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연 무엇을 위하여…”

<출애굽기 15:12~21> 
– 믿음의 기업(47) –

어제 헌법재판소에서 <김영란 법>이란 것이 ‘합헌’이라는 판결이 나왔습니다. 2012년 당시 국민권익위원장이었던 김영란위원장이 제안한 법안인데, 공무원이나 공공기관 임직원, 학교 교직원 등이 일정규모 이상의 금품을 받으면 처벌하는 것을 골자로 한 ‘부정청탁 및 금품 수수에 관한 법률’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 땅의 어떤 법이든 완전할 수는 없는데, 이 법안 역시 여러 가지 우려 섞인 전망들도 있습니다. 일이 진행되고 영업을 하는데 있어서 선물이라든지, 접대와 같은 것이 일반화 되어 있는 우리 사회에서 이 법이 통과될 경우에 액수가 커지는 선물이나 접대를 할 수 없게 되는 겁니다. 그렇게 되면 하루 270억원, 1년에 10조원 가까이 식당과 술집에서 기업 접대비로 썼던 돈을 쓰지 않기 때문에 실물경제에 그만큼 타격을 입게 된다는 전망입니다.

그런데 우리나라의 부패인식지수는 OECD 34개국 중에 27위로 하위권입니다. 정직하지 않은 기업문화 때문에 이 일을 계기로 국가 브랜드의 청렴도가 높아지면 장기적으로는 국가 경쟁력과 경제성장률을 높일 수 있다는 전망도 있습니다. 어쨌든 동전의 양면과 같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생각하시면 판단이 좀 단순해집니다. ‘지금의 경제적 이익을 위해 불법과 부정과 부패한 나라를 만드느냐? 아니면, 당장의 경제적 손실이 있어도 접대보다는 실력으로 경쟁하는 정직한 사회를 만드느냐? 과연 우리는 무엇을 위하여 논쟁하고 있는가?’하는 겁니다. 지금 당장 잘 먹고 잘사는 것보다 더 나은 가치를 좇을 때 잘 먹고 잘 살게도 되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430년간 노예로 살던 애굽에서 출애굽을 하는 1차적인 목적은 배고프고 힘들었던 노예시절 보다 더 배부르게 먹고 자유롭게 살기 위해서가 아닙니다. 물론, 노예에서 해방되어 자유를 얻게 될 경우 좀 더 잘 먹고 잘 살 수 있게 되는 혜택이 따라오지만, 그것이 출애굽의 1차적인 목적은 아닙니다.

오늘 본문 13절을 보시면,
“주의 인자하심으로 주께서 구속하신 백성을 인도하시되 주의 힘으로 그들을 주의 거룩한 처소에 들어가게 하시나이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애굽의 압박과 핍박으로부터 구원하셔서 출애굽 시키신 이유가 “그들을 주의 거룩한 처소에 들어가게 하시나이다”라는 겁니다.

또 한 다른 구절인 17절을 보시면,
“주께서 백성을 인도하사 그들을 주의 기업의 산에 심으시리이다 여호와여 이는 주의 처소를 삼으시려고 예비하신 것이라 주여 이것이 주의 손으로 세우신 성소로소이다”

하나님께서 왜 이스라엘 백성을 인도하셨다고 말씀하고 있습니까? “그들을 주의 기업의 산(예루살렘)에 심으시리이다”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 예루살렘에는 하나님의 성전인 거룩한 처소(13절)가 세워지는 것입니다. “주여 이것이 주의 손으로 세우신 성소로소이다”라고 말씀하시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모세를 애굽 땅에 보내 시면서부터 그리고 애굽에 10개의 재앙을 내리실 때도 비슷한 말씀을 여러 차례 반복하고 있는 게 있습니다.

(출3:12) “…네가 그 백성을 애굽에서 인도하여 낸 후에 너희가 이 산에서 하나님을 섬기리니…”

(출3:18) “…우리가 우리 하나님 여호와께 제사를 드리려 하오니 사흘길쯤 광야로 가도록 허락하소서”

(출5:1) “…내 백성을 보내라 그러면 그들이 광야에서 내 앞에 절기를 지킬 것이니라”

(출5:3) “…우리 하나님 여호와께 제사를 드리려 하오니 가도록 허락하소서…”

(출7:16) “…내 백성을 보내라 그러면 그들이 광야에서 나를 섬길 것이니라…”

(출8:1) “…여호와의 말씀에 내 백성을 보내라 그들이 나를 섬길 것이니라”

이 외에도 출애굽기 8:8, 20, 28, 29, 9:1, 13, 10:7, 8, 26, 12:31 등에도 이 말씀들이 계속 반복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이 구절들을 통해 우리는 출애굽의 근본적인 목적이 무엇인지를 깨달을 수가 있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의 430년 노예생활에서의 해방인 출애굽(Exodus)은 단순히 이스라엘 백성의 해방운동이 아닙니다. 그 일을 통해 노예생활 때보다 좀 더 잘 먹고 잘 살기 위해서가 아닌 것입니다. 더 근본적이고, 더 높은 가치가 있는 목적이 있었습니다. 바로, 하나님을 경외하는 백성으로 살게 하기 위함인 것입니다.

제가 예수님을 믿고 난 후 변화된 가치가 하나 있습니다. 전에는 돈 많고 성공한 사람을 보면 부러웠습니다. 그런데 이제는 아무리 삼성의 이건희처럼 돈 많고 크게 성공했어도 그 사람이 예수님을 믿지 않고 있다면 불쌍해 보입니다. 왜냐하면 그게 전부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이 세상의 짧고 짧은 생애가 전부가 아니라, 우리에게는 영원한 삶이 남아 있기 때문입니다. 이 세상에서 그렇게 잠시 잠깐 세상 즐거움과 쾌락에 빠져 살다가 주님께서 부르시면 지옥에서 영원한 심판을 받든지, 아니면 이 땅에서 하나님을 경외하며 살다가 죽어 천국의 영원한 즐거움으로 들어가는 것입니다.

히브리서 9:27절 말씀에
“한번 죽은 것은 사람에게 정해진 것이요 그 후에는 심판이 있으리니”

라고 말씀하시고 있습니다. 당장 우리의 눈앞에 있는 인생의 문제가 해결되는 것이 급할 수 있지만, 그 일을 통해 하나님을 만나고,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을 경험하면서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으로 변화되는 것이 더 중요한 것입니다. 우리는 과연 무엇을 위해서 살아가는 인생입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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