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야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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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도행전 7:37~53>
이스라엘 민족의 역사는 곧 우리의 인생과 같다 할 수 있습니다. 이스라엘이라는 이름을 가진 아브라함의 손자 야 곱이 가나안 땅의 기근을 피해 가족들을 데리고 애굽(이집 트)에 내려가 정착해 살다 보니 여러 대에 걸쳐 그곳에 살 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애굽인들 입장에서 이스라엘의 후손 들은 이방인들일 뿐이었습니다.
그래서 애굽 왕은 그들에게 계속해서 호의를 베풀 이유 가 없었기에 자신들을 위한 노예로 삼게 됩니다. 야곱의 후 손들인 이스라엘 사람들은 그 땅에서 수백 년간 노동력을 착취당하고, 인권이 유린되는 가축 이하의 취급받으며 고통 속에 살았던 것입니다.
그들은 고통 속에 부르짖었고,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불 쌍히 여기시고 모세를 통해 출애굽 시키신 것입니다. 그리 고 그들은 40년간 광야에서 생활하며 가나안 땅을 바라보며 살아가게 되는 겁니다. 그리고 광야생활 40년 만에 이스라엘 백성들은 약속의 땅 가나안에 입성하게 되는 겁니다.
이런 역사를 간단하게 도표로 보여드리자면, [애굽의 노예] – [광야 40년] – [가나안 입성] 이렇게 3단계로 분류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것의 영 적인 의미가 있습니다.
요한복음 8:34절에 의하면 “죄를범하는 자마다 죄의 종이라”하였습니다. 그래서 이스라엘 백성들의 애굽에서의 노예생활은 곧 우리 인간들이 ‘죄의 노예’ 상태에 있는 것을 말합니다.
그리고 광야 40년 생활은 우리가 죄로부터 구원 받 아 살아가고 있는 인생을 말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가나안에 입성한 것은 우리가 장차 갈 ‘천국’ 을 상징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구원 받아 출애굽하여 광야생활을 하고 있었던 것처럼, 우리는 지금 여기에 있는 겁니 다. 그래서 우리의 인생을 ‘광야와 같다’라고 할 수 있는 것 입니다. 광야 또는 사막은 길이 없습니다. 물도 없고 여러 가지의 결핍을 경험하면서 살아가야 합니다. 또한 추위와 더위가 있고, 전갈과 사막의 독사와 같은 맹독류의 위험이 항상 도사리고 있는 곳이기도 합니다.
우리가 인생을 살아가면서 어떻게 살아야 할지 모르는 게 당연합니다. 청소년들이 앞으로 무엇을 공부하고, 어떤 일을 해야 할지 잘 모르는 게 당연합니다. 부모가 되었다고 해도 자녀를 어떻게 키우는 게 훌륭하게 키우는 것인지, 부모로서 어떻게 해야 좋은 지 잘 모르는 게 어쩌면 당연한 겁니다. 왜냐하면 광야와 사막에는 원래 길이 없습니다. 여 러 가지 결핍과 어려움들이 항상 존재합니다. 그렇다면 우 리는 이 광야와 같은 인생을 어떻게 살아야 할까요?
1. 말씀의 인도를 받으라
이스라엘 백성들이 출애굽하여 광야생활을 시작하면서 애굽에서의 생활과 달라진 것이 있다면 그것은 그들이 하나 님의 말씀의 인도를 받기 시작했다는 겁니다.
38절 말씀을 보시면,
“시내 산에서 말하던 그 천사와 우리 조상들과 함께 광야 교회에 있었고 또 살아 있는 말씀을 받아 우리에게 주던 자가 이 사람이라”
모세가 모세5경(창세기, 출애굽기, 레위기, 민수기, 신명 기)을 기록했을 때가 B.C.1446~1406년경입니다. 지금부터 약 3500년 전이란 얘기입니다. 성경의 첫 번째 책인 창세기 가 그 때 기록된 것이고, 그 이전에는 하나님의 말씀인 성 경이 없었던 것입니다.
물론 이스라엘 민족의 시조라 할 수 있는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 같은 경우 중간 중간 천사를 통해, 꿈과 환상을 통해, 특별한 음성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받았 었습니다.
