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스겔 47:1~12>
– 40일 특새 : 갑절의 은혜를 구하라(15) –
보통 우리가 중학교 세계사 시간에 『세계 4대 문명의 발상지』를 배웁니다. 나일 강을 중심으로 발전한 ‘이집트 문명’과 유프라테스 강과 티그리스 강을 중심으로 발전한 ‘메소포타미아 문명’과 인더스 강을 중심으로 발전한 ‘인더스 문명’ 그리고 중국의 황허 강을 중심으로 발전한 ‘중국 문명(황허 문명)’을 세계 4대 문명의 발상지라고 합니다.
이 중에 가장 오래된 문명은 지금부터 약 6천 년 전에 유프라테스 강과 티그리스 강을 중심으로 발생한 ‘메소포타미아 문명’입니다. 그도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에덴동산에서부터 이 강들이 발원했고, 후에 노아의 방주가 이 강의 발원지와 가까운 아라랏 산에 멈췄고, 노아와 그 후손들은 산에서 내려와 유프라테스 강과 티그리스 강을 중심으로 삶의 터전으로 삼았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이 모이면 자연히 집도 짓고, 상거래도 하고 여러 가지 문명이 발전할 수밖에 없었기 때문에 메소포타미아 문명이 최초의 문명의 발상지가 된 것입니다. 세계사의 역사는 성경의 역사와 같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세계 4대 문명 뿐이 아니라 모든 나라가 세워지는 그 중심에도 항상 강이 있었습니다. 우리나라만 해도 여러 강들이 있는데 남한에는 한강을 중심으로 서울이 수도가 되었고, 우리나라 제2의 도시 부산 역시 낙동강으로 중심으로 도시가 형성이 된 것입니다. 북한이라고 예외는 아닙니다. 평양 중심에 흐르는 강이 대동강이고, 이 강을 중심으로 평양이라는 큰 도시가 만들어진 겁니다.
이처럼 인간은 물론, 동물이나 식물 그리고 작은 미생물도 물이 없이는 그 생명을 유지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우리 인간의 몸도 60~80%가 물로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자기 몸의 2%의 수분만 빠져나가도 인간은 심한 갈증을 느끼게 되고, 5~8% 이상의 수분이 빠져나가면 쇼크가 올 수도 있고, 11% 이상 빠져나가면 죽을 수도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 인간은 물이 없으면 살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요한복음 4장 14절에서
“내가 주는 물을 마시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니 내가 주는 물은 그 속에서 영생하도록 솟아나는 샘물이 되리라”
예수님께서는 자신을 생명의 샘물로 비유하시면서 그 물을 마시는 사람이 영생을 얻게 된다는 것을 말씀하셨습니다. 물이 곧 생명이라는 말씀인 것입니다. 반대로 이 물을 마시지 않는 사람은 인생 속에서 영적인 탈수 증세를 겪게 된다는 것이고, 심하게는 영적 죽음에 으르게 된다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는 에스겔이 본 특별한 환상을 통해 성전으로부터 흘러나온 물이 이르는 곳마다 어떤 변화들을 일으키는지를 보여주시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것을 통해 우리에게 주시는 메시지가 있습니다.
1. 교회는 생명의 원천수이다
에스겔 선지자는 바벨론에 의해 유다왕국이 몰락한 이후 모든 백성들이 포로로 잡혀 간 이후부터 활동한 선지자입니다. 그는 포로로 잡혀간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예언했던 선지자였습니다.
그 때까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성전’이라고 하는 것은 모세를 통해 이스라엘 백성들이 출애굽 한 이후 광야 40년 생활 중에 만들었던 ‘성막’이란 것이 있었습니다. 이 성막은 솔로몬이 성전을 건축하기 전까지 하나님께서 임재하시고, 백성들의 기도를 들으시고, 그들을 만나주시는 예배의 장소로서 역할을 했었습니다.
그리고 솔로몬을 통해서 ‘솔로몬 성전’이 건축되고, 이 성전은 B.C.586년 예루살렘이 멸망할 때까지 동일한 기능을 했던 장소였습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 1절을 보시면,
“그가 나를 데리고 성전 문에 이르시니 성전의 앞면이 동쪽을 향하였는데 그 문지방 밑에서 물이 나와 동쪽으로 흐르다가 성전 오른쪽 제단 남쪽으로 흘러 내리더라”
하나님께서 에스겔에게 보여주신 성전 환상은 모세의 성막도, 솔로몬의 성전도 아닌 새로운 성전의 모습이었습니다. 그 성전은 이전의 성전들과는 다른 특별한 모습이 하나 있었는데, 성전의 문지방으로부터 물이 흘러내린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물이 성전 밖으로 흘러 시내가 되고, 후에는 건너지 못할 큰 강이 되는 특별한 환상이었습니다.
