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리적 위기를 어떻게 극복할 것인가?” – 느헤미야처럼 기도하라⑧ –

<느헤미야 4:1~6> 

정치인들이 많이 쓰는 용어 중어 중에 <Negative : 부정적인, 나쁜>라는 말이 있습니다. 정치인들이 종종 상대방의 약점을 폭로해서 국민들로 하여금 그 상대를 부정적으로 보이게 하는 겁니다. 그렇게 되면 어찌되었건 그 상대적 이익을 얻게 되는 겁니다. 정치인들이 여당과 야당으로 나뉘어지기 때문에 이런 일들이 정치권에서는 아주 비일비재하게 일어납니다.

얼마 전 여당의 S의원이 어떤 보험설계사를 성추행한 사건이 있었습니다.

그러니 국민들로부터 지탄을 받을 뿐만 아니라, 야당에 속한 사람들에게는 아주 좋은 기회가 되는 겁니다. 집중공격 대상이 되는 겁니다.

그런데 어제 뉴스에 보니 이번엔 야당의 Y의원이 ‘LG 디스플레이’에 자신의 딸을 취업 청탁을 했다는 겁니다.

그랬더니 여당 쪽에서 집중 공격을 하는 겁니다.

그런데 오늘 뉴스에 보니깐 이번에는 여당의 K의원이 자신의 아들을 ‘정부법무공단 변호사 특혜채용 의혹’이 있다는 겁니다. 그러니 야당 쪽에서는 집중 공격하고, 해당 의원은 ‘그런 일 없으니 철저히 조사해달라’고 말하는 겁니다. 이건 시소게임과 같아요.

이건 얼마 안 지나서 또 다른 방식으로 여당은 야당의 허물을 들추고, 야당은 여당의 허물을 들추고… 계속 이렇게 될 것으로 보여집니다.

그런데 이런 일이 반복되면 반복될수록 국민들은 정치인들을 신뢰하지 않게 되는 겁니다. 2014년11월 한 연구기관(Yess)에서 현대리서치에 의뢰해서 전국대학생 2300명을 대상으로 ‘가장 신뢰하는 사람’을 조사했는데, 대학생들은 ‘정치인을 2.6%만이 신뢰한다’고 대답했습니다. 이 설문에서 정치인은 우리 사회에서 가장 신뢰받지 못하는 사람들로 조사되었습니다.

네거티브라는 것은 상대방의 약점을 들춰내고 그것을 집중 공격해서 흠집을 내는 겁니다. 우리들에게도 이런 일이 있으면 대응해서 똑같이 되갚아 주고 싶은 것이 솔직한 마음을 겁니다. 그런데 그렇게 되면 정치인들이 맞고 있는 동일한 결과만 돌아올 뿐입니다. 이익이 없습니다. 물론 때로는 그렇게 할 필요도 있겠지만, 그렇게 반응하는 것은 큰 이익이 없습니다.

느헤미야가 예루살렘 성벽을 재건하는데 있어 제일 처음 싸워야 하는 것이 바로 그런 심리적 싸움이었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기억해야 할 것은 그런 심리적인 싸움에 휘말려 거기에 에너지를 쏟기 시작하면 그 때부터 다른 일들은 진행이 안 되는 겁니다. 그러니깐 우리는 그 일 때문에 우리의 인생의 진보는 이룰 수 없는 것입니다.

느헤미야와 유다 백성들이 성벽을 본격적으로 건축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랬더니 사마리아 사람이었던 산발랏이 크게 분노하면서 유다 사람들을 비웃기 시작했습니다.

2절을 보시면

“자기 형제들과 사마리아 군대 앞에서 일러 말하되 이 미약한 유다 사람들이 하는 일이 무엇인가, 스스로 견고하게 하려는가, 제사를 드리려는가, 하루에 일을 마치려는가 불탄 돌을 흙 무더기에서 다시 일으키려는가 하고”

과거 북이스라엘을 가리켜 사마리아라고 했는데, 그 사마리아 사람인 ‘산발랏’이란 사람은 분명 유다와 예루살렘에 대한 야망이 있었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리고 유다와 예루살렘에 그 어떤 영향력을 갖기를 원했는데, 느헤미야라는 사람이 나타나서 그 영향력을 확장하지 못하자 적극적으로 느헤미야를 방해하기 시작했던 겁니다.

