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더-감정의 산을 넘어라” – 느헤미야처럼 기도하라(14) –

<느헤미야 5:6~7> 

요즘 한국에서 <슈퍼 갑질>이란 속어가 많이 쓰여 지고 있는데, 2014년 12월부터 올해 초까지 온 국민들을 분노케 했던 하나의 사건이 있었습니다.

2014년 12월 5일 미국 ‘존 F 케네디 국제공항’에서 ‘인천공항’으로 향하던 대한항공 여객기의 회항 사건입니다. 이것을 <땅콩 회항 사건>이라고 하는데, 대한항공의 부사장인 조OO씨가 1등석에 타고 있었는데, 승무원이 마카다미아 땅콩을 그릇에 담지 않고 봉지 채 서비스를 했다는 것이 발단이 되었습니다. 그 항공기의 부사장으로서 그 자리에서 ‘서비스 매뉴얼대로 하지 않았다’고 승무원을 문책했고, 도가 지나쳐 그 자리에 승무원을 바닥에 무릎을 꿇렸습니다. 그리고 승무원뿐만 아니라, 책임자였던 사무장까지 폭행하고 욕설을 퍼붓고, 무릎을 꿇려 모멸감을 준 겁니다.

조씨는 사무장에게 “매뉴얼도 제대로 모르는 게, 저X 내리라고 해!, 나 이 비행기 안 띄울거야. 당장 기장한테 비행기 세우라고 해!” 라고 하고 사무장은 “비행기가 활주로에 들어서 세울 수 없습니다.” 라고 했더니 조씨는 “상관없어. 니가 나한테 대들어 어디다 대고 말대꾸야! 내가 세우라잖아!”하면서 몰상식하게 말했습니다. 그러는 과정에 매뉴얼을 가져오라고 해서 보니깐, 마카다미아 땅콩은 원래 봉지 채 서비스하게 되어 있었던 겁니다. 그걸 알게 된 조부사장은 더 화를 내면서, “그 XX 오라 그래” 그리고는 “니가 나한테 처음부터 대답 제대로 못했잖아. 그러니 책임은 당신이네. 니가 내려!” 이렇게 된 겁니다. 그래서 사무장은 내리고, 사건은 일파만파 커지게 된 겁니다. 그리고 국민들은 공분했습니다.

결국 이 사건으로 조씨는 항공사 부사장직에서도 내려와야 했고, 143일간 징역을 살다 집행유예로 지난 5월22일 석방되었습니다. 하지만, 피해자들은 미국법원에 <징벌적 손해배상>청구 소송을 냈는데, 수백억원대의 피해보상금을 피해자들에게 내야 할 수도 있다고 합니다. 조씨는 법원에 제출한 <반성문>에서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저는 그 모든 일을 모두 제가 한 일이고 제 탓이라고 생각합니다. 제가 그렇게 소란을 만들고 어떠한 정제도 없이 ‘화’를 표출하였으며 사람들에 대한 따뜻한 마음도 품지 못하고 제 ‘분노’를 여과 없이 드러냈습니다… 이 모든 것을 제가 ‘화’가 났다는 이유로 그렇게 행동한 것입니다. 왜 ‘화’가 났는지는 중요하지 않고 변명도 될 수 없음을 잘 알고 있습니다”

‘화’라는 단어를 세 번, ‘분노’라는 단어를 한번 쓰고 있습니다. 이 사과문에서 볼 수 있는 것처럼, 자신의 감정을 조절하지 못하고 폭발해 버렸던 것을 뼈저리도록 후회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 댓가를 톡톡하게 치르고 있는 겁니다.

조부사장(41세)은 항공, 유통, 호텔 분야에 있어  대기업의 유력한 후계자였습니다. 이 사건만 없었다면 그는 그 기업의 후계자로서 입지를 굳혀갔을 겁니다. 그러나 이제는 더 이상 그런 꿈을 꿀 수 없을지도 모릅니다.

이 사건을 통해 볼 수 있는 것처럼, 리더에게 있어 여러 가지 탁월한 능력과 경험들이 있다고 해도 자신의 감정을 다스리지 못하는 리더는 훌륭한 리더가 될 수 없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자기의 감정 하나 다스리지 못하는 리더가 어떻게 수많은 사람들의 감정을 움직일 수가 있겠습니까? 자리에만 앉아 있다고 리더가 아닙니다. 리더는 감정이라는 산을 반드시 넘어갈 수 있어야만 리더가 될 수 있습니다.

