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도행전 9:1~19>
필리핀만의 독특한 대중교통인 ‘지프니(Jeepney)’는 필리핀 어딜 가나 볼 수 있습니다. 만약 이 지프니가 필리핀에서 없어진다면 엄청난 교통 대란이 일어날 수도 있을 겁니다. 승차비가 저렴하기 때문에 서민들에게 가장 사랑 받는 대중교통수단으로 자리 잡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게 왜 지프니라는 이름을 쓰게 되었냐면, 2차 세계대전 후에 미군이 버리고 간 군용 자동차가 ‘윌리스 MB 지프(Willys MB Jeep, 1940~)’라는 차였었는데, 필리핀 사람들이 그걸 수리하고, 개조해서 이런 미니버스 형태로 만들어 대중교통 수단으로 사용하면서 오늘날의 필리핀의 명물 중에 하나가 된 것입니다. 그래서 지프니의 역사는 무려 70년이나 되었습니다.
그러다 보니 지프니들은 대부분이 노후 되었고, 아주 낡았습니다. 어쩔 때는 저렇게 굴러다니는 게 신기할 정도입니다. 그래서 길거리에 보면 지프니가 고장 나서 서 있는 경우도 어렵지 않게 목격할 수 있습니다. 특히 재생타이어를 많이 쓰기 때문에 지프니의 타이어는 자주 펑크 나기도 합니다.
그런데 지프니의 겉모양이야 양철이나 스테인리스 스틸 같은 것을 두드려서 만들어 새 차처럼 보일 지라도 엔진이라든가 구동계통의 핵심부품들은 중고제품들입니다. 그러다 보니 어떤 지프니들은 새까만 매연을 뿜으면서 도로를 활보하기도 합니다.
얼마 전에도 길을 가는데, 어떤 사람이 지프니 본닛을 열고 엔진룸을 유심히 살펴보면서 수리하는 장면을 봤습니다. 그걸 보면서 ‘도대체 저 엔진은 얼마나 된 것일까?’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연식이 짧은 것도 있을 수 있겠지만, 대체로 아주 오래된 엔진들을 쓰고 있는 거 같습니다. 길게는 수십 년째 그 엔진을 고치고, 수리해가면서 쓰고 있을 겁니다. 그렇게 수리된 지프니 한 대가 여러 가족을 먹여 살리고 있습니다.
필리핀에는 폐차 개념이 거의 없습니다. 그래서 한국 같았으면 벌써 폐차해 버렸을 차들도 여기서는 어떻게든 다 수리해서 도로 위를 굴러다니게 하는 거 같습니다.
사람도 영원할 수가 없고, 언제나 건강하고, 언제나 전성기고, 언제나 멋질 수만은 없습니다. 늙기도 하고, 힘이 다 빠질 수도 있고, 다칠 수도 있고, 실패할 수도 있고, 망할 수도 있고, 더 이상 어떤 소망을 갖기 힘든 상황에 처한 사람들도 있을 수 있습니다. 마치 자신의 삶이 폐장한 해수욕장과 같을 수도 있고, 더 이상 달릴 수 없을 만큼 심각한 고장을 일으켰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 하나님께서는 아무리 심각하게 고장 나 버린 인생이라 할지라도 버리지 않습니다. 그런 인생도 치유하시고 고치셔서 복된 인생이 되게 하시는 것입니다.
1. 찾아 오시는 하나님
오늘 본문에 등장하는 사울(후에 ‘바울’로 개명됨)은 어려서부터 철저한 유대교인이요. 유대교에서 가장 엄격한 바리새파에서 엄격하게 율법을 지키면서 자랐습니다. 또한 바리새파 당대 최고의 학자인 가말리엘 문하에서 자란 유대인 중의 유대인이었습니다. 때문에 나사렛에서 시작된 예수를 따르는 무리들을 유대교의 ‘이단’이라고 생각해 그들을 박해하는데 가장 앞장섰었던 사람이었습니다.
오늘 본문인 1절과 2절을 보면, 당시 유대교의 산헤드린 공회는 로마로부터 유대지역의 사법권을 부여받은 단체였는데, 청년 사울은 그들로부터 멀리 다메섹 지역으로 피신한 그리스도인들을 체포하기 위한 공문까지 요청해 허락 받았습니다. 그리고 무려 700km나 떨어진 다메섹까지 예수 믿는 자들을 체포하기 위해 길을 떠나게 됩니다. 그러니 청년 사울의 유대교를 위한 열심히 얼마나 컸었겠습니까?
