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유권 이전” – 느헤미야처럼 기도하라(30) –

<느헤미야 12:27~31>

최근 우리나라의 ‘L’모 대기업에서 총괄 회장이었던 아버지가 물러나면서 그 아들들이 ‘경영권 승계와 장악’을 위해 다투는 내용의 뉴스들이 있었습니다.
그런 내용과는 다르게, 어제 모처럼 훈훈한 뉴스 두 가지를 접했습니다.

우리나라에 ‘우성해운’이라는 연매출 100억 원 대의 중견 기업이 있는데, 그 창업주가 차수웅이라는 분이세요. 이 분이 누구 시냐면, 탈랜트 ‘차인표(신애라)’씨의 아버지시랍니다. 이 회장님에게 세 아들이 있는데 모두 미국 유학파 출신들입니다. 차인표 씨는 둘째 아들이고, 미국 뉴저지주립대학에서 경제학을 전공하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경영권 승계에 대한 얘기가 나왔을 때, 세 아들이 진지하게 고민하고 그것을 거절했다고 합니다. 차인표 씨가 이렇게 말했답니다. “평생 회사에 온 몸을 바친 분들이 계신데 해운업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는 저희가 경영권을 물려받는 것은 말이 안 되죠” 정말 멋진 사람인 거 같습니다.

또 다른 하나는 미국 캘리포니아에 천 명 정도 출석하는 ‘선한목자교회’ 라고 있습니다. 이 교회에 ‘고태형목사님’이 담임으로서 시무하고 계시는데, 이 교회는 그 지역에서 가장 큰 교회 중에 하나라고 합니다. 이 교회는 ‘미국장로교(PCUSA)’ 교단에 소속된 교회였습니다. 그런데 교단에서 동성결혼을 인정하니깐, 이 교회에서는 동성결혼을 반대하면서 교단을 탈퇴하기로 성도들의 95%의 찬성으로 결의를 했다고 합니다. 문제는 30~40명 정도의 성도들이 교단을 탈퇴하지 않겠다고 하면서, “교회 재산을 돌려 달라”며 목사님과 교회를 미국의 법원에 고소를 한 겁니다.

목사님과 대부분의 성도들은 그들과 합의점을 찾으려고 노력했는데, 반대자들이 거부를 하게 됩니다. 결국 목사님과 95%의 성도들은 630만 달러(74억원) 상당의 예배당을 포기하고 나오기로 했다는 겁니다. 신문기자가 ‘그 동안 지켜오던 건물을 왜 포기하느냐?’고 질문하자, “(우리는) 그리스도인으로서 서로 대화하면서 우리도 잘 하고 교단에 남으려는 소수도 잘할 수 있는 방법을 찾으려 했다. 그러나 법정까지 가게 된다면 결국 그리스도인들끼리 싸우는 것이니 우리가 건물을 포기한다”라고 말했습니다.

이 두 가지 뉴스를 접하면서 ‘소유권’에 대한 부분을 묵상하게 되었습니다. 우리가 어떤 부분에 많은 에너지와 시간과 물질을 쏟아 부었으면 그것에 대한 소유권을 주장하고 인정하는 게 당연한 겁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도 하나님께서 소유권이라는 것이 있습니다.

그러나 나의 소유를 포함해 ‘모든 것의 진정한 소유권자는 하나님이시라’는 사실을 기억하고 있어야 합니다.

욥의 경우는 욥기 1:21절 말씀을 보시면 “주신 이도 여호와시오 거두신 이도 여호와시오니”라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욥의 소유였지만 그 모든 것의 진정한 소유주는 하나님이시라는 것을 고백하는 겁니다.

다윗의 경우도 역대상 29장에서 성전건축을 앞두고

(11절) 여호와여 위대하심과 권능과 영광과 승리와 위엄이 다 주께 속하였사오니 천지에 있는 것이 다 주의 것이로소이다…
(12절) 부와 귀가 주께로 말미암고 또 주는 만물의 주재(주인)가 되사…
(14절) …모든 것이 주께로 말미암았사오니 우리가 주의 손에서 받은 것으로 주께 드렸을 뿐이니이다

다윗은 한 나라의 왕이었습니다. 당시는 ‘절대군주 시대’ 였습니다. 왕이 무엇이든 마음대로 할 수 있었고, 어떤 것이든 절대적인 힘을 가지고 소유할 수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다윗은 당시 다른 군주들이 어떻게 하든, 자신의 지위가 무엇이든… 그것과 관계없이 자신의 소유권 이전에 계신 진정한 소유권자이신 하나님에 대해서 인정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자신의 소유권에 대한 집착이 강하면 강할수록 그는 욥과 같이 고난 중에 반응할 수 없을 것이고, 다윗과 같이 기쁨으로 성전을 건축할 수도 없을 것입니다. 적어도 욥과 다윗은 이 땅에서 분명 자신들의 소유가 있었지만, 그 진정한 소유권은 하나님께 이전해 놓고 살아가고 있었던 겁니다. 그래서 그렇게 반응 할 수 있었던 겁니다.

