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전 성취의 과정(2)” – 느헤미야처럼 기도하라(18) –

<느헤미야 5:14~19> 

여기 필리핀 거리를 걷다보면 로또복권을 판매하는 가게가 여기 저기 많이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한국도 그렇지만, 많은 사람들이 ‘로또 1등에 당첨되었으면…’하는 생각을 갖고 있는 거 같습니다.

그런데 ‘로또(Lotto)의 저주’ 라는 말이 있습니다. 한국에서 ‘황모씨(34세)’는 2006년에 로또 1등(14억원)에 당첨되었었습니다. 그런데 그 14억 원을 4년 만에 탕진하고, 2014년에 스마트폰을 훔치다가 절도범으로 붙잡혔습니다. ‘김모씨(43세)’는 2007년에 로또 1등(18억원)에 당첨되었습니다. 그런데 그 돈을 가지고 사업을 하려고 투자하고 그러다가 빚더미에 앉게 되었습니다. 결국 삶을 비관해서 2012년 공중목욕탕에서 목매어 자살을 했습니다. 차라리 로또에 당첨 안 되었더라면 어디에선가 직장을 다니며 성실하게 살고 있었을 수도 있었을 겁니다. 미국 뉴욕대학교(NYU) 연구에 의하면, 로또 1등 당첨자 중 3명 중 1명은 파산을 한다고 합니다. 미국의 로또는 우리나라와는 비교가 안 될 정도로 어마어마한 금액인데도 세 명 중 한명은 파산하는 겁니다. 그리고 당첨행복감도 평균 9개월도 채 안 간다고 합니다.

성경에 보면, ‘다윗’이라는 왕과 ‘시므리’라는 왕이 나옵니다. 두 사람을 비교해 보면, 다윗은 골리앗을 죽인 뒤 이스라엘의 민족 영웅이 되었습니다. 하지만, 그 이후 10여 년간의 연단기간이 있었습니다. 사울 왕이 다윗을 시기해 아무 이유도 없이 죽이려고 해서, 그 칼을 피해 계속 도망 다녀야 했습니다. 하지만 다윗은 끝까지 주님을 의지해서 결국 이스라엘의 2대 왕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다윗은 40년간 이스라엘을 통치했습니다.

시므리는 북 이스라엘의 장관이었는데, 자기가 섬기던 엘라 왕을 죽이고 자기 스스로 왕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시므리는 단 7일 동안만 왕위에 올라 있다가, 자살로 생을 마감하게 됩니다.

로또 1등에 당첨되더라도 그것을 관리할 만한 능력이 없다면 아무리 큰돈을 갖고 있어도 곧 파산하게 되는 겁니다. 그렇게 왕이 되고 싶어서 왕이 되었는데, 왕이 되기까지의 연단과 훈련이 없이 왕이 된 사람의 생명은 길수가 없는 겁니다.

우리가 큰 비전과 큰 꿈이 있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런데 꿈만 좋으면 아무 의미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그 꿈을 이루어 가는데 필요한 과정을 제대로 밟지 않고는 그 꿈을 온전히 이룰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그 사실을 알고 있었던 느헤미야가 ‘예루살렘 성벽재건’ 이라는 위대한 꿈을 꾸었고, 그 꿈을 이루기 위한 <비전 성취의 과정> 첫 번째는 지난번 이미 나눴던

1. 권리를 포기하라

큰 비전을 성취하기 위해서 예루살렘에 온 느헤미야 앞에는 커다란 장애물들이 버티고 있었습니다.  ‘대적의 방해’가 있었고, 백성들은 기근으로 식량난에 허덕이며 고통 받고 있었고, 반면 상류층은 백성들의 식량난을 이용한 고리대금으로 자신들의 부를 축적하고 있었습니다. 그런 사회적 분위기로 인해서 유다 민족은 계층 간에 심각한 분열이 있었습니다.

계층 간의 분열을 치유할 수 있는 것은 권력과 힘과 지위를 가진 자들이 그 권리를 포기하면 됩니다. 대기업들이 골목상권까지 들어와 장악하면 서민들은 더 어려워 질 수밖에 없는 겁니다. 대기업들의 원래 전문분야 그거에 집중하고, 골목은 서민들한테 주면 됩니다. 그것이 안 되기 때문에 한국 사회가 지금 그렇게 어려운 겁니다.

느헤미야가 상처입고 분열된 유다 백성을 치유하기 위해 첫 번째로 한 것은 유다 총독이었던 자신의 ‘권리를 포기’했던 것입니다. 유다 총독으로서 누릴 수 있는 경제적인 특권, 지위의 특권을 포기했던 것입니다.

