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느헤미야 6:9~14>
어제 중국 베이징 천안문 광장에서는 <항일(抗日) 전승 70주년 열병식>이 있었습니다. ‘군사퍼레이드’와 같은 겁니다. 중국은 각국의 정상 및 정상급 외교인사들을 초대했고 우리나라의 박근혜 대통령과 UN의 반기문 총장도 참석했습니다. 그런데 이 열병식에서 뉴스가 되었던 것은 ‘중국의 시진핑 국가 주석을 중심으로 그 옆에 누가 서게 되느냐?’하는 거였습니다. 특히 ‘우리나라의 박근혜대통령이 어디에 자리하느냐?’가 핫이슈였습니다.
시진핑 국가 주석을 중심으로 오른쪽에는 외국인사들, 왼쪽에는 중국 측 원로(장쩌민, 후진타오) 및 최고 지도부가 자리를 하게 되었습니다. 시진핑 국가주석 바로 오른쪽에는 푸틴 러시아 대통령, 두 번째에는 우리나라 대통령이 자리를 했습니다. 그리고 열병식 때가 아닌 평상시 정상들의 이동시에는 시진핑의 양쪽에 푸틴과 박근혜 대통령이 위치해 움직였습니다. 이것이 왜 뉴스거리가 되고 중요하냐면, 중국의 정치 외교에 있어서 한국의 비중을 그만큼 높게 갖고 있다는 것을 말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격세지감(隔世之感)’을 느끼는 것이 1954년에 있었던 중국의 열병식에서는 중국의 ‘마오쩌둥 주석과 북한의 김일성주석’이 나란히 웃으면서 서 있었다는 겁니다. ✓ 60년이 지난 2015년 열병식에서는 북한의 김정은은 참석하지도 않았고, ‘최룡해 노동당 비서’가 참석했는데, 오른쪽 맨 끝 쪽 구석에 자리를 배정 받았다는 겁니다.
중국과 북한은 혈맹관계라고 할 만큼 오랫동안 우방국이었습니다. 그런데 2013년 북한이 핵실험을 마음대로 한 이후 북중 관계가 점점 나빠지고, 끄떡하면 한 번씩 사고를 터뜨리는 국제적 말썽쟁이 북한을 중국입장에서는 계속 끼고 돌기가 어려운 겁니다. ‘경제 외교 분야에 있어 오히려 한국과 손을 잡는 것이 더 이득이다’ 싶으니깐 이번 행사에 북한이 아닌 한국 대통령에게 특급예우를 했던 겁니다.
이것은 국방과 외교안보에 있어 큰 변화가 도래하고 있는 겁니다. 과거 6.25전쟁시에 남한은 미국을 비롯한 UN군이 돕지 않았다면 한반도는 공산화되었을 겁니다. 반대로 북한은 중국과 러시아(당시 소련)가 돕지 않았다면 북한이라는 나라는 이 땅에서 사라졌을 것입니다.
그런데 만약 전쟁이 다시 일어났을 때, 이제는 북한이 중국이나 러시아에게 도움을 요청해도 이전처럼 쉽게 그 나라들이 북한을 돕지 않을 수도 있다는 겁니다. 어쩌면 북한은 그렇게 점점 고립되어가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우리가 어려운 일을 만났고, 내 힘과 능력으로 그 어려움을 극복할 수 없을 때가 있습니다. 그런데 그 때 누군가에게 도움을 청할 사람도 없고, 어딘가에 도움을 청할 곳도 없다면 우리는 그 어려움 속에서 고난을 당할 수밖에 없는 겁니다. 하지만 우리는 약하지만, 나보다 더 강력한 능력을 갖고 있는 누군가에게 도움을 요청할 수 있다면 그는 행복한 사람입니다. 그는 약하지만 그 누군가 때문에 최후의 승리자가 될 수 있는 것입니다.
느헤미야가 최후의 승리자가 될 수 있었던 것은 그의 위기 때마다 그가 기도의 무릎을 꿇었기 때문입니다.
1. 기도로 더 강해져라
느헤미야와 백성들은 예루살렘 성벽 재건을 완공했습니다. 이제 성문만 달면 140여 년 동안 무너져 있었던 그 성벽재건이라는 위대한 비전이 성취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대적들은 끝까지 그 비전을 이루지 못하도록 방해하려고 합니다. 어떻게든 느헤미야를 암살할 계획을 갖고 집요하게 접근합니다. 그런데 느헤미야가 어떻게 반응합니까?
