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한복음 9:1~7>
[Audio 말씀]
서기 64년 7월 19일 밤, 당시 세계 대제국의 수도인 로마에 대화재가 발생합니다. 당시 약 2백만 명이 몰려 살던 로마의 14개 행정구 중 4개를 제외하고 나머지는 완전 전소되거나 대부분이 불타 잿더미가 되어버렸습니다. 로마의 역사가 타키투스는 로마 화재를 가리켜 ‘공포와 죽음의 지옥이 되었다.’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로마 시민들은 왜 이런 대화재가 났는지에 대해서 의문을 품었고, 화재로 모든 것을 잃은 시민들은 절망적인 상황이었습니다. 그 때 네로 황제는 정치적인 국면전환용으로 그리스도인들이 방화했다고 그들에게 책임을 돌리고, 로마제국 안에서 본격적인 기독교 박해를 시작해 사도들을 비롯해 많은 그리스도인들을 학살하게 됩니다.
1933년부터 1945년, 2차 세계대전 중에 자행되었던 히틀러의 유태인 대학살인 홀로코스트(Holocaust)를 잘 아실 것입니다. 독일은 1차 세계대전을 패했고, 엄청난 전쟁 배상금을 물어내야 했습니다. 그것과 함께 맞물려 1929년 세계 대공항으로 독일은 초인플레이션과 대량 실업 그리고 서민층의 몰락으로 굶어 죽는 사람들까지 속출해 나라가 망하기 직전이었습니다. 그런데 독일 인구의 3%밖에 되지 않았던 유대인들은 독일 경제의 40%를 장악하고 있어 독일 게르만인들과 달리 부유하게 살았습니다. 히틀러는 반유대주의 정서를 정치에 이용해 독일이 이렇게 힘들어지게 된 것은 유태인들 때문이라고 선동해 그들의 재산을 몰수하고, 유태인 600만 명을 무참히 학살했던 것입니다.
올해 중국 우환에서 시작된 코로나19 팬데믹으로 인해 미국은 가장 큰 피해국이 되었습니다. 바이러스는 겉잡을 수 없이 확산되고, 수많은 사람들이 죽어나가자 미국의 트럼프 대통령은 ‘중국이 바이러스를 초기에 막지 않아서 이런 재앙이 왔다’고, ‘중국 책임론’를 앞세워왔습니다.
우리는 어떤 어려운 일이 생겼을 때 ‘왜 이런 일이 생겼을까? 누구 때문에 이렇게 된 거지?’라고 그 실패와 고난의 원인을 찾는 습관이 있습니다. 물론 건전한 피드백을 통해 그런 실수를 반복하지 않는 것 자체는 나쁜 게 아닙니다.
하지만, 로마의 네로 황제나, 독일의 히틀러나, 미국의 대통령처럼 우리가 어려운 상황에 닥쳤을 때, 다른 사람에게 그 원인을 돌리고, 어떤 환경에 그 원인을 돌리는 것은 그것에 대한 책임을 면하려고 하는 인간의 죄성 중에 하나입니다. 아담과 하와가 선악과를 따 먹었을 때, ‘제가 잘못했습니다. 제가 주님의 말씀을 어겼습니다.’라고 하지 않고, ‘누구 때문에, 누구 때문에…’ 이렇게 변명했던 것을 보면, 인간이 죄인이 되면서 책임을 모면하려고 남탓을 하기 시작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춘추전국시대 중국의 사상가인 공자(孔子, BC.551~479)는 “일이 잘 못되면 군자(君子)는 제 탓을 하고, 소인(小人)은 남을 탓한다.” 라고 말했습니다. 정말 큰 사람은 ‘어떤 상황 속에서도 남 탓을 하거나, 환경 탓을 하지 않고, 자기가 그 모든 상황을 책임지는 사람이라’는 말입니다.
여러분들이 지금 어느 누구 때문에 혹은 어떤 상황 때문에 어려움을 겪고 있을 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거기에 집중하면서 누군가를 탓하고, 원망하며 시간을 낭비해 봐야 어떤 변화도 일어나지 않을 것입니다. 이해할 수 없는 어려운 상황 속에서 우리가 가져야 할 믿음이 있습니다.
