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도행전 10:24~48>
– Acts(31) –
제2차 세계대전이 막바지에 이르렀을 때, 필리핀을 점령한 일본군이 일본에 저항한 필리핀 사람들을 동굴에 몰아넣고 동굴 입구를 시멘트로 발라 막아버렸다고 합니다. 그리고 그로부터 70일 뒤 전쟁에 진 일본군이 퇴각을 했습니다. 그 마을 주민들이 동굴에 갇힌 사람들을 장례라도 치러주기 위해서 동굴 입구의 시멘트벽을 허물었습니다.
올 해 7월 태국의 한 동굴에 갇힌 소년들이 10일 만에 구조된 것을 보고, 전 세계 언론은 ‘기적적인 생존’이라고 했는데, 10일도 아니고 70일 동안 먹을 것도, 마실 물도 없이 살아남았을 것이라는 것은 상상할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마을 사람들은 당연히 모두 죽었을 것이라고 생각하고 동굴 안으로 들어갔는데, 그 중에 한 사람이 동굴 안에서 70일을 견디며 살아남아 있었던 것입니다. 이 사람이 어떻게 살아 남았는지 아세요?
그는 그리스도인이었는데, 동굴에 갇혀 있는 동안 고린도후서 4장8절 말씀을 떠올렸습니다.
“우리가 사방으로 우겨쌈을 당하여도 싸이지 아니하며 답답한 일을 당하여도 낙심하지 아니하며”
그리고 이 말씀을 수천, 수만 번을 반복해서 암송했다고 합니다. 앞이 보이지 않고, 답답하고, 불안하고, 주변의 동료들이 하나 둘 씩 죽어가는 모습을 보면서 죽음의 공포가 몰려올 때마다 이 말씀을 암송했고, 이 말씀은 그에게 끊임없이 희망을 주었다고 합니다.
제가 오랫동안 살던 의정부에 가시면 광폭터널(17.6m)로서 기네스북에 기재된 세계에서 제일 긴(3,997m) ‘사패산터널’이란 곳이 있습니다. 처음 개통하고 그 터널을 들어갈 때마다 “와~ 정말 길다.”하면서 터널 드라이브를 즐겼습니다.
제가 세계에서 제일 긴 터널을 들어가면서 그 어둠의 긴 터널이 안 끝날까봐 전혀 걱정하지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그 터널은 반드시 끝이 있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동굴과 터널의 차이라 할 수 있습니다. 반면에 동굴은 더 깊이 들어가면 들어갈수록 앞을 알 수가 없는 겁니다. 어떤 위험이 도사리고 있는지 모릅니다. 앞으로 무슨 일을 당하게 될지, 미래가 전혀 보장되어 있지 않은 곳이며, 어떤 희망의 빛도 보이지 않는 곳이 동굴인 것입니다.
우리의 인생에 동굴과 같이 전혀 희망을 가질 수 없을 때, 내 인생에 작은 희망의 빛조차 보이지 않을 때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하겠습니까? 70일 동안 기약 없이 동굴에 갇혔던 한 사람이 주변의 동료들이 모두 쓰러져 죽어나갈 때, 끝까지 살아남을 수 있었던 비결이 무엇이었습니까?
그것은 자기 자신에게서도, 지금 닥친 막막한 환경 속에서도, 주변의 어떤 사람에게서도 어떤 희망을 가질 수 없었지만, 그의 마음속에 떠올랐던 성경 구절 하나를 붙들었던 것입니다. 나의 가능성을 내려놓고, 하나님의 가능성을 붙들었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에게 주어진 인생을 살아가면서 나의 가능성으로 살지 않고, 하나님의 가능성으로 살아가야 하는 것입니다. 나는 실패했고, 나는 무능하고, 나에게는 한계가 있을 수 있지만, 무한하신 하나님의 능력과 사랑을 의지함으로 세상을 넉넉히 이겨나갈 수 있는 것입니다.
