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태복음 6:1~6>
[Audio 말씀]
오늘 말씀 제목이 좀 부담스러우시죠? 목사인 저 조차도 오늘 설교 제목을 정하면서도 ‘이 제목이 과연 적절한가?’에 대해서 한참을 고민해야 했습니다. 왜냐하면 이 시대 모든 교회의 모델이라고 할 수 있는 사도행전의 초대 예루살렘교회의 모습도 ‘사도들과 성도들이 성전과 집에 모이기를 힘썼다’는 기록이 있고, 히브리서 10장 25절에서도 “모이기를 폐하는 어떤 사람들의 습관과 같이 하지 말고 오직 권하여 그 날이 가까움을 볼수록 더욱 그리하자”라고 말씀하시고 있는데, 교회를 떠나라니요? 자칫 큰 오해를 불러일으킬만한 설교제목일 수 있습니다.
그런데 올해 우리는 코로나19 바이러스로 인해서 매우 고통스런 한 해를 보내고 있습니다. 우리가 살고 있는 필리핀의 코로나 대응을 위한 행정명령은 한국보다 더하면 더했지 결코 약하지 않았습니다. 교회라고 예외는 아니었기 때문에 우리는 지난 3월21일부터 지금까지 온라인 예배를 드리고 있고, 불과 얼마 전에 교회의 주일예배에 대한 완화된 행정명령으로 인해서 세부에 남아계신 정말 소수의 성도들만이 현장예배에 참여하고 있습니다. 사실 우리교회 성도들은 이곳에서 행복하게 신앙생활 잘 하시다가 코로나 때문에 디아스포라(Diaspora)처럼 뿔뿔이 흩어졌습니다.
그런데 우리나라만 해도 집단감염으로 확산하는 코로나 바이러스를 잡기 위해서 [교회 대면예배 집합금지]라는 행정명령을 내렸습니다. 그런데 순수한 목사님들이나 교회들은 이 단어 자체에서 너무나 큰 충격을 받았습니다. 우리가 일제시대나 공산주의에 의해서 교회와 믿는 자들이 핍박과 박해를 받아본 역사를 알고 있기에 지난 70여 년 동안 없었던 ‘예배금지’라는 유래가 없는 행정명령에 ‘이것은 종교박해다. 생명 걸고 예배를 드리자’라고 하는 강경한 반응도 만만치 않았었습니다. 물론 여기에는 ‘종교탄압’과 ‘방역협조’ 사이의 오해가 있었던 거 같습니다. 어쨌든 이런 강제적인 행정명령으로 인해 성도들은 교회를 떠나야만 했습니다. 우리는 더 이상 교회에 갈 수가 없었습니다.
그런데 구약성경에서 ‘예루살렘 성전 파괴’는 이스라엘 사람들에게는 핵폭탄급 충격이었을 것입니다. 그들에게 있어 예루살렘 성전은 지금의 우리 교회들하고는 차원이 아주 달랐습니다. 예루살렘 성전은 실제적인 하나님의 임재의 상징이었는데, BC.586년 바벨론의 침공으로 성전은 파괴되었고, 모든 유대인들은 불타고 허물어져 파괴된 성전을 뒤로하고 바벨론에 포로로 잡혀가야 했었던 것입니다. 그들이 성전에 가고 싶어도 그들에게 더 이상 성전은 없었습니다.
그런데 사람은 ‘아무도 보는 이 없을 때’ 그 사람의 진짜 모습이 드러나는 것입니다. 그 사람이 진짜 신앙인 인지, 정말 하나님을 두려워하는지는 아무도 보는 사람이 없을 때 진정한 모습을 볼 수 있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바벨론에 포로로 잡혀갔습니다. 이젠 성전도 없고, 신앙생활 제대로 하지 않는다고 책망하는 제사장도 없고, 포로로 잡혀 와서 평일이고 안식일이고 상관없이 중노동을 하며 살아가니 예배드리러 성전에 갈 수도 없습니다. 물론 성전도 없구요. 그런데 그런 가운데서도 잠시라도 짬이 나면 어디 구석이라도 찾아 들어가서 하나님 앞에 엎드려 경배하고, 무릎 꿇고 기도하는 사람이 있다면 이 사람은 진짜 신앙인입니까? 가짜이겠습니까?
