슬라이드1

“내 생각대로 되지 않았을 때…”

<열왕기상 19:9~18> 

– 열왕기상(37) –

 

 

우리교회 성도 중에 오래전에 등록은 했는데 꾸준히 출석하지 못하고 계신 성도님이 계십니다. 가게를 새로 하나 오픈했다고 해서 잠시 심방을 갔는데, 이래저래 새로 시작하시느라 뭔가 분주해 보이셨습니다. 그리고 뭔가 문제가 있어 보였습니다. 직원들한테 물건과 재료들 중에 꼭 챙겨놓으라고 했던 게 있었는데 그게 없었던 겁니다.

영어도 잘하고 그러시는데 필리핀 직원들과 여전히 커뮤니케이션에 문제가 있었던 겁니다. 그러다 우리 성도님이 한 숨을 푹 쉬시면서 ‘필리핀은 뭐 하나 쉽게 되는 게 없네요…’라고 하시는 겁니다. 한 번에 딱 되면 좋으련만 몇 번을 왔다갔다 수고해야 할 일들이 종종 있습니다. 아마 우리 성도님들도 여기 오셔서 초기 1~3년 사이에 힘드신 게 이런 이유들 때문일 것입니다.

지난 번 필리핀한인교회협의회 총회에 참석했을 때, 민다나오 섬의 까가얀데오로에서 25년간 선교사역을 하셨던 원로 목사님을 만나 뵈었습니다. 늦게 선교사역에 뛰어들어 파송해 주는 교회도 없이 선교에 대한 열정 하나 갖고 필리핀 민다나오 섬으로 들어가신 겁니다.

그리고 25년간 열정으로 사역하셔서 그 지역에서 가장 많이 모이는 한인교회도 세우셨고, 드넓은 땅에 현지인 아이들을 위한 학교도 세우셔서 수백 명의 학생들을 길러내고 있으셨습니다. 한 5년 전에 은퇴하시고 지금은 사위 목사님과 따님께서 사역을 이어받아 그 학교와 교회를 섬기고 계셨습니다. 이번 총회 때 그 사위 목사님이 그 교회 사역에 대한 프레젠테이션을 하셨었는데, 모든 사람들의 입이 딱 벌어질 만큼 크고 많은 사역을 하고 있었습니다.

지나온 25년 그리고 30년 동안 얼마나 힘들고 어려운 순간들이 많았겠습니까? 우리는 필리핀의 제 2도시라고 하는 번화한 곳에서 생활하면서도 이런 저런 불편한 것들로 인해서 불평이 나올 때가 많은데, 민다나오의 까가얀데오로라고 하는 소도시에 살면서 얼마나 어렵고 힘든 일이 많으셨겠습니까? 하고자 하는 일들이 원하는 대로, 생각대로 그렇게 잘 되기만 했겠습니까?

사역을 계승한 사위 목사님이 프레젠테이션 끝에 이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아버님(원로목사님)이 늘 이렇게 말씀하시는데, 필리핀은 되는 일도 없지만, 그렇다고 안 되는 일도 없습니다.” 여러분도 여기서 살면서 한 번 쯤은 들어본 말일 것입니다. 아마도 ‘필리핀은 뭐 이렇게 한 번에 되는 일이 없냐? 쉽게 되는 일이 없구나…’라고 느끼실 때가 많으셨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안 되는 일도 없다는 겁니다. 이 땅에서 수십 년간 살아오면서 말씀하신 분의 말씀이 더 정확한 겁니다.

우리가 살아가면서 내 생각대로 되지 않았을 때, 우리는 쉽게 낙심할 때가 많습니다. 특히 많이 기대하고 그래서 어느 때보다 열심히 살고 최선을 다해서 노력했는데 내가 생각했던 그런 결과가 나타나지 않았을 때에의 그 실망감은 더욱 클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그렇게 내 뜻대로, 내 생각대로 되지 않아 낙심이 될 때에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

 

1. 내가 있어야 할 곳은 어디인가?