사울이 군병들과 함께 다메섹에 거의 가까이 도착했을 때, 3절과 4절을 보시면
“…홀연히 하늘로부터 빛이 그를 둘러 비추는지라. 땅에 엎드러져 들으매 소리가 있어 이르시되 사울아 사울아 네가 어찌하여 나를 박해하느냐”
너무나도 강력한 빛이 갑작스럽게 사울 일행을 향해 비췄습니다. 사람들은 놀랐고, 말들 역시 놀라서 사울은 말에서 떨어졌습니다. 땅에 엎드러져 있었던 사울을 향해 그 때 주님의 음성이 들렸던 것입니다. ‘사울아 사울아 네가 어찌하여 나를 박해하느냐’라는 음성이었습니다. 주님께서 주님을 믿는 자들을 박해하던 사울을 찾아오신 것입니다. 그리고 믿는 자들을 박해하는 것은 곧 주님을 박해한 것으로 인정하시면서, ‘너는 왜 나를 박해하느냐?’라고 준엄하게 묻고 계시는 것입니다.
지금 한국에서 핫 이슈 중 하나는 차기 유력한 대선후보로 거론되는 모 도지사의 부인의 트윗터 ID가 ‘혜경궁 김씨냐? 아니냐?’하는 겁니다. 왜냐하면 현 도지사가 과거 대통령 경선과정과 도지사 경선과정 중에 있을 때, ‘혜경궁 김씨’라는 사람이 자신의 트위터에 “노무현시체 뺏기지 않으려는 눈물… 가상합니다! 홧팅…(2017.12.16.)” 또 “유치하기 짝이 없는 문제인! 문제 많은 문죄인 어리버리 멀뚱 문죄인!…(2016.11.30.), 걱정마 이재명 지지율이 절대 문어벙이한테는 안갈테니…(2016.12.31.)”와 같은 비방과 비하의 글들을 여러번 올렸다는 겁니다. 그래서 공직선거법 위반과 명예훼손 등등의 이유로 도지사의 부인을 검찰에 송치할 예정이라고 합니다. 진실이 무엇인지는 후에 밝혀지게 되겠지만, 만약 이것이 사실이라면 유력한 대선후보에게는 더 이상 대권에 도전할 수 없게 될 치명적인 일이 될 수도 있을 것입니다.
과거, 같은 정당에서 경선하는 후보들끼리 각 진영에서 했던 비방과 비하의 말들이 지금 정치적으로, 사회적으로 크게 문제가 되고 있고, 검찰은 그 사람에게 그 죄를 묻겠다는 것입니다. 진실 여부에 따라 어떤 처벌이 따를 것으로 보입니다.
그런데 죄인 중의 괴수와 같고, 비천하기도 한 인간이 만왕의 왕이신 하나님의 이름을 모독하고 비하 정도가 아니라 박해를 하고 있는 겁니다. 그러면 무슨 죄를 받아 마땅하겠습니까?
그러면 하나님께서 그를 당장에 벌하셔도 무슨 말을 할 수 있겠습니까? 모든 죄가 드러나면 마땅히 벌을 받아 마땅한 것입니다. 그렇다면 주 예수를 박해하며, 그를 따르는 선한 그리스도인들을 박해하고 죽이는 이 청년 사울 같은 사람은 하나님께서 이 다메섹 도상에서 즉결 심판하셔도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그 죄가 명확하기 때문에 그의 죄를 그에게 물을 필요도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그 악한 자 사울을 찾아오신 것입니다. 그리고 ‘네가 왜 나를 박해하느냐?’하고 물으시는 것입니다. 즉결 심판을 해도 마땅한데, 주님께서는 오히려 그를 향해 손을 내미시고 계신 모습입니다.
요즘 다니엘 기도회를 통해 매일 매일 새로운 은혜를 받고 있는데, 지난 11월16일 금요일 저녁 [다니엘 기도회]에는 박태구 권사님이란 분이 강사로 서셨습니다.
그런데 그 분이 강단에 서셔서 하신 첫 번째 말씀이 “저는 사실 이 자리에 설 수도, 올 수도 없는 그러한 삶을 살던 사람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로 이 자리까지 왔습니다. 저는 자랑할 만한 삶을 살지 못했었고, 저는 삶을 잘못 살아온 사람이었습니다.” 라는 말이었습니다.
