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태복음 20:29~34>
우리 속담에 “그 나물에 그 밥”이란 말이 있습니다. 사전적인 뜻은 ‘서로 격이 어울리는 것끼리 짝이 되었을 경우를 두고 이르는 말’이라고 되어 있습니다. 나물과 밥을 비벼먹는 것을 ‘비빔밥’이라고 하는데, 우리나라의 대표적인 음식 중 하나입니다. 얼마나 맛있습니까? 하지만 이 속담은 이 음식처럼 긍정적인 의미로 보다는 부정적인 의미로 많이 사용되고 있습니다. 때문에 ‘거기서 거기’라는 뜻으로, 끼리끼리 어울린다는 ‘유유상종’이란 의미로 사용되고 있습니다.
특히 정치인들의 행태를 비꼬는 표현으로 이 속담이 많이 쓰이기도 합니다. 정치인들이 정당정치를 하면서 ‘개혁, 개혁, 개혁’을 캐치프레이즈로 내걸기도 하고, 정당명을 바꾸기도 하고, 새로운 인사를 영입하기도 하지만 정작 그 정당의 기득권을 갖고 있는 인물들이 여전히 그 자리에 남아 있을 경우에 그것은 한낱 구호에 불과하다는 것을 국민들은 잘 알고 있습니다.
‘변혁’이란 말과 ‘개혁’이란 단어가 있습니다. 변혁이란 말의 영어 단어는 ‘Transformation’이란 단어를 사용하고 있고, 개혁은 ‘Reformation’이란 단어를 사용하고 있습니다. 우리말도, 영어 단어도 비슷하지만 사실 의미는 좀 다릅니다.
포메이션(formation)이란 같은 접미사를 쓰고 있는데, form이라는 것은 어떤 형태를 만드는 것을 말합니다. 그렇다면 변혁(Transformation)이란 말은 ‘이쪽에서 저쪽으로 옮기는 것’을 말합니다. 그러니깐 개혁(Reformation)처럼 잘못된 부분을 약간 고치고 수정하는 정도가 아니라, 형태가 완전히 바뀌어 버리는 것을 말합니다.
정치인들의 ‘개혁’이 한낱 구호가 될 수밖에 없는 이유는 사람이 바뀌지 않으면 진정한 개혁이 이루어질 수 없기 때문인 것입니다. 때문에 변혁이 없는 개혁은 있을 수 없는 것입니다. 사람이 완전히 바뀌는 변혁이 있으면 거기서부터 개혁이 시작될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갖고 있는 신앙을 ‘개신교 : 개혁주의 신학을 근본으로 한 교회’라고 합니다. 종교개혁을 일으킨 루터는 로마카톨릭 교회의 수사(수녀와 같은 수도사 남자)였습니다. 하지만 성경에서 벗어난 로마 카톨릭 교리의 오류를 지적했고, 그 일로 인해 결국 교황에게 파문당하게 됩니다. 그 이후부터 루터는 더 이상 로마교회교인이 아니었습니다. 그리고 루터는 30대 중반 종교개혁을 시작했던 것입니다.
또 루터의 종교개혁을 완성했다는 평가를 받고 있는 프랑스의 칼뱅 역시 11살 때부터 로마 카톨릭 교회의 신부가 되기 위해 카톨릭 교회로부터 성직록(장학금)을 받고 공부를 해 왔던 사람이었습니다. 하지만 칼빈이 19세 때, 그의 아버지는 로마 카톨릭교회로부터 파문당하게 되고, 2년 뒤에는 사망하게 됩니다. 그리고 칼빈은 24세 때부터 개혁주의 신학의 저술활동 등을 통해 본격적으로 참여하고, 그는 26세 때는 개혁주의 신학을 집대성한 『기독교 강요』를 완성해 종교개혁의 중심에 선 신학자가 됩니다.
루터와 칼빈이 계속해서 로마 카톨릭 교인으로 남아 있었다면 그들은 종교개혁을 이룰 수 없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로마 카톨릭으로부터 파문당하면서 그들의 신분이 바뀐 겁니다. 그들 인생의 변혁(Transformation)은 곧 그들이 개혁(Reformation)을 이룰 수 있는 기초가 된 것입니다.
