슬라이드1

“비전의 여정”

<사도행전 14:19~28> 

– Acts(43) –

 

 

저희 가정이 교회 개척을 위해서 필리핀에 처음 왔을 때 세부에서 가장 눈에 띄는 것 중에 하나가 SM mall 같은 대형 쇼핑몰이었습니다. 도시는 지저분하고 개발되어야 할 곳이 너무 많아 열악한데, 쇼핑몰 안에 들어가면 완전히 딴 세상인 겁니다. 한국의 웬만한 백화점과 대형 마트보다 더 크고 화려하고 없는 게 없는 곳입니다. 마닐라에 가면 ‘몰 오브 아시아(Mall of Asia)’가 있는데, 세계에서 가장 큰 쇼핑몰 중에 하나이기도 합니다. 이 쇼핑몰 역시 SM mall입니다.

 

 

SM 그룹은 필리핀 전역에 70개의 쇼핑몰과 중국에 7개 등 77개의 초대형 쇼핑몰을 소유하고 있고,

쇼핑몰 사업을 확장하다 보니 땅과 건물을 얻는데 불편함이 있어, 1974년에는 부동산 개발과 건설업도 하게 되고, 직원들이 잔돈을 바꾸려 은행에 가면 불편함이 있어서 1976년에는 은행업에도 뛰어들게 됩니다.

 그래서 현재 필리핀 최대은행이라 할 수 있는 ‘BDO 뱅크’를 만들고, 필리핀 5대 은행 중 하나인 ‘차이나 뱅크(China Bank)’ 역시 지분을 소유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명실공히 필리핀 재계 1위이며, 필리핀의 경제를 이끌어 간다고 해도 무리가 아닙니다.

그리고 돈을 많이 버는 만큼 좋은 일들도 많이 하고 있는데, 창업주인 ‘헨리 시(Henry Sy Sr. 1924~2019)’회장은 SM 재단(SM Foundation)을 만들어서 교육 의료, 농업 등등의 다양한 자선사업을 해 오고 있다고 합니다. 현재까지 필리핀에 80개의 학교를 세워 나라에 기부했고, 수많은 학생들에게 장학금을 지급하고 있고, 100만 명에게 의료지원을 했고, 160개의 열악한 병원의 시설을 재보수 할 수 있도록 지원했습니다.

 

 

필리핀 넘버원인 SM 그룹의 창업자는 올해 초 94세의 나이로 타계한 중국계 1.5세인 ‘헨리 시(Henry Sy Sr. 1924~2019)’ 전 회장입니다.

그는 1924년 중국 푸젠성 샤먼에서 태어났는데, 집안이 너무 가난했습니다. 그가 12살 때인 1936년 그의 가족들은 먹고 살 것을 찾아 필리핀 마닐라로 이민을 오게 됩니다. 그의 아버지는 ‘사리사리(Sari Sari)’라 불리는 빈민가의 작은 구멍가게를 통해 생계를 이어갔고, 헨리는 어려서부터 밖에서 노는 것보다 아버지 일을 도왔다고 합니다.

그런데 2차 세계대전이 터지고, 아버지가 운영하던 구멍가게는 전쟁 통에 완전이 불타버렸고, 한 순간에 온가족은 거리에 내 앉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그의 가족들은 다시 중국으로 돌아가게 됩니다. 하지만 헨리는 필리핀에서 대학을 다니길 원했습니다. 그리고 1950년 그는 필리핀에서 다니던 2년제 대학을 졸업하게 됩니다.

대학을 졸업한 후 특이한 물건들을 골라 사서 높은 가격에 되파는 소규모 유통을 시작했고, 전쟁이 끝난 후에는 미국인들을 상대로 신발을 판매하는 일을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1958년 그의 나이 서른네 살에 ‘슈마트(Shoe Mart)’라는 신발가게를 오픈하게 되는데, 14년 뒤인 1972년 슈마트의 약자를 따서 SM몰을 오픈하기에 이른 것입니다.

그가 2004년 한 매체를 통해 이런 말을 했습니다.

