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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먹이시고 살리시는 하나님”

<열왕기상 17:1~7> 

– 열왕기상(30) –

 

 

오늘 본문부터 이스라엘 역사 속에 위대하게 쓰임 받았던 선지자 엘리야에 관한 이야기가 시작됩니다. 엘리야 선지자는 바알과 아세라 우상이 북이스라엘에 가득할 때인 아합 왕의 통치시기에 활동을 시작했습니다.

바알은 아들 신이고, 아세라는 어머니 신입니다. 잘 알려진 그리스 신화나, 로마신화 또는 이집트 신화를 보면 신들끼리 사랑도 하고, 결혼도 하고, 신이 죽기도 하고, 다시 살아나기도 하는 그런 내용들이 많습니다. 이스라엘 역사 속에 어머니와 아들 신인 바알과 아세라 신은 가장 큰 영향력을 발휘하던 우상들이었습니다. 고대 사회에서 이처럼 모자신(母子神)숭배 사상은 아주 널리 퍼져있었던 종교형식이었습니다. 그런데 이런 모자숭배가 퍼지게 된 원인이 있습니다.

 

창세기 10장 8절, 9절을 보시면,

“구스가 또 니므롯을 낳았으니 그는 세상에 첫 용사라. 그가 여호와 앞에서 용감한 사냥꾼이 되었으므로 속담에 이르기를 아무는 여호와 앞에 니므롯 같이 용감한 사냥꾼이로다”

 

노아의 세 아들 중에 하나가 ‘함’이고, 그가 낳은 아들 중에 하나가 ‘구스’였고, 그가 낳은 아들이 ‘니므롯’이었던 겁니다. 그러니깐 니므롯은 노아의 증손자 정도 되는 겁니다. 물론 성경이 기록될 때 직계 아들을 기록하기도 하지만 중요한 인물만 기록하기도 했기 때문에 증손자일 수도 있고, 어쩌면 더 먼 후손일 수도 있습니다.

이 시기에 유프라테스강과 티그리스 강 사이인 메소포타미아 지역에 많은 사람들이 퍼져 살고 있었습니다. 그 중에 바벨론이란 지역에 ‘니므롯’이란 용감한 장수가 있었습니다. 니므롯은 들짐승들이 마을에 내려와 사람들을 헤하려 하면, 탁월한 사냥 솜씨를 통해 마을 사람들을 보호했던 겁니다. 그는 사람들의 존경과 지지를 한 몸에 받게 되고, 그들 사이에 카리스마적인 지도자요 그들의 왕이 되어 바벨을 건설하게 됩니다.

 

 

니므롯은 백성들을 동원해 일반 돌 대신에 벽돌을 굽고 집을 짓고 성을 건설하게 했습니다.

 

그리곤 창세기 11장 3절에 의하면

“자, 성읍과 탑을 건설하여 그 탑 꼭대기를 하늘에 닿게 하여 우리 이름을 내고 온 지면에 흩어짐을 면하자”

 

그는 당시 바벨에서 가장 유력한 사람이었고, 그들의 왕과 같은 존재로서 백성을 선동하여 바벨탑을 쌓기 시작했던 것입니다. 그리고 그 탑을 통해 자신을 중심으로 백성들을 결집하려 했던 것입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 그 탑을 무너뜨리고 사람들을 흩어버렸다고 성경은 기록하고 있습니다.

 

 

고대 사람들 사이에서 대단한 카리스마를 발휘에 거의 신적 존재로 추앙 받던 니므롯이 죽었는데,

그의 아내인 ‘세미라미스’는 백성들에게 ‘니므롯이 죽은 것이 아니라 태양신이 되었다’고 말했고, 어리석은 백성들은 그 사실을 하나의 신앙으로 받아들이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세미라미스는 일찍 죽은 남편인 니므롯의 후광을 입어 여왕으로 군림하기 시작합니다.

그러다 사생아를 갖게 되었는데, 여왕인 세미라미스는 그것을 감추고 태양신인 니므롯이 자기 몸을 통해 환생했다고 해서 그 태어난 아들을 ‘담무스’라고 이름하게 됩니다. 그리고 태양신인 니므롯의 환생체인 담무스를 섬기도록 했고, 자신은 성스런 아들의 어머니로서 거룩한 어머니(성모)로서 우상화했던 것입니다.

