을 빌려주며 이자를 받는 것은 너무 잔인한 일이었던 겁니다.
우리가 돈을 들여 어려운 사람을 도와주기도 하는데, 이자를 받지 않는 것만으로도 어려운 사람을 도와주는 좋은 방법이었던 겁니다. 그래서 느헤미야는 “그 이자 받기를 그치자”라고 유대의 상류층 사람들에게 협조를 구하고 있는 겁니다.
느헤미야가 이미 그렇게 모범을 보이고 있기 때문에 그의 말에는 힘이 있었고, 설득력도 있었던 겁니다. 그래서 리더십은 먼저 모범을 보이는 것이 중요합니다. 말로만 하는 것에는 힘이 없습니다. 그러나 여러분이 솔선수범 한다면 여러분의 말에는 더 큰 힘이 붙게 될 것입니다.
권위적 리더십은 힘에 의한 강제성을 갖고 있습니다. 권위적 리더십은 자기는 안 하면서, 팔로워들에게는 강요합니다. 그 사람의 리더십이 권위적 리더십인지, 섬기는 리더십은 여기에서 분별이 되는 겁니다.
느헤미야의 리더십은 섬기는 리더십이었습니다. 그는 모든 일에 직접 모범을 보이며, 백성들을 리드했던 훌륭한 리더였습니다. 그래서 그의 말에는 힘이 실려 있었습니다. 귀족들과 민장들과 백성들은 따르지 않을 수가 없었습니다.
이런 경제 원리는 사도행전에도 나타납니다. 사도들에게 성령이 강림하신 이후에 나타난 특징 중에 하나가
사도행전2:44~45절입니다.
“믿는 사람이 다함께 있어 모든 물건을 서로 통용하고, 또 재산과 소유를 팔아 각 사람의 필요를 따라 나눠 주며”
모든 믿는 사람들, 예수의 이름으로 형제가 된 사람들이 필요한 물건들을 서로 나눠 쓰기 시작하는 겁니다. 그리고 여유가 있는 사람들은 재산과 소유를 팔아 교회에 헌금을 했고, 그것은 교회 안에 여러 어려운 사람들을 구제하는 일에 사용되어졌던 겁니다.
세상이 악해 지다 보니깐, 이런 말씀을 악하게 이용하는 사람들도 있지만, 성경 속에 나온 이 경제원리가 가장 이상적인 경제 원리인 것입니다. 이것을 통해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사회의 모습이 만들어질 수 있는 것입니다.
이런 일을 통해 사도행전 4:34절 말씀에 보시면,
“그 중에 가난한 사람이 없으니 이는 밭과 집 있는 자는 팔아 그 판 것의 값을 가져다가 사도들의 발 앞에 두매 그들이 각 사람의 필요를 따라 나누어 줌이라”
하였습니다. 초대교회에는 가난한 사람이 없을 정도였습니다. 왜냐하면, 어려운 형제가 있으면 서로 도우려고 애를 썼기 때문입니다. 여기에 전혀 강제성은 없었습니다. 여유가 있는 사람들이 그렇게 어려운 이들을 돕는데, 교회를 통해 그 일들을 했었던 겁니다.
방글라데시의 그라민 은행과 그 은행의 설립자인 유누스가 빈곤을 퇴치하는 데 큰 역할을 해서 노벨평화상을 받았는데, 만약 1세기 예루살렘에 또는 느헤미야시대에 노벨평화상이 있었다면, 예수님의 제자들과 느헤미야가 노벨평화상을 받았을 것입니다.
여러분 개인의 이익을 위한 이기적 마음으로 살지 말고, 나를 통해 이루시고자 하는 하나님의 뜻에 따라 공부도 하시고, 돈도 벌고, 사업도 하시기를 바랍니다. 그래야 우리가 사는 사회가 더 아름다워 질 수 있는 것입니다.
어느 기업의 광고 문구처럼
‘우리는, 하나님을 영화롭게, 사람을 이롭게, 세상을 아름답게’하는 것이 우리의 삶의 목적과 기업의 목적이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그리스도인이 되면서 우리는 더 이상 나 자신을 위해 살지 않습니다. 하나님과 이웃을 위해 살게 하시려고 우리를 다시 살리신 것입니다.
그래서 느헤미야는 귀족들과 민장들에게 결단을 촉구하고 있습니다. 11절 말씀입니다.
“그런즉 너희는 그들에게 오늘이라도 그들의 밭과 포도원과 감람원과 집이며 너희가 꾸어 준 돈이나 양식이나 새 포도주나 기름의 백분의 일을 돌려보내라 하였더니”
‘백분의 일을 돌려보내라’는 것이 ‘이자’라고 말하는 신학자들도 있는데, 백분의 일이 이자라면 고리대금일 수는 없는 거 같습니다. 부자의 재산 중에 백분의 일을 다시 가난한 자들에게 돌려준다고 해도 큰 금액이 아닐 것입니다. 그래서 부자들에게 극심한 식량난을 겪고 있었던 가난한 자들을 향해 부요한 자로서 관대한 자세를 취할 것을 요청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부자들이 어떻게 합니까? 12절을 보시면,
“그들이 말하기를 우리가 당신의 말씀대로 행하여 돌려보내고 그들에게 아무것도 요구하지 아니하리이다 하기로 내가 제사장들을 불러 그들에게 그 말대로 행하겠다고 맹세하게 하고”
라고 말씀하시고 있는데, 부자들은 느헤미야가 제시하고 있는 것과 같이 가난한 자들을 향해 이자도 받지 않고, 가난한 자들이 생활할 수 있도록 다시 돌려 줄 것은 돌려주기로 결단하게 됩니다.
느헤미야는 부자들의 그런 결단을 제사장들을 불러 그 앞에서(하나님 앞에서) 맹세하게 합니다.
그리고 그들의 그런 맹세에 하나님께서 개입되어 있고, 그 맹세를 지키지 않을 시에는 하나님께서 벌하실 것에 대해서 느헤미야는 말하게 됩니다. 13절 말씀에
“내가 옷자락을 털며 이르기를 이 말대로 행하지 아니하는 자는 모두 하나님이 또한 이와 같이 그 집과 산업에서 털어 버리실지니 그는 곧 이렇게 털려서 빈손이 될지로다 하매 회중이 다 아멘 하고 여호와를 찬송하고 백성들이 그 말한 대로 행하였느니라”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경제 원리로 하지 않는 것은 언제든지 하나님께서 느헤미야가 보여주고 있는 것처럼 다 털려 빈손이 될 수도 있다는 겁니다.
느헤미야는 그 사실을 너무나도 잘 알고 있었던 겁니다. 그래서 회중들에게 하나님의 경제 원리를 가르쳐 주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유대 공동체 안에서 하나님의 경제원리에 따라 이기적 탐욕이 사라지고, ‘너와 내가 살고, 우리가 살고, 민족이 함께 잘 사는 것’을 향해 방향을 제시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처럼 하나님을 경외하는 리더들은 결국 하나님의 방법과 뜻에 따라 그 공동체를 이끌어 가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리더는 그 방향을 제시해 줘야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한 사람 한 사람이 가정과 직장과 교회와 사회 속에서 하나님의 리더들이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