산발랏이 사마리아 군대 앞에서 이렇게 말하는 것을 보면, 그는 이미 사마리아에서 상당한 영향력을 갖고 있었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사마리아를 넘어서 예루살렘과 유다까지 영향력을 행사하고 싶었던 겁니다. 그런데 느헤미야가 나타난 겁니다.

산발랏의 첫 번째 방해와 공격은 심리적인 것이었습니다. ‘이 미약한 유다 사람들’이라고 하는데, ‘미약한’이란 단어는 ‘나무가 시들어 말라비틀어지는 것’을 가리킬 때 사용하는 단어입니다. 그러니깐 유다인들에게는 어떠한 소망도 없다는 것을 이런 말로서 비방하고 있는 겁니다.

그도 그럴 것이 예루살렘 성벽은 10여 년 동안 허물어져 있는 상태였고, 성문은 대부분이 불타 없어졌는데, 그 동안 그것을 일으킬 능력이 유다 사람들에게는 없었던 겁니다.

한두 해도 아니고 10여 년 동안 무너진 건물 잔해 옆에서 천막을 치고 산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그런데 그 성벽을 다시 일으킨다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이겠습니까? 이미 사람들의 마음속에 ‘포기’의 마음이 더 큰 겁니다. 우리도 어떤 일에 10여 년 동안 실패했으면, 그 어떤 것도 더 이상 도전하고 싶은 마음이 없는 겁니다.

이제 용기를 내서 다시 도전하고 싶은데, 다시 뭔가 해보려고 하는데 유다인들에게 있어 가장 민감한 부분을 건드리는 겁니다. 사단은 이렇게 여러분에게 가장 민감한 부분을 건드려서 여러분을 낙담시키고, 좌절시키는 것이 목적입니다.

산발랏 옆에 있던 암몬 사람 도비야가 산발랏의 말을 거듭니다. ✓ 3절에 보시면,

“암몬 사람 도비야는 곁에 있다가 이르되 그들이 건축하는 돌 성벽은 여우가 올라가도 곧 무너지리라 하더라”

여우가 올라가도 곧 무너질 만큼 형편없는 것이라고 그 일에 대해 비아냥거리고 있는 겁니다.

사탄은 우리가 뭔가를 의욕적으로 해 보려고 하면, 그렇게 심리적으로 우리를 흔들어놓는 일을 하는 겁니다.

“네가 하는 일이 다 그렇지, 네 주제에 뭘 한다고 하느냐?, 주제를 알아라…”

라는 겁니다. 그런데 우리가 그런 심리적인 공격을 받을 때 무엇보다 마음을 잘 다스리고, 지키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 모릅니다. 거기에 휘말리면 안 되는 겁니다. 여러분이 마음이 흔들리면 안 되는 겁니다.

주변에서 뭐라고 하든지, 지금의 상황이 어떻게 돌아가든지, 내 능력이 얼마나 되든지… 그거 생각하면 우리가 아무것도 할 수 없습니다. 우리가 하는 일이 옳은 일이고,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일이고, 나를 통해 하시고자 하는 하나님의 꿈이고 비전이라면… 중단 없이 전진하십시오.

이런 심리적인 위기가 왔을 때 그것을 어떻게 극복하는 것이 좋겠습니까? 느헤미야도 우리와 같은 사람 아닙니까? 그가 맞대응하며 정치인들처럼 네거티브를 했나요? 누가 옳으니, 그르니 하면서 말싸움하고 있나요?

그런 심리적 위기 속에서 거기에 에너지를 쏟기 시작하면 아무것도 할 수 없습니다. 때로 여러분이 무시하고 넘겨야 할 것들이 있습니다. 그것이 여러분의 마음속에서 들려오는 어떤 소리든, 아니면 여러분을 향한 어떤 사람들의 소리든, 또는 여러 가지 상황들을 통해 느껴지는 것들이든… 그것이 무엇이든 여러분이 비전을 향해 달려가고 있는데, 곁에서 들려오는 소리들이 그 비전을 이루어 가는데 도움이 안 된다 싶으면 무시하고 여러분을 향한 하나님의 비전을 향해 전진하십시오.

그냥 무시한다는 것도 쉽지는 않습니다. 우리가 무시한다고 해도 계속 여러분의 귀에 들려오고, 여러분을 괴롭힐 것이 분명합니다. 그래서 어떤 심리적 위기가 올 때, 그것을 극복하기 위해 꼭 필요한 것은 ‘기도’입니다.

느헤미야는 이렇게 기도합니다. ✓ 4~5절입니다.

