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한계시록 2:8~11>
– 이 시대의 교회들에게(2) –
[Audio 말씀]
지혜의 왕 솔로몬이 쓴 성경 잠언을 보면 자녀교육에 관한 많은 내용들이 나옵니다.
그 중에 잠언 22장 6절에서
“마땅히 행할 길을 아이에게 가르치라 그리하면 늙어도 그것을 떠나지 아니하리라”
는 말씀이 있습니다. 자녀를 망치는 가장 좋은 방법은 자녀들이 하기 싫다고 하면
– ‘그래 하기 싫으면 하지마’,
– ‘그래 힘들면 공부도 하지마’
– ‘그래 힘들면 운동도 하지마’
– ‘그래 먹기 싫으면 밥도 먹지마…’
부모가 뭐든지 이런 식으로 해 주면, 당장에 자녀와의 마찰을 피할 수 있겠지만 그것은 그 자녀의 인생을 100% 망치는 길이 될 것입니다.
부모는 자녀가 해야 할 것들 중에 때로는 힘들고 어려운 것들이라 할지라도 그것을 할 수 있도록 격려하고 용기를 줘서 그것을 감당할 수 있도록 돕는 인생의 코치와 감독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자녀의 어린 시절에 하나님 앞에서 마땅히 행할 길을 가르치시면, 그 말씀과 그 믿음 때문에 평생토록 하나님 앞에서 살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의 자녀로 부름 받아 살아가고 있는 우리의 인생에도 시련이라는 것들이 찾아오기도 합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그 시련을 막아주실 수도 있으실 텐데, 그 고난과 시련을 그대로 내버려 두시기도 합니다.
시련은 분명 우리에게 고난이고 아픔이고 불편함이 됩니다. 하지만 하늘의 아버지께서는 그 시련을 통해 우리가 더 단단해지고 온전해 지게 될 것을 아시기에 그 시련을 허용하시는 것입니다. 그 시련으로 더 큰 믿음의 사람이 될 것입니다. 환란 앞에서도 두려워하지 않는 믿음의 전사가 될 것입니다. 고난 때문에 엘리야 같은 기도의 사람이 될 것입니다. 그 고난과 시련은 우리의 간증거리가 될 것입니다.
지금 시련 속에 있는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그 시련에 굴복하지 마십시오. 그 시련 때문에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더 큰 축복을 포기하지 마십시오.
로마서 8장 18절 말씀에
“생각하건대 현재의 고난은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과 비교할 수 없도다”
우리는 코로나19로 인해서 한 세대에 있어 가장 큰 어려움을 겪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의 시련의 날들을 보내고 있습니다. 세계 경제가 휘청거리고 있고, 각 나라마다 높아만 가는 실업률과 마이너스 성장으로 불안해하고 있습니다. 교회도 예외는 아닙니다. 하지만 우리는 그 어떤 시련이든 거기에 굴복하지 말아야 합니다. 왜냐하면 이 시련 뒤에 이 시련과는 비교할 수 없을 영광이 기다리고 있기 때문입니다.
1. 역경의 끝을 보라
소아시아의 일곱 교회 중에 오늘은 두 번째 ‘서머나 교회’에 보내진 편지 내용을 살펴보게 됩니다. 서머나는 에베소에서 북쪽으로 약 80km정도 떨어져 있었던 항구도시였습니다. ‘처음 사랑을 버린 에베소교회’와 그 도시는 오늘 날 사라져버렸지만, 오늘 본문의 배경인 서머나 지역은 아직까지도 약 20만 명 이상이 사는 큰 항구도시로 남아 있습니다.
오늘 본문 9절을 보시면,
“내가 네 환난과 궁핍을 알거니와 실상은 네가 부요한 자니라 자칭 유대인이라 하는 자들의 비방도 알거니와 실상은 유대인이 아니요 사탄의 회당이라”
항구도시 서머나는 매우 풍요로운 도시였는데, 로마황제숭배가 성행했기 때문에 많은 기독교인들에게 환란과 박해가 행해졌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은 로마인들과 유대인들로부터 경제적 제재와 박해로 인해 경제적으로 매우 궁핍한 생활을 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황제의 권력과 법적 권위를 갖고 로마제국 아래에서 기독교는 수백 년 동안 조직적으로 박해를 받았습니다. 폭군으로 유명한 네로 황제(A.D.54~68) 때의 박해에 대해서는 여러분들도 종종 들으셨을 것입니다.
