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스마엘(Ishmael)”

<창세기 16:5~16> 

우리나라 19대 대통령을 뽑는 대선이 일주일 앞으로 다가왔는데, 이번 대선에서 후보들의 큰 이슈 중에 하나가 안보에 관한 문제입니다. 특히 안보에 있어 북한의 핵문제와 고고도미사일방어(사드 : THAAD)를 어떻게 보느냐? 가 중요한 쟁점 중에 하나입니다.

그런데 사드 문제는 시기와 정세의 변화에 따라 후보들이 오락가락 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사드 배치에 대해서 무조건 반대 입장에 서 있었던 후보가 최근 북한이 미사일 실험을 계속하니깐 다시 찬성 입장으로 돌아서거나, 아니면 차기 정부에서 해야 한다는 입장을 말하기도 했습니다. 또 사드 배치로 인해서 중국의 경제보복 문제가 심각해 지고 또는 미국 트럼프 대통령의 ‘한국이 사드 비용을 지불해야 할 것이다’라는 ‘사드청구서’ 발언이 터지면서 주장이 흔들리는 보수진영의 후보들도 있는 거 같습니다.

이처럼 어떤 것에 대한 확신이 없으면 그 동안 강하게 주장하던 것들도 흔들릴 수밖에 없는 겁니다. 어제 창세기16:1~4절 말씀을 나눌 때 ‘믿음의 방법을 고집하라’고 했는데, 하나님 말씀에 대한 확신이 없으니깐 아브라함과 사라가 하갈을 첩으로 들여 자식을 낳으려고 했던 겁니다. 그 말씀에 대한 확신이 있었다면 믿음의 방법을 떠난 세상적인 방법으로 하려고 했었겠습니까?

또 우리가 하나님 앞에 간절하게 기도하고 기도했는데 응답이 더뎌지면 그 동안 있었던 확신도 점점 약해질 수 있는 겁니다. 기도에 대한 확신이 약해지면 기도에 대한 의욕이 떨어질 수 있는 겁니다. ‘과연 기도로 다 이루어질까? 기도하면 다 되는 것인가? 모든 것이 다 기도로 이루어지는 건 아닌거 같아…’ 이런 식으로 기도에 대한 확신이 떨어지니깐 아브라함과 사라가 했던 실수가 나오는 겁니다.

어쨌든 믿음의 방법을 떠나 세상적인 방법으로 뭔가 이루어 질 거 같은데, 거기에는 부작용이 따라온다고 했습니다. 그 부작용 중에 하나가 아브라함 가정의 불화(不和)로 나타났습니다. 사라는 아브라함을 다그쳤고(5절), 아브라함은 ‘하갈은 당신의 종이니 당신이 하고 싶은 대로 하라’고 하니깐 사라는 여종 하갈을 학대했고 하갈은 사라의 학대를 피해 임신한 몸으로 집을 나와 도망하게 됩니다(6절).

그렇게 하갈이 광야로 도망 나와 울고 있는데 여호와의 사자가 하갈에게 찾아온 겁니다. 9절, 10절입니다.
“여호와의 사자가 그에게 이르되 네 여주인에게로 돌아가서 그 수하에 복종하라. 여호와의 사자가 또 그에게 이르되 내가 네 씨를 크게 번성하여 그 수가 많아 셀 수 없게 하리라”

천사가 하갈에게 다시 여주인 사라의 수하로 돌아가 복종하라고 하셨던 것은 임신한 하갈을 염려하고 배려한 일이기도 하고, 여종의 자식도 결국 아브라함의 자손이기 때문에 아브라함의 가정에서 성장기를 보내게 하시기 위함이기도 할 것입니다.

그러나 더 중요한 목적이 하나 있습니다. 11절을 보시면
“여호와의 사자가 또 그에게 이르되 네가 임신하였은즉 아들을 낳으리니 그 이름을 이스마엘이라 하라 이는 여호와께서 네 고통을 들으셨음이니라”

하갈이 아브라함과 사라의 집으로 다시 돌아가 아들을 낳게 될 텐데, 그 아들의 이름을 ‘이스마엘’이라고 부르라는 겁니다. 성경에서 이름을 미리 지어 준(예언적 의미) 첫 번째 케이스입니다. NIV 영어번역의 Ishmael 옆에 주석이 하나 붙어 있는데, 거기에 보면 ‘Ishmael means God hears’ 즉, 이스마엘이란 이름의 의미가 ‘하나님께서 들으신다’는 뜻인 것입니다. 하갈의 눈물과 고통과 아픔과 기도를 하나님께서 들으신다는 의미가 1차적으로는 있는 겁니다.

그래서 하갈은 13절에 보니깐
“하갈이 자기에게 이르신 여호와의 이름을 나를 살피시는 하나님이라 하였으니 이는 내가 어떻게 여기서 나를 살피시는 하나님을 뵈었는고 함이라”

하갈은 비천한 여종출신이었고, 자기가 원해서 아브라함의 첩이 된 것도 아니고, 본처인 사라가 그렇게 하라고 해서 그렇게 했고, 아들까지 임신하게 된 겁니다. 어쩌면 사라 입장에서는 너무 억울할 수 있었을 거 같습니다. 광야에 나가 그 억울함과 고통 속에 얼마나 통곡을 했겠습니까? 비천한 여종이고, 임신까지 했는데 집에서 쫓겨나와 이제 떠돌이가 되고 어디 가서 빌붙어 지낼 곳도 없는 노숙자 신세가 된 겁니다.

그런데 그 광야 통곡의 자리에서 ‘나를 살펴보고 계시는 하나님’을 만난 겁니다. 내 통곡과 기도를 들으시는 하나님을 만난 겁니다. 그래서 그녀가 낳을 아들의 이름도 ‘하나님께서 들으신다’는 뜻인 ‘이스마엘’이 된 거고, 그 이름도 하나님께서 그렇게 예언적인 이름으로 붙여 주신 겁니다.

그런데 9절에서 하나님께서는 하갈에게 다시 아브라함 가정으로 돌아가 여주인인 사라의 수하에 복종하라고 하셨습니다. 하갈이 다시 아브라함에게로 돌아가야 할 숨겨진 진짜 이유가 여기에 있었던 겁니다.

15절에 보면 하갈이 집에 돌아가 아들을 낳았고, 아브라함은 그 아들의 이름을 이스마엘이라고 했습니다. 이 얘기는 하갈이 집에 돌아가서 광야에서 여호와의 사자를 만난 스토리를 다 아브라함과 사라에게 했다는 얘깁니다. 하나님은 나의 기도를 들으시는 하나님이시라고, 하나님은 나를 살펴보시는 하나님이시라고… 하갈을 통해 아브라함 부부는 큰 충격과 도전을 받게 됩니다. ‘하나님은 저 비천한 여종의 기도와 통곡과 고통을 들으시는 분이시구나…, 하나님은 저 비천한 여종이라 할지라도 살펴보시는 분이시구나…’라는 겁니다.

여기서 마태복음 6장에서 “하물며 너희 일까보냐…”라는 말씀이 스쳐지나갑니다. 우리가 기도했는데 응답이 없고, 하나님께서 내 문제에 대해 잠잠하신 거 같지만, 하나님은 지금도 나를 주목하고 계시고 있고, 내 기도와 내 신음과 내 고통과 내 통곡과 내 눈물을 보시고 들으시고 계시다는 것을 믿으시길 바랍니다. ‘이스마엘’ 그는 나를 듣고 계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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