9절 말씀을 보시면,
“이는 그들이 다 우리를 두렵게 하고자 하여 말하기를 그들의 손이 피곤하여 역사를 중지하고 이루지 못하리라 함이라. 이제 내 손을 힘있게 하옵소서 하였노라”
느헤미야는 위기 때마다 무릎을 꿇었던 기도의 사람이었습니다. 느헤미야의 대적은 너무 많았습니다. 집요하고 교묘한 대적들의 공격을 감당하기에 느헤미야는 너무 힘이 없었습니다. 하지만 그 때마다 느헤미야는 하나님께 도움을 요청했던 것입니다.
대적들의 방해는 끈질기고 집요했습니다. 그들은 느헤미야의 비전을 조롱하고, 그 비전을 이루지 못하도록 조롱을 했습니다(2:19, 4:2~3). 그런 협박과 조롱이 먹혀들지 않자 그들은 성벽 재건에 여념이 없었던 예루살렘 성과 그 백성들을 ‘기습 공격(4:8)’하려는 계략을 세우게 됩니다. 그것도 여의치 않자 그들은 지도자였던 느헤미야를 ‘암살 시도(6:2~8)’하려는 계획을 세웁니다. 그것과 함께 유대 총독으로 파견된 느헤미야를 (페르시아 왕에 대해) ‘반역과 반란 죄(6:5~7)’를 뒤집어 씌우려고 모함을 합니다.
이런 일들을 통해 느헤미야와 백성들을 두려움에 빠뜨려 성벽재건 비전을 이루지 못하도록 하려는 것이었습니다. “우리를 두렵게 하고자(6:9), 나를 두렵게 하고(6:13), 나를 두렵게 하고자(6:14, 19)” 라고 반복된 표현을 통해 그 사실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느헤미야가 어떻게 반응합니까? “(9절) 이제 내 손을 힘있게 하옵소서(But I prayed, Now strengthen my hands), (14절) 나를 두겹게 하고자 한 자들의 소행을 기억하옵소서”하며 기도하고 있는 겁니다.
대적들의 거센 공격 앞에 백성들과 느헤미야가 두려움을 느낄 수밖에 없었을 겁니다. 미래가 불안할 수 있습니다. 그 비전을 이루지 못하고 실패할 까봐 두려울 수 있습니다. 혹시 어떻게 되지 않을까? 하는 불안한 마음이 있을 것입니다. 우리에게도 왜 그런 마음이 없겠습니까? 그러나 느헤미야는 그런 두려움이 올 때마다 기도의 무릎을 꿇은 겁니다. “이제 내 손을 힘있게 하옵소서”라고 고백하는 것처럼, 느헤미야는 기도하면서 점점 더 강해져 갔었던 것입니다.
기도해야 더 강해질 수 있는 것입니다. 기도하면 성령께서 우리에게 말씀으로 임해 주시는 겁니다.
그 유명한 이사야서 41:10절을 통해
“두려워하지 말라 내가 너와 함께 함이라 놀라지 말라 나는 네 하나님이 됨이라 내가 너를 굳세게 하리라 참으로 너를 도와주리라 참으로 나의 의로운 오른손으로 너를 붙들리라”
또 여호수아 1:9절 말씀을 통해서
“내가 네게 명령한 것이 아니냐 강하고 담대하라 두려워하지 말며 놀라지 말라 네가 어디로 가든지 네 하나님 여호와가 너와 함께 하느니라 하시니라”
그리고 빌립보서 4:7~7절 말씀을 통해서
“아무 것도 염려하지 말고 다만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너희 구할 것을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라. 그리하면 모든 지각에 뛰어난 하나님의 평강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 마음과 생각을 지키시리라”
기도할 때 담대함을 주십니다. 평강을 주십니다. 우리 안에 모든 두려움들이 사라져 가기 시작합니다. 여러분의 꿈을 이루어 가는데, 뜻대로 되지 않고 여러 장애물들이 있고, 방해들이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럼 두려워 앉아있지만 마시고 기도하셔야 하는 겁니다. 기도할 때 여러분은 더 강해져 갈 것입니다. 그래야 최후 승리자가 될 수 있습니다
2. 기도로 위기를 넘어가라
느헤미야는 기도하면서 대적의 위기를 하나씩 하나씩 넘어가면서 성벽재건 비전을 이루어가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사탄의 전략은 아주 교묘하다는 사실을 알고 계셔야 합니다. 밖에서부터 오는 공격에 대해서는 우리가 더 강하게 저항할 수 있는 겁니다.
