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도행전 9:32~43>
필리핀은 경제가 한국보다 30~40년 뒤쳐져 있다 보니, 여러 가지 인프라가 갖춰져 있지 않아 불편한 게 많습니다. 도로에는 차와 오토바이와 사람이 뒤엉켜 무질서하고, 사람들이 그렇게 많음에도 사람들이 걸을만한 차도 옆 보도가 제대로 갖춰져 있지 않아 사람들은 보도와 차도를 오르내리며 위험스럽게 다녀야 합니다. 한국에는 여기 저기 많은 공원들이 있지만, 이곳에는 묘지 외에는 거의 공원을 찾아보기 어렵습니다. 공공화장실이 없다보니 여기저기 노상 방뇨하는 사람들을 쉽게 볼 수 있고, 골목으로 다니다보면 불쾌한 냄새로 인해 인상을 쓰게 됩니다.
그런데 구한말 조선을 방문한 서양인들의 눈에 비친 우리의 모습은 더 심각했었습니다. 미국인 의사 선교사였던 ‘셔우드 홀’의 기록에는 “서울은 내가 본 도시 중 가장 더럽고 보잘 것 없다. 거리의 더러움은 말하지 않는 것이 좋겠다.”라고 했습니다. 역시 미국선교사 ‘조지 길모어’는 “세계 많은 나라를 다녀봤지만 지구상에서 이 정도로 더러운 나라는 처음이다.”라고 했고, 의사 선교사였던 ‘알렌’도 “바지는 처음 색깔이 무엇이었는지 짐작조차 할 수 없을 정도로 더럽고 남루했다. 게다가 맨발이 대부분이다.”라고 기록을 남기고 있습니다.
예수전도단을 창단한 ‘로렌 커닝햄’은 1996년 세계 모든 국가를 방문한 최초의 선교사로 인정을 받았습니다. 그 분이 방문한 나라는 238개 주권국을 포함해서 약 400개 이상의 국가를 방문했고, 그 후 한 권의 책을 썼는데 그 책에서 “나라의 흥망이 복음과 성경을 받아들였는지의 여부에 달렸다”라고 말했습니다.
복음(福音)은 ‘좋은 소식(Good News)’입니다. 복음이 없던 구한말 우리의 조선은 가난과 빈곤과 질병에 시달리던 나라였고, 일본에 나라까지 빼앗겼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구한말에 뿌려진 복음의 씨앗이 35년간의 일제강점기와 한국전쟁을 거쳐 수많은 순교자의 피와 함께 성장하고 열매를 맺게 하셨습니다. 비록 전 세계에서 가장 비참하고 비극적인 상황에 처해 있었던 우리 나라였지만, 천막에 십자가만 걸어놓아도 수많은 사람들이 예수를 믿고, 삶이 변화되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반세기 만에 세계11위의 경제대국이 되어 있는 것입니다.
복음에는 능력이 있습니다. 그 복음이 죄에 빠져 있는 영혼을 영적 죽음에서 건져 하나님의 백성이 되게 하는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가난과 질병과 모든 인생의 고통에서도 건져주시는 것입니다.
요한계시록 7:16절에는 천국의 모습이 묘사되어 있는데,
“그들이 다시는 주리지도 아니하며 목마르지도 아니하고 해나 아무 뜨거운 기운에 상하지도 아니하리니”
그 복음으로 인해서 우리는 이 땅에서도 그 천국을 경험하며 천국의 예고편을 맛보며 살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는 사도 베드로가 예루살렘 서북쪽에 위치한 룻다와 욥바 등 지중해안 쪽 마을들을 순회하며 특별히 성도들을 만나 그들을 격려하고, 믿지 않는 사람들을 전도하는 사역 모습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먼저 룻다에 사는 성도들을 방문했을 때, 8년 째 중풍병으로 누워있는 ‘애니아’라는 사람을 만나게 됩니다. 애니아가 언제 예수님을 믿었는지 모르지만, 그가 중풍병을 앓는 중에 예수님을 향한 간절한 기도와 소원을 갖고 있었던 것으로 보여집니다.
베드로는 34절에서
“베드로가 이르되 애니아야 예수 그리스도께서 너를 낫게 하시니 일어나 네 자리를 정돈하라 한대 곧 일어나니”
복음을 믿고 사는 사람들에게 이런 치유의 능력과 은혜가 있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는 겁니다. 육체적인 질병도 치유될 수 있습니다. 마음의 아픔도, 가정의 어려움도, 인생의 여러 가지 문제들로 부터도 치유 받을 수 있는 것입니다. 애니아가 8년간의 중풍병으로 얼마나 고통 스러웠겠습니까? 그런데 베드로를 통해서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으로 치유되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36절부터 42절까지에서 또 다른 지역에서 기적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욥바’라는 해안 마을에는 다비다라는 여성도가 살고 있었는데, 늘 선행을 힘쓰고, 가난한 과부들을 성심으로 돕던 그런 여인이었습니다. 그러나 그가 병들어 죽게 된 겁니다. 사람들은 사도 베드로가 욥바에서 그리 멀지 않은 룻다에 있다는 소문을 듣고, 두 사람을 그리로 보내 ‘지체 말고 와 달라고 간청’하게 됩니다. 베드로가 도착했을 때 다비다는 이미 죽었고, 사람들은 시체를 깨끗이 씻어 나락에 뉘어놓았습니다. 다비다에게 도움을 받은 많은 가난한 사람들이 그녀의 죽음을 슬퍼하고 있었습니다.
40절입니다.
“베드로가 사람을 다 내보내고 무릎을 꿇고 기도하고 돌이켜 시체를 향하여 이르되 다비다야 일어나라 하니 그가 눈을 떠 베드로를 보고 일어나 앉는지라”
예수님께서 죽은 자를 살렸던 사건이 있었는데, 그의 제자인 베드로도 죽은 자를 살리는 놀라운 기적을 행한 것입니다. 이것은 복음 속에 부활의 능력이 있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물론, 우리가 천국에서 다시 살아나고, 언젠가 육체적인 부활에도 참여하게 될 것을 우리는 믿습니다.
그런데 이 땅에서 살아가면서 도저히 안 될 것 같은 상황 속에서도 부활의 복음이 우리의 모든 인생의 문제 속에서 우리를 다시 살리시는 것입니다. 부활의 역사를 경험케 하시는 것입니다. 치유와 부활의 복음을 믿으십시오. 우리 안에, 우리 가정 안에 치유와 부활이 필요한 모든 영역 속에 그 복음은 역사하실 것입니다. 주님은 오늘도 당신을 치유하시고, 다시 일으켜 주실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