이 분의 성장과정이 참 불우했는데, 그런 환경 속에서 자라다 보니 12세 때부터 삶이 망가지기 시작해서 비행 청소년의 길을 걷기 시작했다는 겁니다. 10대 후반에는 끔찍한 폭행사고를 저지르고 가출해서, 조직폭력에 가담하고, 그 조직에서 두목으로 있다가 살인사건에 연루되어 교도소를 들락거리기 시작했습니다. 출소해서도 알콜 중독과 정신병으로 시달리고, 분노조절장애, 사회 부적응자로 살다 돈이 필요하니, 밀수하다 교도소에 재수감, 대마초를 만들어 팔다 또 교도소 재수감을 반복했던 것입니다.
그러다 어찌어찌하다 출소해서 한 여자를 납치해 강제로 결혼하고, 부인이 교회를 열심히 다니니깐 어느 날 목사님을 두들겨 패려 시비 걸려고 교회 갔다가 오히려 그 순간에 교회 다녀야겠다는 생각이 들어서 신앙생활을 시작했다는 겁니다. 그리고 예배 참석한 첫날 말씀에 은혜를 받고 펑펑 울면서 예수님을 영접하고 신앙생활을 시작하면서, 전적으로 하나님과 교회에 충성하고 하나님을 향한 신의와 그 목사님을 향한 의리를 지켜 나가기 시작했다고 합니다.
기적 같은 일이 벌어진 겁니다. 이 분이 예수님을 찾아간 것이 아니라, 그 순간 주님께서 이 분에게 찾아오신 것입니다.
이 세상의 모든 종교는 사람이 자기 필요에 따라 어떤 종교를 선택합니다. 그러나 기독교는 하나님께서 죄인인 사람을 찾아오시는 것입니다. 실패한 사람을 찾아오십니다. 절망한 사람을 찾아오십니다. 어둠 속에 있는 사람을 찾아오십니다. 고통 중에 있는 사람을 찾아오십니다. 아파하는 사람에게 찾아오십니다. 죄 속에 방황하는 인생 속에 찾아오십니다.
고장 나 버린 내 인생에도 찾아와 주십니다. 시험에 실패했고, 취업에 실패했고, 인간관계에 실패했고, 결혼에 실패했고, 사업에 실패했고, 교회생활에 실패했고, 믿음생활에도 실패했고, 뭐 하나 제대로 하지 못하고 있는… 인생 자체가 실패 투성이인 내 인생에도 찾아와 주시는 것입니다. 내 인생의 가장 깊은 절망 속에 있을 때, 주님은 나를 내버려 두지 않으시고 찾아와 주시는 것입니다.
2. 보게 하시는 하나님
주님께서 왜 나를 찾아오시겠습니까? 그것은 나의 감겨진 눈을 뜨게 하시려는 것입니다. 지금 이 순간 아무것도 안 보일만한 여러 가지 상황들이 있겠지만, 그 눈을 뜨게 하셔서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들을 보게 하실 것입니다. 고난당하기 전에는 주님을 몰랐고, 주님이 보이지도 않았고, 믿지도 못했지만, 그 고난 때문에 주님을 찾게 되고, 주님께서는 우리의 감겨진 눈을 뜨게 하셔서 주님을 보게 하시는 것입니다. 주님의 일을 보게 하시는 것입니다.
사울에게 찾아오신 주님께서는 자신을 ‘네가 박해하는 예수라’고 소개하시고, 사울에게 다메섹 시내로 들어가라 명령하십니다.
8절과 9절을 보시면,
“사울이 땅에서 일어나 눈은 떴으나 아무 것도 보지 못하고 사람의 손에 끌려 다메섹으로 들어가서, 사흘 동안 보지 못하고 먹지도 마시지도 아니하니라”
사울은 큰 빛으로 나타나신 예수 그리스도 앞에서 엎드러졌었고, 그 빛이 사라지면서 다시 일어났지만 앞이 보이지 않았습니다. 결국 함께 있었던 다른 사람들의 손에 이끌려 다메섹 시내로 들어갔는데, 사울은 너무 큰 충격을 받아 그 때부터 먹지도 마시지도 않았습니다. 11절 하반절에 보면 “그가 기도하는 중이니라”는 말씀으로 봐서, 청년 사울은 그 고난과 시련을 통해 절박하게 하나님을 찾기 시작했던 것 같습니다.
