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도행전 15:12~21>
이단의 특징은 ‘이기적 구원관’을 갖고 있다는 겁니다. 예를 들어 여호와증인의 경우 요한계시록에 나오는 수를 문자적으로 해석하여 오직 여호와증인 144,000명만이 하늘의 반열이라고 하고, 그 다음의 큰 무리는 땅 반열로 적은 무리의 통치를 받는 자들이라는 계급 사회를 말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많은 여호와증인은 그 144,000안에 들어가기 위해 전도에 열심을 냅니다.
이만희가 이끌고 있는 신천지 역시 144,000명의 신천지교인만이 구원 받고, 교주 이만희가 전하는 하나님의 말씀만을 믿고 신천지로 들어와야만 구원을 받는다고 합니다.
아메리카에 예수 그리스도께서 오셨다고 믿는 몰몬교 역시 몰몬경을 믿고 몰몬교에서 지정한 대로 따른 자만이 완전한 구원에 이른다고 가르치고 있습니다.
그러나 성경은 사도행전 2:21절을 통해서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받으리라 하였느니라”
그리고 요한복음 1;12절을 통해서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그러니깐 사도행전2:21절의 “누구든지”는 그 사람의 과거, 신분, 능력, 성품, 공로, 민족, 인종…와 관계없이 주님의 이름을 부르는 사람에게 구원이 임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또한 요한복음1장12절에서는 ‘그 누구든지 예수님의 이름을 영접하는 사람은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자격이 주어진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깐 이 세상에서 살아가는 누구에게나 구원의 기회가 열려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어떤 분들은 ‘기독교도 이기적이고, 독선적이다. 왜 예수를 믿어야만 구원 받는다고 하는가? 다른 종교에도 구원이 있지 않은가?’라고 할 수도 있을 겁니다. 그러나 그것은 ‘진리와 비(非)진리의 차이’라 할 수 있습니다. 이 세상에 수많은 가짜가 있지만 모든 것을 진품이라고 할 수 없는 것처럼, 그것은 내가 진리의 편에 서느냐? 아니면 비진리의 편에 서느냐? 하는 문제인 것입니다. 그것은 결국 자신의 선택일 것입니다.
오늘 본문의 사건은 유대인들의 선민사상과 그에 따르는 이기적 구원관과 깊은 연관이 있습니다. 유대인들은 그들의 시조인 아브라함 때부터 약 2천년 이상의 기간 동안 여호와 하나님께서 오직 히브리민족만을 선택하여 오직 그들만 구원 받는다고 믿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 구원 언약의 표로 그들은 할례를 받았습니다.
그런데 ‘R. C. 스프로울’의 『예수는 누구인가?』라는 책에서 이방인이 유대인이 되려면 세 가지 단계를 거쳐야 한다고 했는데, 첫째는 신앙고백을 통해서 율법과 선지자들의 가르침을 받아들여야 했고, 둘째는 할례를 받아야 했고, 셋째는 개종자 세례를 통해 정결의식을 거쳐야 했다는 겁니다. 이렇게 유대인이 되어야만 구원을 받는다는 선민의식 가운데 히브리인들은 2천년의 역사를 보냈던 겁니다. 그리고 그 유대인들이 기독교인이 되었지만, 이런 오랜 구원관의 흔적이 쉽게 변하기가 어려운 겁니다.
그러니 바울과 바나바가 세운 시리아의 안디옥 교회는 유대 기독교인들 입장에서는 문제가 있는 교회였던 겁니다. 수많은 이방인들이 열정적으로 예수님을 믿고 신앙 생활한다고 하지만 사도행전15:1절에서 “어떤 사람들이 유대로부터 내려와서 형제들을 가르치되 너희가 모세의 법대로 할례를 받지 아니하면 능히 구원을 받지 못하리라”라고 말했다는 것은 어쩌면 지극히 있을 수 있었던 일이었던 겁니다. 그래서 베드로는 이방인 고넬료의 예를 통해서 구원은 오직 주 예수의 은혜로 받는 것임을 말했습니다(11절).
13절부터는 예수님의 형제였으며, 초대교회에서 중심적인 역할을 감당했던 야고보가 구약성경인 아모스 9:11~12절을 인용하여 베드로의 논증을 지지하게 됩니다. 16절, 17절 말씀입니다.
“이 후에 내가 돌아와서 다윗의 무너진 장막을 다시 지으며 또 그 허물어진 것을 다시 지어 일으키리니, 이는 그 남은 사람들과 내 이름으로 일컬음을 받는 모든 이방인들로 주를 찾게 하려 함이라 하셨으니”
출애굽과 함께 광야에서 지은 ‘모세의 성막’은 여호수아 시대에 가나안 땅에 들어와 ‘실로’라는 지역에 옮겨졌습니다. 그러나 사사시대 블레셋과의 전투 중에 성막은 훼파되었고, 법궤도 뺏겼었고, 성막은 후에 예루살렘 서북쪽 9.5km 지점에 있는 기브온 산에 옮겨놓았습니다. 그런데 거기에 법궤는 없었습니다. 다윗시대 때에서야 비로소 다윗이 다윗궁 안에 따로 마련한 장막에 법궤를 모셔왔고(삼하6:17), 다윗은 그 장막 앞에 날마다 나아가 주님을 예배했습니다(시편27:4~6). 그런데 사무엘하7장에 보면, 다윗이 자신은 백향목 궁에 거하면서 여호와의 법궤가 장막(텐트) 안에 있는 것이 너무 죄송해서 여호와의 성전을 건축할 것을 사모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다윗의 그 성전 건축을 허락하지 않습니다(삼하7:7). 그리고는 ‘다윗언약’이라고 하는 놀라운 축복을 주시는 장면이 나옵니다.
후에 이스라엘 역사 속에 솔로몬 성전도 건축되고, 스룹바벨 성전도 건축되고, 헤롯 성전도 건축되지만… 하나님께서 가장 기쁘셨던 예배는 다윗이 만든 그 장막 앞에 엎드려 신령과 진정으로 드렸던 제사였던 겁니다. 그것이 하나의 상징입니다. 그것이 바로 ‘다윗의 장막’이고, 말세에 유대인 중심의 예루살렘 성전이 아니라, 전 세계 곳곳에서 다윗의 장막이 세워져 수많은 이방인들이 신령과 진정으로 주님을 예배하게 된다는 것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을 통해 유대인들의 종교적 이기심과 이방인을 향한 편견을 버리게 하고 있는 것입니다. 또한 이것은 오늘 날 우리가 갖고 있는 종교적 이기심과 편견을 버리고, 우리의 눈으로 누구든 판단하지 말고, 누구에게든 그리스도의 복음이 전해지고, 누구든 예수를 주로 시인하는 이들이 오늘날 하나님께서 가장 기뻐하시는 ‘다윗의 장막’이 된다는 것을 말씀하시고 있습니다. 오늘 내게 있는 영적 이기심과 편견은 없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