1. 믿음의 온도를 높여라
우리가 지난주에는 로마의 군대 백부장 고넬료라는 사람과 사도 베드로가 각각 다른 장소에서 기도 중에 특별한 환상을 보게 되었고, 고넬료는 천사의 지시에 따라 욥바라는 지역에 머물고 있었던 베드로에게 사람을 보내 고넬료가 있었던 가이사랴로 초청하게 됩니다.
24절 말씀을 보시면
“이튿날 가이사랴에 들어가니 고넬료가 그의 친척과 가까운 친구들을 모아 기다리더니”
베드로는 고넬료가 보낸 사람들의 인도를 따라 약 45km 거리에 있는 지중해 해안도시인 가이사랴 고넬료의 집에 들어가게 됩니다. 그런데 당시에 무슨 전화기가 있었던 것도 아니고, 베드로가 올지 안 올지, 그리고 온다 해도 정확하게 언제 올 지도 몰랐을 텐데 고넬료는 그의 친척과 가까운 친구들까지 모두 모아서 사도 베드로를 기다리고 있었던 것입니다.
우리가 2019년 신년이 되면 대심방이 있을 텐데, 제가 오랫동안 목회를 하고 수많은 가정들을 심방을 다녀보는데, 심방 받는 가정들이 ‘심방을 어떻게 준비하고 있나’를 보면 그 가정의 믿음의 온도가 느껴집니다. 하나님께서 목회자를 통해서 전해주는 축복의 말씀을 간절히 사모하고 또 사모하는 가정들은 심방을 받기 위한 준비가 너무나도 잘 되어 있습니다.
그러면 그런 가정에 들어가 기도를 하면 기도가 술술술 얼마나 잘 나오는지 모릅니다. 그 가정을 향한 엄청난 축복의 기도가 제 입에서 막 흘러나오는 겁니다. 여러분도 아시겠지만 기도라는 게 잘 하고 싶어서 잘 되는 게 아닙니다. 기도라는 것은 영적인 행위기 때문에, 성령께서 내 안에서 기뻐 역사하실 때 기도가 잘 되는 것입니다.
시편 107편 9절 말씀에
“그가 사모하는 영혼에게 만족을 주시며 주린 영혼에게 좋은 것으로 채워주심이로다”
분명 하나님과 그 분의 말씀을 뜨겁게 사모하는 분들이 있습니다. 그 분들은 목회자를 통해 전해지는 그 말이 사람의 말이 아니라, 내게 주시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는 것입니다. 목회자가 설교를 잘 하든, 말이 어눌하든, 스피치가 좋든 나쁘든…, 마음 밭이 옥토와 같은 이런 성도는 항상 은혜를 받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그 사모하는 영혼을 만족하게 하시고, 그 주린 영혼에게 가장 좋은 것으로 채워주시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이 주일예배 나올 때 믿음의 온도를 높여보십시오. 그런 성도들은 강단에서 무슨 말이 떨어지든 은혜를 받는 겁니다. 그런데 어떤 성도들은 설교 들으면서 맨 날 판단만 하고 있는 겁니다. ‘목사님은 왜 설교를 저렇게 하나? 이 설교는 누구 집사가 들어야 할 말인데?…’ 이런 식으로 이 귀한 시간을 허비하고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은혜 받으면 내가 좋아요? 여러분이 좋아요? 저도 여러분이 은혜 받으면 좋지만, 결국 그 은혜의 복은 여러분이 더 크게 누리게 되어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교회를 다니면서 이걸 왜 놓칩니까? 돈 주고도 살 수 없는 이런 좋은 기회를 왜 차버립니까?