그런데 에스겔 환상에서 보여주는 성전은 이 땅에 실제하는 성전도, 에스겔 당시로부터 미래에 있게 될 성전도 아닙니다. 솔로몬 성전은 바벨론 침공시에 파괴되었고, 70년 포로 후에 총독 스룹바벨을 통해 지어진 성전은 후에 헤롯 왕이 정치적 목적으로 헤롯 성전으로 증축했었습니다. 하지만 A.D.70년 로마의 티투스 장군에 의해 예루살렘 성전은 완전히 파괴되었습니다. 그리고 지금 예루살렘 성전 터에는 이슬람의 모스크가 세워져 있습니다.
요한계시록 21:22절 말씀에 보시면,
“성 안에서 내가 성전을 보지 못하였으니 이는 주 하나님 곧 전능하신 이와 및 어린 양이 그 성전이심이라”
천국에도 성전이 없습니다. 왜냐하면 “이는 주 하나님 곧 전능하신 이와 및 어린 양이 그 성전”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요한복음 2장 21절에서도 예수님은 “성전된 자기 육체를 가리켜 말씀하신 것이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즉 예수님이 곧 성전이고, 교회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에스겔 선지자가 본 새로운 성전에 대한 환상은 장차 성전 되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어떤 일들을 이루시는가? 를 암시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요한복음 7장 38절에서는
“나를 믿는 자는 성경에 이름과 같이 그 배에서 생수의 강이 흘러나오리라”
진정한 성전이시며, 교회의 머리가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흘러나오는 생명의 강을 마시는 자 즉, 그 분을 믿는 자들에게는 생명과 회복과 치유의 역사가 시작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주님의 몸 된 교회를 통해 주님의 그 사역과 역사는 지금도 계속 이어지고 있는 것입니다. 교회가 생수의 근원이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하고, 흘려보낼 때 그 주변에는 놀라운 회복과 치유의 역사가 일어나게 되어 있는 것입니다. 한 사람이 살아나고, 그 가정이 살아나고, 자녀들이 살아나고, 그가 속한 공동체와 사회 그리고 더 나아가 나라와 민족도 살아나는 것입니다. 그래서 교회가 생명의 원천수라고 하는 겁니다.
저 역시도 교회를 다니면서 예수님을 알게 되고, 믿게 된 겁니다. 저는 깨어진 가정에서 고아처럼 자랐고, 인생의 어떤 소망도 꿈도 없이 그렇게 살아가고 있었습니다. 저는 뭐 하나 잘하는 것도 없었고, 자라면서 그 누구에게도 주목 한번 받아보지 못했던 사람입니다. 때문에 어떤 자신감도 없었고, 소극적이고, 심각할 정도로 내성적인 성격 때문에 길을 몰라도 사람들에게 길을 물어보지도 못할 정도였습니다.
하지만 교회를 다니고, 예수님을 믿게 되면서 제 인생이 완전히 뒤바뀐 것입니다. 예수의 생수의 강이 제 안에 흘러 들어오면서 메말라 소망이 없던 제 삶이 다시 살아나기 시작했던 것입니다. 꿈이 생기기 시작하고, 내일에 대한 소망을 갖게 되었습니다. 누군가가 나를 주목하든 하지 않든 그건 이젠 상관이 없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나를 사랑하시고, 나를 주목하고 계심을 믿고 있기 때문입니다. 잘 할 줄 아는 게 아무것도 없어 늘 주눅 들고 자신감 없어 하던 제가 어느 순간부터 담대해져 있었습니다. 겁이 없어졌습니다.
저는 열아홉 살에 교회를 다니게 된 것이 제 인생을 완전히 바꿔놓게 된 터닝 포인트가 된 것입니다. 지금도 주님께서는 교회를 통해서 그 역사를 이루어가고 계십니다. 주님은 지금도 얼마든지 여러분의 인생을 새롭게 하실 것을 믿습니다.
우리나라가 일제에 나라를 빼앗겼을 때, 우리나라의 독립을 위해 싸우고, 대한민국 임시정부에서 주석을 지낸, 우리나라 사람들이 가장 존경하는 독립운동가 중에 한 분이 ‘백범 김구(金九) 선생(1876~1949)’이십니다. 김구 선생은 여러 가지 종교를 가져봤습니다. 유교(성리학)에서 동학으로, 불교로 그리고 마지막에는 감리교 신자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이런 결론을 내렸습니다.
“경찰서 100개 세우는 것보다 학교 10개 세우는 것이 낫고, 학교 10개 세우는 것보다 교회 하나 세우는 것이 낫다.”
그러니 교회가 얼마나 중요하며, 얼마나 큰일을 하고 있는 것이겠습니까? 여러분이 오늘 예배하기 위해 교회에 오셨는데, 여기서 은혜 받고 변화를 받으면 여러분이 가는 곳마다 어떤 변화들이 있겠습니까?