그런데 이제 하나님께서 모세라는 사람을 선택하셨고, 그에게 하나님의 살아있는 말씀을 맡기셨고, 모세는 그 살 아 있는 말씀을 받아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전해줬다는 것입 니다. 그 살아있는 말씀을 모세는 성경의 기록으로 남기게 된 것이고, 우리 역시 그 살아 있는 말씀을 지금 이렇게 보 고 있는 것입니다.
이 살아있는 말씀을 쉬운 성경에서는 ‘생명의 말씀’이라 고 번역하고 있는데, 이 말씀이 이끄시는 대로 살아가야지 생명의 길, 축복의 길, 은혜의 길로 인도함을 받는다는 것 입니다.
우리가 어떻게 살아가야 할지, 어떤 길로 가야 할지, 어 떤 선택을 해야 할지, 무엇을 해야 할지… 모를 때가 있습 니다. 길이 없는 광야와 같은 인생을 살아가고 있기 때문에 그런 고민과 갈등이 있는 게 당연한 겁니다.
그런데 이미 우리에게 생명의 길을 보여주시고 있는 것 입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말씀이 우리 인생의 진정한 매뉴얼인 것입니다. 그 말씀대로만 살면 승리할 수 있습니다.
여러분이 어떻게 해야 할지 잘 모를 때 말씀의 인도를 받으시면 됩니다. 설교 말씀을 듣는 중에 그 길이 보여 지 기 시작할 것입니다. 성경을 읽고 묵상하는 중에 그 해답이 보일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시편 119:105절에서
“주의 말씀은 내 발에 등이요 내 길에 빛이니이다”
내 인생의 앞길이 막막하고 캄캄한데, 우리 학생들 앞으 로 무엇을 해야 할지, 어떤 것을 전공해야 할지 모를 수 있 을 겁니다. 우리 성도님들 앞으로 이 세부에서 내가 무엇을 해야 할지… 막막할 수 있을 겁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말씀 이 우리의 길을 열어주실 것입니다. 말씀을 듣거나, 읽거나, 묵상하거나… 할 때 그 말씀으로 인도함을 받기 시작할 것 입니다.
여러분이 말씀을 들을 때 그냥 흘려듣지 마십시오. 어떤 말씀이 여러분의 마음에 뜨겁게 와 닿는다면 그 말씀이 여 러분의 약속의 말씀으로 하나님께서 여러분에게 주시고 있 는 겁니다. 그러면
그 말씀을 붙드는 겁니다. 그리고 그 말 씀을 계속 묵상하고 또 묵상하는 겁니다. 그 말씀을 의심치 않는 것입니다. 그러면 길이 없는 광야와 같은 상황에 있다 할지라도 그 광야 한 가운데로 길을 내시는 하나님을 만나 시게 될 것입니다.
그런데 39절을 보시면,
“우리 조상들이 모세에게 복종하지 아니하고자 하여 거절하 며 그 마음이 도리어 애굽으로 향하여”
이스라엘 백성들은 모세에게 복종하지 않습니다. 그를 통해 전해지는 하나님의 말씀을 거절하고, 그들이 과거에 노예로 살았었던 애굽의 발전된 문명을 그리워합니다.
요즘 예수 믿는 사람들조차 하나님의 말씀보다 다른 것 들을 더 신뢰하고, 더 추구하는 모습들을 보게 됩니다. 하나님의 말씀보다 유명한 TV 강사의 강연을 더 즐겨보고, 유명한 심리학자나, 사회학자나, 교수의 말을 더 신뢰하기도 합니다.
하나님의 살아있는 말씀의 권위와 능력을 믿는다면 우리 는 더욱 더 하나님의 말씀 앞에 나아와야 하는 것입니다. 말씀보다 정확하고, 말씀보다 더 권위 있으며, 말씀보다 더 지혜로운 것은 없습니다. 그런 유명한 사람들의 말이 일반 적으로 도움을 줄 수 있지만, 그 말이 진리는 아닙니다. 괜히 그런 말을 진리처럼 믿지 마십시오. 그럴 수도 있고 아 닐 수도 있는 겁니다. 진리는 오직 하나님의 말씀뿐입니다.