“쉽게 돈을 벌 수 있는 것이나, 벼락부자는 없다. 만약 당신이 실패하면 낙심하지 말라. 그리고 또 다시 도전하라.(There is no such thing as overnight success or easy money. If you fail, do not be discouraged; try again – Henry Sy(Philippine Star, 2004)”

사람들은 어떤 사람들이 자신의 꿈을 이루고, 성공 뒤의 영광스러운 모습만 보고 부러워합니다. 하지만 벼락부자나, 쉽게 큰돈을 벌고, 성공하는 일은 없다는 겁니다. 그가 그런 비전을 이루기까지 그에게도 절망하고 낙심할만한 일들이 있었습니다. 한 가족의 생계를 이어갔었던 가게가 불타서 모든 것을 잃어버렸던 것도 그 중 하나였을 것입니다. 하지만 낙심하지 않고 그 실패의 자리에서 다시 도전하고 다시 도전했기에 오늘 날의 SM그룹이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 능력이 부족해서 실패하는 것이 아니라, 포기해서 실패하는 것입니다. 실패했기 때문에 다 끝난 게 아니라, 포기하기 전까지는 아직 끝난 게 아니고, 포기하면 그 때는 진짜 끝난 겁니다.

여러분이 비전을 향해 가는 여정에는 좋은 일만 있지 않을 것입니다. 여러분의 계획대로 되지 않는 것도 있고, 잘 나가던 일에 큰 장애물이 버티고 있기도 할 것이고, 여러분을 괴롭히는 사람들도 나타날 수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 모든 것들이 비전을 이루어가는 여정임을 잊지 마십시오.

 

1. 아직 끝나지 않았다

여러분이 꿈을 향해 나아갈 때, 그게 아무리 멋지고 훌륭한 꿈이라 할지라도 실패 없이 성공만 있을 것이라 생각하지 마십시오. 분명 실패처럼 보이는 일들이 수없이 있을 수 있을 것입니다. 때로는 크게 낙심이 되고, 앞이 보이지 않는 절망적인 상황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기억하세요. 아직 끝나지 않았습니다. 우리가 살아있고 숨 쉬고 있다면, 여전히 우리에게는 또 다른 기회가 있고, 하나님의 플랜이 남아 있다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 19절 말씀을 보시면,

“유대인들이 안디옥과 이고니온에서 와서 무리를 충동하니 그들이 돌로 바울을 쳐서 죽은 줄로 알고 시외로 끌어 내치니라”

 

바울의 1차 선교여행은 터키지방이 주 무대였습니다. 우리가 사도행전 13장과 14장 말씀을 계속 살펴보고 있는데, 바울은 터키의 비시디아 안디옥 지방과 이고니온 지방에서도 전도했었습니다. 그리고 바울의 전도를 통해 도시 전체가 복음으로 들썩거렸습니다. 그러나 모두가 그들을 환영했던 것은 아니었습니다. 어디에나 그것을 시기하거나, 싫어하는 사람은 항상 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그 지역의 유지들을 선동해 바울 일행을 모함하고, 박해했었습니다.

그들이 복음을 거부하고 박해하자 바울은 거기서 남쪽으로 내려가 오늘 본문의 루스드라 지역에 와서 전도를 했는데, 특별히 태어날 때부터 걷지 못하던 장애인을 복음의 능력으로 치유해 주자 루스드라 사람들이 바울과 바나바를 헬라 신화에 나오는 최고신인 ‘제우스’와 ‘헤르메스’라 부르며 떠받들게 됩니다.

그런데 그 때 비시디아의 안디옥과 이고니온으로 부터 여러 유대인들이 왔습니다. 비시디아의 안디옥과 본문의 루스드라는 무려 160km(서울-대전 거리)나 떨어져 있었습니다. 그런데 복음의 반대자들은 그 먼 거리를 쫓아와 바울의 전도사역을 방해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들은 안디옥과 이고니온에서 썼던 방법을 똑같이 사용합니다. 루스드라 사람들을 충동질해서 돌로 바울을 쳐서 죽이려 했던 것입니다. 돌 하나만 맞아도 얼마나 아프겠습니까? 그런데 여러 사람들이 바울을 향해 돌을 집어 던졌으니, 이마와 머리가 터지고, 얼굴이 찢어지고, 손가락이 부러지기도 했을 겁니다. 바울은 돌에 맞아 쓰러졌고, 사람들은 그가 죽은 줄로 알고 성 밖에 내다 버립니다. 이 때 바울은 기절을 했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고린도후서 11:23절에 보시면,