때문에 여러분이 교회에 나오는 것을 소홀히 여겨서는 안 됩니다. 교회가 생명의 원천수로서, 지금도 누군가를 살리고 회복하고 치유하고 있는데 다른데 가 있으면 그는 이 생명수를 못 마시는 겁니다.
우리 부모님들은 자녀들이 교회 나오는 것을 적극적으로 지지해 주어야 하는 것입니다. 요즘 새벽기도회 때 어린 자녀들을 데리고 오시는데 이것만큼 귀한 신앙 교육도 없는 것입니다. 그런 자녀들은 비뚤어질 수가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 안에서 바르게 성장해 나갈 수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그 자녀를 친히 양육해 주시는 것입니다.
여러분 교회를 가까이 하시길 바랍니다. 집도 교회 근처에 얻으시길 바랍니다. 주중에 교회 오시는 횟수를 늘리시길 바랍니다. 자녀들 데리고 자주 교회로 오고 가십시오. 오셔서 기도도 하시고, 성경도 읽으시고, 좋은 분들과 교제도 나누시길 바랍니다. 교회 중심의 생활을 하실 때, 여러분의 믿음은 날마다 성장해 나갈 겁니다. 그 믿음이 성장해 나갈 때마다 내 삶에는 변화들이 나타나게 될 것입니다. 내가 변할 때 내 주변에도 새로운 변화들이 시작되는 것입니다.
2. 깊은 은혜가 세상을 살린다
성전 문지방에서 흘러내리기 시작한 물은 성전 밖으로 흐르기 시작합니다. 하나님께서 에스겔을 데리고 그 물이 흘러가는 곳을 보게 하십니다. 그리고 에스겔에게 그 강을 건너게 하시는데 약 450m 정도는 물이 발목정도의 깊이였습니다(3절). 그리고 또 450m를 더 가니 물이 이번엔 무릎 높이였고, 다시 450m를 더 가니 물이 허리까지 올랐습니다(4절).
5절 말씀을 보시면,
“다시 천 척(약 450m)을 측량하시니 물이 내가 건너지 못할 강이 된지라 그 물이 가득하여 헤엄칠 만한 물이요 사람이 능히 건너지 못할 강이더라”
이것이 주는 의미가 무엇이겠습니까? 수량이 적고 강이 얕을 경우에는 비가 조금 안 오고, 가무르게 되면 쉽게 강이 말라 바닥을 드러내는 경우가 많습니다. 강에 물이 있어야 그 주변이 그 강을 통해 혜택을 입게 되는데, 강물이 얕아서 말라 버리면 주변에 퍼줄 물이 없고, 그러면 강바닥이 말랐으니 주변은 말할 것도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 5절에서 보여주고 있는 강의 모습은 에스겔이 헤엄을 칠 수 밖에 없는 깊은 강이 되었다는 것이고, 그 강이 너무 크기 때문에 사람이 능히 건너지 못할 강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강의 물이 점점 많아지고, 강이 점점 깊어질 때 어떤 변화들이 강 주변에 나타납니까?
7절에 보시면, ‘나무가 심히 많더라’고 기록합니다. 강에 물이 많고, 물이 깊다보니깐 강 주변에 많은 식물들, 나무들이 자라나게 되어 있는 겁니다.
두 번째로는 8절에 보니깐 ‘사해(Dead Sea)갈 살아난다’는 것입니다. 사해는 염도가 너무 높아서 생물이 살 수 없는 죽음의 바다입니다. 그런데 생명의 강이 흘러들어가니깐 그 사해바다도 다시 살아난다는 것입니다.
세 번째로는 9절에 보니깐, 그 강이 이르는 곳마다 ‘모든 생물이 살고, 물고기가 많다’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물이 많으니 당연한 결과인 것입니다.
네 번째로는 12절에 보니깐, ‘각종 과실이 풍성히 열매 맺는다’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것 역시 당연한 결과인 것입니다.
남아메리카의 아마존 강은 총 길이가 7천km에 달하고, 그 강 주변의 아마존 밀림은 남아메리카 전체 면적의 40%를 차지하고, 한반도의 30배가 넘는 땅입니다.
일단 아마존 강은 ‘세계 최대의 강’입니다. 바다를 제외한 지구 표면에 있는 민물(담수)의 약 20%를 차지합니다. 또한 아마존 강을 중심으로 세계 최대의 밀림은 지구 산소량의 1/4을 만들어내기 때문에 ‘지구의 허파’라는 별명이 붙어 있습니다. 전 세계 식물의 20%가 여기에 살고 있고, 전 세게 동물의 10%가 이 밀림에 살고, 조류의 25%가 이 밀림에 살고 있는 겁니다.
