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엇이 더 필요한가?”

<사도행전 15:1~11> 

자동차를 구입해 보신 분들이 많이 경험해 보셨을 겁니다. 자동차 구입 자체가 워낙 큰돈이 들어가는데, 어떤 자동차가 얼마 정도한다고 해서 그 정도 지출을 예상하고 대리점에 가보면 얘기가 달라집니다. 내가 예상했던 금액은 그 자동차의 무(無)옵션 최저가 모델인 겁니다. 파워 핸들 하는데 추가되고, 기아의 오토매틱이냐 수동이냐에 따라도 달라지고, 휠이 알루미늄이냐 아니면 철이냐에 따라도 달라지고, 한국 같은 경우는 추운 날이 많으니깐 시트에 열선이 들어오느냐 그렇지 않으냐에 따라도 달라지고, 후방 감지 센서나 카메라 유무에 따라도 달라지고… 그런 식으로 하나 둘 씩 추가하게 되면 예상했던 금액보다 500만원에서 1천만 원은 훌쩍 넘어버리게 되는 겁니다.

예산이 초과되니깐 하는 수없이 옵션들 빼고 낮은 가격의 모델을 선택합니다. 그런데 그런 차를 타다 보면 겨울에 추우니깐 시중에서 파는 열선시트 하나 사서 놓고, 또 타다 보니깐 후방 감지 센서나 카메라가 아쉬워서 사제품을 하나 사다가 달고… 그런 식으로 하다보면 어느 순간 차에다가 꽤 많은 돈을 쓰고 있는 겁니다. 사실 처음부터 옵션이 잘 갖춰진 차를 사면 그런 수고를 들일 필요도 없는 겁니다.

이게 자동차뿐이겠습니까? 나이가 들면 젊었을 때의 그 예쁜 얼굴이 세월과 함께 어디론가 사라져 버리니깐, 자꾸 얼굴에 손을 대는 겁니다. 큰 맘 먹고 산 비싼 옷만 입었다고 해서 럭셔리해 보입니까? 거기에 신발도 맞춰줘야지, 가방도 맞춰줘야지, 차도 맞춰줘야지… 사실 끝이 없는 겁니다. 완벽하다면 더 이상 뭘 더 추가할 필요가 없습니다.

그런데 영적인 부분, 종교적인 부분도 마찬가지입니다. 진짜가 아닌 것 즉 진리가 아닌 것의 공통점이 있는데, 자꾸 뭔가를 추가한다는 겁니다. 통일교는 성경에 ‘원리강론’을 추가하고, 여호와의 증인은 ‘신세계 번역성경’을 추가하고, 몰몬교는 ‘몰몬경’ 그리고 이단교주의 ‘설교집 류’가 그것입니다.

그런데 요한계시록 22:18절, 19절을 보시면
“내가 이 두루마리의 예언의 말씀을 듣는 모든 사람에게 증언하노니 만일 누구든지 이것들 외에 더하면 하나님이 이 두루마리에 기록된 재앙들을 그에게 더하실 것이요. 만일 누구든지 이 두루마리의 예언의 말씀에서 제하여 버리면 하나님이 이 두루마리에 기록된 생명나무와 및 거룩한 성에 참여함을 제하여 버리시리라”

성경에 그 무엇을 더하거나 빼면 재앙과 심판이 임한다고 말씀하시고 있는 겁니다. 다시 말하자면 거기에는 구원이 없다는 것을 말합니다.
요한복음 20:31절에는 성경이 기록된 목적을
“오직 이것을 기록함은 너희로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심을 믿게 하려 함이요 또 너희로 믿고 그 이름을 힘입어 생명을 얻게 하려 함이니라”

성경은 이것 자체로 우리로 하여금 구원을 받기에 완벽한 경전인 것입니다. 이것만으로 충분한 겁니다. 이것 외에 무엇이 더 필요하겠습니까?

바울과 바나바가 1차 선교여행을 잘 마치고 시리아의 안디옥 교회에서 사역하고 있던 어느 날이었습니다. 1절에 보시면,
“어떤 사람들이 유대로부터 내려와서 형제들을 가르치되 너희가 모세의 법대로 할례를 받지 아니하면 능히 구원을 받지 못하리라 하니”

유대로부터 온 어떤 사람들이 안디옥교회의 형제들을 가르치기 시작했는데, ‘모세의 법대로 할례를 받지 아니하면 구원을 받지 못한다’라고 하는 겁니다. 안디옥 교회는 다국적 교회(International Church)였습니다. 유대인도 있었지만, 다양한 민족과 종족의 사람들이 예수를 믿어 한 교회를 이루게 된 겁니다. 때문에 그들 중에 유대인들이 구약의 율법에 따라 할례를 받고 있었던 것처럼 할례를 받은 사람은 별로 없었습니다.

때문에 바울 및 바나바 진영과 유대에서 온 사람들 사이에 논쟁이 있었던 겁니다. 오랜 교리적 논쟁 뒤에 안디옥교회는 바울과 바나바 그리고 그 교회의 지도자들을 예루살렘에 있는 사도들과 장로들에게 보내서, 그 부분에 대한 정확한 구원의 교리를 알아보게 했습니다. 예루살렘교회의 사도들과 장로들이 그 문제를 놓고 많은 변론이 있은 후에 사도 중에 베드로가 일어나 그 부분을 정리하게 됩니다. 베드로는 자신이 이방인인 고넬료를 만나는 과정을 떠올리며, 유대인과 이방인이 차별이 없이 구원 받게 되는 것을 말하게 됩니다.

그리고 10절, 11절을 통해서
“그런데 지금 너희가 어찌하여 하나님을 시험하여 우리 조상과 우리도 능히 메지 못하던 멍에를 제자들의 목에 두려느냐. 그러나 우리는 그들이 우리와 동일하게 주 예수의 은혜로 구원 받는 줄을 믿노라 하니라”

죄가 죄인 줄도 모르던 시대에 하나님께서는 율법을 통해서 ‘죄를 깨닫게(롬7:7)’하셨습니다. 그것이 율법의 기능입니다. 이 세상의 아무리 완벽한 사람일 지라도 율법을 완벽하게 지키는 사람은 없습니다. 때문에 모두 죄인이고, 죄의 삯은 사망인 것입니다(롬3:23, 6:23). 그러나 예수님께서 우리의 죄를 위한 속죄제물이 되심으로 우리의 죄가 십자가와 함께 못 박힌 것이고, 우리는 오직 이 믿음 하나만 있으면, 누구든지 예수님의 은혜로 구원 받는 것입니다(엡2:8). 여기에 무엇이 더 필요하지 않습니다. 예수님으로 충분한 것입니다.

이것을 우리 삶의 영역에 적용해 본다면, 예수님으로 충만해지면 충만해질수록 인생이 풍요로워집니다(요10:10). 그러나 예수님이 내 삶에 결핍되어지면, 인생은 점점 메마르게 되어 있는 것입니다. 우리 인생에도, 우리의 가정에도, 자녀들의 마음에도, 모든 사람들의 마음에도 예수님이면 충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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