여러분이 하나님의 말씀보다 세상의 말 잘하는 강사의 말을 더 신뢰하고, 심리학자의 말을 더 신뢰한다면 그냥 그 렇게 사십시오. 그러나 광야와 같은 우리의 인생의 길을 인 도하시는 것은 살아있는 하나님의 말씀인 것입니다. 일반적 인 진리라는 것은 시대에 따라 바뀔 수도 있고, 사람에 따 라 달라질 수도 있고, 상황에 따라 달라질 수도 있는 것입니다.
고린도전서 6:2절, 3절 말씀에서
“성도가 세상을 판단할 것을 너희가 알지 못하느냐 세상도 너희에게 판단을 받겠거든 지극히 작은 일 판단하기를 감당하지 못하겠느냐. 우리가 천사를 판단할 것을 너희가 알지 못하느냐 그러하거든 하물며 세상 일이랴”
교회에서 어떤 분쟁이 있을 때 그걸 가지고 세상 법정에 가서 세상 사람들에게 판단 받는 모습을 보면서 바울 사도는 ‘성도가 세상을 판단하게 되고, 우리가 천사를 판단하게 될 것인데, 그런 작은 일 조차도 판단하지 못하느냐?’ 라고 말하 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받은 사람들인 우리 그 리스도인들은 세상을 판단할 만한 지혜가 이미 있다는 것입 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말씀보다 일반적인 진리가 마치 대 단한 어떤 진리인 마냥 그것에 매달리고, 그걸 신뢰하는 모 습들은 답답한 모습인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보다 여러분의 이성을 더 신뢰하고, 세상 의 지혜를 더 신뢰하는 것은 또 다른 우상숭배인 것입니다. 하나님 말씀의 권위 보다 그런 것들을 더 신뢰하는 사람은 하나님을 안 믿는 사람인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여러분의 인생을 이끌어 가심을 믿으십 시오. 길도 없고, 표지판도 없었던 이스라엘 백성들의 광야 생활 속에 하나님은 그들의 길의 빛과 등불이 되어 주셨습 니다. 그런데 말씀도 안 듣고, 성경도 안 보고, QT도 안 하 고, 성경공부도 안 하고… 그렇게 살면 말씀의 인도가 무엇 인지는 영원히 모르실 겁니다. 그러나 말씀을 사모하시고 가까이 하는 자들이 하나님의 인도도 경험하는 것입니다.
시편 119:165절 말씀에
“주의 법을 사랑하는 자에게는 큰 평안이 있으니 그들에게 장애물이 없으리이다”
하나님의 말씀을 사랑하고 가까이하는 이들에게 평안이 임하고, 장애물이 사라지는 역사가 일어나는 것입니다.
2. 내려놔야 역사가 시작된다
모세가 이스라엘 백성들을 인도할 하나님의 말씀을 받기 위해서 시내 산에 40일간 올라가 있었습니다. 열흘, 이십일, 삼십일… 기다려도 내려오지 않자 백성들이 모세의 형인 아 론에게 찾아왔습니다.
40절입니다.
“아론더러 이르되 우리를 인도할 신들을 우리를 위하여 만 들라 애굽 땅에서 우리를 인도하던 이 모세는 어떻게 되었는지 알지 못하노라 하고”
백성들은 아론에게 “우리를 인도할 신들을 우리를 위하여 만들라”고 요구합니다. 광야에서 하나님의 말씀의 인도를 받 기를 거절하고, 그들은 자신들을 인도할 신을 만들기로 한 겁니다.
그리고 41절을 보시면,
“그때에 그들이 송아지를 만들어 그 우상 앞에 제사하며 자기 손으로 만든 것을 기뻐하더니”
아론은 백성들로부터 금을 모아서 금송아지를 만들어 그 것이 그들을 애굽에서 인도한 신이라고 말합니다. 백성들은 자기 손으로 만든 것을 기뻐하며 그 앞에서 뛰며 즐거워했 던 것을 우리가 출애굽기를 통해 볼 수 있습니다.
