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도서 2:1~11>
조선에 선교하기 위해 초기에 들어온 선교사님들이 조선사람들을 보니 음주와 흡연 그리고 도박과 축첩문제가 심각하더랍니다. 특히 조선 사람들에게 있어 술 문제 같은 경우는 평소에 그처럼 착한 사람도 일단 술이 한번 들어가면 완전히 딴 사람으로 변하고, 늘 술에 취해서 일도 제대로 하지 않고, 가정도 돌보지 않고, 도박과 여자 등 여러 가지 복합적인 사회적 문제들을 일으키면서 패가망신한 경우들도 선교사님들이 수차 목격하게 됩니다.
그래서 신앙적으로도 유익하지 않고, 그리스도인으로서의 덕을 세우는데도 좋지 않고, 개인과 가정과 사회에도 나쁜 영향을 미치는 경우가 많았기 때문에 금주, 금연, 도박과 축첩금지…와 같은 신앙규율을 세워 조선 초기의 성도들이 건전한 생활을 할 수 있도록 가르쳐왔습니다.
이런 것들이 왜 한 개인의 인생과 가정과 사회에 있어 해가 되냐면 ‘중독성’이 있기 때문입니다. 거기에 한번 맛을 들이기 시작하면 계속 거기에 끌려가게 되고, 그것의 종이 되고 그리고 그 중독적인 쾌락의 끝을 향해 계속 나가는 겁니다. 거기에 집착하게 되니깐 개인의 삶도, 가정도, 사회적 역할도 소홀해 질 수 밖에 없는 겁니다. 때문에 이것이 더 심해지게 되면 한 개인의 인생을 망칠 수도 있고, 가정이 파괴되기도 하고, 그 한 사람 때문에 사회에 해악을 끼칠 수도 있게 되는 겁니다.
그래서 쾌락의 끝은 우리에게 허무함과 절망감 그리고 죄책감만을 안겨 줄 뿐입니다. 그것을 깨닫고 하루라도 빨리 그 생활을 청산하고 주님께로 돌아온다면 그 사람은 다시 복된 제2의 인생을 시작할 수 있을 겁니다. 그러나 그 쾌락의 끝을 향해 폭주 기관차처럼 가는 이들에게는 몰락과 멸망만이 기다리고 있을 것입니다.
솔로몬은 전무후무한 지혜를 소유한 사람이었습니다. 하지만 끊임없이 그 지혜 그 이상의 지혜를 계속 탐구하고 연구하고 실험하기도 했습니다.
1절을 보시면,
“나는 내 마음에 이르기를 자, 내가 시험 삼아 너를 즐겁게 하리니 너는 낙을 누리라 하였으나 보라 이것도 헛되도다”
인생 속에서 경험할 수 있는 여러 가지 쾌락적인 일들이 있는데, 그것으로 실험을 해보기로 했습니다. 그래서 그 쾌락의 끝에 가면 과연 정말 만족스러운 지, 행복한지, 어떤지를 실험했습니다. 3절부터 솔로몬의 여러 가지 실험들이 나타나게 되는데,
그래서 3절(쉬운성경)을 보시면,
“이번에는, 내 마음으로는 여전히 지혜를 찾으면서 술을 잔뜩 마셔 보기로 했다. 나는 사람이 하늘 아래서 잠시 사는 동안 무엇이 정말 보람된 일인지를 알아보기 원했던 것이다”
사람들이 술을 마시면 웃고 떠들고 즐거워하고 행복해 하는 것 같아 보였습니다. 솔로몬의 마음에 ‘과연 저것이 저들에게 진정한 행복일까?’를 고민하게 된 겁니다. 그래서 본인이 실험해 보기로 했다는 겁니다. 그리고 그것이 정말 인생을 살면서 보람된 일인지를 찾아보기로 했다는 겁니다.
두 번째 실험의 종류는 4절부터 10절까지의 내용 중에 여러 가지 사업을 통한 큰 성취감을 경험해 보기로 한 겁니다. 솔로몬이 왕의 권력으로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해 본 겁니다.
-(4절) 자신을 위해 큰 집들을 지어보고
-(4,5절) 아름다운 포도원와 과수원을 만들고
-(6절) 큰 숲과 연못을 만들기도 했고
-(7절) 남녀 노비들을 사고팔고 거느려 보기도 했고
-(7절) 수많은 소와 양떼를 늘려보기도 했고
-(8절) 은금과 수많은 보배를 창고에 쌓아보기도 했고
-(8절) 풍류를 즐기며 처첩들을 많이 두기도 했고
-(9절) 누구보다 큰 성공과 부를 누려보기도 했고
-(10절) 마음에 원하고 즐기기 원하는 것을 모두 해봤다
는 겁니다.
그런데 결론은 11절입니다.
“그 후에 내가 생각해 본즉 내 손으로 한 모든 일과 내가 수고한 모든 것이 다 헛되어 바람을 잡는 것이며 해 아래에서 무익한 것이로다”
우리가 즐길 수 있는 모든 쾌락의 끝은 허무함과 절망감 뿐입니다. 또한 우리 인간은 본성적으로 그런 삶을 살게 될 때 죄책감까지 느끼게 됩니다. 왜냐하면 이 세상의 모든 것들은 지음 받은 목적대로 존재하고 살고 있는데, 하나님의 형상으로 가장 존귀하게 지음 받은 우리가 쾌락에 치우쳐 인생을 허비했기 때문입니다. 연필 한 자루도 자기가 지음 받은 목적대로 쓰임 받고, 자동차도 엔진이 멈추고 폐차가 될 때까지 차 주인을 위해 쓰임 받지 않습니까?
A.W.토저 목사님께서
“녹슬어 버려지기보다 쓰임 받아 달아 없어지는 것이 낫다”
라고 말씀하셨는데, 존귀한 형상으로 지음 받은 우리가 바로 그런 삶을 살아야 하지 않겠습니까? 시간과 인생을 낭비하지 마십시오. 오늘도 우리에게 주신 고귀한 인생이 가치 있게 쓰임 받는 하루되시길 축복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