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호수아 19:40~51>
어딜 가나 ‘불평주의자’가 있습니다. 불평하는 사람은 뭔가 마음에 들지 않기 때문에 불평하는 겁니다. 그런데 불평주의자는 매사에, 모든 사람에게, 모든 상황 속에서 항상 불평하는 사람을 말합니다. 그 사람의 비관적이고, 부정적인 말들은 자신도 힘들게 만들고, 주변 사람들까지도 힘 빠지게 만드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런 불평주의자는 사실 여러 가지 면에서 별 도움이 되지 않습니다.
불평(discontent)이나 불만은 분명 좋지 않은 단어임은 분명하지만 모든 상황과 환경에 항상 OK하는 것 역시 어떤 면에서는 좋은 것은 아닐 수 있습니다. 그 불만족스러운 것이 단순히 불평으로만 그친다면 그것은 좋지 않은 영향을 끼치게 되지만, 어떤 상황 속에서 그것에 대한 불만이 그 현실과 상황의 변화를 꾀하는 긍정적인 방향으로 움직여진다면 그것은 ‘거룩한 불만(Holy Discontent)’이라고 할 수 있는 것입니다.
과학문명의 발달은 매년마다 더위와 추위가 반복되는 유럽지역에서 시작된 경우가 많습니다. 1년 내내 거의 같은 기후 속에 사는 동남아 사람들은 1년이고, 10년이고, 30년이고 계속 그렇게 살기 때문에 그냥 이 기후에 적응해서 살고 있는 거 같습니다. 하지만 더위와 추위가 반복되는 지역에 사는 사람들은 1년에 한 번씩 새로운 기후에 적응해야 하다 보니 불편한 게 많습니다. 그래서 이것저것 새로운 것들을 만들면서 과학문명이 발전하게 된 겁니다. 거룩한 불만을 통해 단지 불평으로 끝나는 게 아니라, 그렇게 더 발전적인 문명으로 성장해 갔던 것입니다.
현실에 안주하는 사람은 발전이 없습니다. 하지만 지금의 현실에 대한 거룩한 불만을 갖고 살아가는 사람들은 계속해서 성장하고 발전해 갈 가능성이 큽니다. 특별히 황무지를 개척해 나가는 개척자의 정신을 갖고 있는 사람들은 현실에 안주하지 않습니다. 사람 살 만한 곳이 못되는 황무지라 할지라도 개척자의 정신을 갖고 있는 사람이 있는 곳에는 변화가 시작되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은 기업을 받지 못했던 여러 지파들이 기업을 분배 받고, 맨 마지막에 기업을 분배 받은 단 지파에 관한 이야기가 나옵니다. 단 지파는 남쪽으로는 유다지파와 경계를 하고 있고, 동쪽으로는 베냐민 지파, 북쪽으로는 에브라임 지파 그리고 서쪽으로는 지중해변에 맞닿아 있습니다.
47절 말씀을 보시면,
“그런데 단 자손의 경계는 더욱 확장되었으니 이는 단 자손이 올라가서 레셈과 싸워 그것을 점령하여 칼날로 치고 그것을 차지하여 거기 거주하였음이라 그들의 조상 단의 이름을 따라서 레셈을 단이라 하였더라”
단 자손은 가나안 땅에 들어가기 직전에 계수된 인구를 보면 64,400명에 달합니다. 12지파 중에 최대의 인구를 자랑하던 유다지파의 인구는 76,500명이었습니다. 때문에 그들은 큰 땅을 분배 받았습니다. 그리고 단 지파는 유다 지파에 이어서 두 번째로 많은 인구를 갖고 있었던 지파였음에도 분배 받은 땅이 매우 좁았던 것입니다.
그들에게 분배된 땅은 매우 좁았지만, 그들은 새로운 곳을 개척하기로 했던 것입니다. 그런데 주변의 모든 지역들은 여러 다른 지파들이 이미 분배 받았기 때문에 주변에 더 이상의 땅은 없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북쪽의 에브라임을 지나고, 므낫세를 지나고, 잇사갈과 스불론과 납달리를 거쳐 지나 갈릴리 호수의 최북단에 있는 메롬 호수를 더 거슬러 올라가 ‘레셈’이란 지역의 가나안 원주민들과 싸워 그 땅을 점령하고 거기 거주하기 시작했고, 그 지역의 이름을 ‘단’이라고 이름 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단 지파의 땅은 가나안 땅의 중간에 분배 받은 곳에 있었고, 거기에 가나안 땅의 최북단을 정복하여 그 경계를 확장했던 것입니다. 만약 그들이 이런 개척자의 정신이 없었다면 그들은 그 좁은 땅에서 맨날 환경 탓하고, 남 탓하면서 그렇게 불평만 하다가 끝났을 것입니다.
그리고 또 한 사람의 개척자가 오늘 본문에 나오는데, 지도자였던 여호수아입니다. 49절과 50절을 보시면,
“이스라엘 자손이 그들의 경계를 따라서 기업의 땅 나누기를 마치고 자기들 중에서 눈의 아들 여호수아에게 기업을 주었으니, 곧 여호와의 명령대로 여호수아가 요구한 성읍 에브라임 산지 딤낫 세라를 주매 여호수아가 그 성읍을 건설하고 거기 거주하였더라”
여호수아는 12지파의 기업 분배를 모두 마친 이후에 그의 가족들이 살아가야 할 땅을 기업으로 분배 받게 됩니다. 아마도 갈렙이 과거 모세에게 거인족인 아낙 자손들이 진치고 있었던 헤브론을 약속 받았던 것처럼, 여호수아 역시 에브라임 산지 딤낫 세라를 약속 받았던 것입니다. 그런데 그곳은 평야지대의 좋은 땅이 아니라 험한 ‘산지’였었고, 여호수아가 ‘그 성읍을 건설하고 거기 거주하였다’는 표현을 볼 때, 완전히 파괴된 성읍이었거나 또는 처음부터 집도 짓고 성도 쌓고 도로도 놓는 등… 할 일이 많았던 열악한 성읍이었던 것입니다. 갈렙과 같이 여호수아 역시 그런 개척자의 정신이 있었기 때문에 일부러 험지를 선택했던 것입니다.
이것이 단지파와 여호수아와 갈렙과 같은 개척자의 정신을 갖고 있는 믿음의 사람들을 통해서 우리가 배워야 할 마음인 것입니다. 개척자는 현실에 안주하지 않습니다. 개척자는 소모적인 불평과 남 탓과 환경 탓 만하며 인생을 낭비하지 않습니다. 분명 지금 여러 가지 불만족스러운 환경과 상황이 있지만, 그것을 거룩한 불만으로 승화시킬 줄 아는 사람들이 개척자들인 것입니다. 우리가 살고 있는 세부 역시 한국과 달리 불편한 게 얼마나 많습니까? 하지만 개척자의 정신을 갖고 살아가는 이들은 장차 이 땅의 축복자요, 주인공이 될 것입니다.
# 적용질문 :
(1) 나는 현실에 안주하려는 마음은 없는가?
(2) 불만족스런 현실을 거룩한 불만으로 승화시켜야 할 것은 무엇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