유대의 총독으로 부임했던 느헤미야는 여러 가지 위기 속에서도 빛나는 리더십을 우리에게 보여주고 있는데, 오늘 본문에서 리더 느헤미야는 자신의 감정을 어떻게 다스리고 있는 지를 우리에게 보여주고 있습니다.

먼저 6절 말씀을 보시면

“내가 백성의 부르짖음과 이런 말을 듣고 크게 노하였으나”

느헤미야는 1~5절까지에서 일반 백성들이 겪고 있는 어려운 상황에 대한 부르짖는 소리를 듣게 됩니다. 어제 나눈 내용을 좀 풀어 간단히 정리하면,

(1) 첫 번째는 ‘비전 성취 중 백성의 분열(1절)’ 때문이었습니다. 지금 140여년 만에 예루살렘 성벽을 재건하는 민족의 대업을 이루어 가는 중입니다. 그도 순탄하지 않은 것이 주변 여러 민족들의 방해가 만만치 않은 겁니다. 온 백성의 마음이 하나가 되어 성벽공사와 대적의 공격을 방어하는 것만으로도 힘에 겨운 일입니다. 그런 중에 백성들의 마음은 분열되어 있었던 겁니다.

(2) 그 분열의 이유가 몇 가지가 있는데, ‘식량난을 이용한 귀족들의 재산 증식(2,3,7절)’문제가 그 요인이었습니다. 성벽을 재건하면서 백성들은 자신들의 밭과 포도원을 돌보지 못했고, 때마침 흉년까지 들어 백성들은 큰 고통에 빠져있었습니다. 그런데 ‘때는 이 때다’하면서 백성들의 식량난을 역이용해서 자신의 부를 축척하고 있는 귀족들이 있는 것이었습니다.

(3) 귀족들은 ‘고리대금을 이용해 백성들의 고통을 가중’시켰던 겁니다. 가난한 백성들은 어쩔 수 없이 돈을 빌려 식량을 사먹었는데, 귀족들은 그 백성들에게 터무니없이 많은 이자를 내게 했습니다. 그것을 통해 백성들은 흉년과 식량난 중에 더 고통을 받았던 겁니다.

(4) 귀족들은 백성들이 빚을 갚지 못하면 채무자들의 자녀들까지 노예로 데려갔고, 그런 노예 매매와 같은 것이 일반화되어 버린 겁니다.

(5) 귀족들은 같은 유대인이며, 한 믿음의 형제들에게도 아주 몰인정했습니다. 빚을 갚지 못하면 밭과 포도원과 집을 빼앗았습니다. 심지어 어린 자녀들까지 노예로 데려갔습니다.

그러니 유대의 총독으로 부임해 예루살렘 성벽 재건이라는 큰 비전을 이뤄가던 느헤미야로서는 화가 날 수 밖에 없는 상황이었습니다. 그래서 느헤미야는 그런 현실을 듣고 6절에 보면 ‘크게 노하였다’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느헤미야처럼 하나님을 사랑하고, 백성을 사랑하고, 민족을 사랑하던 사람에게는 도저히 이해되지 않는 귀족들의 모습이었던 겁니다.

우리가 어떤 상황 속에서 화가 나고, 분노가 일어나는 경우가 있습니다. 우리 생각에 도저히 이해되지 않는 말과 행동들을 보면 화가 나는 겁니다. 어떤 경우에는 상식선에서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그런 경우를 보면, ‘틀리다’라고 생각합니다. 또는 ‘다르다’고 생각합니다. 틀린 경우도 있고, 다른 경우도 있습니다. 나와 다른 생각을 갖고 있다고 그것이 모두 틀린 것은 아닙니다. 얼마든지 다를 수 있습니다. 그런 경우는 충분히 이해할 수 있어야 합니다.

하지만, 어떤 경우에는 ‘나와 다르다’라고 생각할 수 없는 경우도 있습니다. 다른 게 아니고 틀린 상황이 있습니다. 그러면 우리는 화가 나기도 하는 겁니다. 그리고 그런 감정이 폭발하기도 하는 겁니다.

지금 느헤미야의 경우는 유다의 귀족들이나 힘 있는 자들이 잘 못하고 있는 것 즉, ‘틀린 것’ 때문에 크게 화가 난 것입니다. 분명 건강한 리더는 틀린 것에 대해서 무조건 눈 감아 주지 않습니다. 때로 어떤 경우에는 눈 감아 주고, 기다려줘야 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모든 사소한 것 하나까지 세세하게 추궁하고 문책하는 것도 좋은 리더십은 아닙니다.