사람들은 하나님조차도 자기가 원하는 대로 해 주는 신 이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하나님은 돈도 많이 벌게 해 줘 야 하고, 병도 걸리지 않게 해 줘야 하고, 재앙도 막아줘야 하고, 모든 일이 형통케 해 줘야 하고, 나를 성공하게 해 줘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이런 기준이 맞지 않는 하나님은 진정한 신이 아 니라고 생각하는 겁니다. 이런 신이 아니면 안 믿는 겁니 다. 그리고 자기 마음에 딱 맞는 그런 신을 만들어 섬기기 시작하는 겁니다.
누누이 강조하지만 일반 종교와 기독교 신앙의 차이가 이런 겁니다. 일반 종교는 오직 기복신앙적인 요소가 다분 합니다. 그래서 신은 내가 원하는 대로 해 주는 존재고, 종 교는 내가 원하는 것을 얻기 위해 갖고 있는 겁니다. 중심이 항상 자기 자신입니다. 이것은 내가 중심이 되기 때문에 나의 삶의 변화하고는 큰 관계가 없습니다.
그러나 기독교 신앙은 내가 기준이 아니고, 하나님이 기 준이 되는 겁니다. 성경 말씀이 기준이 되는 겁니다. 그래 서 하나님을 끌어다가 나에게 맞추는 게 아니라, 나를 끌어 다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에 무릎을 꿇리고, 하나님의 말씀을 나의 기준으로 삼는 겁니다. 기준에 안 맞으면 바꿔야 하고, 변해야 하는 겁니다. 그래서 우리 기독교 신앙은 깊어지면 깊어질수록 삶이 변하게 되어 있는 것입니다.
왜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출애굽 시켜서 곧바로 젖과 꿀이 흐르는 풍성한 가나안 땅으로 인도하지 않으시고, 광야로 인도하셔서 그리 고생케 하셨을까요? 하나님은 능력이 충분하셔서 얼마든지 곧바로 가나안 땅으로 인도해 주실 수도 있는 거 아니겠습니까?
신명기 8:2절을 보시면,
“네하나님 여호와께서 이 사십 년 동안에 네게 광야 길을 걷게 하신 것을 기억하라 이는 너를 낮추시며 너를 시험하사 네 마음이 어떠한지 그 명령을 지키는지 지키지 않는지 알려 하심이라”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굳이 광야로 인도하신 이유는 그들을 낮추시고, 하나님의 말씀을 지키는 훈련을 시 키시기 위해서였습니다.
서론에서 말씀드렸다시피 광야는 여러 가지 결핍과 위험 과 어려움이 항상 있는 곳입니다. 사람이 너무 풍족한 가운 데 있으면 절대 하나님을 찾지 않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 이 출애굽하여 곧바로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으로 들어갔 다면 그들은 결코 하나님을 찾지 않았을 겁니다.
그러나 사람은 결핍과 어려움과 시련과 아픔이 있으면 저절로 하나님을 찾게 되어 있는 겁니다. 풍요로울 때는 내 가 항상 중심이 되는데, 사람이 절박해지면 하나님을 찾고, 하나님 중심으로 바뀌는 겁니다.
그래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광야로 인도해 주신 겁니다. 그 전에 내가 의지하고 믿고 있었던 모든 것들을 다 내려놓 게 하려는 겁니다.
우리 집사님이 얼마 전 한국에 가셔서 작은 국민차 모닝 을 타고 한국에서 즐겁게 일을 보고 계셨답니다. 그러다 어 떤 주차장에 차를 대려고 하는데, 외부에 편히 댈 수 있는 곳에 못 대게하고 주차 요원이 굳이 좁고 복잡한 곳에 주차 하도록 하더랍니다. 그런데 기가 막힌 거는 외제차가 오니 깐 그 넓고 편한 자리에 주차하게 해 주더랍니다.