올해 우리는 자유롭게 교회를 오고갈 수 없는 어쩔 수 없는 상황 속에서 신앙생활을 하고 있습니다. 교회들은 교인들의 출석수와 헌금액 등 모든 것이 줄었습니다. 왜일까요? 어떤 연약한 성도들은 예배할 환경이 갖추어져야만 예배하고, 헌금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온라인으로 예배해야 한다고 하니, 그 전까지만 해도 주일에 교회에 잘 나와서 예배하던 분들이 지금 예배를 잘 드리고 있는지 안 드리고 있는지 알 수가 없습니다.
어쩌면 진짜 신앙은 아무도 보는 이가 없는 골방과 같은 상황 속에서도 하나님을 예배하는 것이 진짜 순수한 신앙인 것입니다. 세계역사를 주관하고 계신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의 바벨론 포로를 통해 그들이 성전에 갈 수 없는 상황을 주셨고,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에게도 어쩌면 그와 비슷한 상황을 주시고 계신 것이 아닌가 생각이 듭니다.
오늘 본문에서 원래의 말씀 제목은 ‘교회를 떠나 골방으로’였었는데, 제가 조금 더 기도해 보다가 다소 충격적일 수 있는 ‘교회를 떠나라’는 파격적인 제목을 선택하게 되었습니다. 우리가 주님의 몸 된 교회를 얼마나 사랑합니까? 7개월이 넘도록 교회를 자유롭게 나가지 못하고 있는데 우리가 함께 모여 예배할 날을 얼마나 사모하고 있습니까? 교회를 떠나라는 것이 아닙니다. 교회를 멀리하라는 것이 아닙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잠시 교회를 떠나 골방의 예배와 골방의 기도를 회복함으로 위선과 외식으로 뒤범벅이 되어 있는 우리 신앙의 순수함을 회복하기를 원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우리는 영적 순수함을 다시 회복해 갈 수 있을까요?
1. 골방으로 들어가라
오늘 본문의 말씀은 2절부터 4절까지는 구제에 관한 말씀이 나옵니다. ‘구제할 때에 오른 손이 하는 것을 왼손이 모르게 하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5절부터 8절까지는 기도에 관한 말씀인데 ‘기도할 때에 네 골방에 들어가 문을 닫고 기도하라’는 말씀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교회에서 어떤 구제사업을 하게 될 때, 어쩔 수 없이 표시가 날 수 밖에 없는 경우가 많고 그리고 교회 와서 기도하는 게 맘 놓고 기도할 수 있으니깐 집에서 기도할 때보다도 기도가 훨씬 더 잘 되기도 합니다.
그런데 이 말씀들의 핵심은 1절입니다.
“사람에게 보이려고 그들 앞에서 너희 의를 행하지 않도록 주의하라 그리하지 아니하면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상을 받지 못하느니라”
예수님께서는 바리새인들의 위선과 외식을 경계하시고 계신 것입니다. 신앙생활을 하나님 앞에서 하지 않고 사람에게 보이려고 한다는 겁니다. 그러면 하나님 아버지 앞에서 상이 없다는 것입니다. 신앙적인 모든 위선과 외식을 버리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6절 말씀을 하신 것입니다.
“너는 기도할 때에 네 골방에 들어가 문을 닫고 은밀한 중에 계신 네 아버지께 기도하라 은밀한 중에 보시는 네 아버지께서 갚으시리라”
예수님께서 골방에 들어가서 기도하라고 말씀하시는 것은 ‘하나님 앞에 진정한 기도를 드리라’고 하신 것입니다. 누구 하나 알아주는 사람 없어도 하나님은 나의 기도를 들으신다는 것입니다. 그 하나님께서 응답하시고, 갚으실 것이라는 것입니다. 이렇게 골방에서 드리는 기도가 진짜 기도가 아니겠습니까? 그래서 우리가 진정한 신앙으로 회복되려면 골방의 기도가 먼저 회복되어야만 하는 것입니다.
혹시 이 모양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어떤 분은 국민은행 로고라고 생각하는 분이 계신데, 이것은 4세기 로마 제국에서 사용하던 로마의 깃발입니다.
