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를 기억 하옵소서” – 느헤미야처럼 기도하라(32) –

<느헤미야 13:14~31> 

우리 기독교 교리의 핵심 중에 하나가 ‘은혜의 교리’ 입니다.

그래서 성경에는 ‘은혜’라는 표현이 많이 나오는데, 신약성경에서 말씀하시는 ‘은혜’의 의미는 ‘자격이 없는 자에게 값없이 베푸시는 하나님의 선물’이란 뜻입니다. 에베소서 2:8절, 9절 말씀에서 “너희는 그 은혜에 의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았으니…”라고 말씀하시고 있는 바와 같이, 우리는 자격이 없지만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을 받게 된 것입니다.

이것을 로마서 3:24절에서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속량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은혜로 값없이 의롭다 하심을 얻은 자 되었느니라”고 말씀하시고 있습니다.

우리 크리스챤들이 ‘은혜’라고 하면 ‘꽁짜’라는 생각을 하게 되는 것 같습니다. 하지만, 은혜를 받는 사람 입장에서는 거저 받는 것이지만, 은혜를 베푸는 사람 입장에서는 희생이 따르는 겁니다.

여기 로마서 말씀에서 ‘속량’이란 단어를 쓰고 있는데, 속량이란 것은 ‘속박되어 있는 사람(종, 노예, 포로)을 위해 대가를 지불하고 그를 자유케 해 주는 것’을 말합니다. 그러니깐 우리가 ‘거저 받은 구원’ 이라는 것은 나를 위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희생이 있었기 때문에 가능한 겁니다. 이것을 하나님의 은혜라고 하는 겁니다.

그런데 우리 크리스챤들이 ‘은혜’라는 것에 대해서 오해하다 보니깐 우리의 ‘삶과 신앙’에 있어서 오해하는 부분도 있습니다. 흔히들 ‘기도는 만사를 변화 시킨다’라는 말을 교회에서 자주 사용하는데, 틀린 말은 아닙니다. 그런데 이것이 ‘기도의 요술램프’처럼, 내가 원하는 것은 무엇이든지 기도만 하면 다 된다는 식으로 생각하게해서 성도들이 기도생활과 교회생활은 열심히 하는데, 사회 속에서는 감나무에서 감 떨어지기를 기다리는 사람 같아 보일 때가 있습니다.

갈라디아서 6:7절 말씀에서 “사람이 무엇으로 심든지 그대로 거두리라”고 말씀하시고 있습니다. 씨를 심으면 열매를 맺게 되는 것이고, 많이 뿌리면 많이 거두게 된다는 자연적 원리를 말씀하시고 있는 겁니다. 이런 자연적 원리도 하나님께서 세상을 창조하시면서 우리 가운데 만들어 놓으신 자연의 질서인 것입니다.

그런데 며칠 전에 칠레에 진도 8.3의 지진이 일어났는데, 많이 심었다고 해서 꼭 많이 거두는 것은 아닙니다. 많이 심었지만 가뭄이 들 수도 있고, 홍수가 날 수도 있고, 큰 병충해가 돌 수도 있고, 지진과 해일로 한 순간에 모든 수고가 땅 속에 묻혀 버릴 수도 있는 겁니다.

전도서 11:6절 말씀에 “너는 아침에 씨를 뿌리고 저녁에도 손을 놓지 말라 이것이 잘 될는지, 저것이 잘 될는지, 혹 둘이 다 잘될는지 알지 못함이니라” 그리고 5절에서는 “…네가 알지 못함 같이 만사를 성취하시는 하나님의 일을 네가 알지 못하느니라”고 말씀하시고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에게 하나님의 은혜가 필요한 것’입니다. 씨를 많이 뿌려도 하나님께서 은혜의 단비를 내려주셔야만 많은 열매를 맺을 수가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왜 기도합니까? ‘인간의 힘으로 불가능한 것을 위해 기도하는 것’입니다. 주님의 은혜를 구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기도하며 항상 최선을 다해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주어진 모든 상황 속에서 우리가 ‘최선(Best)’을 다해야 합니다. 그리고 하나님 앞에 간절하게 그 문제를 놓고 ‘기도(Prayer)’해야 하는 겁니다. 우리가 최선을 다하는 것, 열심히 많은 씨를 뿌리는 것은 하나님께서 만드신 ‘자연의 질서’입니다. 그리고 우리가 간절하게 기도해야 하는 것은 우리에겐 ‘하나님의 은혜’가 필요하기 때문입니다.