로마제국 황제 중에 ‘디오클레티아누스(Diocletianus, 244~311)’같은 사람은 제위 중에 황제의 칙령을 여러 차례 내려 기독교인들을 조직적으로 박해를 가했습니다.
그 칙령 중에 몇 가지를 소개하자면, 교회를 철거하고, 성경을 불태워 없애버리고, 관직자 중에 기독교인들은 모든 관직을 박탈하도록 했던 것입니다.
또 교회의 목사와 직원, 사역자들을 체포해서 감옥에 가두는 것이 황제의 법령이었습니다.
그리고 투옥되어 있는 기독교인들에게는 로마의 신(神)에게 절하면 석방해 주지만, 거부하면 모진 고난을 가했습니다.
그러니 313년 로마의 콘스탄틴 대제에 의해 기독교가 공인되기 전까지 수백 년 동안 로마제국 아래에서의 기독교 박해는 매우 심각했습니다.
그런 박해 한 가운데 있었던 서머나 교회 성도들의 환난과 궁핍은 얼마나 고통스러운 것이었겠습니까?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영접하고 구원 받고 천국을 소망하며 산다는 것은 지금 당장 현실 속에서는 눈에 보여 지는 어떤 보상도 없어 보입니다. 오히려 서머나 교회 성도들은 그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 때문에 도리어 현실 세상 속에서 고통을 받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 8절 말씀을 보시면,
“서머나 교회의 사자에게 편지하라 처음이며 마지막이요 죽었다가 살아나신 이가 이르시되”
우리 주님 예수께서 서머나 교회 성도들에게 편지할 때, 자신을 어떻게 소개하고 계십니까? “처음이며 마지막이요”라는 것은 우리 주님께서 ‘역사의 시작이며 끝’이라는 의미를 갖고 있습니다.
지금의 이런 상황들이 도저히 이해가 되지 않을 때가 있습니다. 왜 이런 일들이 일어났는지? 우리 가정이 왜 이런 고난 속에 있어야 하는지? 왜 우리 자녀에게 이런 문제가 생겼는지? 도대체 문제가 무엇인지? 왜 내가 이런 상황 속에서 이런 시련을 겪어야 하는지?… 이해되지 않을 때가 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세상을 창조하시고 인생의 역사를 시작했다면 그 역사의 끝까지도 하나님께서 주관하신다는 사실을 믿으시길 바랍니다.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의 인생 역시 하나님의 주관 속에 있습니다. 우리를 어머니의 태로부터 잉태케 하시고, 주의 은혜로 성장케 하시고, 살아가게 하시고 그리고 주님 나라에 들어가는 그 순간까지도 우리의 인생 역사는 하나님께서 주관하실 것입니다.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선하심을 잊지 마십시오.
또 8절에서 예수님은 서머나 교회 성도들에게 자신을 어떻게 소개하고 계세요? “죽었다가 살아나신 이가 이르시되”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에 달려 고난 받고 죽으셨었습니다. 죽었다는 것은 고난의 제일 끝에 있는 겁니다. 이제 다 끝났다는 것입니다. 더 이상 소망이 없다는 것을 말합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그 죽음을 이기시고 3일 만에 다시 부활하셨다는 것입니다. 죽음이라는 시련도 예수님을 굴복시킬 수 없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그 죽음까지도 정복하신 부활의 주님이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아무리 힘들고 어려운 일들 앞에서도 이 부활의 소망이 있으면 그 시련까지도 넉넉히 이겨낼 수 있는 것입니다.
– 너 그렇게 끝나지 않는다.
– 너 다시 재기할 수 있다.
– 내가 너를 붙들어 줄 것이다.
– 내가 너를 구원해 줄 것이다.
– 너 다시 부활하게 될 것이다.
– 그 역경의 끝에는 부활이 있을 것이다.
– 너는 반드시 승리하게 될 것이다.