25절, 26절 말씀을 보시면
“마침 베드로가 들어올 때에 고넬료가 맞아 발 앞에 엎드리어 절하니, 베드로가 일으켜 이르되 일어서라 나도 사람이라 하고”
베드로가 집안으로 들어오니 고넬료가 벌떡 일어나 나가 베드로를 맞으면서 발 앞에 엎드려 절하는 장면입니다. 깜짝 놀란 베드로가 ‘나도 사람이라’ 이러면서 그를 붙들어 일으키는 장면입니다.
그런데 고대 로마에서 백부장이란 신분은 매우 대단한 위치였다고 합니다. 일반군인들보다 15배에 달하는 월급을 받았고, 마태복음 5:41절에 나와 있는 것처럼 “누구든지 너로 억지로 오리를 가게 하거든 그 사람과 십리를 동행하라”하셨던 것처럼, 즉각에서 노동력을 징집할 수 있었던 겁니다. 또 당시 로마군 사병들 사이에서는 백부장에게 뇌물을 주지 않으면 아무 일도 안 되고 불이익을 받는 일이 비일비재하였습니다. 그래서 백부장의 눈 밖에 나지 않으려면 항상 돈을 찔러 줄 준비가 되어 있어야만 했다고 합니다. 그런 관례들 때문에 백부장이 제대할 쯤에는 지역의 시의원이나, 수석 치안판사가 될 만큼의 재력과 지위를 유지할 수 있었다고 합니다.
그런 정복군의 백부장이 식민지 나사렛 출신 어부 베드로 앞에 바짝 엎드려 절을 하고 있는 장면입니다. 이게 어떻게 인간적인 생각을 갖고 될 상황이겠습니까? 사회적 지위를 떠나서 고넬료는 믿음의 온도가 아주 높은 사람이었던 것입니다.
사회에서 조금만 성공했다고 해도, 돈 좀 있다고 해도 그런 사람 앞에서는 쩔쩔매는 사람이 가난한 개척교회 목사 앞에서는 거만하고 오만하고 교만한 사람들이 있습니다.
세부에서 몇 년 살았다. 세부에서 뭐 좀 한다. 인맥이 좀 있다… 그러면 그런 사람한테 어떻게든 잘 보이려고 애쓰는 모습을 보면 참 안쓰럽기 그지없습니다. 그런데 그런 사람들은 목사가 무슨 말을 해도 귀담아 듣지 않는 경우가 많습니다.
고넬료는 자신의 사회적 지위가 높다할 지라도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종 앞에서는 자신을 기꺼이 낮췄습니다. 왜 그렇다고 생각되십니까? 원래 겸손한 사람이라서 일수도 있겠지만, 고넬료는 나사렛 출신이며 글도 쓸 줄 모르는 천한 어부 베드로를 보고 있는 게 아닙니다. 그 베드로를 통해서 당신의 말씀을 전하고 계신 전능하신 여호와 하나님을 보고 있는 것입니다. 이건 믿음이 아니고서는 안 됩니다.
그래서 믿음의 온도가 높은 사람은 목회자와 좋은 관계를 유지해 나갑니다. 하지만, 믿음의 온도가 식으면 자꾸 저를 멀리하시는 겁니다. 예배 오시라 해도 자꾸 빠지고, 만나자 해도 잘 안 만나고, 어디 모임에 오라해도 잘 오지 않고, 성경공부하자 해도 잘 안하는 겁니다.
그런데 그러면 안 됩니다. 그러면 우리 성도님들만 손해 보시는 겁니다. 저 개인을 멀리하거나, 저를 별로 안 좋아하시거나, 여러분과 제가 잘 안 맞아서 그러시는 거는 저는 괜찮습니다. 하지만, 그렇게 하시는 건 여러분의 영적 생활에 하나도 도움이 되지 않는 것입니다. 제가 좀 바쁘다 해도 자꾸 만나자 하시고, 밥도 먹자 하시고, 교회에도 왔다 갔다 하시면서 상담도 하자 하시고 하셔야 하는 겁니다. 목자인 제가 그런 성도님들을 마다하겠습니까? 어떻게든 시간도 내고, 커피도 사드리고, 상담과 기도도 해드리고… 그러지 않겠습니까?
