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세기 17:15~27>
– 40일 특새 : 갑절의 은혜를 구하라(28) –
우리나라 제주도에 가면, 우리나라 최초의 미로공원인 『김녕 미로공원』이란 곳이 있습니다. 미로라는 게 입구도 있고 출구도 있는데 한 번 들어가면 출구를 찾기가 쉽지 않습니다. 이쪽으로 가면 길이 나올 거 같은데 막다른 길이고, 저쪽으로 가면 출구가 나올 줄 알았는데 오히려 제자리를 뺑뺑 돌고 있기도 하면서 길을 찾지 못해 그 미로 안에서 계속 헤매게 되는 것입니다.
이럴 때 자주 쓰이는 표현이
‘출구가 보이지 않는다’
라는 겁니다. 그런데 이게 그냥 유명 관광지의 미로면 다행인데, 우리 인생에 정말 출구가 보이지 않는 때도 우리가 종종 만나게 된다는 겁니다.
저 역시 부모 없이 자라나던 성장기가 그러했습니다. 내게 주어진 하루하루를 그냥 살아가는 거지 당시에 저는 저의 미래에 대한 어떠한 소망을 가질 수가 없었습니다. 제가 똑똑하고 잘난 아이였다면 좀 다를 수는 있었을 겁니다.
하지만 저는 남들보다 똑똑하지도 않았고, 건강이 좋았던 것도 아니고, 특별한 재주와 재능이 있었던 것도 아니고, 운동을 잘 했던 것도 아니고, 미술이나 음악을 잘 했던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성격이 좋아서 여러 사람들하고 잘 어울리는 그런 사람도 아니었습니다. 집은 찢어지게 가난했고, 여기 필리핀 빈민가의 사람들과 같이 하루 벌어 하루를 버티어 내야하고 그것조차 없으면 그냥 굶는 일은 다반사였습니다.
그러니 내일에 대한 무슨 꿈과 비전을 갖는다는 것이 저에게는 가당치도 않은 상황이었습니다. 저는 매사에 부정적인 성향을 갖게 되었고, 모든 일에 비관적인 마음도 있었고, 공평하지 않은 세상에 대한 불평 또한 가득했었습니다. 성격도, 실력도, 능력도, 돈도, 배경도… 그 어느 것 하나 갖춰진 것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제가 예수 믿기 전에는 웃어본 기억이 별로 없습니다. 저는 늘 우울했던 거 같습니다. 즐겁고 기쁠만한 일, 소망적인 일이 전혀 없었던 거 같습니다.
우리에겐 『연금술사』라는 베스트셀러의 저자로 잘 알려진 브라질의 ‘파울로 코엘료(paulo Coelho, 1947~)’가 이런 말을 했습니다.
“가장 어두운 시간은 해뜨기 바로 직전의 시간이다”
저는 성장기 내내 그렇게 출구가 보이지 않는 가장 어두운 터널에 갇혀 암울하게 생활하던 열아홉 살 때 친구의 전도로 우연히 교회에 나오게 되었고, 예수님을 영접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그 때 저의 삶은 지옥에서 천국으로 옮겨진 거 같았습니다. 환경 자체는 특별히 변한 게 없었습니다. 하지만 제 마음에 변화가 시작됐고, 제가 바라보는 모든 시각이 달라지기 시작했던 것입니다. 문제는 환경이 아니라 제 마음에 있었던 겁니다. 해뜨기 바로 직전에 가장 어두웠던 것처럼 저는 예수님을 만남으로 일상 속에서 천국을 맛보며 살게 되었던 것입니다.
고난과 시련의 무게로 인해 우리의 삶에 웃을 날이 없고, 또 이 시련이 끝나지 않을 거 같은 두려움이 몰려올 때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여러분을 웃게 하실 것입니다. 여러분의 인생의 꽃길을 걷게 되는 날을 주실 것입니다. 그 일을 통해 하나님은 반드시 영광을 받으실 것입니다.