지금 너무 힘들고 어려울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 역경의 끝을 보십시오. 부활의 주님께서 거기에 서 계시면서 우리를 부르고 계십니다. 다시 일어나게 될 것입니다. 반드시 부활의 주님께서 구원하실 것입니다.
2. 시련은 끝이 있다
서머나 교회 성도들은 로마인들과 유대인들로부터 박해와 고난을 받고 있었습니다. 보통 즐겁고 행복하면 시간이 빠르게 흐르고, 힘들고 어려울 때는 시간이 느리게 흐르는 것 같습니다. 서머나교회 성도들의 시간은 얼마나 느리게 흐르는 것 같았겠습니까?
오늘 본문 10절 말씀을 보시면,
“너는 장차 받을 고난을 두려워하지 말라 볼지어다 마귀가 장차 너희 가운데에서 몇 사람을 옥에 던져 시험을 받게 하리니 너희가 십 일 동안 환난을 받으리라 네가 죽도록 충성하라 그리하면 내가 생명의 관을 네게 주리라”
아직 서머나교회 성도들이 받을 고난이 남아 있었습니다. “볼지어다 마귀가 장차 너희 가운데에서 몇 사람을 옥에 던져 시험을 받게 하리니”라고 장차 올 고난을 미리 알려주고 계십니다.
우리가 이런 불길한 예언을 듣게 된다면 장차올 고난과 시련으로 인해 두려움에 짓눌리게 될 것입니다. 하지만 주님께서 이런 고난을 미리 말씀해 주시는 것은 ‘두려워하라’는 것이 아니라 ‘대비하라’는 의미인 것입니다.
그래서 10절 상반절에서 “너는 장차 받을 고난을 두려워하지 말라”라고 말씀하시고 있는 것입니다. 두려워 말라는 것입니다.
그 이유를 중반절에 보면 “너희가 십 일 동안 환난을 받으리라”고 말씀하시고 있습니다. 분명 시험과 고난이 오지만 그 환난이 ‘십 일 동안’이라는 것입니다. 그 시련의 끝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 환난의 십 일을 견뎌내면 되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시련이 왔는데 그 시련이 언제 끝날지 모르니깐 더 힘들고 어려운 겁니다. 하지만 그 시련이 10일 동안만 되고 그 이후는 괜찮아질 것이라고 한다면 그 시련을 견뎌낼 만 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형질을 너무나도 잘 알고 계십니다. 우리가 감당할 만큼의 시험을 주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시험을 피할 길도 내시는 분이십니다. 우리가 감당하지 못할 시험을 주시지도 않습니다. 우리가 감당할 수 없을 거 같으면 주님께서 다른 길을 내시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우리 하나님은 우리의 하늘 아버지시기 때문입니다.
1905년 오스트리아 출신의 ‘빅터 프랭클(Viktor Emil Frankl, 1905~1997)’은 신경정신과 의사로 2차 세계 대전 중에 독일 나치에 의해 가족과 함께 악명 높은 아우슈비츠 수용소에 갇히게 되었습니다. 그곳에서 여동생을 제외한 아내를 포함한 모든 가족들이 죽게 됩니다. 그는 아우슈비츠의 경험을 바탕으로 『죽음의 수용소에서』라는 책을 썼습니다.
그는 수용소에서 신경정신과 의사로서 사람들을 관찰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강제수용소에서 어떤 사람들은 성자처럼 행동할 때, 어떤 사람들은 돼지처럼 행동하는 것을 보았다고 합니다. 그래서 사람들 안에는 두 개의 잠재력을 모두 가지고 있는데, 그 중 어떤 것을 취하느냐 하는 문제는 전적으로 그 당사자의 의지에 달려있다고 말합니다. 그래서 인간이 어떤 사람이 될 것인가 하는 것은 전적으로 자신의 판단과 선택에 달려 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힘든 수용소 생활을 하고 있던 사람들 중에 그 선택과 관련하여 미래에 대한 희망을 잃은 사람들은 곧 병에 걸려 죽는 모습을 보면서, 용기와 희망을 상실하게 될 때 인간은 면역력이 급격히 떨어져 곧 병에 걸려 죽게 되었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리곤 철학자 니체의 말을 인용 하는데,
“왜 살아야 하는지 아는 사람은 그 어떤 상황도 견딜 수 있다.”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은 우리의 뜻대로 되지는 않습니다. 우리의 생각과 다른 환경 때문에 우리는 힘들고 낙심될 수 있습니다. 그리곤 내 계획대로 되지 않고, 내 생각대로 되지 않아 ‘난 실패했다’고, ‘난 실패자’라고, ‘더 이상 소망도 희망도 없다.’라고, ‘이젠 다 끝났다.’고 말하며 포기하는 사람은 절대 그 역경을 이겨낼 수 없는 것입니다.
