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태복음 18:11~20>
저는 아내와 약 3년 가까이 연애 기간을 거쳐 1993년 결혼해서 26년 째 살고 있습니다. 그런데 결혼생활하면 할수록 느끼는 것은 ‘아내와 저는 정말 다른 사람이구나…’라는 겁니다. 저희 부부는 성격도 완전 정반대구요. 식성도 완전히 다릅니다. 저는 안 익은 김치를 좋아하고, 아내는 완전 신김치를 너무 좋아하는데 저는 신김치는 입에도 못 댑니다. 좋아하는 패션 스타일도 다르고, 집안 인테리어 컨셉도 저는 심플하고 깔끔한 스타일을 좋아하는데 아내는 아기자기하고 예쁜 스타일을 좋아합니다. 그래서 아내는 다른 분들에게 저희 부부를 소개할 때 “우리는 예수님 사랑하는 거 외에 같은 게 거의 없어요.” 라고 말합니다.
어쩌면 맞는 게 하나도 없는데 저희는 26년 째 행복한 결혼생활을 하고 있고, 결혼생활에 만족도도 높습니다. 그런데 제가 목회하면서 수많은 커플들을 봐 왔는데, 성격이든 뭐든 정말 완전히 다른 성향의 커플들이 행복하게 잘사는 걸 많이 봤습니다. 나와 완전히 다른 사람이랑 사는 데 이게 어떻게 가능할까요? 정말 나랑 다른 사람이랑 잠시 잠깐 보는 것도 아니고, 매일 같이 얼굴을 맞대고 살아가고 있는데 이게 짜증나고 화가 날만한 일들이 있지 않겠습니까?
저와 아내에게도 서로 다르기 때문에 ‘이걸 어떻게 해야 하나’라고 할 만한 상황이 있기도 합니다. 누구든 분명 그럴 때가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런데 그런 상황들 속에서도 여전히 서로 좋은 관계를 유지하며 잘 살고 있는 이유가 있습니다. 그것은 ‘서로 사랑하기 때문’입니다. 나와 잘 맞지 않는 수많은 커플들이 여전히 행복하게 잘 살고 있는 이유는 서로 사랑하기 때문인 것입니다.
사랑해서 결혼한 커플들도 잘 맞지 않는데, 교회 공동체에서 나와 잘 맞지 않는 사람이 있겠습니까? 없겠습니까? 말하나 마나 당연히 나와 너무나도 다른 지체들이 있을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는 교회 공동체에서 나와 너무나도 다른, 그래서 나와 잘 맞지 않는 사람을 어떻게 대해야 할까요?
12절 말씀을 보시면,
“너희 생각에는 어떠하냐 만일 어떤 사람이 양 백 마리가 있는데 그 중의 하나가 길을 잃었으면 그 아흔아홉 마리를 산에 두고 가서 길 잃은 양을 찾지 않겠느냐”
여기서 ‘길을 잃게 하다(Planaw : 플라나오)’는 말은 ‘속임을 받아 고의로 곁길로 나간 양’임을 강조하는 말입니다. 이민목회에 지친 어떤 목사님이 “나는 나 좋아서 오는 양 막지 않고, 나 싫다고 가는 양 붙잡지 않는다.”라는 말씀을 하신 적이 있습니다. 저는 그 말씀을 들으면서 ‘목회를 하며 오고 가는 사람들에게 얼마나 많은 실망을 하셨으면 이런 말씀을 하실까?’라고 생각했었습니다. 제가 이민목회를 해보니깐 그 말씀이 조금은 이해되기도 합니다. 목자는 나 싫다고 가는 양을 붙잡고 또 붙잡습니다. 그런데 거기서 돌아오는 양은 거의 없고 결국 떠납니다. 오히려 목자는 그 과정에서 마음이 갈기갈기 찢어져 상처만 입을 때가 많습니다. 이 길이 참 쉽지 않습니다. 그러니 더 이상 상처받고 싶지 않아서 그 목사님께서 그렇게 말씀하셨던 거 같습니다.
그런데 14절을 보시면,
“이와 같이 이 작은 자 중의 하나라도 잃는 것은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뜻이 아니니라”
목자 되신 주님께서는 아흔아홉 마리를 들에 두고 그 잃은 한 마리 양을 찾기 위해 떠난다는 겁니다. 아흔아홉 마리에 비해 그 한 마리 양은 얼마나 소수입니까? 그러나 그 작은 자 중의 하나라도 잃는 것은 하나님 아버지의 뜻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또 한 가지 비유를 하시는데, 15절을 보시면,
“네 형제가 죄를 범하거든 가서 너와 그 사람과만 상대하여 권고하라 만일 들으면 네가 네 형제를 얻은 것이요”
교회 공동체에서 누군가 잘못한 일이 있으면, 그걸 공개적으로 터뜨려서 그 사람에게 수치를 주고, 그 사람을 죄인 만들 필요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그는 내 형제이고, 주님께서 피 흘려서 구속하신 그리스도의 몸이며 지체이기 때문입니다. 먼저 개인적으로 찾아가서 그 사람에게 권면해서 그가 들으면 그 형제를 얻게 되는 겁니다. 그러나 만일 듣지 않으면 한두 사람을 데리고 가서 증언하게 함으로 그가 죄에서 돌아오게 해야 하고(16절), 그들의 말도 듣지 않으면 교회에 말함으로 그를 구제해야 하는데 교회의 말도 듣지 않았을 때는 더 이상 우리가 할 수 있는 건 없는 겁니다. 그 때부터는 이방인과 세리처럼 여기라(17절)는 겁니다. 중요한 것은 그를 죄인 만드는 게 먼저가 아니라 그를 어떻게든 회개케 하여 그 형제의 영혼을 얻는 것입니다.
18절 말씀을 보시면,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무엇이든지 너희가 땅에서 매면 하늘에서도 매일 것이요 무엇이든지 땅에서 풀면 하늘에서도 풀리리라”
교회 공동체에서 나와 잘 맞지 않는 사람이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매인 관계가 있다면 하늘의 문도 닫힐 수 있다는 것을 기억하셔야 합니다. 그러나 땅에서 풀면 하늘에서도 풀리는 것입니다. 공동체에서 나와 잘 맞지 않는 사람이 있어서 ‘저 사람 하나 없어도 돼. 하나님이 또 다른 사람 보내주실 거야. 그 한 사람 때문에 힘들어할 필요 없어. 그 사람은 없는 게 나아…’라고 생각할 수 있을 겁니다.
그러나 정말 성향이 다른 부부도 ‘사랑’이라는 매개를 통해 안 맞는 것을 이해하고 맞춰가는 것입니다. 우리가 공동체의 형제와 자매를 사랑한다면 그 사랑으로 이해하고 맞춰가는 것도 필요한 것입니다. 잃어버린 한 마리의 양을 찾듯이, 죄를 범한 한 영혼을 끝까지 얻기 위해 노력하듯이 할 때, 그 사람과 공동체를 향한 하늘의 문은 열리게 되어 있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