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세기 11:10~30>
저 뿐 아니라 많은 목회자들이 갖고 있는 딜레마 같은 게 있을 겁니다. 목사는 성도를 끝까지 내가 돌보고 섬겨야 할 양으로 본다는 겁니다. 하지만 그 순하고 순한 양의 옷을 입고 있는 사람들 중에 간혹 그 속에는 ‘노략질하는 이리’가 섞여있기도 하다는 것은 슬픈 현실이기도 합니다(마7:15).
교회를 개척해서 예배를 드리기 시작했더니 우리 교회에 많은 사람들이 등록하여 우리 교인이 되었습니다. 담임목사는 성도들이 그렇게 교회를 찾아 나와 주일날 예배 자리에 앉아 있는 것만으로도 얼마나 고마운지 모릅니다. 그리고 그 사람의 직업이 무엇이든, 어떻게 해서 세부에 와서 살고 있든, 심지어 그의 과거가 어떻든…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은 죄인들의 친구였고, 죄인들을 치유하고 구원하기 위해 오셨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그 중에는 신앙생활하기 위해 순수한 목적으로 온 사람만 있는 게 아니라, 교회를 이용하려고 한다든지 혹은 어떤 비즈니스 목적으로 교회를 찾는 사람도 있습니다. 목사는 그들이 그런 목적으로 왔다 하더라도 ‘주여, 저 영혼도 주님을 만나고 변화되게 해 주옵소서’라는 마음을 갖고 있고, 그를 끝까지 포기하지 않으려는 마음을 갖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 목자의 마음이 포기되려 할 때가 있습니다. 정말 변화되기를 기다리고 기다렸는데, 기도하고 또 기도했는데도 안 되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럼 마음속에 ‘더 이상은 안 되나보다… 목자로서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은 여기까지인가보다…’ 라고 하면서 그 교인을 향한 마음을 내려놓을 때, 그 성도 한 사람 변화시키지 못하는 나의 무능력과 어쩔 수 없다고 하지만 그를 거의 포기해 버리는 목자로서의 연약한 마음에 한 쪽 가슴이 아프기도 합니다.
바벨탑 사건 이후 인간들은 메소포타미아 지역을 중심으로 북서쪽(야벳 자손)과 남서쪽(함 자손)과 중앙아시아(셈 자손) 쪽으로 흩어져 살게 되었습니다. 창세기 11장 10절부터 30절까지는 노아의 첫째 아들인 셈의 후손들의 족보가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특이한 점 하나는 노아 홍수 이전에 비해 급격하게 수명이 줄어들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홍수 이전에는 기본적으로 900살을 넘도록 자손을 낳으며 살았는데, 홍수 이후에는 점점 수명이 줄더니 아브라함의 아버지 데라 같은 경우는 205세까지 살았고, 아브라함 같은 경우는 175세까지 살았고, 그의 아들 이삭은 137세, 이삭의 아들 야곱은 148세, 야곱의 아들 요셉은 110세까지 살면서 오늘날의 수명과 비슷해 졌습니다.
이것을 창조과학회의 학자들은 노아홍수가 수명감소의 결정적 원인이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창세기 1장 6~8절에 기록되고 있는 궁창(하늘) 위의 물은 지구 대기권에 있었던 거대한 수증기 층이었습니다. 하지만 대홍수 사건 때 하늘의 창이 열리며 궁창 위의 물이 쏟아져 버렸던 것입니다. 때문에 태양광 안에 있는 자외선과 같은 것은 피부노화와 함께 수명을 감소시키는 원인으로 작용했다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의 셈의 족보는 누가 누구를 낳고 낳고 낳고…를 하다가 ‘데라’라는 인물에 이르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26절부터 28절을 보시면,
“데라는 칠십 세에 아브람과 나홀과 하란을 낳았더라. 데라의 족보는 이러하니라 데라는 아브람과 나홀과 하란을 낳고 하란은 롯을 낳았으며, 하란은 그 아비 데라보다 먼저 고향 갈대아인의 우르에서 죽었더라”
데라는 아브람과 나홀과 하란 세 형제를 낳았다는 것입니다. 데라는 아브라함의 아버지였습니다. 이 셈의 족보는 자연스럽게 데라의 아들인 아브라함에게 포커스가 맞춰지고 있는 것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아브라함이 누구입니까? ‘믿음의 조상’ 아닙니까? 바벨탑 사건을 통해 노아의 후손들인 새로운 인류는 니므롯을 중심으로 하나님을 대적하는 불신앙에 빠져들었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바벨탑을 무너뜨리셨고, 그들의 언어를 혼잡케 하셨습니다. 새로운 인류는 노아 홍수보다는 약하지만 하나님의 또 다른 징계 혹은 심판을 받은 것입니다.
그리고는 창세기 11장 10절부터 셈의 족보를 기록하고 있고, 그 족보는 믿음의 조상인 아브라함에게 이어지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아브라함이 대단한 믿음의 사람이었느냐? 초기 아브라함은 전혀 믿음이 없었습니다. 오히려 여호수아 24장 2절에 의하면 아브라함과 그의 아버지 데라는 우상을 숭배하던 사람이었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하나님께서 인간의 악함을 보시고서도 아브라함과 같은 사람을 선택하셔서 그를 통해 하나님의 사랑을 나타내신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인간은 선악과를 따 먹었을 때 하나님으로부터 완전히 버림받아 마땅했습니다. 노아 이전 세상에 죄가 가득함으로 홍수로 심판 받아 마땅했습니다. 홍수 이후 바벨탑 사건으로 모두 버림받아 마땅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여전히 죄인들에게 손을 내밀고 계신 것입니다. 버림받아 마땅한 그들을 선택하시고 은혜를 베풀고 계신 것을 볼 수 있습니다.
히브리서 13장 5절 말씀에 “그가 친히 말씀하시기를 내가 결코 너희를 버리지 아니하고 너희를 떠나지 아니하리라”하셨습니다. 목사인 저도 때로는 어떤 교인들은 포기하고 싶은 연약한 마음으로 괴로워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아무리 부족하고 연약한 실수투성이인 우리를 버리지 아니하고 떠나지 아니하시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을 통해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나는 결코 너를 포기하지 않을 것이다. 나는 결코 너를 버리지 않을 것이다. 내가 너를 붙들어 주리라. 네 손을 잡아 주리라. 내가 너를 도와주리라. 내가 너를 구원하시라”고 말씀하시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실수도 많고, 인생의 여러 가지 문제들로 고통 속에 있을 때도 많습니다. 하지만 주님은 나를 포기하지 않을 것입니다. 다른 사람들이 모두 나를 버린다 할지라도 주님은 결코 나를 포기하지 않을 것입니다. 오늘 그 주님의 붙들어 주심을 신뢰하며 승리하시길 축복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