하지만, ‘나에겐 내일이 남아 있다.’ ‘오늘은 실패했지만, 내일이라는 기회가 내게는 남아 있다.’라고 하는 사람에게는 내일의 태양이 떠오르는 것입니다. 내일에 대한 희망이 남아 있는 사람은 어떤 역경도 이겨낼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에게는 죽음이라는 최악의 상황에 다다른다 할지라도 부활의 소망이 남아 있다는 것을 기억하시길 바랍니다. 다른 사람에게는 죽음이라면 끝이지만, 우리에게는 아직 부활이 남아 있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의 배경인 서머나 교회의 감독과 목회자로 섬기다 순교했던 초대 교부 ‘폴리캅(Polycarp, 69~155)’에 대한 역사가 있습니다. 그는 어린 소년시절 사도 요한을 통해 예수님을 영접했고, 요한의 가르침을 직접 받았던 사람이었고, 후에 요한에 의해 서머나 교회의 감독으로 세워졌습니다.
당시 로마의 안토니누스 피누스 황제는 명확한 이유도 없이 소아시아 지방의 기독교인들에게 겁을 주기 위해 그들을 박해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래서 서머나 교회의 중요 인물들을 처형하기로 결정하고 급습해 체포하게 됩니다. 서머나교회의 지도자였던 폴리캅도 그 때 체포된 것입니다.
당시 치안감이었던 로마인은 폴리캅을 체포해 보니 86세나 된 고령의 노인임을 알게 되고, 그런 노인을 처형하는 것 자체가 무의미하다는 것을 느꼈습니다. 그래서 폴리캅을 회유하기로 하고, “그대의 신앙에 대해 나는 관심이 없소. 당신이 한 번만 로마 황제를 향해 ‘주님’이라고 부르고, 황제를 향한 희생 제사를 참여하면 그대를 죽이지 않겠소.” 폴리캅이 완강히 거부하자. 치안감은 “그대의 나이를 좀 생각하시오. 당신을 죽이고 싶지 않소. 황제가 주님이고, 나사렛 예수가 주님이 아니라고 한 마디만 하시오. 그러면 당신을 풀어주겠소.”라고 마지막으로 회유했습니다.
그 때 폴리캅은
“주 예수님은 86년간 한 번도 나를 부인하지 않으셨다. 내가 어떻게 모든 죄에서 나를 구원하실 나의 왕을 부인할 수 있겠는가?”
라고 말하면서 죽음 앞에 조금도 두려워하지 않으며, 화형 당함으로 순교하시게 됩니다.
오늘 본문 11절 말씀에서
“귀 있는 자는 성령이 교회들에게 하시는 말씀을 들을지어다 이기는 자는 둘째 사망의 해를 받지 아니하리라”
주 예수님께서 죽음을 이기셨던 것처럼 폴리캅은 죽음의 두려움을 이기고 영생과 구원의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간 것입니다.
오늘 이 시대의 교회와 그리스도인들에게 주 예수님께서는 ‘시련에 굴복하지 말라’고 말씀하시고 있습니다. 지금 당장의 고난과 시련을 보면 절망적이지만, 그 역경이 끝이 아니라 십자가 고난과 죽음 뒤에 오는 부활의 소망을 붙잡으시길 바랍니다. 그리고 그 시련은 반드시 끝이 있습니다. 작은 시련에 흔들리지 말고, 믿음의 주여 우리를 온전케 하시는 예수를 바라보며 승리하시는 성도님들 되시기를 축복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