느헤미야 12장의 핵심 내용은 ‘예루살렘 성벽 봉헌식’ 입니다. 27절 말씀을 보시면,
“예루살렘 성벽을 봉헌하게 되니 각처에서 레위 사람들을 찾아 예루살렘으로 데려다가 감사하며 노래하며 제금을 치며 비파와 수금을 타며 즐거이 봉헌식을 행하려 하매”

그런데 저는 이 말씀을 보면서 약간은 의아한 생각이 들었습니다. 왜냐하면 솔로몬 왕이 하나님의 성전을 짓고 했던 ‘성전 봉헌식’은 이해가 되는데, 예루살렘 성벽은 하나님의 성전도 아닌데, ‘성벽 봉헌식’을 한다고 하니깐 쉽게 이해가 안 되는 겁니다.

‘봉헌(奉獻)’이란 말의 한자어는  ‘받들 봉(奉), 바칠 헌(獻)’자를 사용하고 있어서, 뜻은 ‘(물건이나, 헌금 등을) 받들어 바침’이란 의미를 갖고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주일 예배 시에 갖게 되는 ‘헌금시간’을 ‘봉헌시간’ 또는 ‘봉헌기도’라는 말로 사용하고 있는 겁니다. 또는 지금도 교회들마다 성전을 건축하고 ‘성전 봉헌식’ 또는 ‘헌당식’이란 이름으로도 여전히 사용하고 있는 겁니다.

그런데 느헤미야는 성전이 아닌, 예루살렘 성벽을 모두 재건한 후에 ‘예루살렘 성벽 봉헌식’을 하려고 하는 겁니다. 느헤미야는 성벽 봉헌식을 위해서 여러 가지 준비를 하는데, 특별히 준비된 사람들과 함께 그 성벽 위를 나팔을 불고, 여러 가지 악기를 연주하면서, 찬양을 부르며 행렬하며 하나님께 그 성벽을 봉헌하려고 합니다.

일단, 느헤미야는 예루살렘 주변 여러 마을에 거처를 두고 살던 모든 ‘레위인들을 소집’하게 됩니다. 왜냐하면 레위인들은 하나님께 올려드리는 제사의식에 빠져서는 안 되는 사람들이고, 그들을 통해 찬양대와 연주단을 조직하기 위해서 였습니다(27~29절).

느헤미야가 봉헌식에서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이 하나님께 찬양을 올려드리는 ‘찬양대 조직’이었던 것 같습니다. 찬양대의 찬양이 울려 퍼지면서 사람들이 따라서 행렬을 해야 했기 때문입니다.

그 찬양대가 찬양을 올려드리기 위해서는 ‘연주단 조직’이 필수적으로 필요했습니다. 그들은 제금, 비파, 수금 및 나팔을 불며 찬양을 연주했습니다(27, 36절).

하나님께 올려드리는 봉헌식에 있어 ‘제사장들의 소집’은 필수적이었습니다.

또한 백성들의 지도자들인 ‘민장들을 소집’했습니다.

그리고 어떻게 행렬할 것인가?를 고민했고, 행렬은 두 팀(에스라팀, 느헤미야팀)으로 나누기로 했습니다.

제사장겸 학사였던 ‘에스라’를 선두로 한 행렬은 예루살렘 성의 남쪽과 동쪽을 돌아 북쪽에 있었던 성전까지 성벽 위를 따라 올라가는 행렬이었습니다.

또 다른 행렬은 총독 ‘느헤미야’를 선두로 성의 서북쪽으로 올라가서 동쪽으로 돌아 성전으로 들어가는 입구까지 가는 행렬이었습니다.

그들은 크게 찬송하며, 나팔을 불고, 악기를 연주하며 성 전체를 돌아 성전 앞까지 행렬하여 성전 앞에서 멈추었습니다.

그리고  43절 말씀을 보시면,
“이 날에 무리가 큰 제사를 드리고 심히 즐거워하였으니 이는 하나님이 크게 즐거워하게 하셨음이라 부녀와 어린 아이도 즐거워하였으므로 예루살렘이 즐거워하는 소리가 멀리 들렸느니라”

그 날 봉헌식의 절정은 성전에서 드리는 큰 제사였습니다. 그들은 하나님 앞에 마음을 다해 제사를 올렸습니다. 그리고는 ‘(그들이) 심히 즐거워하였으니’라고 되어 있는데, 그 이유가 ‘하나님이 크게 즐거워하게 하셨음이라’고 되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큰 기쁨을 주셨다는 겁니다. ‘부녀와 어린아이도 즐거워하였으므로 예루살렘이 즐거워하는 소리가 멀리’까지 들릴 정도였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 짧은 구절 안에 ‘즐겁다’라는 표현이 네 차례에 걸쳐서 반복적으로 나타나 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 앞에 예루살렘 성벽을 봉헌했습니다. 봉헌을 했더니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큰 기쁨과 즐거움을 주셨다는 겁니다.