우리 집사님이 자신이 많이 변화되었다고 생각했었는데, 갑자기 마음속에서 어떤 비교의식이 확 느껴지더랍니다. 한 국 사회가 유독 그런 비교 문화가 좀 강합니다. 한국에 가 니깐 그런 문화 속에 동요되고 있었던 겁니다. 그러다보니 집사님이 빨리 세부에 오고 싶으셨답니다.
여러분이 한국에서 사업도 잘 하고, 잘 나가셨었는데 뭐 하러 이 광야와 같은 세부에 오셨겠습니까? 사람마다 다르 겠지만 그 풍요함 속에 계속 젖어 있었다면 여러분이 하나님을 진실하게 찾지 않았을 수도 있었을 겁니다. 하나님은 여러분을 광야로 이끄셨습니다. 왜냐하면 이 광야에서는 하 나님을 찾지 않을 수가 없는 겁니다.
우리교회에 세부에 오셔서 믿음을 회복하시거나, 하나님 을 만나시거나, 은혜 받고 변화되시거나, 처음 예수를 믿으 시거나… 이런 분들이 의외로 많습니다. 저도 그런 것에 대 해 늘 하나님 앞에 감사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 이유가 있습니다. 이민사회 자체가 누구하나 의지할 사람도 마땅치 않고, 재정적인 것도 풍요롭지 않고, 할 일도, 갈 때도 많지 않은 겁니다. 그러니깐 이런 상황에 계속 있다 보면 우울증까지는 아니어도 그냥 무기력하고 사 람이 우울해 지고 그럴 수 있는 겁니다. 그런 중에 교회를 나오게 되었는데, 너무 좋은 겁니다. 예배도 좋고, 교회도 좋고, 성도들도 좋고… 왜 빨리 교회를 안 나왔을까? 라는 생각도 들고, 그러다 보니 은혜 받고 삶이 변화되기 시작하 는 겁니다.
우리 교회에 오신 분들 중에는 한국에서 사업 잘 하시 고, 크게 성공도 해 보신 분들도 꽤 있으십니다. 그 때 저 를 좀 만나고, 우리교회에 등록도 하고, 헌금도 많이 하고, 열심히 섬겼다면 얼마나 좋았겠습니까? 그런데 우리 중에는 과거와 비교할 수 없이 적은 수입으로 생활해야 하는 성도 들도 계시고, 갑자기 직업을 잃은 분도 계시고, 앞으로 뭘 해야 할지 막막한 분들도 계십니다.
제가 얼마 전 그런 생각을 했습니다. ‘왜 성도들이 잘 나 갈 때 우리 교회 등록하지 않고, 힘들고 어려울 때 신앙을 갖 게 되었을까?…’ 그런데 이게 참 감사한 제목이었습니다. 여 러분 사회에서 크게 성공하고 한 마디로 잘 나가는 사람이 그 상태로 우리교회 와 보세요. 물론 다 그런 건 아니겠지 만, 헌금 좀 한다고 교회에서 주인 노릇하려 할 겁니다. 목 사를 월급쟁이로 만들어 버리고, 겸손과 사랑으로 성도들을 섬길 생각은 하지 않고 대접 받을 생각만 할 겁니다.
그런데 인생의 광야를 경험한 사람은 압니다. 나중에 축 복을 받아도 그것이 내가 잘나서가 아니라, 그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은혜였음을 고백하는 겁니다. 하나님께서 인생의 광야를 통해서 모든 것을 내려놓게 하셨던 겁니다. 그리고 하나님만 의지하고, 하나님만 바라보고, 모든 삶의 목적과 이유가 하나님 중심, 성경 중심, 예수 중심, 성령 중심, 믿 음 중심, 교회 중심으로 바뀌게 하셨던 것입니다.