엘리야는 이스라엘이 왕으로부터 시작하여 모든 백성들까지 우상 숭배에 빠졌고, 여호와 신앙을 버렸을 때 홀로 남아 하나님의 말씀을 외쳤던 선지자였습니다. 누구도 그의 편이 없었습니다. 영적 전투의 최전방에서부터 엘리야는 우상숭배자들과 싸웠습니다. 특히 얼마 전 있었던 바알선지자 450명과의 갈멜산 전투는 엘리야에게 자신의 목숨과 생애 전부를 걸었던 사건이었습니다.

 

10절 말씀을 보시면,

“그가 대답하되 내가 만군의 하나님 여호와께 열심이 유별하오니 이는 이스라엘 자손이 주의 언약을 버리고 주의 제단을 헐며 칼로 주의 선지자들을 죽였음이오며 오직 나만 남았거늘 그들이 내 생명을 찾아 빼앗으려 하나이다”

 

엘리야는 그 영적 전투에서 승리해 홀로 바알선지자 450명을 멸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면 엘리야 선지자 앞에 이제 꽃길만 걸을 일이 있으면 좋겠는데, 오히려 그 사건 때문에 왕비 이세벨의 미움을 사서 엘리야 선지자를 죽이려 지명수배를 내렸던 것입니다. 그래서 엘리야는 북이스라엘의 서북쪽 끝에 위치한 이스르엘로 부터 무조건 남쪽으로 남쪽으로 수백 km를 도망하여 시내반도에 위치한 하나님의 산 호렙의 한 동굴까지 피해 숨어있는 것입니다.

크게 낙심한 엘리야는 이미 지난 4절 말씀에서 “여호와여 넉넉하오니 지금 내 생명을 거두시옵소서…”라고 하면서 자신의 절망감을 하나님 앞에서 표현했었습니다.

 

오늘 본문 9절을 보시면,

“엘리야가 그 곳 굴에 들어가 거기서 머물더니 여호와의 말씀이 그에게 임하여 이르시되 엘리야야 네가 어찌하여 여기 있느냐”

 

호렙산의 한 동굴에 숨어있었던 엘리야에게 하나님께서 찾아오셨습니다. 그리고 “엘리야야 네가 어찌하여 여기 있느냐?”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이 말씀은 13절에서도 다시 한 번 “엘리야야 네가 어찌하여 여기 있느냐?”하면서 똑같이 반복해서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의 일을 행한 뒤에 낙심하고 절망해 있는 엘리야의 연약한 모습을 안타까워하시며 그의 사명을 다시 일깨우시려는 하나님의 말씀인 것입니다. 13절에서 다시 반복할 때의 이 말씀은 태풍과 지진과 큰 불이 지나고 “엘리야야 네가 어찌하여 여기 있느냐”하며 세미한 음성으로 들려지는 말씀이었습니다. 때문에 여기서 하나님의 음성은 엘리야를 책망하려 하시기보다는 위로하시고 격려하시고 다시 그를 붙들어 일으키시려는 말씀이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비슷한 경우가 있었습니다. 다윗이 사울 왕을 피해 도망 다닐 때 어쩔 수 없이 적군인 블레셋의 가드 왕 아비멜렉에게 귀화하려고 했던 적이 있었습니다. 이스라엘 내에서는 다윗이 더 이상 피할 곳이 없었습니다. 모든 백성들은 사울의 편에 섰고, 다윗이 어디에 숨든 밀고가 들어갔기 때문에 다윗으로서는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습니다.

하지만 과거 블레셋의 장수 골리앗을 죽인 다윗을 블레셋의 장수들은 경계했고, 결국 다윗은 그들의 왕과 신하들 앞에서 침을 질질 흘리면서 미친 체 연기하면서 겨우 빠져 나온 사건이 있었습니다.

다윗은 하나님 앞에서 민족을 위해 왕을 위해 목숨을 걸고 충성했던 사심이 없었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상황이 이렇게 되니 크게 낙심이 되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블레셋 왕에게 귀화하려고 했었던 것입니다. 하지만 블레셋 장수들의 위협 속에서 처형당하기 직전 겨우 빠져나올 수 있었던 것입니다.

시편 34편은 그 때 다윗이 지은 시입니다.