그러나 우리가 믿고 신뢰하는 사람을 통해서 오는 교묘한 속임수에 대해서는 속수무책으로 넘어지는 경우가 많이 있습니다.
10절 말씀을 보시면,
“이 후에 므헤다벨의 손자 들라야의 아들 스마야가 두문불출하기로 내가 그 집에 가니 그가 이르기를 그들이 너를 죽이러 올 터이니 우리가 하나님의 전으로 가서 외소 안에 머물고 그 문을 닫자 저들이 반드시 밤에 와서 너를 죽이리라 하기로”
본문에 보니깐 ‘스마야’라는 사람이 등장하는데, 이 사람에 대한 자세한 내용은 나와 있지 않지만 그는 성전에 자유롭게 출입할 수 있는 것으로 봐서 그는 제사장이었던 것 같습니다. 그것도 총독이었던 느헤미야가 스마야에 대해서 관심을 갖고 있는 것으로 보면 그는 유대 사회 속에 꽤 높은 위치에 있었던 제사장으로 보여 집니다.
또 느헤미야와는 친분이 두터웠던 인물이었습니다. 왜냐하면 스마야가 ‘두문불출’ 집에서 나오지 않는 겁니다. 그래서 느헤미야가 ‘이게 무슨 일인가? 이럴 분이 아닌데, 어디 아프신가?’라고 생각되어서 그 집에 찾아가게 됩니다.
스마야는 꽤 높은 신분의 제사장 중에 한 사람이었고, 예언적인 능력도 있었던 사람이었고, 느헤미야와 친분이 있어 평소 느헤미야가 여러 가지 면에서 영적 도움을 받았을 가능성도 있었던 사람인 거 같습니다. 그래서 느헤미야는 스마야를 찾아갔던 겁니다. 그런데 집에 온 느헤미야를 향해 스마야가 예언을 하는 겁니다. “그가 이르기를 그들이 너를 죽이러 올 터이니 우리가 하나님의 전으로 가서 외소 안에 머물고 그 문을 닫자 저들이 반드시 밤에 와서 너를 죽이리라”
암살의 위기 앞에 있는 느헤미야를 굉장히 챙기는 듯한 예언 같지만, 사실은 여기에 악한 계략이 숨어 있는 겁니다.
12절과 13절 말씀을 보시면
“깨달은즉 그는 하나님께서 보내신 바가 아니라 도비야와 산발랏에게 뇌물을 받고 내게 이런 예언을 함이라. 그들이 뇌물을 준 까닭은 나를 두렵게 하고 이렇게 함으로 범죄하게 하고 악한 말을 지어 나를 비방하려 함이었느니라”
늘 기도하고 있었던 기도의 사람 느헤미야에게 성령님께서 깨닫게 해 주신 겁니다. 아무리 목회자라 하더라도 기도하지 않는다면, 그의 영적 상태는 하나님과의 통로가 단절되는 겁니다. 그러나 기도하고 있었던 느헤미야에게는 하나님과의 영적 통로가 연결되어 있었던 겁니다. 그래서 깨닫고 있었던 겁니다.
오히려 그 하나님의 제사장이었던 스마야는 대적들에게 뇌물을 받고, 느헤미야를 대적들에게 넘겨주려고 거짓 예언을 하고 있는 겁니다. 이 얼마나 기가 막힌 일입니까? 제사장이라는 사람이 돈에 눈이 멀고, 민족을 다시 일으킬 하나님의 비전을 들고 온 사람을 오히려 대적에게 넘겨주려고 하는 겁니다.
성소에는 아무나 막 들어가면 안 되는 겁니다. 그것은 율법에서 금하고 있는 조항이었습니다. 민수기3:10절과 18:7절에 의하면 성소에는 오직 제사장만이 들어갈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느헤미야가 아무리 유대의 총독이라고 하더라도, 율법을 범하게 되면 영적 공동체였던 유대 사회 속에서 느헤미야는 율법을 범한 죄인이 되는 겁니다. 그렇게 되면 백성들 앞에서 리더십에 치명적인 흠을 갖게 되는 겁니다. 그것을 이용해 스마야는 느헤미야를 내부에서부터 비방을 받고 더 이상 리더십을 발휘하지 못하도록 할 계획이었던 겁니다. 사탄의 계략이 얼마나 교묘합니까?
