슬라이드1

“말씀의 신실성”

<열왕기상 13:1~34> 

– 열왕기상(23) –

 

 

우리 한국 분들이 처음 필리핀에 와서 잘 적응되지 않았던 부분이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그 중에 하나가 필리핀 사람들이 약속은 잘 하는데 그게 잘 지켜지지 않는다는 겁니다. 내일 오겠다고 해서 하루 스케줄 빼 놓고 계속 기다리는데, 아무리 기다려도 약속한 사람이 안 오는 겁니다. 시간 약속을 정확하게 지키는 경우가 사실 좀 드물고, 아예 늦는 정도가 아니라 그 날 안 오는 경우도 적잖게 있습니다. 그래서 처음 필리핀 사람들에게 실망하고, 그들을 향한 불신도 쌓이게 됩니다.

그런데 그런 일 갖고 계속 스트레스 받으면 나만 힘드니깐 ‘에이, 그렇지 뭐… 필리핀이니깐 내가 이해해야지…’하고 그냥 이해하고 넘어가기도 합니다. 사실 이렇게 안 하면 내 마음이 힘드니깐 이렇게 넘어가는 게 좋기도 하지만, 여기에 우리에게 부정적 영향이 있기도 합니다. 다 그런 건 아니지만 한국 분들 중에 필리핀에 어느 정도 사신 분들은 약간 필리핀 사람처럼 되어버리는 경우가 있는 겁니다. 필리핀 사람에 대한 불신이 있어서, ‘한국 사람은 제대로 해 주겠지…’하고 그 한국 분에게 일을 맡겼는데 해 주겠다고 해 놓고 제대로 기일을 맞추지 않는 겁니다. 그러다 보니 어느 순간 한국 사람에 대한 불신까지 갖게 되기도 합니다.

그래서 우리 한국 분들이 여기서 한국의 그 서비스 정신과 신용을 얻으며 일한다면 그 분은 반드시 성공할 수 있는 겁니다. 우리 인테리어 사업 하는 성도 중에 한 분은 본인이 직접 드릴 작업 같은 거 한다는 겁니다. 그래서 제가 ‘왜 인건비도 싼데 필리핀 인부들에게 안 맡기냐?’고 물으니, ‘제가 하는 게 편해요’ 이렇게 말 하더라구요. 얼마나 답답하면 자기가 먼지 다 뒤집어쓰면서 일하겠습니까? 어쨌든 그런 정신이 사람들에게는 더 신뢰를 줄 수 있는 태도와 자세일 것입니다.

수년 전에 우리교회에서 신앙 생활하던 가정이 세부에 방문하실 일이 있으셔서 알리시아에 방을 알아보고 싶은데 마땅히 방법이 없으셔서 저에게 도움 요청이 왔습니다. 어떻게든 돕고 싶은데 방학을 맞아 그 콘도에 사시는 우리 성도님들이 모두 한국에 들어가 계신 겁니다. 마침 며칠 전 돌아오신 올해 새로 등록하신 초신자 성도님이 생각나서 전화로 방을 좀 알아봐 달라고 부탁을 했는데, 흔쾌히 알아봐 주신 겁니다.

 

그리고 오늘 예약하기 위해서 그 성도님하고 약속을 잡고, 제가 약속 시간 5분 전에 도착했는데 이미 먼저 도착해서 저를 기다리고 계신 겁니다. 그리고 그 성도님 도움 받아서 예약을 잘 마무리 했는데, 초신자이신 우리 성도님이 ‘목사님, 바쁘신데 앞으로 이런 일은 언제든지 제게 맡겨 주세요. 제가 앞으로 다 할께요’ 이렇게 말씀해 주시는데, 그 성도님이 얼마나 고마웠는지 모릅니다. 사소한 일일 수 있지만 그 성도님에게 믿음이 생기더군요.

탈무드에 이런 말이 있습니다.

“아이에게 무언가 약속하면, 반드시 지켜라. 지키지 않으면 당신은 아이에게 거짓말하는 것을 가르치는 것이 된다.”

 

우리는 얼마나 쉽게 약속하고, 얼마나 쉽게 그 약속을 어깁니까? 특히 자녀들에게도 쉽게 약속을 하는데 그걸 지키지 않으면 그건 자녀들에게 거짓말을 가르치는 것이 된다는 무거운 말인 것입니다.

19세기 영국의 영적 부흥기를 이끌었으며, 설교의 황태자라고 불리던 ‘찰스 H. 스펄전(Charles Haddon Spurgeon, 1834~1892)’목사님이 이런 말씀을 했습니다.