1. 주님은 나를 주목하신다
오늘 본문은 예수님과 제자들이 길을 가다가 한 맹인을 보게 되면서 있었던 사건입니다.
1절 말씀을 보시면,
“예수께서 길을 가실 때에 날 때부터 맹인 된 사람을 보신지라”
요한복음 9장 8절에 보면 이 사람은 시각장애로 활동이 자유롭지 못했기 때문에 구걸하며 살 수 밖에 없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그 마을 사람들은 그가 주로 어디에 앉아서 구걸하는 지 그 장소도 이미 잘 알고 있을 정도로, 그 마을 사람들은 그를 잘 알고 있었습니다.
2절 말씀을 보시면,
“제자들이 물어 이르되 랍비여 이 사람이 맹인으로 난 것이 누구의 죄로 인함이니이까 자기니이까 그의 부모니이까”
당시 유대 사람들은 모든 질병과 장애의 원인을 ‘죄’로 봤습니다. 그래서 자기가 죄를 지었든지 아니면 그 부모가 죄를 지어서 그런 장애를 갖게 되었다고 믿었습니다. 그래서 제자들은 예수님께 누구 죄 때문에 저 사람이 장애를 갖게 되어서 저렇게 비참하게 살 수 밖에 없는 지에 대해 질문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누구 때문에 이 사람이 이렇게 벌을 받게 되었냐는 겁니다.
그런데 여기서 저는 흥미로운 사실 하나를 발견하게 되었습니다. 제자들이 그 맹인을 보고 그런 질문을 했다는 것은 예수님과 제자들이 함께 그 맹인을 봤다는 것을 말합니다.
그런데 1절 말씀을 다시 보시면
“예수께서 길을 가실 때에 날 때부터 맹인 된 사람을 보신지라”
‘예수님께서 제자들과 함께 가실 때에 맹인을 보신지라’라고 기록하지 않고, ‘예수께서 … 날 때부터 맹인 된 사람을 보신지라’라고 되어 있습니다. 2절에 보면 제자들도 분명 함께 보고 있었는데, 그래서 그들이 예수님께 그 맹인에 관해 질문한 겁니다. 하지만 1절만을 보면, 날 때부터 맹인 되어 구걸하며 비참하게 인생을 살아가는 불쌍한 한 맹인을 예수님께서 주목하고 있다는 것을 말씀하시고 있습니다.
사람들은 그 사람이 맹인이라는 것을 보고, 가난한 거지라는 것을 보고, 그 사람이 뭘 하는 지, 그 사람이 연봉이 얼마나 되는지, 얼굴이 예쁜지 어디가 잘 생겼는지, 어느 대학을 나왔는지, 집안이 좋은지, 어떤 능력이 있는지… 그런 외적인 것들을 보고 그를 판단하기도 하고, 가까이 하거나 멀리하거나 그러기도 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사무엘상 16장 7절에서
“… 사람은 외모를 보거니와 나 여호와는 중심을 보느니라”
주 예수님은 그 사람이 어느 대학을 나와, 무슨 일을 하고, 연봉이 얼마고, 얼마나 대단한 능력을 갖고 있는지, 얼굴이 잘났는지 못났는지… 이런 거에 전혀 관심이 없으십니다.
주님은 그 사람의 아픔이 무엇인지, 필요가 무엇인지, 어떤 괴로움이 있는지, 주님이 필요한지, 그 마음이 어떤지… 그런 내면적이고, 인격적이고, 영적인 부분에 대해 관심이 있으십니다.
그 맹인은 예수님이 누구신지도 모르고 예수님 앞에서도 예수님의 얼굴을 볼 수도 없을 것입니다. 사람들은 지금 ‘누구 때문에 이 사람이 이렇게 벌을 받게 되었나?’ 에 관심이 있지만, 예수님께서는 그가 지금 얼마나 아픈지, 얼마나 괴로운지, 얼마나 그 상황에서 벗어나고 싶은지… 그의 내면 깊은 곳, 심령의 가난함을 보고 계셨습니다.