하지만 느헤미야에게 여러 위기들이 왔었지만, 느헤미야는 그 때마다 그 사실을 눈치챘습니다. 예레미야 33:3절에 보면, 기도의 사람에게 하나님의 비밀도 알려주시는데, 하나님께서 기도의 사람에게 고난과 위기를 피할 방법을 왜 안 알려주시겠습니까?
우리가 기도할 때, 우리 인생의 여러 가지 위기들도 얼마든지 넘어갈 수 있습니다. 지금 여러분 앞에 위기가 있다면 주저하지 마시고 기도의 자리로 들어가십시오. 우리가 엎드릴 때 하나님은 피할 길도 열어주십니다.
3. 기도로 최후의 승리자가 되라
느헤미야의 원수와 대적은 예루살렘 성 밖에만 있었던 것이 아니었습니다. 어쩌면 그 어려운 상황 속에서 느헤미야가 믿고 의지했던 영적 지도자들 중에도 더 교묘한 방법으로 느헤미야를 넘어뜨리려 했던 내부의 적이 있었던 겁니다.
14절 말씀을 보시면,
“내 하나님이여 도비야와 산발랏과 여선지 노야다와 그 남은 선지자들 곧 나를 두렵게 하고자 한 자들의 소행을 기억하옵소서 하였노라”
‘암몬 사람 도비야’는 우리가 주일날 좀더 구체적으로 나누겠지만, 이스라엘 사람들과 외부의 적과 연결된 교활한 대적이었고, 사마리아의 총독이었던 ‘산발랏’은 유대에 더 영향력을 행사하기 위해 느헤미야를 훼방하던 적극적 대적이었습니다.
느헤미야의 마음을 더 아프게 만들었던 것은 내부에서 느헤미야가 영적으로 믿고 의지했던 선지자들, 제사장들과 같은 영적 리더들이 부패한 겁니다. 물론 모든 제사장들과 선지자들이 그런 건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일부는 도비야와 산발랏의 뇌물에 넘어갔습니다.
도비야는 꽤 높은 지위를 갖고 있었고, 꽤 큰 재력을 소유하고 있었습니다. 산발랏은 사마리아의 총독으로 권력을 쥐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스마야, 여선지자 노아댜 그리고 몇몇의 제사장들은 영적 지위를 갖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최후 승리자는 기도의 사람 느헤미야였습니다.
– 어떤 지위가 있느냐?
– 어떤 권력이 있느냐?
– 얼마만한 재력이 있느냐?
– 얼마나 교회 생활을 했느냐?
– 교회에서 어떤 직분을 갖고 있느냐?
– 어떤 영적 은사가 있느냐?
그 모든 것들보다 더 중요한 것은 ‘그가 기도하는 사람인가?’라는 겁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기도자의 기도로 움직이시고, 역사하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 땅의 어떤 권력과 돈과 경험과 능력과 지위에도 흔들리는 분이 아니십니다. 그런 거에는 눈 하나 깜짝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연약한 기도자가 부르짖으며 울며 기도할 때, 하나님의 심장도 뛰기 시작하는 겁니다. 하나님께서 그 보좌에서 일어나 우리를 어떻게 도우실 지를 주목하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기도자가 최후 승리자가 되게 하시는 것입니다. The Last Winner(최후의 승리자)가 되기를 원하신다면, 전능하신 하나님 앞에 엎드리십시오. 기도 시간을 늘리십시오. 엘리야는 기도로 하늘의 문을 열었습니다. 모세가 기도할 때 아말렉 군대를 파했습니다.
이제 여러분이 기도할 때 우리에게 불가능했던 새로운 역사가 우리 인생 가운데 시작되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최후의 승리자가 되는 것입니다.
“최후의 승리자(The Last Winner)<2>”
– 느헤미야처럼 기도하라(20) –
1. 기도로 더 강해져라
2. 기도로 위기를 넘어가라
3. 기도로 최후의 승리자가 되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