청년 사울은 율법에 정통했습니다. 젊은 날 그는 이미 유대 사회에서 꽤 인정받던 전도유망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눈이 멀어버리니 그 모든 게 아무 의미가 없었습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에 보시면, 유독 반복되는 표현들이 있습니다.
(7절) 아무도 보지 못하여…
(8절) 아무 것도 보지 못하고…
(9절) 사흘 동안 보지 못하고…
여기 7절부터 9절까지는 사울이 ‘보지 못하다(시력을 잃었다)’는 말입니다. 사람은 자기가 그 동안 눈을 뜨고 보던 것들이 모두 전부인 줄 압니다. 그런데 어떤 것들은 눈을 감아야 비로소 보이는 것들이 있습니다. 어쩌면 내가 본다고 하지만 겉으로 보여 지는, 눈으로 보여 지는 현실 때문에 놓치고 있는 것들이 있을 수 있습니다.
‘빈센트 반 고흐’라는 사람과 함께 19세기 후반기를 대표하는 프랑스의 화가 중 한 사람인 ‘폴 고갱(Paul Gauguin, 1848~1903)’이란 사람이 있습니다. 이 예술가가 이런 말을 했습니다.
“나는 보기 위해 눈을 감는다.”
예술가들은 영감이 떠올라야 훌륭한 작품을 그릴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예술가는 눈을 감으면 비로소 자신의 화폭에 그릴 작품들이 보이기 시작했던 것입니다. 그리고 눈을 뜨고 그 작품들을 그려냈던 겁니다.
저 역시도 설교를 준비할 때, 성경을 여러 번 읽고, 다른 번역본도 보고, 주석도 보고, 여러 책들도 참조하고, 묵상도 하고… 그런데 그렇게 수 시간이 지나도록 그 본문을 통해 하나님께서 말씀하시고자 하는 메시지가 떠오르지 않을 때가 많습니다. 설교해야 할 시간은 점점 다가오는데, 그렇게 아무 것도 떠오르지 않을 때는 얼마나 답답한지 모릅니다.
그런데 그 때마다 제가 확실하게 믿고 있는 방법이 하나 있습니다. 하나님 앞에 그 본문을 올려드리고, 그 설교를 위해 기도시간을 갖는 겁니다. 눈을 질끈 감고 있지만 저는 그 때 하나님을 간절히 찾습니다. 하나님의 뜻을 보여 달라고, 하나님의 메시지를 보여 달라고 기도합니다.
제가 대여섯 시간 동안 책상에 앉아 그렇게 많은 책들을 보고, 연구하고 그랬는데, 그럴 때는 핵심적인 메시지나 주제가 전혀 보이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눈을 감고 기도할 때, 어떤 때는 5분 만에, 어떤 때는 10분 만에, 20분, 30분 걸리는 경우도 종종 있지만… 하나님께서 저에게 그 본문을 통해 우리 교회 공동체에 주시고자 하시는 말씀의 제목과 소주제 1번부터 3번까지 모두 보여주시는 것입니다.
그 때 저는 스마트폰 메모장을 열고 주님께서 보여주신 대로 그대로 써 내려가는 겁니다. 오히려 눈을 뜨고 있을 때는 전혀 보이지 않던 것들이 눈을 감으면 비로소 보이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눈을 뜨고 있다고 다 보고 있다고 생각하지 마십시오. 주님께서 여러분에게 보여주셔야만 비로소 보여 지는 것들이 있는 것입니다.
7절부터 9절까지는 멀쩡하던 사울이 눈이 멀어서 보지 못하게 되었다는 내용이 반복되고 있는데, 12절, 16절, 17절, 18절에서는 반대의 내용이 나옵니다.
(12절) 다시 보게 하는 것을 보았느니라
(16절) 내가 그에게 보이리라
(17절) 너로 다시 보게 하시고…
(18절) 다시 보게 된지라…
주님께서 사울의 눈을 다시 뜨게 해 주시겠다는 것입니다. 청년 사울은 이전에 주님을 볼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이제 그가 눈을 다시 뜨게 될 때, 그는 주님을 확실히 보게 되는 것입니다.