오늘 본문의 에스겔이 본 생명의 강의 환상이 우리에게 교훈하고 있는 것도 같습니다. 강이 깊고 수량이 많으면 그 강 하나로 인해서 주변이 다 살아나게 되어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신앙생활을 설렁설렁하면 나도 제대로 서 있지 못하고, 당연히 우리 주변에도 선한 영향력을 끼칠 수가 없는 것입니다. 깊은 강이 주변을 살리는 것처럼, 우리의 믿음과 은혜가 깊어져야 나도 살고, 가족도 살리고, 자녀도 살리고, 이 도시에 살고 있는 교민들도 살릴 수 있는 것입니다.
발목까지 밖에 안 오는 얕은 신앙은 작은 시험 하나에도 그 강바닥까지 다 말라버리는 겁니다. 사람들의 말 한마디에, 어떤 사람의 눈빛 하나, 표정 하나에 감정이 흔들리고 교회를 가니 마니, 시험에 들었니 말았니… 그러고 있는 겁니다. 그래서 우리가 누구를 살릴 수 있겠습니까?
어떤 성도들은 남편이 변화되길 바라고, 자녀들이 변화되길 바라고 있습니다. 그리고 적어도 그런 소망에 대해서 간절한 마음도 없지 않습니다. 하지만 내가 깊은 은혜의 자리로 들어가지 않으면 가족들은 변화될 수가 없는 것입니다. 내가 먼저 깊은 은혜의 자리로 들어가야 하는 것입니다. 내게 넘치는 은혜가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내 믿음이 더 깊어지고, 내가 더 성령 충만해 질 때 주변도 변화될 수 있는 것입니다.
3. 세상에 못 고칠 인생은 없다
보통 바닷물의 소금 농도는 3.5% 정도 됩니다. 그런데 사해의 염도는 34.2%나 됩니다. 무슨 말이냐면 사해는 영어로도 Dead Sea(죽음의 바다)라는 뜻입니다. 이렇게 아름다운 색깔을 갖고 있어도 이 바다에서는 너무 높은 염도 때문에 어떤 생명체도 살 수가 없습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 10절 말씀을 보시면,
“또 이 강 가에 어부가 설 것이니 엔게디에서부터 에네글라임까지 그물 치는 곳이 될 것이라 그 고기가 각기 종류를 따라 큰 바다의 고기 같이 심히 많으려니와”
엔게디에서부터 에네글라임까지 어부들이 그물 치며 각종 고기를 잡아 올리게 될 것이라는 것입니다. 엔게디와 에네글라임은 사해 주변의 대표적인 해안지역을 의미하는 거 같습니다. 동쪽에서 서쪽으로, 남쪽에서 북쪽으로 수많은 어부들이 고기를 잡기 위해 그물 치는 바다가 될 것이라는 것입니다.
9절 말씀을 보시면,
“이 강물이 이르는 곳마다 번성하는 모든 생물이 살고 또 고기가 심히 많으리니 이 물이 흘러 들어가므로 바닷물이 되살아나겠고 이 강이 이르는 각처에 모든 것이 살 것이며”
그 죽음의 바다까지도 살아날 수 있었던 것은 그곳에 예수 그리스도의 생명의 강이 흘러들어갔기 때문입니다. 12절 마지막 부분에 보면 “그 잎사귀는 약 재료가 되리라”는 말씀이 나옵니다. 이것을 요한계시록 22장 2절에서는 “그 나무 잎사귀들은 만국을 치료하기 위하여 있더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오늘 날의 사해는 여전히 동일하게 죽음의 바다입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의 에스겔 환상을 통해서 사해 바다를 비유로 들고 있는 것은 사해 바다를 살린다는 것이 아니라, 그렇게 소망이 없고, 가망이 없고, 가능성이 없는 그런 인생이라도 주님께서는 다 살리신다는 것입니다. 세상에 못 고칠 인생은 없습니다. 주님께 불가능한 일은 없습니다.
아무리 가능성 없어 보이는 인생이라 할지라도 생명의 강이신 주님께서 그에게 흘러들어갈 때 그 인생 속에 치유가 나타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그를 치료하시는 것입니다.
사해와 같이 전혀 생명체가 살 수 없는 바다라 할지라도 큰 생명의 강이 그리로 흘러갈 때 그 죽음의 바다까지도 살리신다는 것입니다. 지금 내 인생이 사해 바다와 같을 수 있습니다. 지금 우리 가정이 그런 상태일 수도 있습니다. 때로는 자녀의 모습을 보면서도 그런 감정이 들 수도 있고, 우리 가정의 형편과 상황과 생업을 보면서도 소망이 전혀 보이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기억하십시오. 주님이 못 고칠 인생은 없습니다. 오늘도 그에게 치유의 강이 흘러들어가 그를 고치고, 그의 인생을 새롭게 하실 것을 믿으시길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