때로 우리의 인생에도 어떤 변화가 되기를 바라는 마음은 누구에게나 있을 것입니다. 지금 이대로가 아닌 더 나은 삶, 더 능력 있는 삶, 더 새로운 삶을 살기를 누구나 소망할 것입니다. 하지만 사람이 바뀌지 않으면 즉 변혁이 없으면, 그에게 새로운 변화 즉 개혁은 없을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는 인생변혁(Life Transformation)을 경험한 한 사람의 이야기가 나옵니다. 그의 인생은 어떻게 놀라운 변혁을 이룰 수 있었을까요?
1. 군중이 아닌 주인공이 되라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시기 위해서 예루살렘을 향해 여리고에서 길을 떠나셨습니다.
29절 말씀을 보시면,
“그들이 여리고에서 떠나 갈 때에 큰 무리가 예수를 따르더라”
예수님은 지난 3년 6개월 동안의 공생애를 보내셨고, 예루살렘과 유다와 사마리아 등에는 예수님에 대한 소문이 크게 퍼져있었고, 예수님은 위대한 선지자로 또는 메시야로 사람들에게 추앙 받고 있었던 어쩌면 최고의 전성기를 보내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이제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시면 일주일 여 시간 뒤에는 십자가에 달려 죽음을 맞게 되어 있었습니다. 때문에 예수님께서 여리고로 돌아올 확률은 없었습니다.
그 일을 아는지 모르는지 예수님께서 제자들과 함께 여리고 성을 떠나 나오실 때 수많은 군중들은 환호하며 예수님을 따르고 있었습니다. 본문 29절에서 ‘무리(군중)’라는 단어는 성경에서 567회 걸쳐 나오고 있습니다. 구약에도 나오고 있지만, 상당부분은 신약의 복음서에 이 표현이 나와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복음서는 예수님의 공생애를 기록하고 있는 성경입니다. 그러니깐 예수님 주변에는 항상 ‘군중, 무리’가 있었다는 얘기입니다. 하지만 군중만 있었던 것은 아닙니다. 그 군중들 틈에는 항상 믿음의 주인공들이 등장했었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이름 하나 알려지지 않은 군중으로만 또는 성경 속의 ‘무리’라는 기록으로만 잊혀 졌지만, 어떤 사람은 예수님을 만나고, 예수님의 어루만지심을 경험하고, 병이 치료되고, 문제를 해결 받고, 인생의 깊은 고난 속에서 구원 받은 주인공들로 등장했던 것입니다. 그 사건을 통해 그들의 인생은 완전히 변혁되었던 것입니다.
저는 어릴 때부터 부모님 없이 고아로 살다 보니 늘 위축되고 자신감도 없고 소극적으로 살았습니다. 성장기 때 그 누구에게도 주목 받아 본 적이 없었던 거 같습니다. 그리고 그리 특별한 능력이나 잘 하는 것도 없었고, 그렇다고 성격이 활달해서 여기저기 잘 어울리고 많은 친구들을 사귀고 그렇지도 못했습니다.
요즘 젊은 친구들이 쓰는 ‘아싸와 인싸’라는 말이 있지 않습니까? 인싸는 인사이더(Insider)의 줄임말로 어떤 그룹이나 조직에서 적극적으로 참여하고, 사람들과 잘 어울리는 친화력이 좋은 사람 그래서 그 조직에서 영향력이 있는 사람을 말합니다. 하지만 아싸는 아웃사이더(Outsider)의 줄임말로 조직의 구성원들과 잘 어울리지 못하고 겉으로 맴도는 사람을 가리킵니다. 당연히 아싸는 그 그룹과 조직에서 크게 영향력이 없습니다.
여기서 더 나아가서 요즘에는 ‘핵인싸’와 ‘개아싸’라는 말도 있습니다. 핵인싸는 말 그대로 인싸들 중에 더 적극적이고 친화력이 더 뛰어난 사람을 말하고, 개아싸는 아싸들 중에서 더 존재감이 없는 사람을 가리키는 말이라고 합니다.