1. 생각의 한계를 깨뜨려라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이 99세 때 그에게 찾아오셨습니다. 그리고 그에게 엄청난 축복의 언약을 해 주셨고, 평생을 갖고 있었던 ‘아브람’이란 이름을 ‘아브라함’으로 개명해 주셨습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에서 그의 부인인 사래의 이름도 개명해 주시고 있는 장면을 볼 수 있습니다.
15절을 보시면,
“하나님이 또 아브라함에게 이르시되 네 아내 사래는 이름을 사래라 하지 말고 사라라 하라”
아브람에서 아브라함으로 개명해 주신 것을 보면 ‘큰 아버지’라는 뜻에서 ‘여러 민족의 아버지’란 이름으로 철자를 약간만 바꾸어 주셨는데, 사라의 경우도 비슷합니다.
원래 지난 89년 동안 쓰던 이름이 ‘사래(공주)’란 이름이었습니다. 사라가 애굽에 내려갔을 때, 애굽 왕의 신하들과 바로 왕까지도 그 미모에 감탄할 정도로 대단한 미인이었다는 것을 기록하고 있는데, 아마도 동화속의 공주처럼 예뻤었나 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그 예쁜 이름을 ‘사라(여러 민족의 어머니)’란 이름으로 바꿔 주셨던 겁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람에서 아브라함으로 이름을 개명하신 것은 아브라함이 단지 하나의 부족장 정도가 되는 것이 아니라 여러 나라, 여러 민족의 아버지 곧 시조와 조상이 되게 하시겠다는 원대한 하나님의 계획이 담겨 있었던 것입니다.
그의 부인인 사래를 사라로 바꿔주신 것도 같은 선상에서 이해하시면 됩니다. 남편이 하나의 작은 부족의 부족장에서 여러 민족과 나라의 아버지가 되는데, 그 아내가 한 남자에게만 사랑받고 예쁨 받는 공주로 일생을 마치지 않을 것이라는 것입니다. 사라 역시 여러 민족의 어머니가 될 것이라는 겁니다. 사라를 통해 여러 민족의 왕들이 나게 된다는 것입니다. 사라는 하나님의 원대한 비전이 담겨 있는 이름이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17절을 보실까요?
“아브라함이 엎드려 웃으며 마음속으로 이르되 백 세 된 사람이 어찌 자식을 낳을까 사라는 구십 세니 어찌 출산하리요”
아브라함은 이미 오래 전에 사라를 통해 아이를 낳게 될 것이라는 꿈을 접었습니다. 14년 전에 하갈을 통해 이스마엘을 낳았을 때는 다시 굳게 믿어야겠다고 생각했었던 거 같습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 하갈 사건으로 진노하셨는지 14년 동안 침묵하셨습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께서 자신에게 진노하셔서 사라를 통해 아이를 주시지 않으실 거 같다고 생각도 했을 겁니다. 그리고 세월이 오래 지나니 그의 부인 사라가 여성으로서 출산할 수 있는 시기가 지난 지 오래 되었던 것입니다. 사라가 127세까지 살았는데, 당시 사라의 나이가 89세였습니다. 그러면 이미 사라는 노년기에 접어든지 좀 시간이 흘렀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아브라함 생각에도 ‘더 이상 그런 기대를 갖지 말아야 겠다’라고 생각했던 거 같습니다. ‘자신의 나이는 100세고, 사라는 90세인데 신체적으로 이건 불가능한 나이다’라고 일찌감치 생각을 정리했던 것입니다.
작년에 멕시코에서 사시는 만 70세의 ‘마리아 데 라 루즈(Maria de la luz)’라는 할머니가 7월18일에 여덟 번째 아이를 출산한다는 해외토픽이 방송된 적이 있습니다. 의사들은 임신을 확인하기 위해 10회에 걸쳐서 초음파검사를 했는데, 모두 임신으로 확인되었고, 태아는 여자 아이였다고 합니다. 이 할머니는 하나님께 감사하다고 말했다고 합니다.