“약속은 태산처럼 해 놓고 실천은 두더지 둔덕만큼 한다”

 

사람들이 약속은 쉽게 쉽게 하지만, 그 약속은 잘 안 지킨다는 비유입니다. 태산이 얼마나 큽니까? 그런데 우리의 입에서 나온 약속이 그렇게 많이 쌓여있다는 겁니다. 하지만 두더지가 지나간 곳에는 작은 둔덕이 있는 것처럼, 우리가 한 약속에 비해 실천이 너무나도 미미하다는 것입니다.

약속을 잘 지키는 사람에 대해서는 우리가 그에 대한 믿음을 갖게 되지만, 약속을 잘 어기는 사람에 대해서 우리는 불신을 갖게 됩니다.

우리가 하나님에 대한 믿음을 가져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사람은 잘 지키기도 하고, 어기기도 하지만 하나님은 우리를 향한 약속의 말씀을 반드시 이행하시는 분이십니다.

솔로몬의 아들 때인 르호보암 왕 때에 이스라엘은 남과 북으로 분열되고 맙니다. 남유다는 다윗의 손자이며, 솔로몬의 아들인 르호보암이 통치합니다. 그러나 북이스라엘은 여로보암이 왕으로 통치하게 됩니다.

 

 

하나님께서는 여로보암을 북이스라엘의 왕으로 세우시면서 그가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고, 하나님의 뜻대로 행하면 다윗에게 베풀었던 은혜를 그에게도 베풀 것이라고 언약하셨습니다(왕상11:38). 그러나 여로보암은 왕이 된 이후 마음이 변질되었고, 그는 하나님의 뜻과 방법과 믿음으로 나라를 다스린 것이 아니라 세속적인 방법으로 통치했습니다. 그에게 심각한 3가지의 죄가 있었습니다.

첫째, 단과 벧엘에 금송아지 우상을 만들어 백성들이 섬기게 했습니다. 북이스라엘 백성들이 남유다에 속한 예루살렘 성전을 향해 자꾸 오가니깐 금송아지를 북이스라엘의 북쪽 끝인 단에 하나 만들어 놓고, 남쪽 경계인 벧엘에 하나 만들어 놓고 그것이 이스라엘을 애굽 땅에서 인도해 낸 하나님이라고, 이제 멀리 예루살렘까지 갈 필요 없이 여기서 섬기라고 백성들의 우상숭배를 부추킨 것입니다.

둘째, 레위 지파가 아닌 자를 제사장으로 삼았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오직 레위지파에서만 제사장을 세우도록 했지만, 여로보암은 자기가 원하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제사장으로 세웠던 것입니다. 율법의 말씀을 정면으로 거부한 것입니다.

셋째, 자기 마음대로 절기 날짜를 변경했습니다. 이스라엘의 3대 절기가 있었는데, 그는 세 번째 절기인 ‘장막절(초막절)’을 원래 날짜에서 한 달 뒤에 하도록 정해 지키도록 했습니다.

이 세 가지 죄의 특징은 ‘자기 합리화’의 죄라고 할 수 있습니다. 꼭 예루살렘에서만 제사해야 하냐? 꼭 레위지파만 제사장이 될 수 있느냐? 꼭 그 날짜에만 절기를 지켜야 하느냐? 하는 건데, 여로보함은 하나님께서 정하시고 말씀하신 것을 자기의 정치적 목적을 위해 기꺼이 변경해 버린 것입니다.

자기 합리화라는 것은 하나님이 아닌 자기가 여전히 중심에 있고, 자기가 주인인 것입니다. 하나님을 진정한 주인으로 섬기는 사람들은 자기가 빠지는 겁니다. 내 생각과 내 판단과 내 계획이 주인이신 하나님의 뜻에서 어긋난다면 기꺼이 내려놓는 것입니다. 내가 힘들더라도, 지키기 쉽지 않더라도 합리화하지 않고 ‘말씀이 그렇다면 그런 것이다’라고 하며 순종하는 게 진짜 믿음인 것입니다.

 

오늘 본문 1절을 보시면,

“보라 그 때에 하나님의 사람이 여호와의 말씀으로 말미암아 유다에서부터 벧엘에 이르니 마침 여로보암이 제단 곁에 서서 분향하는지라”

 

유다에서부터 하나님의 선지자 한 사람이 여호와의 말씀을 갖고 여로보암 왕이 만들어 놓은 제단이 있었던 벧엘에 오게 됩니다. 그리고 이렇게 예언합니다.