2. 하나님을 경외하라

큰 비전을 성취해 가는 과정의 중요한 두 번째 원리는 ‘하나님을 경외하라’는 겁니다.

15절 말씀을 보시면,

“나보다 먼저 있었던 총독들은 백성에게서 양식과 포도주와 또 은 사십 세겔을 그들에게서 빼앗았고 또한 그들의 종자들도 백성을 압제하였으나 나는 하나님을 경외함으로 이같이 행하지 아니하고”

페르시아 왕에 의해 유다에 파견된 총독으로서 국민들로부터 세금을 거둬들여 그것을 페르시아 정부에 보내고, 총독부를 운영하는 자금으로 쓰는 건 당연한 겁니다. 느헤미야도 그렇게 했을 겁니다. 그러나 이전 총독들은 백성들로부터 그들의 1년 수입 중에 거의 40%에 이르는 세금을 필요 이상으로 거둬들인 겁니다. 결국 그것을 통해 중간지도자들, 관원들, 귀족들 그리고 총독이 부를 축척했었던 것입니다.

오랫동안의 그런 관행들로 인해 백성들의 삶은 피폐해질 때로 피폐해졌고, 백성들은 어쩔 수 없이 먹고 살기 위해 빚더미에 앉아있고, 그 빚을 갚지 못해 자녀들마저 노예로 팔려가기도 했습니다.

그런 상황 속에서 아무리 비전이 좋아도 어떻게 그 비전을 이뤄갈 수가 있겠습니까? 그래서 느헤미야는 자신의 권리부터 포기했습니다. 어려운 백성들의 재정적 어려움을 덜어주고자 자신은 총독으로서 당연히 받아야 하는 패이(pay)를 안 받았던 겁니다. 그리고 자비량으로, 아마도 종들을 통해 농사와 목축 등으로 자급자족했던 겁니다.

느헤미야가 그렇게 했던 이유는 그는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이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경외하다’는 말의 영어 단어는 ‘두려워하다(fear)’는 단어를 사용하고 있습니다. 즉 ‘하나님을 경외한다’는 것은 ‘하나님을 두려워한다’라는 것을 의미합니다.

우리나라에는 법(法)이라는 것이 있습니다. 헌법(국민이 제정, 개정), 법률(국회에서 제정한 법), 명령(대통령령, 총리령, 각부 장관령), 조례(지방의회에서 제정한 법), 규칙(자치 단체장이 제정한 법)이 그것입니다.

하지만 법이라는 것이 완벽하지 않고, 법들 사이에서 충돌할 때가 있는 겁니다. 그 때는 어떻게 하냐면, ‘법의 해석과 적용’에 있어 <상위법 우선의 원칙>이라는 게 있습니다. 그러니깐 조례와 헌법이 충돌하면 상위법인 헌법에 따라 한다는 겁니다. 헌법이 상위법입니다.

믿음의 사람 느헤미야는 <유다의 총독>으로 부임했습니다. 느헤미야가 총독으로서 예루살렘에 도착해 보니, 이전에 유다의 총독이었던 사람들의 <관습과 관행>들이 있었습니다. 그들은 필요이상의 세금을 거둬들여 사리사욕을 채웠고, 때문에 백성들은 더욱 고통을 받았던 겁니다.

그러나 정직한 믿음의 사람이었던 느헤미야에게 상위법은 ‘페르시아 왕의 명령과 국법’이었습니다. 그 법에서 어긋나는 일을 해서는 안 되는 것이었고, 무엇보다 총독으로서 자신의 사욕을 채우기 보다는 그 땅을 잘 통치해야 했었습니다.

그런데 다른 사람들은 다 그렇게 하더라도, 그것이 관행이고, 관습이라 할지라도, 그것보다 상위법은 페르시아의 법이었고, 느헤미야에게 있어 그 모든 것들보다 상위법은 <하나님의 법/말씀>이었던 것입니다. 그 말씀에 의해 유다를 정의롭게 통치해야 했습니다. 하나님의 법에 따라 사랑과 자비와 희생의 정신으로, 통치가 아닌 섬김의 정신으로 총독으로서의 직임을 감당해야 했던 것입니다.

왜냐하면 느헤미야는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이었기 때문입니다. 그 하나님께서 보고 계시는데 그 분 앞에서 악을 행하지 말아야 했고, 주님의 마음으로 백성을 사랑하고 더 나아가 희생하기까지 해야 했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그는 하나님을 경외함으로 총독으로서 마땅히 누려도 되는 자기의 권리까지 포기했던 것입니다. 140여년 동안 무너져 있었던 ‘예루살렘 성벽재건’이라는 위대한 비전을 성취해 갈 수 있었던 것은 느헤미야의 이런 정신이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던 것입니다.