고넬료라는 한 집안의 가장 한 사람이 변하니깐 온 가족이 변화되고, 그 주변 친구들까지 모두에게 성령이 임하시는 것입니다.
특별히 우리 교회의 각 가정의 영적인 가장들 잘 들으십시오. 여러분의 믿음의 온도가 여러분의 가족의 믿음의 온도를 높일지, 식힐지를 결정할 것입니다. 여러분이 하나님 안에서 살아나면 가족이 다 살아나는 겁니다. 여러분이 영적으로 비실비실하면 자녀들도 똑같을 겁니다. 아버지가 살아야 가정이 삽니다. 영적 가장이 살아야 온 가족이 살아나는 것입니다.
가족들이 식탁에 둘러앉아 찬송하고 기도하고 가정예배 드리고, 자녀들이 힘들다고 하면 기도해주고 그래야 그 가정이 살지 않겠습니까? 그런데 식탁에 앉아서 맨날 불평불만이나 쏟아놓고, 교회와 목사 욕이나 하고 있고, 다른 사람들에 관한 부정적인 얘기나 하고 있으면, 그 순간 가장인 여러분들이 자녀들 마음속에 독을 뿌리고 있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자녀들 인생을 여러분이 망치고 있는 겁니다.
여러분, 믿음의 온도를 높이셔야 합니다. 식어진 믿음에 불을 붙이십시오. 마귀가 원하는 대로 끌려 다니지 마십시오.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대로 순종하십시오.
2. 영적인 시력을 높여라
베드로는 고넬료의 믿음에 크게 감동받게 됩니다
34, 35절을 보시면
“베드로가 입을 열어 말하되 내가 참으로 하나님은 사람의 외모를 보지 아니하시고, 각 나라 중 하나님을 경외하며 의를 행하는 사람은 다 받으시는 줄 깨달았도다”
만약에 베드로가 백부장 고넬료를 만나지 못했었더라면 그는 평생 동안 이방인들에게 복음을 전하지 않고, 오직 유대인들에게만 복음을 전하며 살았을 것입니다. 또한 하나님께서 온 우주의 하나님이시며, 온 세상의 열방 가운데 높임을 받으시고, 그들의 하나님이 되시는 이 비밀도 못 깨달았을 것입니다.
그런데 이 사건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베드로의 영적 시력, 믿음의 시력을 높여주신 것입니다.
열왕기하 6장에 보시면 선지자 엘리사에 관한 이야기가 나옵니다. 엘리사가 늘 아람국의 공격을 눈치 채고 이스라엘 왕이 늘 방비하도록 하니깐, 아람 왕이 어느 날 엘리사 선지자를 죽이기 위해 수많은 말과 병거와 군사들을 보내 엘리사가 있는 성읍을 포위했던 적이 있었습니다. 이른 아침에 엘리사의 사환이 밖에 나가보니 아람의 군사들과 병거와 말들이 성읍을 포위하고 있는 것을 보고 공포에 질려 엘리사를 찾습니다.
그리고는 “아아, 내 주여 우리가 어찌 하리이까”라고 호들갑을 떨게 된 것입니다.
그 때 엘리사가 이렇게 말합니다
“두려워하지 말라 우리와 함께 한 자가 그들과 함께 한 자보다 많으니라. 여호와여 그의 눈을 열어서 보게 하옵소서!”
사환은 지금 육신의 눈으로 보여 지는 것만 보고 있었던 겁니다. 그러니 당연히 무서울 수밖에 없는 겁니다. 이제 다 끝난 거 같은 겁니다. 아람 군대가 이제 막 쳐들어와 칼로 목을 벨 거 같은 겁니다.