 

시편 34편 17절, 18절을 보시면

“의인이 부르짖으매 여호와께서 들으시고 그들의 모든 환난에서 건지셨도다. 여호와는 마음이 상한 자를 가까이 하시고 충심으로 통회하는 자를 구원하시는도다”

 

그곳은 다윗이 있어야 할 자리가 아님을 알았습니다. 그리고 다시 기도의 자리, 부르짖는 자리로 돌아갔던 것입니다. 그랬더니 하나님께서 그 기도를 들으시고 그를 환난에서 건져주셨다는 것입니다. 주님은 지금도 마음이 상한 자를 가까이 하시고, 충심으로 통회하는 자를 구원하신다는 것입니다. 때문에 사명자는 낙심하지 말아야 합니다.

 

갈라디아서 6장 9절에서

“우리가 선을 행하되 낙심하지 말지니 포기하지 아니하면 때가 이르매 거두리라”

 

여러분이 선을 행하되 낙심하지 말아야 합니다. 내 생각대로 되지 않고, 내 뜻대로 되지 않는다 할지라도 여러분이 실패한 것은 아닙니다. 사명자은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은 자입니다. 하나님께서 그를 통해 하나님의 뜻을 이루시길 원하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엘리야는 그 뜻을 이루어 갔던 것입니다. 그 이후에 고난이 왔다고, 어려움이 왔다고 해서 엘리야가 사명자로서 실패한 것은 아닙니다. 세상적인 눈으로 볼 때 일이 힘들고 어려워지니깐 실패자인 것처럼 낙심이 될 수 있는 겁니다. 그러나 사명자로서 실패했다 안했다하는 것은 그런 조건들이 아닌 것입니다. 그리고 주님께서 끝내지 않는 한 아직 끝난 게 아니라는 것입니다. 포기하지 않고 때를 기다릴 때 반드시 거두게 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엘리야에게 말씀하시는 겁니다. ‘엘리야야 네가 있어야 할 곳은 그런 낙심의 자리, 절망의 자리, 실패의 자리, 슬픔의 자리가 아니라 사명의 자리인 것이다. 그 자리에서 일어나야 한다. 그 상황을 박차고 나와야 한다. 그것 때문에 절망할 필요도 없고, 낙심할 필요도 없다’ 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러시아의 대문호 톨스토이(Leo Tolstoy, 1828~1910)가 이런 말을 했습니다.

 

“인간의 절망은 하나님의 기회이고, 인간의 끝은 하나님의 시작이다.”

 

우리가 절망의 자리에 있을 때 하나님께서 새로운 일을 행하실 것이라는 것입니다. 때문에 오히려 그 절망의 자리에서 하나님의 기회와 하나님의 시작을 기대할 수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의 생각대로 일이 잘 되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여러분이 기도한대로 되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우리가 생각한 것보다, 우리가 기도했던 것보다 더 놀랍도록 일하시고 채우실 것을 믿으시길 축복합니다. 때문에 우리가 있어야 할 곳은 그 낙심과 절망의 자리가 아닌 것입니다. 나를 향한 하나님의 기대와 소망과 꿈과 비전을 놓치지 마십시오. 하나님께서 엘리야에게 “네가 어찌하여 여기 있느냐”라고 말씀하셨던 것처럼, 오늘 낙심해 있는 우리에게도 동일하게 ‘네가 왜 절망의 자리에서 그렇게 낙심해 있느냐?’라고 말씀하시고 있는 것입니다.

 

2. 현상이 아니라 말씀에 집중하라!

우리는 눈에 보이는 어떤 현상에 집중할 때가 많습니다. 그 나타나는 현상 때문에 좋아하기도 하고 낙심하기도 합니다. 현상이 여러분의 감정을 통제하지 못하도록 하셔야 합니다. 믿음이 여러분의 감정을 통제하고, 말씀이 여러분의 이성을 통제하도록 해야 합니다. 그래야 어떤 상황 속에서도 방향을 잃지 않고 살아갈 수 있는 것입니다.