미국의 카네기 멜론 대학의 ‘랜드 포시(Randolph Frederick “Randy” Pausch, 1960~2008)’라는 유능한 교수가 계셨었습니다. ‘마지막 강의’라는 책과 영상으로 전 세계적으로 유명한 분이되시기도 하셨는데, 이 분이 교수의 전성기라고 할 수 있는 중년의 나이에 췌장암 진단을 통해 시안부 선고를 받게 됩니다. 이 분이 회복 불가능한 질병으로 죽음을 앞두고 이런 말씀을 하십니다.
“장벽에 서 있는 것은 가로막기 위함이 아니라, 그것은 우리가 얼마나 간절히 원하는 지 보여줄 기회를 주기 위해 거기 서 있는 것이다.”
눈을 감을 때 보여 지는 것들이 있고, 큰 장애물 앞에 서 있어봐야 내가 정말 뭘 원하는 지를 깨닫게 됩니다. 인간이 죽음 앞에 직면하면, 평생 동안 내가 중요하게 생각했던 것들이 아무 의미 없는 것임을 깨닫게 되기도 하고, 그것 때문에 너무나도 소중하고 중요한 것들을 보지 못하고 살았던 인생을 후회하기도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내가 지금 정말 뭘 가장 원하는 지도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청년 사울이 눈이 멀었다가 다시 눈이 뜨게 되는 사건은 진리를 보지 못하던 사울이 비로소 진리를 깨닫고 보게 하시는 특별한 하나님의 은혜였습니다.
3. 고쳐 쓰시는 하나님
하나님께서는 다메섹 성에 살고 있었던 믿음의 사람 아나니아라는 사람에게 환상 중에 말씀하셔서, 사울에게 보내십니다. 그리고 그에게 안수하여 그를 치료하시게 합니다. 아나니아는 청년 사울에 대한 소문을 들었기 때문에 주님의 그 명령을 이해할 수 없었지만, 주님께서는 “그는 나의 택한 그릇이다(15절)”고 말씀하시면서 아나니아를 눈멀어 있었던 사울에게 보내셨습니다.
17절 말씀을 보시면,
“아나니아가 떠나 그 집에 들어가서 그에게 안수하여 이르되 형제 사울아 주 곧 네가 오는 길에서 나타나셨던 예수께서 나를 보내어 너로 다시 보게 하시고 성령으로 충만하게 하신다 하니”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을 우리가 어찌 다 이해할 수 있겠습니까? 청년 사울은 그리스도인들을 박해하던 악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의 주적과 같은 사람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그를 가장 위대한 사도 중에 한 사람으로 선택하셨습니다.
하지만, 변화되지 않은 상태로 그를 쓸 수가 없었습니다. 눈이 멀게 되는 엄청난 시련이 있었지만, 주님께서는 그를 고치셔서 가장 위대한 사도 중의 사도로 사용하신 것입니다.
지난 주간에 우리 성도님들 중에 몇몇 분이 각각 저를 찾아오셨습니다. 평상시에 그렇게 밝고 예쁘시던 분들이 얼굴이 근심이 가득하고, 눈에는 눈물이 그렁그렁 했습니다. 인생의 여러 가지 문제들 때문에 아파하고, 괴로워하고, 자신을 탓하기도 하고, 상황을 탓하기도 하고… 너무 힘들고 괴로워하셨습니다. 목사인 제가 해 줄 수 있는 것은 기도 밖에 없었고, 그래서 저는 기도했고, 하나님은 상한 마음들을 치유하시고 회복하셨습니다.
저는 믿습니다. 상처와 아픔이 있는 사람들을 그렇게 내버려 두지 않고, 주님은 그를 치료하셔서 더욱 크게 쓰실 것입니다. 내 인생이 고장나버린 것 같다고 느껴질 때도 있으실 것입니다. 내 마음과 감정이 조절이 되지 않고, 아무리 결심하고 결심해도 또 무너져 내리고, 넘어지고 실패하는 나의 모습 때문에 또 좌절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아무리 많이 망가져 있다 할지라도 우리를 만드신 하나님께서 우리를 못 고치실 리 없습니다. 비록 지금 고장나버린 인생처럼 느껴질 지라도 주님께서 사울을 고쳐 역사상 가장 위대한 사도 중의 사도로 사용하셨듯이, 주님께서 우리 인생을 그렇게 사용하실 것입니다. 고장나버린 인생 그대로 주님 앞에 나아가십시오. 세상에서는 고장나 못 쓰게 되면 폐기해 버리지만, 주님은 그를 고쳐서 더 위대하게 사용하시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