그런데 이 깃발과 관련된 이야기가 하나 있습니다. 로마의 ‘콘스탄티누스(Constantinus, 272~337)’가 전쟁 직전에 꿈을 꾸었는데 하늘에 이 모양이 나타나면서 ‘이 표시로 승리하리라’는 음성을 들었다고 합니다. 영어 알파벳 X와 P자로 보이지만, 헬라어로는 ‘카이(X)’와 ‘로(P)’라고 발음합니다. 헬라어로 그리스도를 ‘크리스토스(Χρίςτος)’라고 발음하는데, 첫 두 철자가 카이(X)와 로(P)인 것입니다. 콘스탄티누스의 어머니 헬라나는 그리스도인이었지만 그는 나이 마흔 살에 이 사건을 계기로 그리스도인이 되었다고 합니다. 그리고 꿈에서 깬 콘스탄티누스는 군사들의 방패에 이 모양을 그려 넣고 이 모양의 깃발을 만들어 전쟁에 나가 승리했고, 로마제국을 통일했다고 합니다.
콘스탄티누스 이전까지 기독교는 로마제국의 수많은 황제들로부터 박해를 받아왔습니다. 그런데 콘스탄티누스가 이 사건을 계기로 313년 황제의 칙령을 발표하면서 기독교인들은 빼앗겼던 시민권을 되찾고, 몰수당했던 교회의 재산을 되찾고, 황제는 교회 지도자들에게 호의를 베풀었습니다. 이단자들에 대해서는 군사력을 동원해 진압하게도 했습니다. 카톨릭(Catholic)이란 용어도 이때부터 본격적으로 쓰여 지기 시작했습니다. 기독교가 과거처럼 핍박을 받지 않게 되었고, 성직자들은 황제에 의해서 사회적인 신분과 세속적인 이익들과 특혜들을 누릴 수 있었습니다.
세상이 복음화 되면 좋을 거 같지만, 콘스탄티누스의 기독교 공인 이후로 기독교의 세속화가 급속히 진행되기 시작했던 겁니다. 황제가 기독교인이라고 하니깐 출세를 위해서 기독교로 개종하는 사람들이 많아졌고, 교회는 순수함과 거룩함을 잃은 정치적인 출세의 도구로 전락하게 된 것입니다. 카톨릭교회의 교황제도와 같은 것들도 이런 정치적이고 세속적인 교회로부터 탄생하게 된 것입니다. 콘스탄티누스의 기독교 공인은 수많은 가짜 그리스도인과 가짜 성직자를 만드는 전환점이 되었던 것입니다.
20세기 위대한 기독교 역사학자인 ‘롤랜드 베인튼(Roland H. Bainton, 1894~1984)’은 이것을 이렇게 말했습니다.
“불로 시험을 받던 교회가 이제는 호의로 시험을 받았다”
콘스탄티누스의 로마제국 하에서의 기독교 공인은 도리어 교회에 독이 되었던 것입니다. 세상이 복음화 되고, 교회는 사회적인 영향력을 갖게 되고, 교회는 물질적으로 풍요로워지고, 그리스도인들은 평안하고 안락한 삶을 살게 되면 좋을 거 같지만… 물이 고이면 썩게 되어 있는 것입니다. 시련과 고난과 핍박과 박해가 힘들고 피하고 싶은 것이긴 하지만, 그것을 통해서 우리의 신앙은 더욱 더 순수해지고, 교회는 더 거룩해지는 것입니다.
『은혜를 찾아 길을 떠나다』란 책에서 저자인 필립얀시가 중국의 박해받는 많은 그리스도인들을 만나서 대화 나눈 내용이 있습니다. 그가 중국의 그리스도인들에게 “정부의 변화를 위해서 기도하십니까?”라고 물으면, 그들은 이렇게 대답한다고 합니다. “아니요. 박해는 언제나 있으리라 봅니다. 우리는 그것을 감당할 힘을 달라고 기도합니다.”