 

11절을 보시면,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너는 나가서 여호와 앞에서 산에 서라 하시더니 여호와께서 지나가시는데 여호와 앞에 크고 강한 바람이 산을 가르고 바위를 부수나 바람 가운데에 여호와께서 계시지 아니하며 바람 후에 지진이 있으나 지진 가운데에도 여호와께서 계시지 아니하며”

 

갑자기 크고 강한 바람소리가 들려 엘리야는 고개를 들어 빛이 들어오는 동굴 입구를 바라봤습니다. 고막을 찢을 듯한 세찬 바람 소리가 산을 가르고 바위를 부숴버렸습니다. 그리고 바람 후에 지진이 있었고, 12절에서도 보면 지진 후에 크게 불이 일어나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11절과 12절에 반복되는 단어가 있습니다. “여호와께서 계시지 아니하며”라는 것입니다. 눈에 보여 지는 그 엄청난 현상들이 있었지만 거기에 여호와께서 계시지 아니하였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12절을 보시면,

“또 지진 후에 불이 있으나 불 가운데에도 여호와께서 계시지 아니하더니 불 후에 세미한 소리가 있는지라”

 

사람들은 눈에 보여 지는 그 엄청난 현상들에 집중합니다. 그리고 그런 현상들이 보이지 않으면 낙심하곤 합니다. 우리가 그런 삶을 반복하고 있는 것입니다. 내가 생각했던 대로, 내가 원하는 대로 어떤 현상들이 일어나면 좋아라 하는 겁니다. 하지만 그런 현상들이 나타나지 않으면 쉽게 낙심해 버리는 것입니다.

엘리야도 바알선지자 450명과의 영적 혈투에서 홀로 승리했습니다. 이 얼마나 대단한 일입니까? 이것 자체가 어쩌면 대단한 현상이었던 것입니다. 하지만 엘리야는 그 뒤에 또 다른 현상들과 어떤 긍정적 결과물들이 있을 것이라고 기대했었던 것입니다. 더 이상 도망 다닐 필요도 없고, 숨어 지낼 필요도 없고, 이제 엘리야가 북 이스라엘에서 크게 목회도 하고, 대접도 받고, 사람들 앞에서 높여지기도 하고… 어쩌면 그런 것들을 은근히 기대했는지도 모릅니다. 그런데 엘리야의 그런 기대대로 되지 않았던 것입니다.

우리에게도 이런 상황이 있을 때 낙심이 되는 겁니다. 세부에 처음 왔을 때 얼마나 많은 기대감에 부풀었습니까? 하지만 좀 지내다 보면 쉽지 않은 일들에 부딪치는 겁니다. 뭐 하나 쉽게 되는 일이 없는 겁니다. 뭐 하나 생각대로 되는 일이 없는 겁니다. 뭐 하나 한 번에 되는 일이 없는 겁니다. 그러다 보니 세부 생활이 자꾸 자신 없어 지고, 기대감도 줄어들고 그러는 겁니다.

그래서 한국으로 갈까? 다른 지역으로 한 번 옮겨볼까? 다른 나라로 한 번 가볼까?… 이런 생각도 해 보는 겁니다. 그런데 여러분 상황이 더 좋은 곳으로 옮기는 게 항상 정답은 아닙니다. 상황이라는 것은 언제나 바뀔 수 있는 것입니다. 때문에 어떤 상황 속에서도 그것을 축복으로 바꿀 수 있는 능력과 근력이 없다면 늘 환경에 휘둘릴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때문에 여러분이 생각하기에 열악한 이 세부에서 잘 견뎌내고 성공했다면 여러분은 어디에서든 잘 해낼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니깐 너무 지금의 현상에 집중하지 마십시오. 지금의 환경과 상황과 현상에 집중하면 할수록 여러분은 자꾸 낙심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지난 한 달여 동안 다니엘 기도회다, 수련회다 해서 우리교회에서 새벽기도회가 없었는데 사실 잠도 덜 깬 이른 새벽에 일어나서 기도회를 한다는 게 쉽지 않습니다. 그래서 목사님들 중에서도 ‘새벽 기도만 없으면 목회 할만하다’라는 농담을 하시기도 합니다. 그만큼 새벽기도회라는 사역이 쉽지 않은 겁니다. 저 역시 새벽기도를 수십 년 했는데도 아직도 힘이 듭니다. 그것도 요즘 안하다 다시 하니 힘듭니다. 그래서 새벽 기도회를 꾸준히 나오는 우리 성도님들 보면 ‘참 대단하시다’라고 생각들 때가 많습니다.

