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세기 13:1~4>
– 40일 특새 : 갑절의 은혜를 구하라(9) –
어제 뉴스를 살펴보는데 유명 아이돌 가수가 대체복무 소집해제가 되었다는 겁니다. 군대로 치자면 제대를 한 거죠. 이 사진은 이 가수가 소집 해제일에 마지막 출근하는 장면입니다. 대체복무 출근하는데 고급승용차에 운전기사와 보디가드까지 이 가수를 수행하면서 문까지 열어주는 모습입니다. 용산구청에 출근하는 군인의 신분으로서 좀 과하다는 생각이 듭니다. 어쨌든 대단한 가수긴 한 거 같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그게 아니라 사진을 자세히 보시면 자동차가 이 가수를 내려주려고 정차한 곳이 장애인 주차구역이었다는 겁니다. 그래서 이것에 대해 곱지 않은 시선으로 보는 이들이 적지 않았다는 겁니다. 저는 이 기사를 보면서 사람들이 너무 예민하게 보는 거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들었는데, 이 가수의 군복무를 전후로 있었던 사건들 때문에 이런 사소한 것조차 좋게 보기가 어려웠던 겁니다.
왜냐하면 2017년 2월에 논산 육군훈련소에서 군 복무를 시작했지만, 입대하기 전 대마초 흡연 사실이 적발돼 같은 해 7월 징역 10개월, 집행유예 2년을 선고 받고 보충역으로 전환돼 2018년 1월부터 용산구청에서 사회복무요원으로 대체복무를 시작했다고 합니다. 그런데 근무 당시에도 다른 요원에 비해 3배 이상 많은 병가를 사용했고, 그것도 연휴가 있는 날을 끼어 사용했다는 겁니다. 이런 이력들이 있었기 때문에 엊그제 장애인 주차구역에 정차했다고 소란이 났었던 겁니다. 다른 사람이 그랬다면 사람들이 이렇게까지는 안했을지도 모릅니다.
누구나 사람은 실수를 할 수 있습니다. 사람은 연약해서 굳게 결심해도 작심삼일이 되는 일도 있고, ‘나는 절대 안 그래’라고 했던 사람도 죄와 유혹에 넘어갈 때도 있습니다. 때문에 누군가 실수했다면 사람이 연약하니깐 이해하고 넘어갈 수도 있는 겁니다. 하지만 그 이후가 더 중요합니다. 같은 실수를 계속 반복한다면 그것은 더 이상 실수라고 보기보다는 나쁜 의도가 깔려 있었던 것으로 보는 겁니다. 이전의 잘못이 정말 실수라면 이후로는 변화된 모습을 조금이라도 보여주는 것이 중요한 겁니다. 한 유명 아이돌 가수가 공인으로서 사회적 물의를 일으켰는데, 그 뒤이어 이어지는 모습에 사람들은 실망감을 느꼈던 것 같습니다.
시편 119:67절 말씀에
“고난 당하기 전에는 내가 그릇 행하였더니 이제는 주의 말씀을 지키나이다”
이 시편 기자는 잘못된 길로 가다가 고난을 당하게 되니 그 이후로 자신의 잘못을 뉘우치고 이제는 하나님의 말씀을 지키며, 그 말씀에 순종하며 살게 되었다는 고백입니다.
시편 119:71절에서도
“고난 당한 것이 내게 유익이라 이로 말미암아 내가 주의 율례들을 배우게 되었나이다”
그래서 시편 기자는 고난당한 것이 오히려 자신에게 유익하게 되었는데 왜냐하면 그것을 통해 하나님의 말씀과 뜻을 배우게 되었다는 겁니다. 그 고난으로 죄를 버리고, 잘못된 습관과 행동을 끊어버리고, 하나님께로 가까이 나아오게 되었다는 겁니다. 누구나 실수할 수 있지만, 그 실수와 실패 이후 내가 어떻게 반응하며 살아가는가? 가 더 중요한 겁니다.