여러분에게 어떤 비전이 있어도, 그 비전을 성취하기 위해 앞뒤 가리지 않고, 많은 사람을 희생시키거나, 그들을 짓밟아 가면서 그 꿈을 이루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언제나 기준은 ‘하나님을 경외함’이어야 합니다. 그 분의 말씀이 기준이 되어야 합니다. 그것이 우리 인생의 상위법이기 때문입니다.

‘비전 성취의 과정’ 세 번째 원리는

3. 비전에 헌신하라

그 비전과 꿈을 이루어가기 위해서 꼭 필요한 원리 중에 하나가 ‘집중력’입니다.

16절 말씀입니다.

“도리어 이 성벽 공사에 힘을 다하며 땅을 사지 아니하였고 내 모든 종자들도 모여서 일을 하였으며”

귀족들과 민장들, 이전 총독들은 고리대금을 하며, 가난한 백성들의 땅을 사들이고 빼앗았습니다. 그런데 느헤미야는 그런 일을 하지 않았습니다. 느헤미야 관할 아래 있었던 관원들도 그런 일을 하지 못하도록 했습니다.

그리고는 성벽 공사에 힘을 다하여 집중했던 것입니다. <예루살렘 성벽 재건>이라는 큰 비전이 있는데, 느헤미야가 유다 땅에 도착해서 이전 관리들과 같이 그런 일에 관심을 갖고 그런 일들을 했다면, 절대로 느헤미야의 그 비전은 이루지 못했을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누가복음 9:62절 말씀에서

“손에 쟁기를 잡고 뒤를 돌아보는 자는 하나님의 나라에 합당하지 아니하니라”

앞을 보고 쟁기질을 해야 바르게 밭을 갈 수 있는 겁니다. 그런데 자꾸 한 눈을 팔면 밭을 고르게 갈 수가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어떤 비전을 주셨을 때, 다른 데 눈을 돌리기 시작하면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계획과 축복은 자꾸 늦어질 수밖에 없는 겁니다. 비전을 받았다면, 그 비전에 집중하십시오.

그리고 느헤미야가 그 비전을 위해 다른 관심들을 모두 다 끊었던 것처럼, 오직 비전에만 헌신하십시오. 그래야 그 비전이 속히 이루어 질 수 있는 것입니다. 140여 년 동안 무너져 있었던 예루살렘 성벽, 그 누구도 저 파괴된 예루살렘 성벽이 다시 쌓여질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한 사람은 없었습니다. 그런데 그 비전을 위해 헌신한 느헤미야에 의해 단 52일 만에 예루살렘 성벽은 완공이 되었던 것입니다.

그렇게 비전을 성취하기 위한 네 번째 원리는

4. 자신을 희생하라

느헤미야가 총독으로서 마땅히 누릴 수 있는 권리를 포기했다고 해서, 그가 총독으로서의 역할을 소홀히 한 것은 아닙니다. 그는 총독으로서의 일을 잘 수행하기 위해서는 리더들을 챙겨야 했습니다. 매일같이 백성의 리더들을 챙기기 위해서는 막대한 자금이 필요했는데, 느헤미야는 그것마저 자신의 사비를 들여 했던 것입니다.

17절과 18절 말씀을 보시면,

“또 내 상에는 유다 사람들과 민장들 백오십명이 있고 그 외에도 우리 주위에 있는 이방 족속들 중에서 우리에게 나아온 자들이 있었는데, 매일 나를 위하여 소 한 마리와 살진 양 여섯 마리를 준비하며 닭도 많이 준비하고 열흘에 한 번씩은 각종 포도주를 갖추었나니 비록 이같이 하였을지라도 내가 총독의 녹을 요구하지 아니하였음은 이 백성의 부역이 중함이었더라”

느헤미야는 매일 150명의 민장(백성의 리더)들, 주변 국가들로부터 방문하는 외교관들을 위해 소 한 마리, 살진 양 여섯 마리, 많은 양의 닭을 준비해서 대접했습니다. 그렇게 총독부를 운영하는데 많은 재정적 필요가 있었지만, 그것을 백성의 세금으로 하지 않았다는 겁니다. 그리고 자신의 사비를 털어 그 일을 했다는 겁니다.