저야 말로 성장기를 개아싸로 보낸 거 같습니다. 그러다 열아홉 살에 교회를 다니게 되었고, 예수님을 영접하게 되었습니다. 제가 그 때까지 살아오면서 그렇게 좋고 행복했던 적이 없었습니다. 너무 좋고 행복하니깐 교회 가는 횟수가 늘고, 교회 일이라면 늘 적극적으로 임했습니다. 그랬더니 평생을 아싸로 살던 제가 어느 순간부터 교회 안에서만큼은 인싸, 핵인싸가 되어 있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인싸와 아싸가 되는 기준점이 있습니다. ‘적극성’입니다. 얼마나 그 그룹과 조직에서 적극적으로 임하느냐? 것에 달려 있는 것입니다. 저는 다른 능력은 없었습니다. 어릴 때 성격이 어디 갑니까? 내성적이고, 수줍음 잘 타고 또 잘하는 것도 별로 없었습니다. 그런데 교회가 좋았습니다. 예수님이 좋았고, 교회 성도들이 너무 좋았습니다. 그래서 뭐든지 적극적으로 임했던 거 밖에 없었던 겁니다.
그런데 이게 단지 아싸에서 인싸로 존재감이 커졌다는 게 아닙니다. 영적인 부분, 신앙적인 부분에 있어서 인싸가 될 때 간증거리도 많이 생기는 겁니다. 10년을 교회 다녀도 그냥 다니기만 하고, 늘 교회 변두리에만 있으면 영적인 어떤 체험도, 간증할 거리도 없는 겁니다. 하지만 영적인 부분에 적극적으로 임하기 시작하면서 영적 체험도 생기고, 기도의 응답이란 것도 경험하고, 능력과 역사와 기적과 같은 일들도 경험하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군중과 무리였던 사람이 주인공이 되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요즘 우리교회는 21일간 진행되고 있는 『2019 다니엘 기도회』에 참여하여 은혜 받고 있습니다. 그런데 강사로 세워지는 사람들의 분들의 간증을 들어보면 이 분들이 예전에는 ‘아싸’였는데, 어느 때부터 영적인 ‘인싸’가 되어 있는 것입니다. 축복의 간증자가 되어 있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의 주인공은 마가복음 10장에도 소개되고 있는 맹인 거지 바디메오입니다. ‘바디메오’라는 이름은 ‘디메오의 아들’이란 뜻입니다. 그러니깐 제대로 된 이름조차도 없었던 사람이었습니다. 필리핀 빈민들 중에도 태어난 자식의 출생 신고조차 안하고 사는 사람들이 많다고 합니다. 오늘 하루 당장 먹고 사는 문제가 걱정인 사람에겐 출생신고 같은 거나, 이름 같은 게 그렇게 중요하지 않기도 하는 겁니다. 그는 누구에게도 주목받지 못했던 시각 장애를 갖고 태어난 거지였던 것입니다.
그런데 이런 사람이 오늘 본문의 주인공이 되었던 것입니다. 예수님을 따르던 수많은 군중들이 있었지만 그들 중에는 많이 공부한 사람도 있었고, 사회에서 나름 성공한 부자도 있었고, 여러 가지 재능과 능력이 있는 사람도 있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들은 ‘무리, 군중’이었습니다.
그러나 그 중에 바디메오는 군중이 아닌 주인공이 되었던 것입니다. 어떻게 그의 인생에는 이런 놀라운 변혁이 일어난 것일까요?
2. 절박한 기도자가 되라
많은 사람들이 자신의 지금의 삶에 만족하지 못합니다. 대부분이 지금보다 더 나은 삶을 살기를 바라고, 지금의 불완전한 현실을 벗어나기를 바라고 있습니다. 다 바라지만 다 바라는 대로 되지는 않습니다. 앞에서 잠시 말씀드린 대로 인싸와 아싸의 기준점은 ‘적극성’이라고 했습니다. 누가 적극적으로 임하느냐에 따라 그 사람의 존재감이 커지기도 하고, 그렇지 않기도 하는 것입니다. 얼마나 적극적인가에 따라서 그 사람이 군중에 머물기도 하고, 주인공이 되기도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모두가 더 나은 삶을 바라는데 그의 삶의 변혁의 기준점은 ‘절박함’입니다. 정말 간절한가? 정말 절박한가? 그것에 따라 그의 삶에 변화가 시작되는가? 변화 없이 그렇게 1년이고, 10년이고, 20년이고… 그렇게 똑같이 시간만 보내기도 하는 것입니다.
