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대상 9:1~34>
사람의 마음이란 것이 변하게 되어 있습니다. 처음의 그 순수했던 마음이 시간이 지날수록 더 순수해지고 더 좋아지면 좋을 텐데… 대체로 세월이 흐를수록 처음의 그 순수함을 잃고 약간씩 변질되어가는 것을 보게 됩니다.
어릴 때부터 교사가 되는 게 꿈이었던 분이 그 어려운 임용고시에 합격합니다. 그리고 교사로서의 소명의식으로 똘똘 뭉친 신입교사가 되어 학교라는 현장에 들어가는데 교육의 현실, 학교의 현실, 학생들의 현실이라는 벽에 가로막혀 점점 그 교사의 소명을 잃는 경우도 있습니다.
예전에 안성기 박중훈 주연의 ‘투캅스’라는 영화를 보니깐 경찰 대학교를 막 졸업한 순수하고 열정으로 가득한 경찰이 점점 변질되는 스토리가 영화 속에서 이어졌습니다.
목사나 선교사가 되고자 하는 목사후보생들이 신학교에 들어가는데, 신학생들 사이에 그런 말이 있습니다. ‘신학교 입학하여 1학년 때는 목사의 믿음이고, 2학년 때는 장로의 믿음이고, 3학년 때는 집사의 믿음이 되고, 4학년이 되어 평신도의 믿음으로 졸업하게 된다.’ 우수개 소리이기도 하지만, 하나님께 자신의 삶을 바치기로 했던 목사후보생들 조차 점점 그 순수함과 열정을 잃게 된다는 것을 비꼬는 말이기도 합니다.
제가 세부에서 목회하면서 사실 복을 많이 받았습니다. 가장 큰 복이 좋은 성도님들을 만나 함께 주님의 교회를 이 영적 불모지에 세워가는 것이 가장 큰 복이라 생각합니다. 처음 우리교회에 오신 분들이 우리교회의 예배와 설교와 분위기에 은혜 받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래서 어떤 분은 정말 교회를 위해서 이것저것 다 헌신하고 충성하시려 하시기도 합니다. 그리고 ‘정말 우리교회 같은 교회를 보기 힘들다’고, 심지어 ‘목사님의 설교는 더 많은 사람들이 들었으면 좋겠다’고 저를 띄어주기도 합니다. 감사한 일이죠. 하지만 시간이 좀 흐르다보면 그런 열정과 마음이 식어버리는 경우도 있고, 이전의 순수했던 성도의 믿음이 점점 변해가는 모습에 안타까울 때가 많습니다.
우리가 주님을 향한 순수한 믿음과 마음과 헌신과 충성됨이 10년 전이나 오늘이나 내일이나 한결같다면 얼마나 좋을까요? 그런데 오늘 본문에는 그렇게 한결같은 사람들이 등장하는데, 어떻게 그들은 그럴 수 있었을까요?
오늘 본문 역대상 9장1절부터 34절까지는 바벨론 포로에서 돌아온 이스라엘 백성들의 명단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1절부터 9절까지는 유다와 베냐민 자손들의 대표적인 이름들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2절을 보시면,
“그들의 땅 안에 있는 성읍에 처음으로 거주한 이스라엘 사람들은 제사장들과 레위 사람들과 느디님 사람들이라”
바벨론에서 돌아온 사람들 중에 예루살렘 성에 처음으로 거주하게 된 이스라엘 사람들은 제사장들과 레위 사람들과 느디님 사람들이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에스라서를 통해서 볼 때 바벨론 포로 1차 귀환자들의 목적은 BC 586년 남유다왕국 멸망당시 완전히 파괴되고 불태워져 버린 예루살렘 성전의 재건이었습니다. 때문에 그 성전 재건을 위해서는 과거 성전에서 제사를 집례 했던 제사장들과 관련된 일들을 했었던 레위인들이 필요했을 것입니다. 어쩌면 그들은 당연히 귀환해서 성전을 재건하고, 성전제사를 회복하기 위해 꼭 와야 할 사람들이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들 외에 ‘느디님 사람들’이라는 부류가 추가적으로 기록되고 있습니다. 이 느디님 사람들은 여호수아 9장에 나와 있는 기브온 사람들을 말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요단 동편의 강대한 헤스본왕 시혼과 바산왕 옥까지 격파하고 요단강을 건너 그들의 지도자인 여호수아와 함께 철의 2중 성벽인 난공불락 여리고성과 아이성까지 정복했고, 서쪽으로 진격해나가고 있었습니다. 그 소식을 들은 가나안 땅의 히위 족속인 기브온 사람들은 이스라엘에 의해 멸망하게 될 것에 두려움에 떨게 됩니다. 그래서 그들은 여호수아와 이스라엘에 항복하게 되는데, 그 과정에서 여호수아와 이스라엘을 속였습니다. 그들이 속였다는 사실을 알게 되자
여호수아 9장 23절에서 지도자 여호수아는
“그러므로 너희가 저주를 받나니 너희가 대를 이어 종이 되어 다 내 하나님의 집을 위하여 나무를 패며 물을 긷는 자가 되리라”
그래서 기브온(느디님) 사람들은 멸망 받아야 할 이방 가나안 사람들이었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성전을 위하여 나무를 패며 물을 긷는 종들이 되게 됩니다. 하지만 그들은 남유다가 멸망할 때 그들과 함께 바벨론에 포로로 잡혀가게 됩니다. 그런데 그 이후로 약 50년이 지났습니다. 그러면 두 세대가 지날 정도로 긴 세월인 것입니다. 그리고 페르시아의 고레스 왕이 유다의 포로들에게 고향으로 귀환하라고 했을 때, 강제성이 없었습니다. 그러니깐 가고 싶은 사람은 가고 가기를 원하지 않는 사람은 그냥 페르시아에서 살아도 되는 거였던 것입니다. 성전의 종이었던 느디님 사람들 입장에서는 지난 50년간도 그 중노동을 안했었는데, 이후로 그냥 페르시아에 남아 있어도 되는 거였습니다. 다시 돌아가면 성전을 위해 나무를 패며, 물을 긷는 종이 되는 겁니다. 하지만 그들은 기꺼이 성전의 노예로 자신의 삶을 드리기로 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기꺼이 귀환했던 것입니다.
‘느디님 사람들’이란 말은 히브리어로 ‘바쳐진 자들’이란 뜻입니다. 그들은 과거 여호수아의 손에 멸망할 가나안 족속이었습니다. 하지만 겨우 생명을 부지했는데 대신에 성전의 노예가 되어야 했습니다. 그리고 그들과 그들의 자손들은 대대로 성전의 노예로 중노동을 하며 살았습니다. 바벨론 포로에서 귀환하지 않아도 되었을 것을 그들은 기꺼이 다시 귀환하여 성전을 위한 노예생활을 시작합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바쳐진 자들’이었기 때문입니다.
이들을 통해 오늘 중요한 교훈을 받게 됩니다. ‘바쳐진 자들’이었기 때문에 그들은 다시 돌아왔던 겁니다. 여러분 우리는 주님의 십자가로 속량(‘값을 주고 사왔다’)된 사람들입니다. 우리는 주님의 소유인 것입니다. 우리는 주님께 바쳐진 사람들인 것입니다. 바쳐진 사람들은 시간이 지난다고 변하면 안 되는 것입니다. 한결같은 믿음으로 주님을 섬기시는 이 시대의 느디님 사람들이 되시기를 축복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