그러나 영적인 눈, 믿음의 눈을 뜨고 있었던 엘리사의 눈에는 아람 군대만 보이는 게 아니라, 그 위에 하나님께서 보내신 셀 수 없는 불말과 불병거가 산에 가득하여 엘리사를 보호하고 있었던 것이 보인 것입니다.
육적인 눈만 있는 사람은 지금의 현상들, 들려오는 말들, 상황들, 조건들… 그런 외적인 모습만 봅니다. 그래서 그런 것들 때문에 늘 힘든 겁니다. 그런 외적 상황이 좋을 때는 호호 하하 하다가, 조금만 상황이 어려워지면 사시나무 떨 듯 흔들리는 겁니다.
그러나 영적인 눈, 믿음의 눈을 뜨고 있는 사람은 지금 상황이 어떻게 돌아간다고 해도, 어떤 조건과 환경 속에 있다고 하더라도, 누가 무슨 말을 한다고 하더라도 흔들리지 않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이 사람들은 지금 이 환경 그 너머에 계신 하나님이 보이는 겁니다. 하나님께서 보내신 불말과 불병거가 보이기도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앞으로 행하실 일들이 기대가 되는 것입니다. 내 플랜은 실패했지만, 내 계획보다 더 좋은 하나님의 플랜이 이제 시작될 것을 믿기 때문인 것입니다.
제가 시력이 -3.0 정도 되는데, 시력이 안 좋으니깐 불편한 게 너무 많습니다. 조금만 사람이 멀리 떨어져 있어도 그 분 얼굴이 잘 안 보이는 겁니다. 요즘 우리 형제들과 자전거 탈 때도 땀이 많이 나니깐 마치 사우나 들어와 있는 것처럼 안경에 습기가 얼마나 많이 끼는지 모릅니다. 아침에 일어나서도 안경을 쓰지 않으면 시계도, 달력도 잘 안 보입니다. 전에 호핑을 갔었는데, 물안경이나 스노클링에 도수가 들어가 있지 않으면 저는 물속에 있는 그 예쁜 물고기들도 제대로 볼 수가 없었습니다.
아마 저처럼 시력이 안 좋은 분들이 동일하게 느끼고 있는 바일 겁니다. 그런데 제 주변에 라식이나 라섹 수술 하신 분들 얘기를 들어보니깐 너무 너무 행복하다는 겁니다. 아침에 눈을 떴을 때 모든 게 선명하게 보이는 게 너무 감사하고 좋다는 겁니다. 마치 신세계에 사는 것 같고, 새로 태어난 느낌마저 든다고 합니다. 못 보던 것을 보니 이렇게 다른 겁니다.
이제 영적인 시력을 높이시길 바랍니다. 어떻게 영적인 시력을 높일 수 있겠습니까? 고넬료와 베드로가 어떻게 남들이 보지 못하던 환상과 하나님의 세계를 볼 수 있었습니까? 그들이 기도 중에 알게 된 거 아닙니까? 그렇다면 영적인 시력이 높아지는 비결은 간단합니다.
여러분이 기도의 자리에 나와 계시면 되는 겁니다. 기도 시간을 늘리는 겁니다. 눈을 뜨면 보이는 게 있을 수 있지만, 눈을 감으면 영적인 시력이 좋아지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고넬료와 베드로처럼 성령께서 무엇을 말씀하시든지 순종해 보십시오. 그러면 남들이 못 보던 것들을 보기 시작하게 될 것입니다.
제가 해외여행을 서른여섯 살이 될 때까지 한 번도 안 갔었습니다. 그런데 그 이후부터 교회에서 어떤 일들을 맡아서 여러 차례 해외여행을 다녀올 기회가 있었습니다. 중국을 비롯한 동남아 여러 나라들과 호주와 뉴질랜드와 미국 등 영어권 국가들도 여행을 했었습니다.