여러분의 몸이 많이 아플 때, 가족들이 ‘얼마나 아플까…’라고 진심으로 걱정하겠지만, 여러분이 느끼는 정도의 아픔을 이해하지는 못할 겁니다. 그게 당연한 겁니다. 여러분이 어떤 문제 때문에 홀로 그 문제를 해결하느라 너무 고통스러운 나날들을 보내는데, 누군가 ‘네가 얼마나 힘든지 내가 이해해’라고 말해주면 위로는 되겠지만, 그 사람이 내 상황을 100%로 이해하거나 느끼지는 못할 것입니다. 너무 섭섭해 하지 마십시오. 그게 어쩌면 당연한 겁니다.
하지만 주 예수님께서 불쌍한 맹인을 바라보듯이, 주님께서 지금 우리의 모습, 형편, 처지와 상황을 주목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불쌍히 여기시는 것입니다. 어떻게 도와 줄 것인지를 계획하시는 것입니다.
다른 사람들이야 나를 100% 이해할 수 없을 겁니다. 여기 저기 다니면서 여러분의 마음을 완전히 이해해 줄 사람을 찾는 헛수고를 그만하십시오. 우리 하나님 외에 그 누구도 우리를 완전히 이해할 수도, 위로해 줄 수도 없을 것입니다. 하지만, 주님이 내 마음을 이해해 주세요. 나를 주목하고 계십니다. 사랑의 마음으로 나를 바라보고 계십니다.
2. 하나님의 플랜을 믿으라
주님께서 우리를 주목하고 계신 이유가 있습니다.
3절 말씀을 보시면,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이 사람이나 그 부모의 죄로 인한 것이 아니라 그에게서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나타내고자 하심이라”
사람들은 맹인 거지의 겉모습만 보고 그가 장애라는 징벌을 받은 이유가 누구 때문인지에 대해 관심이 있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그 이유와 원인을 찾기 보다는 그 사람에게 관심이 있었습니다. 또 하나님께 관심이 있었습니다. 그 사람을 향한 하나님의 어떤 뜻과 계획에 더 관심이 있으셨던 것입니다.
이것이 오늘 우리가 생각해야 할 중요한 부분이기도 합니다. 서론에서 우리가 함께 나눴던 바와 같이, 우리에게 어떤 어려움과 문제가 생기면 우리는 ‘누구 때문에, 무엇 때문에…’라고 하는 원인을 찾는 경향이 있습니다. 물론 그런 것을 통해 더 이상 그런 실수와 죄를 반복하지 않는 것도 중요합니다.
우리나라 민주정치가 발전하는 것에는 보수와 진보 진영의 정치인들이 서로의 잘잘못을 가리고, 그래서 과거의 잘못과 실수를 더 이상 반복하지 않는 것일 수 있습니다. 그런 과정을 통해 우리나라 민주 정치가 그동안 조금씩 발전해 왔을 것입니다.
하지만 매일같이 양 진영이 서로 싸우는 모습을 보면, ‘저럴 시간에 국민들이 살 길이나 좀 마련해 주지…’ 그런 생각이 들 때가 많습니다. 괜히 옛날에 돌아가신 대통령들을 자꾸 불러올리고, 감옥에 가 있는 대통령도 끄집어 올리고 그러면서 ‘누가 옳으니, 누가 틀렸니, 누가 잘났니…’ 하면서 마치 서로 간에 복수의 복수를 하듯 하는 모습을 보면 국민의 한 사람으로서 참 답답함을 느낍니다. 양 진영이 서로 견제하면서 당리당략이 아니라 정말 국가를 위하고, 국민을 위해서 미래를 준비해 나가면 좋겠다는 생각이 많이 듭니다.
우리는 자꾸 과거에만 메여 있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누구 때문에, 어떤 환경 때문에 실제로 여러분이 지금 힘들고 어려운 상황에 처해 있을 수도 있습니다.