 

2절을 보시면,

“제단아 제단아 여호와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기를 다윗의 집에 요시야라 이름하는 아들을 낳으리니 그가 네 위에 분향하는 산당 제사장을 네 위에서 제물로 바칠 것이요”

 

선지자는 이후 290년 뒤에 있을 일을 미리 예언하고 있는데, 남유다의 요시야라는 왕이 일어나 벧엘의 거짓 제사장들을 심판할 것이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3절을 보시면,

“그 날에 그가 징조를 들어 이르되 이는 여호와께서 말씀하신 징조라 제단이 갈라지며 그 위에 있는 재가 쏟아지리라 하매”

 

이런 불길한 예언을 하는 선지자가 달갑지 않았던 여로보암은 군병들에게 그 선지자를 체포하라고 할 때, 그 손이 말라 마비가 오게 되고, 분향하던 제단은 갈라지며 재가 제단에 다 쏟아져 내립니다.

그런 현상을 보며 여로보암은 그 선지자가 하나님께서 보낸 진짜 선지자임을 느끼게 되었던 거 같습니다. 그래서 그 선지자에게 ‘당신의 하나님 여호와께 손의 마비가 풀리도록 기도해 달라’고 부탁합니다. 선지자는 기도했고, 여로보암의 손의 마비는 풀리게 됩니다.

악한 왕 여로보암의 마비된 손은 다시 고쳐주지 않아도 되지 않겠습니까? 그런데 하나님은 왜 그 손을 다시 고쳐주셨을까요? 선지자의 말대로 된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함이었던 것입니다. 선지자가 하나님의 말씀을 예언의 말씀으로 전했는데, 그 말씀 역시 그대로 된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7절 이하에 보면 여로보암 왕은 그 선지자에게 물질적 보상을 해 줄테니 왕궁으로 가자고 초청합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 이미 선지자에게 ‘그곳에서 떡도 먹지 말고, 물도 마시지 말고, 왔던 길로 되돌아가지 말라’고 명령하셨기 때문에 왕의 초청을 거절하고 그는 다른 길로 떠나가게 됩니다.

그리고 11절부터 32절까지는 또 다른 이야기 한 가지가 전개되고 있습니다.

 

 

금으로 만든 송아지 우상이 있었던 벧엘에는 한 늙은 선지자 하나가 있었습니다. 그는 과거에 하나님의 음성도 듣고, 하나님의 말씀도 전하던 선지자였던 거 같습니다. 그러나 어느 순간 그는 변질되었습니다. 그리고 여로보암 왕의 권력 아래에서 안락함을 누리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유다로부터 벧엘에 와 하나님의 말씀을 여로보암 왕에게 전한 하나님의 선지자에 관한 소식을 아들들로부터 듣게 됩니다. 그래서 그는 나귀를 타고 그를 뒤 따라 가서 자신의 집에 그를 초청합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선지자는 16절, 17절에 보니깐 여로보암 왕에게 말한 것을 똑같이 말하면서 거짓 선지자의 초청을 거절합니다.

그런데 그 늙은 선지자가 ‘나도 그대와 같은 선지자라’ 하면서 ‘천사가 나타나 당신에게 먹을 것을 주고 섬기라 해서 이렇게 왔다’라고 거짓말을 통해 유다의 선지자를 집에 데리고 가서 먹을 것과 마실 것을 주어 대접합니다.

그런데 그 때 그 늙은 선지자에게 진짜 하나님의 말씀이 임하게 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어기고, 하나님의 명령을 지키지 않고 먹고 마신 선지자가 사고를 당해 죽게 될 것이다’라는 예언이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24절 이하에 보시면, 사자가 나귀를 타고 가던 유다로부터 온 선지자를 만나 그를 물어 죽이게 됩니다. 하지만 사자는 그 선지자를 먹지 않았고, 나귀 역시 잡아 먹지 않습니다. 그냥 그 늙은 선지자가 올 때까지 그 옆에 나귀와 함께 서 있는 것입니다. 소식을 들은 선지자는 유다로부터 온 선지자가 사고 당한 곳으로 달려갑니다.

 

그리고 26절입니다.

“그 사람을 길에서 데리고 돌아간 선지자가 듣고 말하되 이는 여호와의 말씀을 어긴 하나님의 사람이로다 여호와께서 그에게 하신 말씀과 같이 여호와께서 그를 사자에게 넘기시매 사자가 그를 찢어 죽였도다”

 

오늘 본문을 보시면 잘 이해되지 않는 불편한 상황들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뜻을 전했던 선지자는 사자에 물려 죽었습니다. 그러나 범죄 한 여로보암 왕의 마비된 손을 하나님께서는 선지자를 통해 치유해 주십니다. 또 벧엘의 늙은 거짓 선지자는 유다의 선지자를 속여 범죄하게 한 원인 제공자였는데, 그에게는 특별한 징계를 내리지 않으시고 오히려 그에게 하나님의 말씀이 임하여 유다로부터 온 선지자에게 말씀을 전하게 합니다.