“… 내가 수고를 넘치도록 하고 옥에 갇히기도 더 많이 하고 매도 수없이 맞고 여러 번 죽을 뻔하였으니”

 

이 구절에서 말씀하시고 있는 ‘매도 수없이 맞고 여러 번 죽을 뻔하였으니’라는 말씀은 오늘 본문의 루스드라에서의 이 환란과 박해를 포함하고 있는 것입니다.

바울은 이방인의 사도로 부름을 받았습니다. 적은 인구와 작은 땅의 유대에 비해서 이방민족과 이방의 땅들은 얼마나 많고 넓습니까? 바울은 그 이방인을 구원하기 위한 비전을 받은 겁니다. 이 꿈과 비전이 얼마나 크고 훌륭합니까? 바울은 사도들 중에 가장 원대한 꿈과 비전이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비전이 크면 클수록 저항도 크다는 것을 기억하시길 바랍니다. 비전의 크기와 장애물의 높이는 비례한 것입니다. 때문에 낙심하면 안 됩니다. 그 비전의 크기만 한 저항이 온 것뿐입니다. 그것은 그 꿈을 향한 여정에 반드시 거쳐야 할 과정일 뿐입니다.

바울을 통해 유럽에 복음이 흘러들어갔고, 그 이후 유럽의 2천년 역사는 기독교의 역사와 함께하게 된 것입니다. 바울 한 사람을 통해 유럽의 역사가 바뀐 것입니다. 그 과정에서 바울이 죽음의 고비를 한 번만 넘긴 게 아니었습니다. 매도 수없이 맞았고, 여러 번 죽을 뻔한 고비를 넘겼고, 오늘 본문의 루스드라에서도 돌에 맞아 죽은 줄 알았습니다.

 

20절 말씀을 보시면,

“제자들이 둘러섰을 때에 바울이 일어나 그 성에 들어갔다가 이튿날 바나바와 함께 더베로 가서”

 

바울과 함께 했던 일행들이 성 밖에 버려진 바울 주위를 둘러섰습니다. 얼굴을 비롯해 온 몸이 처참하게 찢겨지고, 깨지고, 부러지고, 피투성이로 마치 죽은 것처럼 조금의 미동도 없고, 신음소리 조차 없는 바울의 버려진 모습에 따르던 제자들의 가슴이 찢어졌을 것입니다. 이렇게 이방복음화, 세계복음화의 꿈은 실패한 것처럼 느껴졌습니다.

그런데 죽은 줄 알았던 바울이 눈을 뜨고 서서히 일어나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튿날 바나바와 함께 성치 않은 몸으로 또 다른 지역으로 이동해 그곳에서도 복음을 전하여 수많은 사람을 예수의 제자로 삼게 됩니다.

수많은 명작을 남긴 러시아의 대문호 ‘레오 톨스토이(Leo Tolstoy, 1828~1910)’가 이런 말을 했습니다.

 

“인간의 절망은 하나님의 기회이고, 인간의 끝은 하나님의 시작이다.”

 

바울이 돌이 맞아 죽은 사람처럼 버려진 모습을 보면서 사람들은 ‘다 끝났다’라고 생각했을 겁니다. 여러분들이 믿음으로 살고, 주님을 향해 흔들리지 않는 믿음으로 기도하면서 도전했을 지라도 정말 다 끝난 것처럼, 더 이상 어떤 소망도 없는 것처럼 느껴질 만한 상황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인간의 절망은 하나님의 기회고, 인간의 끝은 하나님의 시작인 것과 같이 아직 끝난 게 아니란 것입니다. 나는 끝났을 지라도 나를 향한 하나님의 계획이 있는 한 아직 끝난 게 아닌 것입니다. 내가 할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을 때부터 이제 본격적으로 하나님께서 일하실 차례가 될 수 있는 것입니다.