느헤미야는 이 두 가지의 균형을 가장 이상적으로 맞추며 살아온 믿음의 사람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페르시아에서 아닥사스다 왕의 술관원으로 있을 때, 황폐한 예루살렘의 소식을 들었을 때 그는 4개월여의 시간 동안 하나님 앞에 기도로 매달렸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던 중에 왕에게 예루살렘 성벽 재건에 대해 허락을 맡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예루살렘 성벽 재건은 다른 사람도 아닌 바로 그 아닥사스다 왕을 통해 ‘성벽 재건 금지’ 명령이 떨어졌었던 사안이었습니다(에스라4:21). 그러나 느헤미야가 왕에게 그 부분에 대한 청을 올리자, 왕은 왕명을 바꾸어서 그것을 허락해 주었고, 여러 가지 지원까지 아끼지 않았습니다. 왕이 그를 신뢰하지 않고, 총애하지 않았다면 그런 일이 가능하겠습니까?

그만큼 느헤미야는 사회 속에서도 최선을 다하는 사람이었고, 그가 하나님 앞에 4개월여 동안 매달리고 기도하는 중에 하나님의 은혜가 그 위에 부어진 것입니다.

그가 유다의 총독으로 부임해서 예루살렘 성벽을 재건할 때도 그는 최선을 다했던 것을 우리는 이미 살펴봤습니다. 성벽 재건뿐만 아니라 그는 영적인 부분과 종교적인 부분에 있어서도 늘 하나님 앞에서 최선을 다했던 믿음의 사람이었습니다.

느헤미야 13장에 있는 내용들은 느헤미야가 페르시아에서 1~3년 정도 머물다가 다시 예루살렘에 돌아와서 제2의 개혁을 했던 내용들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느헤미야가 자리를 비운 사이에 예루살렘 안의 영적 분위기는 상황이 좋지 않았습니다.

1. 암몬 사람 도비야와 대제사장이었던 엘리아십이 서로 결탁된 것은 이미 오래된 문제였습니다. 그러나 느헤미야가 유다의 총독으로 부임해서 예루살렘에 거주하고 있었을 때는 대제사장이나 도비야가 몸을 사리고 있었던 것 같습니다. 그러나 느헤미야가 총독으로서의 임기를 마치고 페르시아로 돌아가자마자, 암몬 사람 도비야는 제사장 엘리아십에게 성전에 자기 방 하나를 만들어 줄 것을 요구했고, 제사장은 도비야의 방을 성전 안에 만들어 준 겁니다(13:4~9).

느헤미야가 예루살렘에 복귀해서 이 사실을 알게 되고, 암몬 사람 도비야의 세간을 성전의 방에서 내던지고, 그 성전의 방의 원래 기능대로 성전의 기물들을 그곳에 다시 넣어두게 됩니다.

2. 레위 사람들은 성전을 떠나 자신들의 먹고 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농사를 짓거나, 가축을 키우고 있었습니다. 백성들의 십일조 규례가 제대로 지켜지지 않았고, 레위인들에게 식량이 제대로 지급되지 않았기 때문이었습니다(13:10~14)

그래서 느헤미야는 민장들을 꾸짖고, 백성들의 십일조 규례가 잘 지켜지도록 하고, 다시 레위인들이 성전으로 복귀하도록 했습니다.

3. 13장15~22절까지는 백성들의 안식일 규례 위반 사례들이 나타나 있습니다. 안식일에 일하는 사람, 장사하는 사람들을 경계하고, 장사꾼들이 들어오고 나가지 못하도록 안식일에는 예루살렘 성문까지 닫아 두도록 강제적인 장치까지 마련하게 됩니다.

그렇게 안식일 규례를 백성들 가운데 재정립해 주는 일을 느헤미야가 했습니다.