느헤미야가 왜 성전도 아닌, 예루살렘의 성벽의 ‘봉헌식’을 했을 거 같습니까?

우리가 이사를 하면 이사예배를 통해서 하나님께서 그 가정을 지켜주시기를 구하기도 하고, 기업을 새롭게 오픈하면서 개업예배를 통해 하나님께서 그 기업을 축복해 주시기를 구하는 것도 좋은 믿음의 태도입니다.

느헤미야 역시 그 성벽을 완공하고, 시편127편1절 말씀을 생각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여호와께서 집을 세우지 아니하시면 세우는 자의 수고가 헛되며 여호와께서 성을 지키지 아니하시면 파수꾼의 깨어 있음이 헛되도다” 그래서 느헤미야가 하나님께서 그 성을 지켜주시고, 대적들로부터 보호해 주시기를 구하는 마음으로 봉헌식을 했을 거 같습니다.

그러나 사실은 더 중요한 이유가 있습니다. 설교 앞부분에서 ‘봉헌(奉獻)’의 의미를 잠시 말씀드렸었습니다. 봉헌은 ‘받들어 바친다’는 의미입니다.

아주 간혹적으로 이런 경우를 봤습니다. 교회에서 시험이 든다거나, 어떤 분쟁이 생겨서 자신이 헌금했던 십일조와 헌금 또는 물건들을 돌려달라고 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렇다면 그는 하나님 앞에 ‘봉헌’했던 것이 아닙니다. 은행에 돈 맡겨두듯이 잠시 맡겨둔 겁니다. 그 교회가 어떤 교회이든, 그 목회자가 얼마나 잘못되었던 간에 우리가 하나님 앞에 드렸다고 생각하면 그걸로 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봉헌과 헌신을 받으신 겁니다.

‘봉헌(奉獻)’이란 뜻은 ‘받들어 바친다’는 뜻입니다. 이 말은 ‘소유권 이전’이란 말과 같은 겁니다. 주인이 바뀐 겁니다.

예루살렘 성을 느헤미야와 백성들이 쌓았습니다. 느헤미야의 공로도 있고, 백성들의 수고와 땀도 있습니다. 분명 그들의 지분을 주장할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그 소유권을 하나님께 올려드린 겁니다. 소유권이 이전 되었으니, 이제 예루살렘 성은 하나님의 소유가 되는 것입니다. 느헤미야와 백성들이 그것을 믿음으로 고백하고 있는 것이 이 성전 봉헌식인 것입니다.

하나님의 소유가 되었다는 것은 ‘이제 하나님께서 책임 지신다’라는 의미가 담겨 있는 것입니다.

“여호와께서 성을 지키지 아니하시면 파수꾼의 깨어 있음이 헛되도다(시127:1)”라는 말씀과 같이 예루살렘 성을 하나님께서 지켜주시지 않으면 그 견고
한 성벽이라도 무너졌던 경험을 그들의 조상들이 했었고, 결국 조상들과 그 자손들은 바벨론에 포로로 잡혀가 비참한 노예생활을 했었던 겁니다.

내가 뭔가를 꽉 쥐고 있으면 그것이 내 것인 거 같지만, 하나님께서 지켜주시지 않으면 아무 의미가 없습니다. 내 소유인 거 같고, 내 자녀인 거 같고, 내 사람인거 같고, 내 능력인 거 같지만 우리에게는 늘 하나님의 도우심이 필요한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손에 힘을 꽉 쥐고 그것을 잃을까봐 늘 노심초사합니다. 그러나 그것을 봉헌해 보십시오. 그 때부터 하나님의 책임져 주시는 것을 경험하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가정을 책임져 주시고, 자녀를 책임져 주시고, 기업을 책임져 주시고, 우리의 인생을 책임져 주시는 것입니다. 우리의 삶이 그 분의 소유가 되고, 그분의 책임이 되는 것입니다.

성벽 봉헌식 후에 느헤미야와 온 백성들에게 큰 기쁨이 있었습니다. 성 밖에 까지 크게 들릴 정도로 그 기쁨이 넘쳤다고 말씀하시고 있습니다(43절). 여러분의 인생 소유권을 하나님께로 이전해 보십시오. 이전에 경험할 수 없었던 하늘의 기쁨을 경험하시게 될 것입니다.

Tags: No tags

Add a Comment

You must be logged in to post a com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