중국 공산정권의 박해 속에서도 지금 중국에는 약 1억 명의 크리스천들이 생명을 걸고 믿음의 길을 걷고 있습니다. 그들은 그럴듯한 교회 간판도 걸 수 없고, 교회 건물도 없이 가정에서 모입니다. 목회자들과 열심히 교회를 섬기는 이들은 아무도 모르게 체포되어 투옥되거나 사형을 당할 수도 있습니다. 그들은 골방에서 은밀하게 신앙생활하고 있으나 어쩌면 우리와는 비교도 안 될 영적 순수함과 거룩함과 순교자의 마음으로 신앙생활하고 있는 것입니다.
2020년, 우리는 코로나19 팬데믹으로 엄청난 고통 속에 있습니다. 교회는 가고 싶어도 갈 수가 없고, 모이고 싶어도 모임이 조심스러워 질 수 밖에 없습니다. 동남아 최대 발생국인 필리핀에 있는 우리교회도 지난 3월부터 시작된 온라인예배가 지금까지 진행되고 있고, 성도들은 대부분 철수했고, 이곳 예배당은 오고가는 성도들이 없어서 7개월이 넘도록 썰렁함만이 감돕니다. 주일예배도 제약이 많고, 성경공부 모임이나 기도회조차도 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이런 상황 속에 여러분의 믿음을 지키고, 신앙생활을 계속 이어갈 수 있겠습니까? 어려울 때 진정한 친구가 누구인지를 확인할 수 있는 것처럼, 교회가 가기가 어렵고, 예배드리기가 어려운 환경이고, 믿음을 지키기가 어려운 상황이지만 이 때야말로 우리의 믿음이 확인되는 것입니다.
지난 주간에 개인적으로 기도하는데, ‘주님께서 우리에게 교회를 떠나 골방으로 초대하고 계신다’는 깨달음이 있었습니다. 우리는 지금 기도회도 온라인으로 하고, 예배도 대부분의 성도들이 온라인으로 드립니다. 골방 예배자, 골방 기도자가 되는 겁니다. 누구도 여러분이 어떻게 신앙생활하고 있는 지 확인할 수 없지만 하나님은 아십니다. 하나님께서 그 골방에서 우리를 인격적으로 만나주실 것입니다.
2. 믿음으로 살아내라
신앙생활은 ‘교회 다니면 천국 간다.’라는 것이 전부가 아닙니다.
빌립보서 2장12절을 보시면,
“그러므로 나의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가 나 있을 때뿐 아니라 더욱 지금 나 없을 때에도 항상 복종하여 두렵고 떨림으로 너희 구원을 이루라”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의 십자가 사건을 믿으면 죄사함을 받고 구원 받은 것입니다. 이것은 취소되지도 않고 미완성된 것도 아닙니다. ‘장차 구원 받을 것이다’라는 것이 아니라, 예수를 믿는 즉시로 모든 죄는 용서를 받고 구원 받아 지금 당장 죽어도 천국에 들어갈 수 있는 것입니다. 이것을 구원의 확신이라고 하는 겁니다.
그런데 사도 바울은 “너희가 나 있을 때뿐 아니라 더욱 지금 나 없을 때에도 항상 복종하여 두렵고 떨림으로 너희 구원을 이루라.”고 말씀하시고 있습니다.
사도 바울이 빌립보 교인들과 함께 있을 때 그들은 믿음으로 살았습니다. 열심히 믿음생활을 했습니다. 그런데 바울이 사역을 위해 다른 곳에 있을 때, 그들의 믿음은 시들해졌습니다. 그들의 열정은 식었습니다. 교회도 잘 안 나오고, 기도생활도 잘 안 하고, 성경도 멀리하고, 예수 믿기 전의 생활 패턴으로 돌아간 사람도 있었습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나 없을 때에도 항상 복종하여 두렵고 떨림으로 너희 구원을 이루라’고 말씀하고 있는 겁니다. 그런데 ‘구원을 이루라’는 말씀은 아직 구원이 미완성되었다는 의미인 것입니다. 그러면 즉시로 구원 받는다고 하는 구원론에 있어서 교리적인 충돌이 있는 거 아닙니까?
구원은 교리적으로 3가지 단계가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첫째 ‘칭의(Salvation)’는 말 그대로 ‘의롭다고 칭한다’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구속을 믿으면 그것으로 구원 받은 것입니다. 우리의 다른 조건을 아무것도 보지 않으시는 것입니다. 죄인에서 하나님의 자녀로서 신분이 바뀌는 겁니다. 이제 이미 구원 받은 겁니다.