그런데 사람은 확실히 여러 가지, 여러 문화들을 봐야합니다. 제가 그런 것들을 보면서 시야가 많이 넓어지는 걸 느낄 수 있었습니다. 제가 정말 고지식한 사람이었는데, 지금도 그런 면이 없지 않아 있는데, 여러 나라를 다니면서 여러 문화권에 있는 사람들을 보고 난 후에는 제가 좀 유연해 졌습니다. 다른 문화 속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을 이해하기 시작해졌고, 약간의 융통성도 생긴 거 같습니다. 어쩌면 지금 제가 필리핀에서 이렇게 목회하는 것도 하나님께서 저를 그렇게 준비시키셨기 때문에 가능했던 거 같습니다.
한 가지 이야기만 드리고 말씀을 맺겠습니다.
2013년 5월 나이지리아 선박 제이슨 4호가 30m 바닷속으로 침몰하게 됩니다. 그 배에는 우크라이나 출신 선장과 11명의 나이지리아 선원이 있었습니다. 사고 지점과 120km 떨어진 곳에서 네덜란드 잠수부들이 작업을 하다가, 급히 사고현장으로 투입되게 됩니다. 사고 후 시간은 60시간이나 흘러 침몰한 배에 있던 이들은 모두 숨졌습니다. 그래서 잠수부들은 선장과 10명의 나이지리아 선원들의 시체를 인양하게 됩니다.
잠수부들이 철수하려던 찰나 기적적으로 한 명의 생존자를 확인하게 됩니다. 그는 제이슨 4호의 요리사 해리슨 오케네(Harrison Okene)였습니다. 사고 당시 충격으로 기절했었는데, 깨어나 보니 배는 침몰했고, 배가 침몰하면서 뒤집어졌는데 해리슨은 그 때 공기가 빠져나가지 못하고 남아 있는 에어포켓(Air Pocket)이 있는 곳으로 필사적으로 헤엄쳐 도착했습니다. 그리고 거기서 물에 떠있던 콜라 한 병으로 60시간 이상을 버텨냅니다.
대서양 바다 한 가운데 침몰한 배 안에서 점점 산소가 희박해지는 상황에서 언제 구조될지 모르는 상황이고, 시간이 갈수록 점점 불길한 예감이 들고, ‘이대로 생존은 불가능하겠구나, 이대로 죽는 구나…’라는 생각이 들 때, 사고 나기 전 아내가 문자 메시지로 보내준 성경 구절이 생각이 나더랍니다.
그것이 시편 18:6절이었습니다
“내가 환난 중에서 여호와께 아뢰며 나의 하나님께 부르짖었더니 그가 그의 성전에서 내 소리를 들으심이여 그의 앞에서 나의 부르짖음이 그의 귀에 들렸도다”
이 말씀을 붙들고 그 죽음의 공포를 견뎌내며 살아남을 수 있었던 것입니다. ‘3일 동안 숨 쉴 수 있는 산소를 남겨주셨고, 그 넓은 대서양에서 국적이 다른 잠수부가 사고 지점 근처에서 마침 작업 중이었고, 산소가 희박해 질 때쯤 잠수부가 해리슨을 찾아냈고, 차가운 바닷속에서도 체온이 떨어지지 않고 생존했던 기적…’ 어떻게 이런 기적이 있을 수 있었겠습니까?
구조된 해리슨이 기자들과의 첫 인터뷰에서 짧은 한 마디로 이 기적을 이렇게 설명 했습니다
“주님께 간절히 기도했더니 주님께서 나를 구원해 주셨습니다.”
모든 길이 막히고, 모든 가능성이 없을 때가 있습니다. 그런데 그것은 우리 인간적인 눈으로 볼 때 그렇습니다. 우리의 영적인 시력을 높이고, 우리의 믿음의 온도를 높이기 시작할 때는 새로운 길이 보이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나는 실패할 수 있습니다. 나의 가능성은 내려놓을 수 있습니다. 하지만 이제 우리는 하나님의 가능성으로 살면 되는 것입니다. 믿음의 가능성으로 살면 되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