엊그제 새벽기도를 나오는데 갑자기 한국에서 12월에서 2~3월까지 새벽기도를 다니던 생각이 들었습니다. 요 기간의 한국의 새벽이 얼마나 춥습니까? 옷을 세 겹, 네 겹 끼어 입고 나와도 몸이 으슬으슬 떨리고 발이 시렵고, 교회 도착해서 의자에 앉아있어도 춥습니다.

그걸 생각하니 여기서 새벽마다 힘들게 일어나서 새벽 기도하는 게 하나도 안 힘들게 느껴지는 겁니다. 오히려 여기서는 너무 편하게 새벽 기도하는 거 같은 겁니다. 바로 얼마 전까지 ‘새벽기도는 역시 힘들구나’라고 생각했는데, 그 생각 하나 때문에 한국의 겨울 새벽 기도에 비해 너무 편하게 느껴지는 겁니다. 단순히 생각만 조금 바꿨을 뿐인데 이걸 통해 그 무게가 달라지는 겁니다.

이처럼 사람은 지금의 환경과 상황과 현상에 집중하면 점점 더 힘들어지고 그것이 무거운 짐이 될 수 있는 것입니다. 하지만 그 현상을 넘어가는 사람, 그 현상을 초월하는 사람은 그 상황이 그리 어렵지도 않은 것입니다.

때문에 믿음의 사람들은 지금 당장의 현상보다 하나님의 말씀에 집중해야 하는 것입니다. 현상이라는 것은 진리가 아닙니다. 지금의 상황이라는 것은 종종 우리를 속이기도 합니다. 그게 전부인 것처럼, 그게 진리인 것처럼, 그게 결과인 것처럼 우리를 속이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만이 진리입니다. 진리인 말씀은 변하지 않는 것입니다. 순간순간 변하는 상황에 속지 말고, 변하지 않는 진리의 말씀을 믿으시길 바랍니다.

엘리야가 숨어있었던 동굴 밖에는 엄청난 현상들이 있었습니다. 산을 쪼개고 바위를 부서 버릴 만한 강력한 태풍이 있었고, 큰 지진으로 온 산이 흔들렸고, 큰 불의 위협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거기에 하나님이 안 계셨다는 것입니다. 그 현상들이 잔잔해진 뒤에 세미한 주님의 음성이 들리어 엘리야에게 새로운 사명을 불어 넣으시는 장면이 오늘 본문의 내용인 것입니다.

지금의 상황들이 내게 유익해 보이지도 않고, 내 생각대로 내가 원하는 대로 이뤄져 있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그 때 우리는 낙심이 되고 절망적인 마음이 들게 되는 것입니다.

독일계 스위스인이며 노벨문학상을 수상했던 ‘헤르만 헤세(Hermann Karl Hesse, 1877~1962)’는 인도 선교사 부모님 아래에서 자랐습니다. 한 때 목회의 꿈을 안고 신학교까지 다닌 경험이 있었던 그가 이런 말을 했습니다.

 

“신(神)이 우리들에게 절망을 보내는 것은 우리들을 죽이려는 게 아니라 우리들 가운데 새로운 생명을 불러일으키기 위해서다.”

 

우리는 우리의 생각대로 되지 않았을 때 그 상황에 실망하고, 그런 절망적인 상황까지 이르도록 내버려두신 하나님에게도 실망스런 마음이 듭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우리를 낙심케 하고 절망케 해서 우리를 쓰러뜨리시려는 게 아닙니다. 오히려 그 절망 속에서 새로운 생명을 불러 일으키시려는 것이라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십자가에 달려 죽으시고 무덤에까지 장사되었지만 그것을 통해 부활의 역사를 보여주셨던 것처럼, 우리의 절망적인 상황에서도 주님은 새로운 역사들을 만들어 주께서 친히 영광을 받으실 것입니다.

 

Leave a Comment

You must be logged in to post a com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