필리핀에 온 사람들 대부분은 학생들이건, 성인들이건 영어를 잘하고 싶어 합니다. 하지만 거기에 얼마나 절박한가? 에 따라서 실력은 달라지기 시작할 것입니다. 또 자녀들 데리고 이곳에 와서 정착하고 사업을 하려는 분들에게 재정적인 넉넉함은 누구나 바라는 일일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그 일에 절박한 사람은 잠자는 시간도 아까울 것입니다. 날이 이렇게 더운데 늘 바쁘게 이리저리 움직이며 열심히 일할 것입니다. 우리가 무엇을 하든지 절박함을 갖고 있으면 그는 그 분야에 어느 정도 성과를 거두게 될 것입니다.
오늘 본문 30절을 보시면,
“맹인 두 사람이 길 가에 앉았다가 예수께서 지나가신다 함을 듣고 소리 질러 이르되 주여 우리를 불쌍히 여기소서 다윗의 자손이여 하니”
여리고 성에서 구걸하며 평생을 살아왔던 두 사람의 거지는 똑같이 ‘맹인’이었습니다. 마가복음 10장에서는 바디메오라는 이름으로 기록되어 있는데, 바디메오는 ‘디메오의 아들’이라는 뜻이라 했습니다. 그렇다면 여기 등장하는 이 두 사람의 맹인 거지는 ‘바디메오’와 그의 아버지일 가능성이 큽니다. 아버지가 맹인이었고 할 수 있는 일이 구걸이었는데, 아들이 태어났고 그 역시 맹인이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아버지와 아들은 그렇게 평생을, 태어날 때부터 거지로 살아왔던 것입니다. 그것은 그들의 숙명이었습니다.
그런데 마가복음 10장에는 거지 바디메오 이야기만 써 있고, 또 다른 거지에 관한 언급은 없습니다. 그래서 마가복음 10장만을 보면 한 사람의 거지였을 거 같은데, 오늘 본문을 보면 이들은 두 사람이었습니다. 그리고 이 두 사람 모두 예수님께서 치료해 주셨다는 내용이 나옵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이 본문을 이렇게 추론해 볼 수 있습니다. 바디메오의 아버지는 너무나 오랫동안 구걸로 생계를 이어왔습니다. 그리고 그것을 그의 숙명으로 받아들였습니다. 자신의 인생에 어떤 새로운 변화에 대해서 생각해 본 적이 별로 없습니다. 그냥 그렇게 구걸하며 하루를 넘길 수 있다면 그것으로 족했습니다.
그런데 아들 바디메오는 그 모든 상황을 그대로 받아들일 수 없었습니다. 단지 맹인이라는 이유 때문에 거지로 살아야 하고 평생을 불행하게 인생을 마감해야 한다는 것을 받아들일 수가 없었습니다. 하지만 방법이 없었습니다. 어쩌면 아버지가 숙명으로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던 이유이기도 했습니다.
그러던 차에 수년 전부터 팔레스틴 일대에 퍼져있었던 나사렛 예수에 관한 소문을 그들도 듣고 있었는데, 그 병든 자를 치유하시고, 앉은뱅이를 일으키시고, 맹인의 눈을 뜨게 하시는 예수께서 여리고를 들러 예루살렘으로 가신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예수님께서 지금 여리고 성을 떠나가시는 중이었던 것입니다.
바디메오는 절박할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예수님만이 그의 인생을 바꿔 주실 수 있는 분이셨던 것이었습니다. 그 기회를 결코 놓칠 수 없었습니다. 그렇게 예수님이 그들의 앞을 그냥 지나쳐 가시게 내버려 둘 수 없었습니다. 그 기회를 붙잡아야 했습니다. 그게 아니면 안 되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그는 “주여 우리를 불쌍히 여기소서 다윗의 자손이여”라고 소리를 질렀던 것입니다.
31절을 보시면,
“무리가 꾸짖어 잠잠하라 하되 더욱 소리 질러 이르되 주여 우리를 불쌍히 여기소서 다윗의 자손이여 하는지라”
그런데 예수님을 따르던 무리(군중)가 비천한 거지 바디메오를 꾸짖으며 조용히 하라고 했습니다. 하지만 바디메오는 더욱 크게 소리 질러 “주여 우리를 불쌍히 여기소서 다윗의 자손이여”라고 다시 부르짖기 시작했던 것입니다.