그렇게 한 이유는 18절 끝부분에서 ‘이 백성의 부역이 중함이었더라’ 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것을 쉬운성경에서는 ‘그렇게 한 까닭은 백성들의 짐이 너무 크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입니다’라고 되어 있습니다.

백성들의 짐이 너무 무거웠기 때문에, 그 백성들의 짐을 조금이라도 가볍게 하기 위해서 였다는 겁니다. 느헤미야가 이렇게 한다고 해서 그걸 통해 느헤미야가 무슨 부귀 영화를 누리는 것도 아닙니다. 그렇다고 누가 크게 알아주는 것도 아닙니다. 그 비전을 이루기 위해서 느헤미야가 치른 희생만큼 어떤 댓가가 돌아오는 것도 아닙니다.

그러나 희생이 없이 비전은 성취될 수 없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요한복음 12:24절을 통해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죽지 아니하면 한 알 그대로 있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느니라”

하셨습니다. 그 한 알이 땅에 떨어져 희생하면 하나님께서는 그를 통해 많은 열매들이 맺혀지게 하실  것이라는 겁니다. 자신을 희생하지 않고는 절대 비전을 이룰 수 없습니다. 여러분이 흘린 눈물 한 방울, 땀 한 방울, 애씀과 수고는 비전의 성취로 반드시 돌아오게 될 것입니다.

느헤미야의 자기희생으로 예루살렘 성벽이 재건되었고, 바울사도의 자기희생으로 유럽이 복음화 되었고, 예수님의 희생으로 전 세계 인류에 구원이 임한 것입니다. 이제 여러분의 눈물과 희생이 열매 맺을 차례인 것입니다. 여러분의 희생은 결코 헛되지 않을 것입니다.

5. 하나님 앞에서 하라

우리가 느헤미야서를 처음 함께 나눌 때, 우리 안에 하나님께서 어떤 비전을 주시는 데, 그 비전이 나의 비전이 아니라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꿈이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하나님의 일꾼이 되어서 하나님 앞에서 살아가야 하는 것입니다.

느헤미야는 <예루살렘 성벽 재건>이라는 비전을 위해 힘을 다해 수고했습니다. 자신의 권리를 포기하고, 하나님을 경외함으로, 그 비전을 위해 헌신하고, 자신을 희생하면서까지 그 비전을 향해 달려가고 그렇게 살았던 사람이었습니다.

예루살렘 성벽을 재건한다고 해도, 느헤미야가 희생과 수고를 많이 했다고 해도 예루살렘 성이 느헤미야 개인의 소유가 되는 것도 아닙니다. 유다인의 왕이 되는 것도 아닙니다. 어떤 누구로부터 큰 칭찬을 듣는 것도 아닐 수 있습니다. 그렇게 희생하고 헌신해도 아무도 알아주지 않을 수도 있는 겁니다.

19절에서 느헤미야가 이렇게 기도합니다.

“내 하나님이여 내가 이 백성을 위하여 행한 모든 일을 기억하사 내게 은혜를 베푸시옵소서”

느헤미야가 하나님 앞에 눈물로 기도하는 겁니다.

‘아무도 나를 알아주지 않고, 내게 어떤 이득이 없어도, 저는 하나님 앞에서 했습니다. 사람들에게 칭찬 들으려고도, 사람들 앞에 높아지려고도, 어떤 명예를 얻으려고도 한 것이 아닙니다. 저는 하나님께서만 알아주시면 됩니다. 주님이면 충분합니다. 주님의 은혜면 충분합니다’

라고 고백하고 있는 겁니다. 여러분이 비전을 향해 달려갈 때 여러 사람들의 시선을 의식하고, 내 수익을 계산하기 시작하면 하나님의 비전을 온전히 이룰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내가 너를 통해 이 일을 하고 싶구나, 나는 너를 이렇게 쓰고 싶구나, 나는 너를 통해 이런 꿈을 꾸고 있단다’라고 말씀하셨다면, 그 하나님 앞에서 하면 되는 겁니다.

결국 내 손에 뭐가 돌아올까? 생각하지 마세요. 내게 돌아올 이익을 계산하지 마세요. 그냥 그 비전을 향해 도전하시고, 헌신해 보십시오. 하나님은 여러분을 통해 반드시 그 일을 이루실 것이고, 하나님은 반드시 여러분과 여러분의 가정과 자녀 위에 큰 은혜를 베푸실 것입니다.

“비전성취의 과정”

– 느헤미야처럼 기도하라(18) –

1. 권리를 포기하라

2. 하나님을 경외하라

3. 비전에 헌신하라

4. 자신을 희생하라

5. 하나님 앞에서 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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