톨스토이가 죽기 3주전 그의 딸 사샤에게 보낸 편지에 이런 글이 있습니다.

 

“하나님은 한계가 없으시다. 모든 사람들은 그를 부분적으로 이해할 뿐이다.”

 

우리가 알고 있는 하나님이 전부라고 생각하지 마십시오. 우리의 생각을 뛰어넘고, 우리의 이해를 뛰어넘는 한계가 없으신 전능하신 하나님을 믿으시길 축복합니다.

 

2. 축복의 자리에 머물라

바울 사도는 일행과 함께 환란과 박해가 있었던 루스드라와 이고니온과 비시디아의 안디옥으로 되돌아갑니다.

 

그리고 22절입니다.

“제자들의 마음을 굳게 하여 이 믿음에 머물러 있으라 권하고 또 우리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려면 많은 환난을 겪어야 할 것이라 하고”

그 도시들에는 여전히 바울 사도를 노리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바울이 다시 그 도시에 들어왔다는 소식이 그들에게 들어가기라도 하면 겨우 살아난 바울의 생명은 더 이상 보장될 수가 없는 것입니다.

 

하지만 그 도시들에 바울을 죽이려는 대적들만 있었던 것이 아니고, 바울이 복음으로 낳은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그런데 바울이 당한 환란과 박해의 소식을 접한 이들의 믿음이 흔들릴 수도 있었던 겁니다. 그래서 바울은 큰 위험을 무릅쓰고 다시 그 도시들을 향해 나아갔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이 구절의 상반절에 보시면 “제자들의 마음을 굳게 하여 이 믿음에 머물러 있으라 권하고”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예수 믿은 지 얼마 되지 않은 제자들은 분명 믿음이 흔들리기도 했을 것입니다. 그런 초신자들을 향해 사도 바울은 ‘이 믿음에 머물러 있으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세부에 정착하러 오시거나, 세부에서 뭔가 새로운 인생을 살고 싶어 하시거나, 여기서 어떤 일을 해보려 하시는 분들에게 제가 꼭 권면 드리는 말씀이 있습니다. ‘버티셔야 합니다. 결국 버티는 사람이 성공합니다.’라고 합니다.

여러 가지 사정이 생겨 버티지 못하고 1~2년 만에, 2~3년 만에 떠나시는 분들은 여기서 고생만 하다 떠나시는 경우가 많습니다. 초기에 이 낯선 땅에 정착하려면 돈이 얼마나 많이 드는지 모릅니다. 그리고 세부가 물가가 쌀 거 같아서 왔는데 생각보다 여기저기에 돈이 많이 듭니다. 그런데 정말 1~2년, 2~3년 만에 여길 떠나시면 갖고 있던 재정만 다 쓰고, 별로 얻어서 가는 것도 없이 떠나게 되는 경우를 많이 봤습니다.

설교 서론에서 말씀 드렸던, 12살에 부모님 따라 필리핀에 왔었던 ‘헨리 시’ SM 창업자가 집안에 어려움이 있었을 때, 그냥 중국으로 돌아갔다면 오늘의 SM 그룹은 없었을 것입니다. 집안의 생계를 이어주던 가계가 몽땅 불타버리니 살길이 막막해 진 그의 가족들은 다시 중국으로 돌아가 버렸습니다. 하지만, 헨리 시는 홀로 이 시련의 땅에서 버티고 또 버텼던 것입니다. 필리핀 사람도 아니면서, 중국에서 온 이민자 1.5세인 사람이 세계 100대 기업 안에 드는 오늘 날의 SM그룹을 만들어낸 것입니다.