4. (13:23~31)절에서는 백성들과 제사장들의 이방인들과의 통혼 문제를 다루고 있습니다. 백성들이 아스돗, 암몬, 모압 사람들과 혼인관계를 맺고, 심지어 백성들의 모범이 되어야 할 대제사장 엘리아십의 손자는 사마리아 사람 산발랏의 사위가 되었습니다.

이에 느헤미야는 이방인들과의 통혼을 금지시키고, 백성들이 하나님 앞에 다시는 이런 죄를 범하지 않도록 맹세시키고, 제사장의 경우는 그 가문을 제사장으로서의 직분을 더 이상 하지 못하도록 파면시키게 됩니다.

느헤미야는 유다의 총독이었지만, 그는 하나님을 정말로 사랑하던 믿음의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유다의 총독으로서 최선을 다한 사람이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사람으로서 하나님의 말씀을 지키며 살아가기 위해 최선을 다했습니다. 자신 뿐 아니라 유다 백성들까지 그렇게 살아갈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한 믿음의 사람이었습니다.

느헤미야는 이렇게 기도합니다.
14절에서
“내 하나님이여 이 일로 말미암아 나를 기억하옵소서 내 하나님의 전과 그 모든 직무를 위하여 내가 행한 선한 일을 도말하지 마옵소서”
라고 기도합니다.

22절에서는
“…내 하나님이여 나를 위하여 이 일도 기억하시옵고 주의 크신 은혜대로 나를 아끼시옵소서”

그리고 31절에서는
“또 정한 기한에 나무와 처음 익은 것을 드리게 하였사오니 내 하나님이여 나를 기억하사 복을 주옵소서”

느헤미야는 하나님 앞에 “나를 기억하옵소서” 라고 반복적으로 기도하고 있는데,

(14절) “내가 행한 선한 일을 도말하지 마옵소서” 즉, 느헤미야가 하나님 앞에서 최선을 다해 살았던 일들을 하나님께서 잊지 말아달라는 간청입니다.

(22절) “주의 크신 은혜대로 나를 아끼시옵소서” 하나님께서 자신을 귀하게 여겨달라고 기도하는 겁니다.

(31절) “복을 주옵소서” 라고 마지막으로 기도하고 있습니다. 다 같은 내용이겠지만, 느헤미야는 하나님 앞에 모든 면에서 최선을 다하고, 하나님께서

그런 이들을 결코 버리지도 떠나지도 아니하시고 반드시 복을 주실 것을 확신하며 기도하고 있는 것입니다.

느헤미야를 마치면서 오늘 본문의 내용은 우리에게 귀한 진리를 깨닫게 해 주시고 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로 사는 것이 맞습니다. 모든 것이 주의 은혜입니다.

그러나 설교 앞부분에서 잠시 말씀드렸던 것처럼, 최선이 없이 은혜만을 구하는 것은 하나님의 자연 질서에 어긋나는 것이 될 수 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 앞에 살아야 합니다. 믿음의 삶, 말씀 순종의 삶, 기도자의 삶을 살아야 합니다. 그러면서 동시에 우리의 삶의 자리에서 최선을 다하는 삶을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 사람을 버리지 않습니다.

느헤미야가 마지막으로 구하고 있는 것처럼 하나님은 그를 잊지 않으실 것이고, 그를 귀히 여기실 것이고, 그에게 반드시 복을 주실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지 않으면서 하나님의 복을 구하는 잘못된 뻔뻔함을 버리고, 하나님 앞에 느헤미야와 같이 최선의 삶을 살아야 하는 겁니다. 그리고 하나님 앞에 ‘하나님 저를 기억해 주세요’라고 구할 수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께 ‘저를 기억해 주세요’라고 할 만큼 하나님 앞에 최선의 삶을 살고 있는지 살펴봐야 합니다.

우리의 능력과 의지는 완벽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분명 여러 가지 실수와 넘어짐이 있을 겁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말씀을 깨달았다면 거기에 우리는 최선을 다해야 할 것입니다. 완벽하지 않더라도 우리가 하나님께 최선을 다할 때, 하나님은 우리에게 최선의 것을 주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바로 그 사람에게 복을 주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 사람을 기억해 주실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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