그래서 저는 앞으로가 더 기대가 됩니다. 여러분 중에 지금 인생의 광야를 걷고 있다고 낙심하거나 절망할 필요 없습니다. 내 욕심도, 자아도, 교만도… 모두 내려놓으십시 오. 이제부터 하나님께서 여러분을 통해 일하실 것입니다. 여러분의 내면의 그릇을 광야를 통해 준비하셔서, 이제 하 나님께서 원하시는 가장 알맞은 그릇으로 사용하실 것입니 다. 그렇게 우리를 내려놓기 시작할 때 비로소 하나님께서 일하시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3. 마음과 귀에 할례를 받으라
인생의 광야를 통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선물은 ‘낮아짐과 겸손’인 것입니다. 그런데 정신을 못 차리고 여전 히 교만하고, 거만하고, 자기를 의지하고, 자기를 자랑하고, 고집이 센 사람이 있습니다. 그런 사람은 더 망해봐야 겸손 해 질까요? 더 큰 환란을 겪어봐야 낮아질까요? 하나님께서 우리를 인생의 광야를 걷게 하셨다면 우리는 마음과 귀에 할례를 받아야 하는 겁니다. 신약적인 표현으로 마음과 귀가 거듭나야 하는 것입니다.
51절 말씀을 보시면,
“목이곧고 마음과 귀에 할례를 받지 못한 사람들아 너희도 너희 조상과 같이 항상 성령을 거스르는도다”
스테반 집사님의 설교 마지막 부분의 이 말씀은 수많은 선지자들의 예언과 하나님의 말씀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유대인들을 예수 그리스도를 거절하고 오히려 그 분을 십자 가에 못 박아 죽였던 것입니다.
스테반 집사님은 그들을 향해서 ‘목이 곧고 마음과 귀에 할례를 받지 못한 사람들’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목이 곧다 는 것은 교만한 것을 말합니다. 마음과 귀에 할례를 받지 못했다는 것은 마음과 귀가 거듭나지 않은 것과 같은 겁니다. 여전히 변화되지 않은 겁니다. 좋은 마음이 아니고, 겸 손한 귀가 아닌 것입니다.
목이 곧고 마음과 귀에 할례를 받지 못한 사람들은 과거 광야 40년 생활 중에 모두 죽었습니다. 그들은 가나안의 축 복을 경험하지 못했습니다. 오늘 스테반 집사님의 설교를 듣고 있던 유대인들 역시 그 가나안(천국)의 축복과 약속을 받지 못하는 것입니다.
광야는 길이 없는 곳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말씀을 의 지하지 않고,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고 여전히 자기 자신의 능력과 실력과 지식과 경험만을 의지하고, 자기가 어떻게 해 보겠다고 이러 저리 쫓아다니는 사람은 마치 사막에서 신기루를 좇는 사람과 같은 것입니다. “내가 저 곳에 가 닿 기만 하면, 내게 필요한 물을 다 얻을 수 있겠지. 나는 저 오아 시스에서 실컷 물을 마시고 충분히 쉰 다음, 다시 여행을 계속 할 수 있을 거야 『사막의 샘터 中 – 로이드 존스』.” 그러나 그것은 신기 루였던 겁니다. 진짜가 아니었던 겁니다. 마음과 귀에 할례 를 받은 사람은 더 이상 신기루를 쫓지 않습니다. 그들은 광야에서 주의 세미한 음성을 듣고 따르기 시작하는 것입니 다. 주의 구름기둥과 불기둥을 따라 움직이는 것입니다.
CCM그룹 히즈윌(HisWill)의
『광야를 지나며』의 가사 가 참 마음에 와 닿습니다.
왜 나를 깊은 어둠 속에 홀로 두시는지 어두움 밤은 왜 그리 길었는지
나를 고독하게 나를 낮아지게 세상 어디도 기댈 곳이 없게 하셨네 광야 광야에 서있네
주님만 내 도움이 되시고 주님만 내 빛이 되시는 주님만 내 친구 되시는 광야 주님 손 놓고는 단 하루도 살 수
없는 곳 광야 광야에 서있네
주께서 나를 사용하시려 나를 더 정결케 하시려 나를 택하여 보내신 그 곳 광야 성령이 내 영을 다시 태어나게
하는 곳 광야 광야에 서있네
내 자아가 산산이 깨지고 높아지려 했던 내 꿈도 내려놓고 오직 주님 뜻만 이루어지기를 나를 통해 주님만 드러나시기를
광야를 지나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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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야에서…”
1. 말씀의 인도를 받으라
2. 내려놔야 역사가 시작된다
3. 마음과 귀에 할례를 받으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