여기 세부의 상권은 모두 중국 사람들이 쥐고 있는데, 여기서 성공한 차이니스 필리피노(Chinese Filipino : 화교) 한 사람이 우리 한국인들에게 그런 말을 했답니다. ‘왜 한국 사람은 여기서 성공하지 못하고, 중국 사람은 여기서 성공하는지 압니까? 한국인은 떠날 생각을 하고 여기 살지만, 중국인들은 여기 살 생각을 하고 살고 있기 때문입니다.’ 맞는 말입니다. 그래서 한국인들은 조금만 힘든 일이 있으면 한국으로 돌아갈 생각부터 하는 겁니다. 하지만 죽이 되던 밥이 되던 여기서 뿌리내리고 살 생각을 하는 사람은 성공할 가능성이 더 클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골로새서 2:6~7절 말씀에 보시면,

“그러므로 너희가 그리스도 예수를 주로 받았으니 그 안에서 행하되, 그 안에 뿌리를 박으며 세움을 받아 교훈을 받은 대로 믿음에 굳게 서서 감사함을 넘치게 하라”

 

우리가 무엇을 하든 뿌리가 얕으면 오래갈 수가 없는 겁니다. 뿌리가 얕으면 땅으로부터 영양분을 제대로 받을 수도 없고, 결국 약한 바람만 불어도 뿌리 채 뽑혀 쓰러지게 되어 있는 것입니다. 때문에 뿌리가 얕으면 맺을 열매도 없는 것입니다.

요즘 망고나무들 마다 망고열매가 많이 영글어가고 있는데, 제가 언젠가 이 망고나무에 대해서 한 번 말씀드렸던 적이 있었습니다. 망고나무는 보통 10~30m의 높이로 자라나는데, 나무가 아주 크고 멋지게 생겼습니다. 그런데 망고나무는 나이가 들수록 열매를 더 많이 맺어지게 된다고 합니다. 수령이 10~20년생은 200~300개, 20~30년생은 1,000개 이상 그런데 100년 이상 된 나무에서는 5~6천개가 열리기도 하고, 최고 기록이 망고나무 한 그루에서 29,000개까지 열렸었다고 합니다. 왜 그렇겠습니까? 뿌리가 그 만큼 더 깊어지고, 많은 영양분을 흡수해서 더 많은 망고를 맺게 되는 거 아니겠습니까?

우리의 신앙생활 역시 예수 그리스도 안에 뿌리를 깊이 내려야 하는 것입니다. 신앙생활을 한두 달 만에 끝낼 생각 하지 마십시오. 신앙생활은 우리의 평생을 두고 해야 하는 것입니다. 날이 갈수록 예수 그리스도에게 믿음의 뿌리를 더 견고하게 내려가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야 영적인 풍성한 열매를 맺어가게 되고, 내 세대에 때 뿐 아니라 우리 자녀 세대에까지도 축복의 열매가 주렁주렁 열려지게 되는 것입니다.

저는 이 세부 땅에서 누가 복을 받을 사람인지 알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나를 이 땅에 보내셨고, 우리의 삶에 우연이 없고, 모두 하나님의 계획과 섭리가 있음을 믿는 사람은 쉽게 포기하지 않습니다. 헨리 시 회장도 늘 필리핀의 잠재성에 대해서 얘기했다고 합니다. 그걸 보는 사람은 이 필리핀 땅이 축복의 땅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 땅에 살면서 늘 입에 불평불만만 있는 사람에게는 이 땅이 결코 그에게 축복의 가나안이 되지는 않을 것입니다. 이 땅도 그 사람의 불평을 듣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어떤 사람은 이 땅이 축복의 가나안으로 느껴지고, 보여 지고, 믿어질 것입니다. 그 사람에게 세부는 축복의 가나안이 될 것입니다. 여기에 몇 달에서 혹은 1~2년 단기로 계실 계획을 갖고 계신 분도 계실 겁니다. 그런데 이 땅에 머무시는 동안 이 땅을 축복해 보십시오. 이 땅에서 사는 날들을 하나님께 감사해 보십시오. 그런 분에게도 이 땅은 복된 곳이 될 것입니다.

여러분, 이 축복의 자리를 빼앗기지 마십시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과 그의 아들 이삭에게 가나안 땅을 떠나지 말 것을 왜 말씀하셨겠습니까? 축복의 자리에 머물라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거하시는 곳, 하나님께서 축복하시는 곳, 우리의 믿음이 성장하는 곳, 우리가 하나님을 만나는 곳, 하나님의 언약과 계획이 있는 바로 그곳에 우리가 머물러야 할 것을 말씀하셨던 것입니다.