진짜 절박한 사람은 어떤 장애물이 와도 그것에 굴하지 않습니다. 상황이 안 좋아도, 장애물이 나타나도, 사람들이 뭐라고 말하든, 어떻게 바라보든… 절박한 사람은 그거 아니면 안 된다는 그 마음 하나 때문에 포기할 수 없는 것입니다.
예레미야 29장 12절, 13절에 보시면,
“너희가 내게 부르짖으며 내게 와서 기도하면 내가 너희들의 기도를 들을 것이요. 너희가 온 마음으로 나를 구하면 나를 찾을 것이요 나를 만나리라”
기도를 하더라도 ‘부르짖으면’ 주님께서 그 기도를 들으신다는 것입니다. 사람은 간절한 만큼, 절박한 만큼 부르짖게 되어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온 마음으로 주님을 구하면, 주님을 찾으면’ 주님은 만나주시겠다는 것입니다. 온 마음이 뭐겠습니까? ‘주님이 아니면 안 됩니다. 나는 주님 밖에 없습니다. 주님만이 나의 도움이십니다. 주님만이 나의 구원이십니다.’ 이런 마음으로 주님을 간절하고도 절박하게 찾는 것을 말합니다.
왜 공부를 못하는 줄 아세요? 왜 성공하지 못하는 줄 아세요? 왜 우리의 인생에 변혁이 일어나지 않을까요? 그것은 결국 절박함의 차이인 것입니다. 우리가 절박하면 우리 인생은 변화될 수 있는 것입니다.
남아프리카의 성자이며, 성령의 사람, 기도의 사람이며 수많은 글들을 남긴 ‘앤드류 머레이(Andrew Murray, 1828~1917)’가 이런 말을 했습니다.
“하나님의 자녀는 기도로 모든 것을 정복할 수 있다”
오늘 본문에 등장하는 무리(군중)와 바디메오의 차이는 절박함의 차이였습니다. 무리는 예수님이라는 유명인 옆에 있는 것으로 우쭐댈 뿐이었지만, 바디메오는 절박한 기도자였던 것입니다. 하나님의 자녀들에게는 기도라는 영적 무기가 주어져 있습니다. 그 기도로 모든 것을 정복할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약하지만 우리가 기도할 때 하나님이 일하실 것입니다.
여러분에게 어떤 고난과 시련이 있어 가난한 마음, 절박한 마음이 있다면 그것은 오히려 복인 것입니다. 그 절박함으로 하나님 앞에 절박한 기도자가 되십시오.
3. 주님께 주목 받는 자가 되라
예수님 주변에 있었던 무리들은 극성스러운 바디메오를 꾸짖었지만 그의 절박함은 모든 장애물을 뚫고 넘어갔습니다. 절박한 사람을 이길 수 있는 것은 없습니다. 여러분이 하나님을 향해 정말 간절하다면, 정말 절박하다면 여러분을 막을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여러분에게 모든 것은 가능해 지는 것입니다. 주님께서도 그런 사람을 주목하시는 것입니다.
32절을 보시면,
“예수께서 머물러 서서 그들을 불러 이르시되 너희에게 무엇을 하여 주기를 원하느냐”
그곳에 있었던 무리(군중)는 비천한 맹인 거지 바디메오를 구박했지만, 예수님은 절박한 기도자 바디메오에게 주목하셨던 것입니다. 예수님은 그에게 ‘너희에게 무엇을 하여 주기를 원하느냐?’고 물으셨고, 그는 눈을 뜨기 원한다고 했고, 예수님은 그들을 불쌍히 여기셔서 그들의 눈을 만지시니 그들이 곧 보게 되었다는 것이 오늘 본문의 내용입니다.
지난 주간에 검사 차 잠시 한국에 다녀왔습니다. 십 수 년을 알고 지내던 가까운 집사님 가정과 잠시 교제할 수 있는 시간이 있었습니다. 처음 이 가정과 교제하기 시작했을 때 남편은 부인이 너무 좋아서 교회에 다니고 있었던 거지 믿음이 전혀 없었습니다. 그렇게 오랫동안 형식적인 교인으로 교회를 다녔습니다.