고대 문명의 발상지인 메소포타미아의 바벨론에서부터 [니므롯-세미라미스-담무스]의 숭배가 시작되어 ‘태양신 숭배와 모자(母子)숭배사상’이 시작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모자숭배사상은 바벨탑 붕괴로부터 사람들이 전 세계로 흩어지면서 이 모자숭배종교도 함께 퍼져나가기 시작했습니다. 각 나라마다 이름만 다를 뿐이지 똑같이 어머니 신과 아들 신을 섬기는 모습은 똑같습니다.

그래서 바벨론에서 시작한 ‘세미라미스(Semiramis)와 담무스(Tamuz)’는 이집트에서는 ‘이시스(Isis)와 호러스(Horus)’라고 불리며 숭배되어집니다. 이것은 수메리아와 중국과 인도와 그리스에도 이름만 다르지 모자숭배가 존재하고 있고, 더더욱 충격적인 것은 ‘마리아와 아기예수’ 역시 같은 선상에서 생겨난 종교인 것입니다.

 

 

여러분은 이 조각상들이 뭐라고 생각하십니까? 사실 이 둘은 너무나도 닮아 있는데, 다른 형상들입니다. 왼쪽에 왕관을 쓰고 있는 형상은 바벨론 신인 ‘세미라미스와 담무스(니므롯)’입니다. 그리고 오른쪽 왕관이 없는 여성은 ‘마리아와 아기예수’의 모습입니다. 아래쪽 사진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그런데 아래쪽 사진을 보면 나중에는 마리아의 머리에 세미라미스와 똑같은 왕관이 쓴 모습이 되어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세미라미스와 똑같은 모습입니다.

왜 기독교가 이렇게 되어 버렸을까요? 우리가 신약성경과 사도행전 또는 바울 서신들을 보면 전혀 성모숭배와 같은 분위기는 없습니다. 초기 기독교에는 그런 게 없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로마제국 아래에서 기독교가 오랫동안 박해받는 종교였었는데, 콘스탄티 황제(Constantinus, 272 ~ 337)가 기독교인이 되면서 기독교를 로마의 국교로 공인을 하게 됩니다. 그런데 광활한 로마제국 아래에 언어와 문화와 종교가 각기 다른 사람을 통치한다는 것이 쉽지 않은 일이었습니다. 그런데 각 나라에 있는 종교들 중에 공통적으로 오랫동안 모자숭배 신앙이 있었고, 학자들 간의 평가가 다르지만 그는 그것을 정치적으로 이용하길 원했습니다.

그래서 당시 교회의 지도자들과 상의해서 이 사상을 기독교 안으로 혼합시켜서 마리아라는 이름으로 바꿔간다면 로마 제국 하의 더 많은 사람들을 개종시킬 수 있을 것이라 생각했고, 그것이 드넓은 세계 대제국 로마를 이끌 방법이라 여겼던 것입니다. 그래서 그 때부터 마리아와 아기예수의 성상들이 만들어지고, 그들에게 경배하기 시작하면서 마리아 숭배 사상이 자리를 잡게 된 것입니다.

기독교가 로마의 국교로 공인되면서 정치와 종교는 때려야 땔 수 없는 관계가 되었고, 교회와 교회 지도자들은 정치적으로 막강한 권력을 갖게 되었습니다. 이 때부터 초기 기독교의 변질된 교회로서의 천주교라는 것이 시작된 것입니다.

이 이후로부터 로마의 주교는 종교적인 절대적 권력을 갖게 되고, 그것이 교황제도로 발전하게 된 것입니다. 마리아와 아기예수는 교회와 정치가 결합하여 탄생한 우상숭배이고, 로마교회는 그 권력을 유지하기 위해 점점 더 마리아 숭배를 견고하게 합니다. 그래서 431년 에베소 공의회에서는 마리아를 하나님의 어머니로 채택하고, 1854년 교황 피우스 9세는 ‘마리아의 무죄 잉태설’을 선포했고, 이 때부터 마리아는 일생 동안 죄를 짓지 않았다는 교리가 생겨난 겁니다. 또 1950년에는 ‘마리아의 부활 승천설’이 생겼고, 1962년 제2차 바티칸회의에서는 ‘마리아의 종신 처녀설’이 선포된 것입니다.

왜 모자숭배가 시작되었다고 했죠? 니므롯이라는 사람의 부인인 세미라미스가 남편이 죽자 자신이 여왕이 되어 그 왕권을 유지하기 위해 그 태어난 아들과 자신을 신성시 하면서 이 사상이 시작된 것입니다. 그리고 최초의 문명인 메소포타미아의 고대 바벨론에서 시작된 이 종교는 수천년의 역사 속에서 각 나라와 종족마다 이름만 다른 형태로 퍼져나갔고, 4세기부터는 기독교 안에도 들어와 교회를 변질시킨 우상숭배가 된 것입니다. 그리고 기독교 안에도 성모마리아와 아기 예수의 이름으로 숭배되고 있는 것입니다.

