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도행전 10:17~33>
미국의 16대 대통령으로 미국 역사상 가장 존경받는 인물인 ‘아브라함 링컨(Abraham Lincoln, 1809 ~ 1865)’의 전기에 보면, 그는 인생 속에 수많은 실패와 역경을 겪어야만 했습니다. 그는 10세 때 사랑하던 어머니를 잃었고, 청년시절 몇 차례에 걸친 사업의 실패와 약혼녀의 갑작스런 사망을 경험해야 했고, 그 이후 신경쇠약으로 정신병원에 입원하기도 했습니다. 또한 정치에 입문해서도 항상 승승장구했던 것은 아니었습니다. 여러 차례, 여러 종류의 선거에 도전했지만 많은 실패를 경험했습니다.
하지만, 그의 인생 속에 고난만 가득했던 것은 아니었습니다. 그는 수많은 실패와 역경을 딛고 50세에 미국의 16대 대통령에 당선되어 남북전쟁을 종식시키고, 흑인노예해방을 이루는 위대한 업적을 남겼던 것입니다.
그가 이런 말을 남겼습니다.
“내가 걷는 길은 험하고 미끄러웠다. 그래서 나는 자꾸만 미끄러져 길바닥 위에 넘어지곤 했다. 그러나 나는 곧 기운을 차리고 내 자신에게 말했다. ‘괜찮아, 길이 약간 미끄럽긴 해도 낭떠러지는 아니야.’”
위대한 대통령 링컨이 있을 수 있었던 것은 그의 생각이 여느 실패자와는 달랐기 때문입니다. 그런 가치와 생각 때문에 실패했을 지라도 다시 일어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사람은 생각이 바뀌지 않으면 그의 인생에는 어떤 변화도 일어날 수 없는 것입니다. 우리의 어리석은 생각을 고집하고 있으면 성령님께서 우리의 인생을 복된 삶으로 이끌어 가실 수 없는 것입니다. 때문에 우리는 우리의 생각을 완전하신 성령님께 복종시켜야 하는 것입니다.
베드로는 특별한 환상을 봤습니다(9~16절). 구약 율법에 의하면 부정하므로 식용을 금한 짐승들이 있는데 하나님께서 그것들을 깨끗하게 하셨으니 베드로에게 그것을 먹으라고 하셨습니다. 평생 유대인으로 살았던 베드로는 절대 그것을 먹을 수 없다고 했지만, 그런 상황이 세 번이나 반복이 되는 겁니다.
기도 후에 베드로는 그 환상이 어떤 의미인지 의아해 하며 있었는데, 때마침 백부장 고넬료가 보낸 사람들이 그가 머물고 있는 집에 찾아왔습니다.
그리고 19절, 20절을 보시면,
“베드로가 그 환상에 대하여 생각할 때에 성령께서 그에게 말씀하시되 두 사람이 너를 찾으니, 일어나 내려가 의심하지 말고 함께 가라 내가 그들을 보내었느니라 하시니”
환상 이후에 성령께서 베드로의 마음에 다시 감동을 주셨습니다. 그래서 베드로가 내려가 만나보니, 로마의 군대장교인 백부장 고넬료라는 사람이 베드로를 초청해서 말씀을 듣길 원한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이튿날 베드로는 가이사랴의 고넬료에 집에 가보니 로마인 고넬료는 이미 자기 집안 식구들 뿐만 아니라 그의 친척과 가까운 친구들까지 그 집에 모아서 베드로를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고넬료는 베드로가 들어올 때 그의 발 앞에 엎드려 절을 하며 맞게 됩니다.
그리고 베드로가 이런 말을 합니다. 28절, 29절에서
“이르되 유대인으로서 이방인과 교제하며 가까이 하는 것이 위법인 줄은 너희도 알거니와 하나님께서 내게 지시하사 아무도 속되다 하거나 깨끗하지 않다 하지 말라 하시기로, 부름을 사양하지 아니하고 왔노라 묻노니 무슨 일로 나를 불렀느냐”
오늘 본문의 내용을 우리는 익히 잘 알고 있어서 그냥 대수롭지 않게 넘길 수 있을 겁니다. 하지만, 당시의 문화적 상황을 고려해 보면 고넬료 입장에서도, 베드로 입장에서도 쉽지 않은 상황인 겁니다.
왜냐하면 고넬료는 로마의 군대 장교였습니다. 사도행전 21장 이하에는 바울이 예루살렘에 방문하여 백부장, 천부장에 의해 체포되는 장면이 나옵니다. 거기서 그들이 바울 사도를 심문하는데 그 과정에서 바울이 태어나면서부터 로마의 시민권을 갖고 있는 사람인 것을 알고 두려워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그만큼 로마 시민권 그것 자체로 대단했던 힘을 갖고 있었던 겁니다.
고넬료는 지배국인 로마의 군대 장교였고, 베드로는 한낱 식민지 그것도 갈리리의 천한 어부 출신일 뿐이었습니다. 신분사회였던 당시에 로마의 백부장이 베드로의 발 앞에 엎드려 절한다는 것은 절대 있을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그런데 그것이 가능했던 것은 하나님을 경외했던 고넬료는 베드로를 하나님께서 보내신 메신저로 믿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철저한 계급과 신분 사회 속에서 고넬료의 행동은 성령님께 자신의 생각을 굴복시킨 것이었습니다.
베드로 입장에서도 유대인으로서 이방인과 교제하는 것을 죄악시 여기던 사회에서 주변의 시선을 개의치 않고 이방인 고넬료의 가정을 방문했던 것 역시 그 모든 과정 속에 일하고 말씀하시고 계신 성령님께 자신의 생각을 복종시켰던 것입니다.
우리의 생각과 뜻을 내려놓고 하나님의 말씀과 성령님의 인도에 복종하는 것이 믿음의 삶인 것입니다. 주님의 뜻과 내 계획은 맞지 않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완전하신 성령님께 내 생각을 복종시키는 것이 내 인생 속에 가장 복된 하나님의 뜻이 이뤄지는 길인 것입니다. 요즘 내 생각과 내 고집을 꺽지 못하고 사는 것은 없습니까? 오늘 잠잠히 그 성령님께 우리의 마음을 기울여 그 분께 우리의 생각을 복종시키는 하루되시길 축복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