“우리 하나님이여 들으시옵소서 우리가 업신여김을 당하나이다 원하건대 그들이 하늘 것을 자기들의 머리에 돌리사 노략거리가 되어 이방에 사로잡히게 하시고, 주 앞에서 그들의 악을 덮어 두지 마시며 그들의 죄를 도말하지 마옵소서 그들이 건축하는 자 앞에서 주를 노하시게 하였음이니이다”

라고 기도합니다.

느헤미야가 저주의 기도를 하는 것 같지만, 이것은 저주의 기도보다는 하나님의 공의에 호소하고 있는 기도입니다. 지금 느헤미야는 맞대응하지 않고 하나님께 호소하는 겁니다. 하나님의 공의로우심을 믿고 있는 겁니다. ‘나는 이렇게 업신여김을 받고, 그것을 맞대응하지 않지만 하나님께서는 이미 다 보고 계시고 있고, 반드시 악을 행한자들을 심판하신다’라는 사실을 확신하며 기도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나님의 공의가 이 땅에서도 실현되어지도록 간청하고 있는 겁니다.

그런데 느헤미야가 더 확실하게 확신하고 있는 것이 하나 더 있습니다. ‘주를 노하시게 하였음이니이다’ 지금 느헤미야와 유다백성이 업신여김을 받았는데, 거기에 누가 노하셨다는 거예요? 하나님께서 노하셨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이 예루살렘 성벽 재건이 느헤미야 개인의 꿈도 아니고, 유다 사람들의 꿈도 아니고, 이것은 느헤미야와 유다백성들을 향한 하나님의 비전이기 때문인 것입니다.

그리고 2:20절에서 느헤미야가 “그의 종들인 우리가 일어나 건축하려니와”라고 말했던 것처럼 느헤미야와 유다 백성들은 하나님의 그 비전을 이루어가는 종들로 부름을 받았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지금 산발랏이 이것을 방해하는 것은 하나님의 비전을 방해하는 것과 같다는 겁니다. 이것은 느헤미야를 괴롭히고, 유다 백성을 괴롭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노하시게 하는 것과 같다는 것을 말합니다.

– 여러분들이 무슨 직업을 갖고 있느냐?

– 어떤 일을 하느냐?

그것보다 중요한 것이

– 우리가 하나님의 편에 있느냐?

– 우리가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일을 하고 있느냐?

– 우리가 하는 일들이 하나님의 꿈과 비전이냐?

– 나를 통해 하나님께서 꼭 하고 싶어 하시는 일이냐?

가 더 중요한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 때부터 그 일은 하나님의 꿈이 되는 것이고, 우리는 그 비전의 일꾼들이 되는 것입니다.

그런 마음으로 일할 때 다시 평안을 찾는 겁니다. 그리고 어떻게 해요? ✓ 6절 말씀을 보시면,

“이에 우리가 성을 건축하여 전부가 연결되고 높이가 절반에 이르렀으니 이는 백성이 마음을 들여 일을 하였음이니라”

산발랏과 도비야의 그런 심리적 공격으로 성벽재건은 위기를 맞는 듯 했지만, 느헤미야가 맞대응하지 않고, 오직 기도하면서 마음의 안정을 찾았습니다. 그리고 백성들은 마음을 거기에 쏟았던 겁니다. 그랬더니 허물어졌던 성벽 전체가 연결되고, 성벽의 높이가 절반 정도가 쌓여진 겁니다. 분명 방해는 있지만 기도하며 마음을 쏟아 그 비전을 향해 나아갔더니 눈에 띄도록 성과들도 보여 지기 시작하는 겁니다.

정리를 하자면,

여러분이 비전을 향해 나아갈 때, 분명 여러분들을 괴롭히는 심리적인 공격들과 방해들이 나타날 것입니다.

거기에 휘말리지 마세요. 흔들리지 말고 하나님께서 나를 통해 이루시고자 하는 비전을 바라보셔야 하는 겁니다.

그리고 그거 옳고 그름을 따지고, 말싸움하고 변명하다 시간 낭비 하지 마세요. 무시하세요.

그리고 공의로우신 하나님 앞에 기도의 무릎을 꿇으세요. 우리가 기도할 때 하나님이 일하십니다.

마지막으로 이제 다시 비전에 마음을 쏟아 보세요. 심리적 위기가 와도 극복할 수 있고, 그는 비전을 향해 한 걸음 더 가까이 갈 수 있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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