오늘 이 모자숭배사상에 대해서 구체적으로 살펴본 이유는 오늘부터 살펴보게 될 열왕기상 17장 이후부터를 이해하는데 도움이 되기 때문입니다.

 

오늘 본문 1절을 보시면,

“길르앗에 우거하는 자 중에 디셉 사람 엘리야가 아합에게 말하되 내가 섬기는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살아 계심을 두고 맹세하노니 내 말이 없으면 수 년 동안 비도 이슬도 있지 아니하리라 하니라”

 

이스라엘의 위대한 선지자로 활동했던 엘리야라는 사람이 처음 등장하는 장면입니다. 그런데 엘리야가 북이스라엘의 왕인 아합에게 “내가 섬기는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살아 계심을 두고 맹세하노니 내 말이 없으면 수 년 동안 비도 이슬도 있지 아니하리라”고 예언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 이유가 있습니다. 아합은 북이스라엘의 7대 왕입니다. 아합은 이전 이스라엘의 어떤 왕들보다 더 악을 행했다고 성경은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전의 왕들은 황금송아지로 만든 우상을 여호와 하나님으로 섬겼는데, 아합은 거기에 다가 하나를 더 더해서 바알 우상 숭배를 북이스라엘 안에 가득하게 만든 인물입니다.

특히 그는 페니키아의 시돈의 왕 엣바알의 딸인 이세벨을 왕비로 맞았는데, 이세벨은 페니키아로부터 바알우상을 잔뜩 가져오고, 북이스라엘에 바알의 신전을 만들고, 바알과 아세라의 제사장들에게 왕궁에서 월급을 주면서 우상숭배를 퍼뜨렸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엘리야를 일으키셔서 바알과 아세라 우상에 빠져 있는 아합 왕과 그 백성들을 심판하고 있는 것입니다.

 

 

여기서 앞으로 자주 등장하게 될 바알과 아세라가 어떤 신인지도 살펴봐야 우리가 성경을 이해하는데 도움이 될 겁니다. 바알과 아세라는 세미라미스와 담무스와 같은 가나안 지방에 있었던 ‘모자신(母子神)’입니다. 바알은 아들이고, 아세라는 엄마입니다.

바알은 ‘농경의 신, 폭풍의 신(비, 번개, 바람)’으로서 비를 주관하고, 농사가 잘 되게 해서 사람들을 먹고 살게 해 주는 그런 신이라는 겁니다. 물질과 풍요의 신인 것입니다.

어머니 신인 아세라는 ‘다산의 신’인 것입니다. 고대 부족사회에서 부족의 힘은 ‘인구’였습니다. 수시로 부족 간의 전쟁이 일어났었고, 힘들게 농사지은 모든 것들을 한꺼번에 약탈당하고, 부족원들이 죽는 일들이 많았습니다. 그래서 당시 일부다처제도 같은 것들이 일반화 되어 있었는데, 아이를 낳지 못한다는 것이나 자녀가 적은 것은 부족의 생존과 깊은 관계가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니 아세라 같은 신은 너무 필요한 신이었던 겁니다. 아이를 많이 낳게 해 주는 신이라고 하니깐 그 신이 얼마나 의지가 되겠습니까?

고대 가나안 땅에 가장 매력적이고, 사람들에게 가장 필요한 신은 ‘바알과 아세라’와 같은 그들의 필요를 채워주는 신이었던 것입니다. 여호와 신앙은 도덕적이고, 윤리적으로 잘못 살면 안 되었습니다. 여호와 신앙은 하나님을 두려워할 줄 알아야 하고,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해야 했습니다.

그런데 이게 힘든 겁니다. 지켜야 할 게 너무 많고, 하지 말아야 할 게 너무 많고, 내 육체의 욕심을 쳐서 복종시켜야 할 것이 너무 많은 겁니다.

그에 비해 바알과 아세라는 얼마나 편합니다. 내가 필요한 걸 채워주는 그런 신인데 얼마나 좋습니까? 어떻게 여호와 신앙을 버리고 그들이 바알과 아세라 같은 우상을 숭배할 수 있었겠습니까? 여호와에 비해 바알과 아세라는 사람들에게 너무 매력적인 신이었던 것입니다. 풍요와 다산 그리고 다산은 성적인 것과 연결되는 것이었습니다.