둘째는 ‘성화(Sanctification)’는 ‘점점 거룩하게 변화 된다’는 뜻인데 이미 우리 영혼은 구원 받았지만, 이제 하나님의 자녀로서 믿음으로 삶을 살아내는 것을 말합니다. 교회 다니는데, 예수 믿는다고 하는데 여전히 변화되지 않은 모습들이 있는 건 당연한 겁니다. 옛날의 그 기질과 인격과 습관과 말투와 태도와 표정… 이런 변화는 시간이 많이 필요합니다. 여전히 변하지 않고 넘어지고 자빠지는 모습 속에서 많이 절망할 겁니다. 하지만 우리는 그렇게 조금씩 조금씩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에 이르도록 자라가며 변화되어 거룩해져 가는 겁니다.
그리고 세 번째는 ‘영화(Glorification)’는 우리가 천국에 들어갈 때 천사와 같이, 주님과 같이 완전해 지는 상태를 말합니다. 구원이 완성되는 단계입니다. 더 이상 죄에게 영향을 받지 않고, 죄의 실존으로부터 완전히 자유해저 천사와 같이 되는 단계인 것입니다.
바울 사도가 빌립보 교인들에게 ‘너희 구원을 이루라’고 말씀하신 것은 두 번째 ‘성화’의 단계를 의미하고 있는 것입니다.
기독교 역사에 있어 가장 존경 받는 교부였던 ‘성 어거스틴(Augustinus Hipponensis, 354~430)’은
“악은 처음에 타인으로 우리집 문턱을 넘다가 점차 손님으로 오고 결국은 주인으로 눌러앉는다.”
라고 말했습니다. 죄라는 것은 처음에는 우리 주변에서 이리저리 맴돌다가 우리 집 문턱을 슬쩍 넘어왔다 나가기도 하고 그럽니다. 그러다가 자주 오는 손님처럼 그 횟수가 점점 늘어나는 겁니다. 그리고는 결국 우리 안에서 주인으로 눌러앉아 우리를 죄의 종으로 만들어 버린다는 것입니다.
때문에 히브리서 12장 4절에서는 “너희가 죄와 싸우되 아직 피흘리기까지는 대항하지 아니하고” 라고 말씀하셨는데, 우리가 한 번 구원 받았다고 끝나는 게 아니라, 천국에 갈 때까지 이 믿음의 싸움을 치열하게 해야 한다는 것을 말합니다. 그것이 구원을 이루어 가는 것입니다.
외신 보도에 의하면 요즘 코로나 때문에 부부들이 집에 붙어 있는 시간이 늘어나다 보니 이혼율이 급증하고 있다고 합니다. 결혼해서 부부가 되면 다 끝난 게 아닙니다. 부부로서 서로 사랑하며, 이해하며, 섬기도, 도우며 함께 살아내야 하는 삶이 남은 겁니다. 그걸 생각지 않는 결혼은 환상에 불과한 겁니다.
여러분이 ‘교회를 다닌다’, ‘예수를 믿는다’ 라고 한다면, 구원 받았음을 의심치 않습니다. 하지만 이제 두 번째 단계인 그 구원을 이루어 가야 하는 것이 남은 겁니다.
교회를 다닐 때는 겉으로 표시가 나니깐 구원 받은 사람인 거 같습니다. 하지만 이제 우리는 교회를 떠나서 골방신자가 된 겁니다. 이제 우리는 교회 밖에서 그 믿음을 증명하는 삶을 살아내야 하는 것입니다. 가정에서 가족들 앞에서 믿음을 증명해 내는 삶을 살아내야 합니다. 불신자들 앞에서 예수의 향기와 흔적을 남겨야 하는 것입니다. 세상에서 빛이 되고, 소금이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교회에서나 집사님이고, 성도님이지… 가정과 직장과 사회 속에서는 믿음으로 살아내는 것을 통해 구원을 이루어 가고, 우리의 믿음을 증명하는 삶을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쉽지 않을 겁니다. 하지만 주님께서 십자가를 감당하셨던 것처럼, 우리도 이제 교회 밖에서 그 십자가를 감당해야 하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