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준이 무엇인가?”

<디모데후서 3:10~17> 

‘기복신앙(祈福信仰)’이란 것이 있습니다. 한자로는 ‘빌 기(祈)’자에 ‘복 복(福)’자를 쓰고 있어서, ‘복을 비는 신앙’이라 할 수 있습니다. 연약한 인간이 초자연적 존재인 신에게 복을 비는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한 거 아니겠습니까? 기복신앙적인 것은 우리 기독교를 포함해서 모든 종교와 신앙 속에 다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 기독교에서 기복신앙은 우리의 믿음의 본질은 아닙니다. 복을 비는 요소는 있지만, 그것이 우리의 믿음의 본질이라고 할 수는 없는 것입니다.

기복신앙의 특징이 있습니다. 그것은 그 종교의 교리든, 신이든, 그것이 무엇이든 그 모든 것을 자기 유익한대로 자기에게 맞추는 겁니다. 그러니깐 자기의 목적(혹은 복)을 위해 종교도 이용하고, 신도 이용하고, 그 종교의 교리도 이용하는 것을 말합니다. 철저히 자기가 중심이 되는 겁니다.

그러나 진정한 기독교 신앙의 특징은 내가 중심이 되지 않고 하나님과 그 분의 말씀이 중심이 됩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내게 맞추는 게 아니라, 나를 하나님과 그 분의 말씀에 맞춰가는 겁니다. 나보다 더 높은 기준에 나를 맞추다 보니 내 삶에 변화가 나타나는 겁니다.

반면 기복신앙은 철저히 자기중심적(이기심과 정욕)이기 때문에 삶의 변화는 전혀 따르지 않게 되는 겁니다. 그래서 교회가 자기를 위해서 뭔가를 해 줘야 하고, 하나님이 자기를 위해 뭔가를 해 줘야 할 것만 생각하는 겁니다. 그리고 그렇게 되지 않을 경우 시험에 빠지는 경우가 많습니다.

어제 나눴던 디모데후서 3:1~9절 말씀은 영지주의 이단들의 지적교만에 대해서 말씀하시고 있습니다. 기준이 자기의 깨달음과 지식에 있는 겁니다. 그래서 2절에서 “사람들이 자기를 사랑하며 돈을 사랑하며 자랑하며 교만하며 비방하며 부모를 거역하며 감사하지 아니하며 거룩하지 아니하며…”와 같은 삶의 태도들이 나타나는 겁니다.

그래서 14절부터 17절을 보시면,
“그러나 너는 배우고 확신한 일에 거하라 너는 네가 누구에게서 배운 것을 알며, 또 어려서부터 성경을 알았나니 성경은 능히 너로 하여금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에 이르는 지혜가 있게 하느니라.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으로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하니, 이는 하나님의 사람으로 온전하게 하며 모든 선한 일을 행할 능력을 갖추게 하려 함이라”

바울은 디모데에게 어머니와 외할머니로부터 물려받은 신앙의 유산에 따라 성경을 가까이 하고, 그 성경 중심으로 살아가야 함을 권면하고 있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15절 말씀과 같이 “(성경에는) 구원에 이르는 지혜가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16절에서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이라 말씀하시고 있는데, 인간의 지식과 철학이 아니라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인 것입니다. 인간의 지식은 아무리 탁월하고 뛰어나다 하더라도 7절 말씀과 같이 “항상 배우나 진리의 지식에 이를 수 없기 때문”인 것입니다. 한계가 있는 겁니다. 인간 중에 뛰어난 지식이 될 수는 있을 겁니다. 그러나 거기에 구원에 이르는 지혜는 없습니다. 온전한 진리에는 이를 수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디모데에게 이 세상의 철학과 영지주의 이단과 같은 것들이 교회와 성도들을 미혹하지만, 철저하게 성경을 기준 삼고, 성경을 가까이하고, 성경 안에 거할 것을 권면하고 있는 것입니다.

10절에서 11절을 보시면,
“나의 교훈과 행실과 의향과 믿음과 오래 참음과 사랑과 인내와, 박해를 받음과 고난과 또한 안디옥과 이고니온과 루스드라에서 당한 일과 어떠한 박해를 받은 것을 네가 과연 보고 알았거니와 주께서 이 모든 것 가운데서 나를 건지셨느니라”

바울이 사역할 때 디모데가 동역했었습니다. 때문에 복음 전파와 사역 중에 여러 가지 방해들과 박해와 고난이 있었던 것을 디모데 역시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11절 하반절에서 “주께서 이 모든 것 가운데서 나를 건지셨느니라.”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하나님 말씀을 기준으로 삼고 있는 바울은 흔들리지 않았던 것입니다. 성경에 뿌리를 깊게 내리고 있었던, 하나님의 말씀을 기준으로 삼고 사역하며 살았던 바울을 그 어떠한 시련과 고난도 흔들 수 없었던 것입니다.

마태복음 13장에 ‘씨의 비유(네 가지 밭의 비유)’라는 것이 나오는데, 여기서 씨는 ‘천국 말씀, 복음, 하나님의 말씀’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같은 장 20절, 21절에서 “돌밭에 뿌려졌다는 것은 말씀을 듣고 즉시 기쁨으로 받되, 그 속에 뿌리가 없어 잠시 견디다가 말씀으로 말미암아 환난이나 박해가 일어날 때에는 곧 넘어지는 자요” 라고 되어 있습니다. 성경에 기준을 두지 않고, 말씀에 기준을 두지 않고 사는 삶의 모습을 보여주는 비유라 할 수 있습니다. 작은 시련에도 흔들리는 이유는 그 속에 말씀이 없어서, 말씀이 그 마음에 밭에 깊게 뿌리를 내리지 못해서인 것입니다.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성경을 참 모릅니다. 교회는 다니지만 하나님의 말씀에는 무지한 것을 보게 됩니다. 그래서 어떤 사람은 유투브 동영상이 기준이고, 어떤 영향력 있는 사람의 강연이나 말이 기준이 되고, 혹은 자기의 경험이나 생각이 기준이 되기도 합니다.

베드로전서 1:24절, 25절에서
“모든 육체는 풀과 같고 그 모든 영광은 풀의 꽃과 같으니 풀은 마르고 꽃은 떨어지되, 오직 주의 말씀은 세세토록 있도다”

이 세상의 그 어떤 것도 내 인생의 진정한 기준이 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영원히 흔들리지 않는, 변하지 않는 하나님의 말씀을 기준으로 삼는 이들은 흔들리지 않는 견고한 인생을 건축해 나가게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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