모자숭배의 시작인 ‘세미라미스와 담무스’ 숭배가 어떻게 시작되었습니까? 세미라미스의 왕권에 대한 탐욕에 의해 만들어진 것입니다. 그래서 모자숭배의 뿌리가 그렇기 때문에, 모자숭배가 있는 곳의 핵심을 들어가 보면 그 안에는 탐욕이라는 것이 도사리고 있는 것이고, 사람들의 필요를 채워주는 탐욕적인 종교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북이스라엘에 농경의 신이며, 비를 내리는 신인 바알 숭배가 가득 찾을 때 하나님께서는 선지자 엘리야를 보내서 바알 숭배자 아합 왕에게 오늘 본문 1절의 예언을 선포케 하신 것입니다.

 

다시 1절 말씀을 보시면,

“길르앗에 우거하는 자 중에 디셉 사람 엘리야가 아합에게 말하되 내가 섬기는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살아 계심을 두고 맹세하노니 내 말이 없으면 수 년 동안 비도 이슬도 있지 아니하리라 하니라”

 

왜 엘리야가 자기가 다시 말하지 않으면 수년 동안 비도 이슬도 안 내리게 될 것이라고 말하고 있습니까? 바알이 농경의 신이었습니다. 바알을 심판하는 것이고, 동시에 그 바알을 의지하고 숭배했던 백성들을 심판하는 것이기도 했던 것입니다.

오늘날도 수많은 사람들이 물질과 같은 풍요를 의지하거나, 아세라와 관계된 성적인 쾌락에 인생을 망치는 이들이 많습니다. 결국 그들이 좇던 이 시대의 바알과 이 시대의 아세라에게 그들의 인생이 망가지는 것입니다. 그것으로 인해 그들이 몰락하고, 수치 당하고, 조롱당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신앙생활의 시작은 이런 가치와 믿음이 바뀌면서부터 제대로 된 신앙이 시작됩니다. 그래서 물질적으로 망해서 예수 믿는 사람들이 어쩌면 더 뜨겁게, 더 충만하게 신앙 생활하는 것일 수도 있습니다. 세상에서 해 볼 거 다 해보다가 여러 가지 죄 속에 빠져 살다가 주님 앞에 돌아오는 사람들이 ‘죄가 더한 곳에 은혜가 더 한다’는 말씀과 같이 자신이 얼마나 큰 죄인이고, 얼마나 큰 은혜를 받았는지를 더 절실하게 느끼는 것입니다.

 

그리고 3절과 4절을 보시면,

“너는 여기서 떠나 동쪽으로 가서 요단 앞 그릿 시냇가에 숨고, 그 시냇물을 마시라 내가 까마귀들에게 명령하여 거기서 너를 먹이게 하리라”

 

드디어 가뭄이 시작되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믿음의 사람 엘리야를 먹이고 살리시는 장면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까마귀는 동물의 사체를 게걸스럽게 먹기도 하고, 자기 새끼를 제대로 안 돌보는 새라고 합니다. 그런데 그 까마귀가 엘리야를 먹여 살리는 겁니다. 아침에도, 저녁에도 떡과 고기를 나르고, 시내 물을 마시며 엘리야가 살아남는 것입니다. 까마귀가 그렇게 한다는 것은 불가능한 얘깁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 까마귀에게 그렇게 명령하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오늘날에도 또 다른 까마귀에게 명하셔서 여러분을 먹이시고 살리실 수 있음을 믿으시길 바랍니다. 바알과 아세라와 같은 풍요의 신이 우리를 먹여 살리는 게 아닙니다. 엘리야 선지자를 통해서 그 풍요의 신을 심판하시듯이, 우리가 믿고 의지하던 것은 한 순간에 우리 앞에 구름처럼, 먼지처럼 사라질 수도 있는 것입니다.

 

디모데전서 6장17절 말씀을 일고 마칩니다.

“네가 이 세대에서 부한 자들을 명하여 마음을 높이지 말고 정함이 없는 재물에 소망을 두지 말고 오직 우리에게 모든 것을 후히 주사 누리게 하시는 하나님께 두며”

 

기억하십시오. 우리를 먹이고 입히시고 살리시는 분은 우리 하나님이심을 믿으십시오. 까마귀를 보내서라도 여러분의 모든 필요를 채우시는 분은 하나님이십니다. 모두 다 불가능하다, 안 될 거 같다고 생각하는 그 시점에 주님은 우리의 모든 것이 되어 주실 것입니다. 돈이 우상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모든 우상들을 버리고 주님을 철저하게 신뢰하며 살아가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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