오늘 본문 1절 말씀을 보시면
“아브람이 애굽에서 그와 그의 아내와 모든 소유와 롯과 함께 네게브로 올라가니”
가나안 땅에 큰 흉년이 들어서 아브라함은 가족들을 이끌고 애굽(이집트) 땅에 내려갔다가 자신의 아내 사라를 애굽 왕 바로에게 뺏길 번한 어려움을 겪게 됩니다. 창세기 26장 이삭의 예를 통해서 우리가 살펴봤듯이,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이든, 이삭이든 그 약속의 땅인 가나안을 떠나지 않기를 바라셨던 겁니다.
하지만 아브라함은 당장 먹고 살 문제가 걱정되었고 그래서 하나님의 뜻과 상관없이 자기 마음대로 가나안 땅을 떠나 애굽 땅으로 내려갔었던 것입니다. 하지만 그곳에서 자신의 아내 사라에게 씻지 못할 마음의 상처를 안겨주기도 하고, 애굽의 절대 권력자인 바로에게 몰살당할 위기에 처하기도 했었습니다.
어쨌든 하나님의 특별한 개입으로 아브라함과 바로 왕의 죄를 막으셨고, 아브라함은 가족들을 데리고 애굽을 떠나 네게브로 올라가는 장면입니다.
그리고 3절을 보시면,
“그가 네게브에서부터 길을 떠나 벧엘에 이르며 벧엘과 아이 사이 곧 전에 장막 쳤던 곳에 이르니”
아브라함의 여정을 보면, 벧엘에서 네게브(광야 사막지대)를 거쳐 애굽으로 내려갔었습니다. 아브라함에게는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습니다. 아무리 그 땅에 머무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었을지라도 가나안 원주민들의 텃세와 위협 앞에 그 땅에 더 머물 수가 없었고, 그나마 피해있었던 네게브 사막지대에서 조차 큰 흉년을 만나기 거기에서조차 더 이상 머무를 수 없어 애굽까지 갔었던 겁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의 모습을 보면 풍요로운 애굽 땅을 떠나 다시 어디로 갑니까? 자신이 지나왔던 네게브를 거쳐 다시 벧엘로 올라갑니다. 그런데 ‘벧엘’이란 지명의 뜻은 ‘하나님의 집’이란 뜻을 갖고 있습니다. 그러니깐 이런 지명의 이름을 통해 성경이 우리에게 교훈하고 있는 바가 있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이 죄를 상징하는 애굽을 떠나 다시 하나님의 집으로 올라가고 있는 모습인 것입니다.
그리고 4절을 보시면,
“그가 처음으로 제단을 쌓은 곳이라 그가 거기서 여호와의 이름을 불렀더라”
그 벧엘에서 아브라함은 여호와의 이름을 불렀습니다. 분명 그 땅에는 여전히 아브라함을 위협하는 가나안 원주민들의 텃세가 있었고, 그는 그들의 눈치를 보며 그 땅 이리저리를 배회해야 할지도 모릅니다. 그런 어려움이 예상되지만 이제 벧엘 즉 하나님의 집에 머물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 안에 거하겠다는 것입니다. 어쩌면 그 벧엘에서 드리는 기도는 아브라함에게 절박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하나님의 도우심을 간절히 구하는 기도였을 것입니다.
아브라함이 가나안 땅을 떠났었던 이유는 두 가지였습니다. 하나는 가나안 원주민들의 텃세와 위협이었고, 또 다른 하나는 가나안 땅에 큰 흉년이 들었었던 겁니다. 그렇다면 아브라함이 풍요로운 애굽에서 다시 그 땅으로 돌아간다는 것은 상식선에서 어리석어 보이는 결정이었습니다.
그러나 아브라함이 안락함과 편안함을 따라 애굽으로 갔을 때 도리어 큰 고난을 경험했습니다. 하나님의 뜻을 떠난다는 것이 옳지 않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래서 여러 가지 부담스러운 상황들이 여전히 있고, 가나안 인들의 텃세가 있고, 여전히 흉년이 들어있는 가나안으로 돌아갔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 안에 머무는 것이 가장 큰 복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실수도 하고, 실패할 수도 있습니다. 아브라함 역시 그런 실수와 실패를 경험했지만 그 이후 당장 여러 가지 어려움이 온다할 지라도, 여러 가지 부담스런 상황 속에 들어간다 할지라도 이제는 하나님의 뜻대로 살기로, 하나님의 집에 거하기로,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기로 결정한 것입니다. 하나님 안에 거하는 것이 진정한 복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