여러분이 어떤 꿈과 비전을 향해 나아가고 있는 여정 속에 분명 어려움이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믿음으로 그 축복의 자리에 머물기 바랍니다. 지금 당장의 형편과 어려움 때문에 자리를 옮기고, 또 옮기다 보면 뿌리를 내릴 수가 없는 것입니다. 믿음의 눈으로 하나님께서 내게 주시는 축복의 자리가 어딘지 바라보시길 바랍니다.

창세기 13장에 보시면, 롯은 풍요한 소돔과 고모라를 선택했습니다. 그러나 지금 당장의 풍요를 따랐던 소돔과 고모라는 얼마 지나지 않아 유황불로 심판을 받았지만, 당장 보장된 것이 없었지만 믿음의 눈을 들어 선택한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복을 받았던 것입니다. 축복의 자리에 머무시길 바랍니다.

 

3. 십자가 없는 영광은 없다

비전의 여정 세 번째 주제는 ‘십자가 없는 영광은 없다.’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비전을 향해 나아갈 때, 그냥 쉽게쉽게 얻어질 거라 생각하지 마십시오.

 

오늘 본문 22절 하반절에서

“…또 우리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려면 많은 환난을 겪어야 할 것이라”

 

고 말씀하시고 있습니다.

 

그래서 마태복음 13장 13절과 14절 말씀에서도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 멸망으로 인도하는 문은 크고 그 길이 넓어 그리로 들어가는 자가 많고, 생명으로 인도하는 문은 좁고 길이 협착하여 찾는 자가 적음이라”

 

내가 하고 싶은 대로 살고, 내 욕심대로 살고, 내 뜻대로 살고, 내 생각대로만 사는 사람이 과연 하나님을 섬기는 사람이겠습니까? 내 생각을 하나님의 뜻을 굴복시킬 때에야 비로소 진정한 신앙생활이 시작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신앙생활은 좁은 문이고, 좁은 길인 것입니다. 때문에 주님의 뜻을 행하는 사람에게 환난이 있는 것은 당연한 것입니다.

 

마태복음 16장 24절에서 예수님께서는

“나를 따라 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

 

고 말씀하셨습니다.

여기에서 그 유명한 영어격언인

“No Cross No Crown(십자가 없이는 영광도 없다)”

 

는 말이 나온 것입니다. 왕관을 쓰려는 자는 그 무게를 견뎌내야 하는 것이고, 십자가 뒤에는 부활의 영광이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의 믿음의 여정, 비전의 여정에 환난과 같은 시련이 있을지라도 낙심하지 말 것은 그 십자가 뒤에는 반드시 부활의 영광이 있을 것입니다.

우리 민족 역사에 가장 비극적인 시대에 태어난 시인 윤동주는 일본에서 유학생활 하던 1943년 항일운동을 했다는 혐의로 일본 경찰에 체포되어 일본 형무소에 투옥되어 독립이 되던 해 1945년 2월, 만 27세의 나이로 옥중에서 죽게 됩니다. 우리가 알다시피 윤동주 시인은 글로서(특별히 시를 통해) 독립운동을 한 분이십니다.

 

그의 시 ‘십자가’에는 이런 내용이 있습니다.

『괴로웠던 사나이, 행복한 예수 그리스도에게처럼 십자가가 허락된다면, 모가지를 드리우고 꽃처럼 피어나는 피를 어두워 가는 하늘 밑에 조용히 흘리겠습니다.』

 

나라를 사랑했던 크리스천 윤동주 시인 같은 분들이 있었기에 우리나라의 독립도 있을 수 있었던 것입니다. 또한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고 복음을 전했던 바울 사도와 같은 분이 있었기에 유럽의 복음화 더 나아가 전 세계에 복음이 전해지게 된 것입니다.

우리 인생의 여정 그리고 비전으로 가는 여정에는 여러 장애물들과 많은 환난이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 십자가 뒤에 반드시 영광의 부활이 있음을 믿으시길 바랍니다. 지금 인생의 깊은 광야를 지나는 것 같을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무엇도, 누구도 의지할 수 없는 이 광야에서 주님은 우리의 유일한 도움이 되어 주실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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