우리의 ‘생각의 틀’이란 게 있습니다. 우리는 우리의 생각의 틀에 갇혀서 내가 안 되는 건 다른 사람도 안 되는 것이고, 내가 불가능한 건 다른 사람도 불가능한 것처럼 생각할 때가 많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에서 우리의 생각의 한계를 넘어서는 일들이 종종 일어나고 있습니다. 그게 그 사람에게만 일어나는 특별한 기적이라고 생각하지 마십시오. 우리가 갖고 있는 생각의 틀을 깨는 동시에 우리는 그 너머의 세계를 경험하게 되는 것입니다.
사래라는 이름도, 아브람이란 이름도 그들의 육신의 부모님들이 지어주셨을 것입니다. 자녀의 이름을 지어주면서 크고 잘 되라는 뜻으로 좋은 이름을 작명해 줍니다. 육신의 부모님이 생각하기에 ‘공주’정도면 훌륭하게 크는 거고, 한 가문의 ‘부족장’ 정도면 그것도 훌륭하지 않은가 라고 생각했을 겁니다.
그런데 이것은 우리의 생각의 틀 또는 우리 생각의 한계를 보여주고 있는 것이기도 합니다. 하나님은 작은 공주 정도가 아니라, 열국의 어머니로 사라를 세우시려는 계획을 갖고 있으셨던 것입니다. 지금 당장 아이도 없고, 아이를 출산할 나이도 되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그녀의 이름을 사라(열국의 어머니)라 바꿔주신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우리의 생각의 한계를 깨뜨려야 합니다. 그 생각의 한계를 깨뜨리기 시작할 때, 비로소 우리는 미래에 웃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그 생각의 한계에 늘 갇혀 있게 되면 결코 웃게 될 일이 없을 것입니다. 지금의 상황과 조건들, 내 능력과 형편들을 보면 더 큰 꿈을 갖게 되기 어려울 것입니다.
그런데 그 생각의 틀부터 깨야 하는 것입니다. 성경은 미련한 자를 들어서 지혜로운 자를 부끄럽게 하시고, 가난한 자들을 들어 부요한 자를 부끄럽게 하시며, 연약한 자를 들어 건강한 자를 부끄럽게 하시는 전능하신 하나님이 우리의 하늘 아버지이심을 말씀하시고 있습니다(고전1:27,28).
2. 살아있는 동안 도전하라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89세 된 그의 아내 사라가 내년 이만 때에는 아들을 안고 있게 될 것이라고 말씀하셨는데, 아브라함은 도저히 믿겨지지가 않았던 거 같습니다.
그래서 17절 말씀을 보시면,
“아브라함이 엎드려 웃으며 마음속으로 이르되 백 세 된 사람이 어찌 자식을 낳을까 사라는 구십 세니 어찌 출산하리요”
아브라함은 하나님께서 나타나셔서 엄위하신 음성으로 말씀하시니깐 그 앞에 바짝 엎드렸습니다. 엎드려서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데 내용이 너무 어이없게 들렸습니다. 그래서 피식하고 웃었던 거 같습니다. 그리고 자신은 곧 100세가 되고, 사라는 90세가 되는데 어떻게 아이를 출산하겠느냐고 하나님께 묻고 있는 장면입니다.
아브라함은 이미 오래전에 사라와의 사이에서 아이를 출산한다는 것을 일찌감치 포기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자신은 이미 나이가 너무 들었고, 그런 나이에 아이를 낳는 사람은 없고, 그런 사이에 성공한 사람은 못 봤고, 아이를 갖기에는 너무 늦은 나이고… 이런 생각들로 인해서 사라의 임신에 대해서는 포기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저는 부교역자 생활을 20년간 했습니다. 저는 그게 제 체질에 잘 맞습니다. ‘훌륭한 리더십 아래에서 참모 역할 하는 게 적성에 잘 맞다’고 생각하며 살아왔습니다. 때문에 교회개척 같은 것은 생각을 별로 해 본 적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40대 중반에 하나님께서 갑자기 저에게 ‘교회 개척 미션’을 주신 것입니다. 처음엔 이것이 저에게 주시는 비전이 아니라고 애써 부인하기도 했었습니다.