지난 주 목요일 수능이 있었습니다. 이번에 코로나 때문에 수능을 포기한 학생들도 생겨 너무나도 안타까운 마음이 듭니다. 어쩌면 성장기의 자녀들에게 수능 날만큼 중요한 날도 없을 것입니다.
그런데 모두가 다 좋은 결과를 얻는 것은 아닙니다. 그 중에 어떤 학생들은 원하던 점수를 얻지 못해 크게 실망하기도 할 겁니다. 어떤 A라는 학생이 ‘나도 부모님이 족집게 과외를 좀 시켜 주시고, 비싼 학원도 좀 보내주고 그랬으면 남들처럼 더 좋은 점수를 얻을 수 있었을 텐데…’라고 생각하며 부모님 탓, 환경 탓을 하며 낙심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B라는 학생은 ‘내가 좀 더 노력했다면 더 좋은 점수를 얻을 수 있었을 텐데, 어차피 이건 내 싸움이다. 다음번에 죽기 살기로 한번 도전해보자’라고 누구도 탓하지 않고, 다음 기회를 향해 도전적으로 나아간다면, 여러분 생각에 이 둘 중에 누가 더 좋은 미래를 열겠습니까?
과거는 빨리 청산할수록 더 나은 삶을 살 수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살아가면서 여러 인간관계로 인해 마음이 답답하고 힘들 수 있습니다. 어떤 사람이 정말 미울 수도 있고, 그 사람 때문에 지금의 삶이 불행하고 힘들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빨리 벗어나야 하는 겁니다. 왜 그 사람 때문에 여러분에게 주어진 인생을 낭비해야 합니까? 이미 지난 일입니다. 이미 끝난 일입니다. 물론, 누가 잘잘못 했는지 가리면 좋겠지만, 그거 다 상대적이라 결론내기가 어렵습니다. 우리나라 보수정치와 진보정치 누가 옳습니까? 그거 결론내기 어려운 거랑 똑같은 겁니다.
로마서 12장 19절 말씀에
“내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가 친히 원수를 갚지 말고 하나님의 진노하심에 맡기라 기록되었으되 원수 갚는 것이 내게 있으니 내가 갚으리라고 주께서 말씀하시니라”
여러분이 복수하려고 하지 마십시오. 여러분이 심판자가 되어서는 안 됩니다. 심판하시는 재판장은 오직 하나님이십니다. 그 일은 우리 몫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친히 갚으실 것입니다.
때문에 우리가 거기에 메여 있으면 안 되는 겁니다.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플랜이 있습니다. 여러분이 남들보다 안 좋은 환경과 조건에서 성장했을 수도 있고, 여러 가지 예기치 않은 일들로 지금 어려움을 겪을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거기에는 하나님의 뜻이 있습니다. 그 일을 통해 하나님께서 영광을 받으실 것입니다.
고린도전서 1장 27절, 28절을 보시면,
“그러나 하나님께서 세상의 미련한 것들을 택하사 지혜 있는 자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시고 세상의 약한 것들을 택하사 강한 것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시며, 하나님께서 세상의 천한 것들과 멸시 받는 것들과 없는 것들을 택하사 있는 것들을 폐하려 하시나니”
여러분 이 성경 어디에 ‘하나님께서 똑똑한 사람들을 통해, 돈 많은 사람들을 통해, 잘 난 사람들을 통해 내가 영광을 받을 것이다’라고 말씀하시고 있습니까? 우리가 약할 때 그리스도의 능력은 우리를 통해 더 강하게 나타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더 크게 영광을 받으실 것입니다. 여러분의 약함과 단점과 가난함과 부족함과 연약함과 넘어짐과 실수까지도 하나님의 선하신 뜻을 이루는 통로가 될 것입니다.