오늘 본문을 통해서 우리에게 교훈하시고 있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은 반드시 이루어진다’라는 것을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유다로부터 온 선지자가 전한 여호와의 말씀이 하나도 이뤄지지 않은 게 없습니다. 여로보암의 제단이 무너지리라 한 것도 그대로 됐습니다. 또 여로보암의 마비된 손도 나았습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그가 죽어가면서 교훈하고 있는 것은 말씀을 어긴 자의 최후가 어떻게 된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을 통해 그는 하나님의 말씀을 정면으로 어기고 있는 여로보암과 그의 나라가 어떻게 될 것인지를 예언하고 있는 것입니다.

 

34절 말씀을 보시면,

“이 일이 여로보암 집에 죄가 되어 그 집이 땅 위에서 끊어져 멸망하게 되니라”

 

이 얼마나 두려운 말씀입니까? 하나님의 말씀은 반드시 그대로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어겼고, 그 분의 뜻을 거슬렀던 여로보암과 그의 집은 완전히 멸망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민수기 23장 19절 말씀을 보시면,

“하나님은 사람이 아니시니 거짓말을 하지 않으시고 인생이 아니시니 후회가 없으시도다 어찌 그 말씀하신 바를 행하지 않으시며 하신 말씀을 실행하지 않으시랴”

 

하나님은 우리 사람처럼 수시로 약속해 놓고 어기는 분이 아니십니다. 그는 거짓말을 하지 않고, 하신 말씀을 반드시 실행하시는 분이시라는 것입니다.

 

신명기 30장 15절에서

“보라 내가 오늘 생명과 복과 사망과 화를 네 앞에 두었나니”

 

말씀이 그대로 될 것을 믿는다면, 그 말씀이 100% 그대로 될 것을 확신한다면 우리는 말씀에 순종하는 삶을 살게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주님께서는 우리 앞에 생명과 복의 길을 두셨고, 사망과 화의 길을 두셨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선택은 우리에게 달려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말씀을 신뢰한다면 사망과 화의 길로 가지 않고, 생명과 복의 길로 가기를 선택할 것입니다.

 

 

제가 우리 사역 브레이크 기간에 읽었던 『왕의 재정 / (규장), 김미진 著』이란 책이 하나 있는데 그 책에 나와 있는 간증 하나 소개해 드리고 마치겠습니다.

 

이 분이 젊을 때부터 사업을 해서 크게 성공했었는데, 친구 사업 보증 한번 잘 못 서주고, 어찌어찌하다 부도가 나서 50억의 빚더미에 앉았다고 합니다. 그 전에는 100평 짜리 대형 안경점을 운영했었는데, 나중엔 두 평짜리 안경점을 운영하며 겨우 겨우 살았다고 합니다.

그러던 어느 날 다음 달 장사를 위해 500만원의 물건 값을 갖고 있었는데, 어떤 아프리카 선교사님이 들어오는데 성령께서 ‘그 선교사님에게 그 돈을 헌금하라’는 감동을 주시더랍니다. 그런데 그렇게 완전 밑바닥 까지 내려갔다가 하나님의 은혜로 사는 훈련을 받아본 저자는 순간 다음 달 장사가 걱정되었지만, 주님의 말씀에 순종하기로 하고 그 자리에서 그 분께 헌금을 전달했다는 것입니다. 나중에 알고 보니깐 그 선교사님은 선교센터를 위해서 기도하고 있는데 이 분이 드린 헌금이 첫 열매였다는 겁니다.

며칠 뒤 이탈리아 밀라노의 안경쇼에 갔었던 친구가 큰 박스 40개를 보내왔는데, 그 안에 들어있는 거래명세표를 보니깐 4,800만원어치였다는 겁니다. 그런데 그걸 보낸 친구는 믿지 않는 친구였는데, 왠지 그 안경 전부를 선물하고 싶어서 그 40박스를 모두 보내왔다는 겁니다.

그렇게 저자는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해서 살아갔는데, 재기에 성공하고, 그 50억의 빚도 4년 만에 청산하고 지금은 전 세계를 다니며 말씀에 순종하며 살아갔던 자신의 삶을 간증하며 다니고 있습니다.

여러분, 하나님의 말씀의 신실함을 믿으시길 바랍니다. 그 말씀은 반드시 이루어질 것입니다. 그 말씀을 신뢰함으로 간증의 주인공들이 되시길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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