하지만 정확하게 말하자면 저는 자신이 없었습니다. 그리고 ‘교회 개척 같은 건 젊을 때 하는 게 맞다’고 늘 생각하고 있었기 때문에 저는 그냥 ‘이렇게 부교역자로 사역하다 은퇴하는 게 맞다’고 생각했었습니다. 그리고 이 나이에 개척하다가 실패라도 하면 다시 회생한다는 게 너무 어려울 거 같았습니다. 개척하기엔 제 나이는 너무 많았고, 위험 부담이 너무 크다는 생각이 저의 마음을 지배하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믿음은 지금 당장의 조건과 여건을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을 향한 그 믿음 하나로 도전하는 것입니다. 나이 때문에, 건강 때문에, 재정 때문에, 환경 때문에, 능력 때문에… 그렇게 여러 가지 이유들을 들어가며 포기하는 것은 믿음이 없는 겁니다. 믿음은 나에게 주목하지 않고 하나님께 주목하는 것입니다.
독일의 소설가 ‘장 파울(Jean Paul, 1763~1825)’은 이런 말을 남겼습니다.
“실패한 자가 패배하는 것이 아니라, 포기한 자가 패배한 것이다.”
우리가 살아있다면 아직 도전할 기회가 여전히 남아 있는 것입니다. 실패했기 때문에 실패한 게 아니라, 포기했기 때문에 실패한 것입니다. 우리가 포기하지만 않으면 아직 여전히 나에게도 기회는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살아 있다면, 살아있는 동안 절대로 포기해서는 안 됩니다. 우리가 살아있는 동안 절대 포기하지 않고 계속 도전해 나가는 것이 믿음의 사람이 가져야 할 자세인 것입니다.
19절 말씀을 보시면,
“하나님이 이르시되 아니라 네 아내 사라가 네게 아들을 낳으리니 너는 그 이름을 이삭이라 하라 내가 그와 내 언약을 세우리니 그의 후손에게 영원한 언약이 되리라”
하나님께서는 1년 뒤 사라를 통해 낳게 될 아들의 이름까지 지어주십니다. 그 이름은 ‘이삭’이라고 지으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이름의 뜻이 ‘웃음’이란 뜻입니다. 아브라함이 어이없어 웃었던 웃음이 생각나는 이름이기도 하고, 하나님께서 아브라함 가정에 이삭의 출생으로 인해 ‘웃음’을 주시겠다는 의미이기도 합니다.
창세기 21:6절을 보시면,
“사라가 이르되 하나님이 나를 웃게 하시니 듣는 자가 다 나와 함께 웃으리로다”
1년 뒤 사라는 아들 이삭을 낳게 됩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나를 웃게 하시니 듣는 자가 다 나와 함께 웃으리로다”라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정말 이름의 뜻과 같이 아브라함과 사라에게 큰 기쁨으로 인한 웃음이 있었던 것입니다.
아브라함 99세 때, 사라의 나이 89세 때는 어떤 꿈을 가질 나이도 아니고, 어떤 내일에 대한 소망을 가질 나이도 아니었고, 당장 눈에 보여 지는 무엇이 있었던 것도 아니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그에게 나타나셔서 “너는 웃게 될 것이다”라고 예언의 말씀을 주시고 있었던 것입니다.
오늘 우리에게 동일하게 말씀하시고 있습니다. 여러분의 지금의 삶은 힘들고 어려울 것입니다. 이 시련의 끝을 알 수 없고, 출구가 없는 삶을 살고 있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여러분을 웃게 해 주실 것입니다. 여러분은 하나님 안에서 크게 웃게 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