3. 말씀을 믿고 순종하라
예수님께서는 그 맹인에게 하나님께서 갖고 계신 플랜이 있다고 말씀하시고서는 “내가 세상의 빛 이로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맹인은 밝은 태양 빛이 비추이고 있지만, 그 빛을 볼 수 없었습니다. 푸르고 맑은 하늘도, 에메랄드 빛 바다도, 산과 들의 푸른 초목도 볼 수 없었습니다. 눈은 갖고 있으되 볼 수는 없었던 것입니다. 그의 눈은 온통 캄캄함의 매일이었습니다. 그런데 이제 예수님께서 진정한 빛으로 우리 가운데 오셔서, 어둠 가운데 있는 이들의 눈을 밝혀 주신다는 것입니다.
6절, 7절 말씀을 보시면,
“이 말씀을 하시고 땅에 침을 뱉어 진흙을 이겨 그의 눈에 바르시고, 이르시되 실로암 못에 가서 씻으라 하시니 (실로암은 번역하면 보냄을 받았다는 뜻이라) 이에 가서 씻고 밝은 눈으로 왔더라”
예수님께서 땅에 침을 뱉어 진흙을 이겨서 맹인의 눈에 바르셨습니다. 왜 이렇게 하셨는지는 이유를 알 수가 없습니다. 그냥 말씀만으로도 가능하셨을 텐데, 굳이 이런 방법을 쓰셨습니다.
그런데 이어지는 7절의 내용을 보면 짐작해 볼 수 있는 것이 있습니다. 눈에 진흙이 발라졌으니 맹인도 일단은 씻어야 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실로암 못에 가서 씻으라’하셨어요. 그런데 실로암이란 뜻은 ‘보냄을 받았다’는 뜻입니다. 어쨌든 그가 실로암에 가서 눈에 묻은 진흙을 씻는데 눈이 보이기 시작했던 것입니다.
맹인은 예수님이 가라고 하는 곳에 갔고, 순종하는 마음으로 보냄을 받아 실로암에서 진흙을 씻어냈더니 기적이 일어났었던 것입니다.
기적은 믿음으로 순종하는 이들에게 나타나는 것입니다.
– 여호와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하나님의 지팡이를 손에 잡고 그 손을 바다에 내밀라 해서 그대로 했더니 홍해가 갈라졌던 것입니다.
– 여호수아에게는 제사장들이 법궤를 들고 요단강에 들어가게 하라 했을 때, 그대로 했더니 요단강이 멈춰 쌓였던 것입니다.
– 여리고 성을 하루에 한 바퀴씩 돌으라 해서 그대로 했더니 난공불락의 철의 성이 무너져 내렸던 것입니다.
– 예수님께서 베드로에게 ‘깊은 데로 가서 고기를 잡자, 배 오른 편에 그물을 던지라’ 해서 그대로 했더니 그물이 찢어질 정도로 물고기가 잡혔던 것입니다.
지금 우리는 너무 힘들고 어려운 상황을 살아가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내 능력으로 할 수 있는 것이 없을 때,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해 보십시오. 순종하는 사람들이 기적도 맛볼 수 있는 것입니다. 순종하지 않는 이들에게는 기적이라는 것도 없을 것입니다. 예수님을 사랑한다고 하지만, 순종하지 않는다면 예수님은 여러분의 주님이 아니신 것입니다. ‘내가 세상의 빛이다’ 라고 말씀하시면서, 날 때부터 소경이었던 사람의 눈을 다시 뜨게 하셨을 때, 그 맹인이 말씀에 순종함으로 다시 보게 된 것입니다.
우리나라 크리스천들에게 유명한 존비비어 목사님의 『동행(NCD)』이란 책에서
“하나님을 믿는 것은 순종하는 것이며, 순종하는 것이 믿는 것이다!”
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순종이 없는 믿음은 가짜입니다. 진짜 믿음은 순종하고, 그 순종하는 이들에게 빛이신 주 예수님께서 인생의 모든 어둠을 거둬 주실 것입니다.
지금의 여러 가지 힘들고 어려운 상황들 속에서 남 탓을 하거나, 원망하거나, 환경을 탓하는 어리석음을 버리십시오. 주님께서 우리를 주목하고 계십니다. 여기에 있는 주님의 플랜을 믿으십시오. 그리고 믿고 순종하며 나가십시오. 하나님께서 살아계신 증거들이 우리의 삶에 나타나게 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