그러다 사랑하는 첫째 딸이 대학 입시를 2년 앞둔 시점에 딸이 그러더랍니다. ‘엄마, 아빠 중에 누가 나를 위해 새벽에 기도해 주실 거예요?’ 엄마는 딸이 공부할 때, 새벽 2시든 3시든 그 옆에서 함께 깨어서 성경을 읽던 엄마였습니다. 그러니 믿음이 없던 아빠가 하는 수 없이 ‘그럼 아빠가 새벽에 기도할께’했던 겁니다.
생전 기도 한 번 해보지 않았던 아빠가 새벽기도를 가서 기도를 할 줄 모르니깐 주기도문 3번, 사도신경 3번을 하고 오고가기를 6개월을 했답니다. 그 이후부터 떠듬떠듬 딸 대학 잘 가게 해 달라고 기도 했구요. 그렇게 2년이 흘러 딸은 좋은 대학에 합격해서 지금 잘 다니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2년 기도한 이후로 사업의 문이 조금씩 열리더랍니다. 그래서 새벽기도를 그만 할 수가 없었다고 합니다. 그 부인 집사님 말로는 남편이 지난 20년 동안 집에 돈 한 번 제대로 가져와 본 적이 없었답니다. 그래서 통장에 돈이 있었던 적이 한 번도 없었고, 부인이 카드론 대출 받고, 마이너스 통장을 하면서 빚으로 겨우 겨우 집안 살림을 꾸려왔다고 합니다.
그런데 새벽 기도하는 2년 사이에 남편이 완전히 바뀌기 시작했습니다. 교회 일이라면 적극적으로 뛰어가서 교회청소건, 설거지건 앞장서서 하고, 새벽기도도 3년 째 계속하고 있답니다. 이번에 만났더니 이젠 새벽에 ‘이게 하나님의 음성이란 것인가?’라고 하는 그런 특별한 체험도 하기 시작했습니다. 6개월 전 즈음에 이 분이 갑자기 저한테 연락을 하셔서 ‘목사님 법인 사업체를 하나 만들고 싶은데 법인명을 하나 지어주세요’라고 해서, 제가 기도하다가 이름을 하나 지어드렸습니다.
그런데 그 때부터 놀라운 일이 시작되었다고 합니다. 그 동안 묶여있던 빚을 청산하기 시작하고, 드디어 모든 빚을 다 청산했다는 겁니다. 그리고 그 사업체를 통해서 통장에 돈이 쌓이기 시작하고, 이제 곧 전세계약을 새로 하고 이사를 가야 하는데 그걸 위해 기도해 달라고 연락이 왔습니다. 그리고 이번에 만났더니, 얼마 전에 7억 5천만 원을 주고, 48평짜리 아파트를 계약했고, 12월 말에 이사 가게 되었다고 울먹거리며 말씀하시는 겁니다. 지난 20년간 마이너스 통장으로 겨우겨우 살던 분이 3년간의 새벽기도 뒤에 엄청난 역사를 경험하고 있는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이 분이 돈을 얼마 벌었다는 게 아니라, 이 분의 가치가 완전히 바뀌었다는 겁니다. 이 남자분이 기도를 시작하면서 철저하게 하나님만 의지하기 시작했고, 그 전엔 자신이 뭘 해보려고 했다면 이젠 철저하게 기도하고 주님께서 응답하실 때 한다는 것입니다. 제가 이번에 이 분 얼굴을 보니 완전히 바뀌어 있었습니다.
마태복음 7장 7절에서
“구하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주실 것이요 찾으라 그리하면 찾아낼 것이요 문을 두드리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열릴 것이니”
그 전에 교회 다니던 수많은 군중 중에 한 사람이었던 분이 지금은 절박한 기도자가 되고, 주님께 주목받는 기도자가 되어 있습니다. 20년 내내 실패와 마이너스 인생을 살고 있던 분이 가정을 믿음으로 이끌고 있는 가장이 되고, 가정의 기도의 파수꾼이 되어 있는 것입니다. 이 분의 인생이 기도를 시작한 3년 사이에, 구하고, 찾고, 두드리던 몇 년 사이에 완전히 변혁이 되었던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의 인생도 변혁될 수 있습니다. 여러분의 삶에 놀라운 변화들이 시작될 것을 믿습니다. 저는 우리 성도들이 기도의 파수꾼이 되길 바랍니다. 저는 우리 성도들의 인생을 바꿔 줄 수 없지만, 각 가정의 기도의 파수꾼들은 그 가정과 인생에 놀라운 변혁을 이루게 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