하지만, 분명히 집고 넘어가야 할 부분 또는 교정해야 할 부분은 지적하고 넘어가야 다음에 그런 일들이 다시 반복되지 않는 것입니다. 때로 교정의 시기를 놓쳐 더 심각한 상황에 빠지게 되기도 합니다. 그렇다고 교정하겠다고 무조건 불러놓고 책망부터 하고, 문책부터 하는 것, ‘너 잘못했다’고 몰아붙이는 것은 좋은 방법이 아닙니다. 지적하거나, 책망하거나, 교정하는 것에도 지혜가 필요합니다. 감정적으로 치우쳐 그 문제를 지극히 감정적으로 처리하게 될 때는 오히려 더 큰 부작용을 낳기도 합니다.

느헤미야는 7절에서

“깊이 생각하고, 귀족들과 민장들을 꾸짖어 그들에게 이르기를 너희가 각기 형제에게 높은 이자를 취하는도다 하고, 대회를 열고 그들을 쳐서”

느헤미야는 화가 났고, 반드시 그 문제를 뿌리 뽑아야 했지만 섣불리 행동할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7절에서 “깊이 생각하고”라고 하는데, 원어에서는 ‘내 마음 속에 다스리고’라는 의미를 갖고 있었습니다. 느헤미야가 그 문제를 놓고 자신의 감정과 분노는 자제를 하고, 심사숙고했음을 의미하는 단어인 것입니다.

느헤미야는 그 문제를 깊이 생각하고 그 해결책을 고민했던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순간의 감정을 눌렀습니다. 상대가 명백히 잘못되었을 수 있고, 틀렸을 수도 있습니다. 그렇다고 리더가 감정에 휘둘리기 시작하면, 그 때부터 더 큰 일은 못합니다. 젊은 나이에 대기업의 후계자요, 대한민국 최고 항공사의 부사장이었던 사람이 순간의 그 감정을 다스리지 못해서 철저하게 그 댓가를 지불하고 있는 것은 큰 교훈이 됩니다.

잠언 16:32절 말씀에서도

“노하기를 더디하는 자는 용사보다 낫고 자기의 마음을 다스리는 자는 성을 빼앗는 자보다 나으니라”

고 말씀하시고 있습니다. 순간적인 감정의 산을 넘어야 성도 빼앗을 수가 있는 겁니다. 그 감정을 제어할 수 있다면, 그는 무엇이든 못할 것이 없는 것입니다.

느헤미야는 순간적인 자신의 감정을 절제하고, 귀족들과 민장들과 같은 지도자들을 책망하는데, 그들 모두가 나쁜 사람들은 아니었을 것으로 보여 집니다. 그 중에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들도 분명 있었을 겁니다.

그런데 느헤미야가 그들을 책망하는 장면을 보면,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성경적인 방법으로 리더십을 발휘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마태복음 18:15~17절 말씀을 보시면, “네 형제가 죄를 범하거든 가서 너와 그 사람과만 상대하여 권고하라 만일 들으면 네가 네 제를 얻은 것이요(15절)” 이라고 말씀하시는데, 누가 어떤 죄에 빠져 있을 때 처음부터 공개적인 자리에서 책망하는 것은 지혜로운 것이 아니라는 겁니다.

처음에는 <1:1>로 권면하고,

“만일 듣지 않거든 한두 사람을 데리고 가서 두세 증인의 입으로 말마다 확증하게 하라(마18:16)” 만일 듣지 않으면, 두 세 증인을 데리고 가서 권면하라는 것입니다.

그래도 듣지 않을 경우에는 “만일 그들의 말도 듣지 않거든 교회에 말하고 교회의 말도 듣지 않거든 이방인과 세리와 같이 여기라(마18:17)”

그 때는 공적인 자리에서 책망하는데, 그마저 듣지 않는다면 이방인과 세리와 같이 여기라는 겁니다.

느헤미야는 처음에는 고리대금을 통해 잘못된 방법으로 부를 축척하는 이들을 책망했지만 그들에게 받아들여지지 않았던 것으로 보여 집니다. 그래서 느헤미야는 큰 대회를 열어 그 문제를 공론화하여 해결해 나가는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오늘 본문을 통해서 리더가 순간의 감정을 조절하지 못하면 안 된다는 사실을 배웠습니다. 리더는 큰 장애물을 넘기 전에, 자신의 감정의 산을 넘어야 좋은 리더가 될 수 있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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