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잠언 26:17>
제가 가끔 우연히 보게 되는 TV 예능 프로 중에 <비정상회담>이라는 게 있습니다. 한국에서 살고 있는 각국의 젊은 청년들이 모여서 여러 가지 주제를 놓고 토론하는 프로그램인데, 저는 개인적으로는 독일의 ‘다니엘’이라는 친구와 미국의 ‘타일러’라는 친구의 발언에 공감할 때가 많이 있습니다.
언제 방송한 건지는 모르지만, ‘타일러의 개념발언’이라는 타이틀로 누군가 블로그에 포스팅을 해 놨습니다. 토론주제가 “청소년들이 담배 피우는 모습을 봤을 때, 끄라고 한다 VS 그냥 지나친다”라는 찬반 토론이었습니다.
우리나라 정서로는 당연히 ‘끄라고 한다’는 쪽이 더 많을 겁니다. 하지만, 요즘 무서운 청소년들이 많아서 알긴 알지만 그렇게 말하는 것도 쉽지는 않을 겁니다.
그런데 미국청년 타일러는 “미국의 경우 모르는 학생이 담배를 피우고 있다고 해도 뭐라고 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모르는 학생에게 간섭한다는 느낌이 들거든요. 양육권이 저에게 있는 것이 아니라 부모한테 있는 거고, 그 학생을 책임지는 가정이나 학교에서 교육할 일이기 때문입니다”라고 말했습니다.
자신이 존경하고 신뢰하는 분이 책망해도 들을까 말까한 사실을 전혀 모르는 어른이 말한다고 과연 귀담아 들을 청소년들이 얼마나 있을까요? 자칫 잘못했다는 일면식도 없는 청소년들에게 몰매를 맞고, 모욕을 겪을 수도 있을 겁니다. 모른 척 하라는 것이 아니라 정작 그 청소년을 그렇게 방치한 가정과 학교에게 그 책임을 묻는 게 옳은 일이라는 겁니다. 어쩌면 그게 훨씬 더 현명한 방법입니다.
오늘의 잠언은 위의 예와 관계가 있는데, “누군가의 다툼을 목격했을 때”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하는지에 대해서 말씀하시고 있습니다. 특별히 나와 직접적인 관계가 없는 어떤 다툼을 목격했을 때, 우리는 어떻게 해야할까요?
먼저, 17절 말씀을 보시면,
“길로 지나가다가 자기와 상관없는 다툼을 간섭하는 자는 개의 귀를 잡는 자와 같으니라”
라고 말씀하시고 있습니다. 나와 아무 상관없는 문제와 다툼에 간섭하게 되는 것은 마치 사나운 개의 귀를 잡는 것과 같다는 겁니다. 격렬하게 논쟁을 하든지 그렇게 다투고 있는 사람의 감정은 매우 흥분되어 있을 겁니다. 그런데 나와는 상관없는 그런 다툼에 끼어드는 것은 사나운 개의 귀를 잡는 것과 같은 겁니다. 그러면 그 사나운 개가 “넌 뭔데, 남의 일에 상관이야!”하면서 아무 상관없던 나를 도리어 물어 버릴 수도 있는 겁니다.
필리핀 세부 교민사회는 한국사회보다 훨씬 좁습니다. 한국은 몇 사람 건너야 알 수 있는 사실들을, 여기는 나와 전혀 모르는 사람이라 할지라도 정말 한 사람만 건너면 다 알 수 있습니다. 그런 걸 깨달을 때마다 ‘세부 교민사회는 정말 말조심도 해야 하고, 행동에도 각별히 신경을 써야하겠구나…’라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날씨가 덥다 보니 커피숍에 들어가 보면 한국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그런데 한국과는 달리 여기서는 서로 얽히고설킨 관계와 문제들이 참 많이 있습니다. 그러다 보니 한국 사람들이 모여서 건설적인 대화보다는 남을 헐뜯는 말들이 그렇게 많습니다. 그러니 교민사회가 서로를 믿지 못하고, 경계하고 또 어떤 선입견을 갖고 상대를 바라보기도 합니다. 그런데 나중에 그 상대를 만나서 대화해 보면 ‘어? 이 분 괜찮은 사람이네?’라고 생각들 때가 많은 겁니다. 처음에 가졌던 생각보다 의외로 괜찮은 분들도 참 많이 있습니다. 우리교회를 통해서 우리 교민사회와 분위기가 더 긍정적이고 화평한 사회가 되길 기도합니다.
어쨌든 그렇게 서로 복잡한 관계가 많다 보니, 누군가가 내게 와서 어떤 하소연을 하면 그 얘기에 공감하게 되고 그러면 나도 그 사람의 편에서 생각하고 말하게 되어 있는 겁니다. 그래서 그런 말을 나 역시 또 다른 누군가에게 하게 될 수도 있는데, 이런 경우가 오늘 잠언에서 경계하고 있는 내용입니다. 나는 아무 상관없는 사람인데 그 때부터 나는 한쪽에 치우치는 겁니다. 그럼 나와 아무 상관없는 사람들의 다툼에 끼어드는 상황이 되어 버리는 겁니다.
사실 얘기는 양쪽 얘기를 다 들어봐야 제대로 알 수 있는 겁니다. 모든 사람들은 다 자기 입장만을 얘기할 것입니다. 우리가 누군가 한쪽으로 치우치기 시작하면 하나의 당이 되는 겁니다. 그러면 이제부터 나도 나와 아무 상관없는 사람하고 싸움이 시작되는 겁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마태복음 5:9절을 통해서
“화평하게 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받을 것임이요”
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는 다투고 싸워 또 다른 한 사람을 정죄하고 죄인 만드는 사람이 아니라, 둘 사이를 화평하게 하는 하나님의 아들(딸)인 것입니다.
오늘 본문의 ‘간섭하는’이란 말의 히브리 원어는 ‘미트아베르(mitaber)’라는 단어를 쓰고 있는데 ‘간섭하다, 격노하게 되다, 흥분하다’라는 뜻입니다.
우리가 감정적으로 흥분해서 다투기 보다는 하나님의 아들로서 둘 사이를 화평케 하는 크리스천이 되어야 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