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사야 6:1~5
1 웃시야 왕이 죽던 해에 내가 본즉 주께서 높이 들린 보좌에 앉으셨는데 그 옷자락은 성전에 가득하였고
2 스랍들이 모시고 섰는데 각기 여섯 날개가 있어 그 둘로는 자기의 얼굴을 가리었고 그 둘로는 자기의 발을 가리었고 그 둘로는 날며
3 서로 불러 이르되 거룩하다 거룩하다 거룩하다 만군의 여호와여 그의 영광이 온 땅에 충만하도다 하더라
4 이같이 화답하는 자의 소리로 말미암아 문지방의 터가 요동하며 성전에 연기가 충만한지라
5 그 때에 내가 말하되 화로다 나여 망하게 되었도다 나는 입술이 부정한 사람이요 나는 입술이 부정한 백성 중에 거주하면서 만군의 여호와이신 왕을 뵈었음이로다 하였더라
오늘은 조금은 예민할 수도 있는 정치인 관련 얘기를 잠시 드리려고 합니다. 그런데 여러분이 오해 없으시길 바라고, 어떤 특정 정당이나 특정 정치인을 비방하거나, 지지를 호소하려는 정치와 이념에 관한 얘기가 아님을 먼저 밝힙니다. 다만 정치인이기 이전에 한 사람의 영혼에 관한 얘기입니다. 덧붙여 권면하자면, 우리 교회 성도들도 목장 모임과 같은 소그룹 모임에서 괜히 정치적 논쟁으로 다른 성도가 시험에 빠지는 일은 삼가야 할 것입니다.
최근 1년이 못 되는 시간 동안 우리나라 정치사에 또 하나의 비극적인 사건이 있었고, 그 어느 때보다 국민들의 이념적 분열이 심화되어 있는 상태인 거 같습니다. 그리고 이런 사태의 중심에는 계엄령으로 탄핵되어, 현재는 감옥에 수감되어 재판을 받고 있는 윤 전(前)대통령이 있습니다.

윤 전 대통령은 서울대 법대를 졸업하고, 검사가 되어 우리나라의 굵직한 사건 사고를 담당한 스타 검사 출신으로 많은 국민들의 지지를 입어 대통령에까지 당선된 분입니다. 하지만, 검사로서 범죄자들을 잡아 법의 심판을 받게 하는일과 정치는 생리와 구조가 많이 다르다 할 수 있어서 그가 정치에 뛰어든 이후 무척 불안하고 힘들었을 겁니다.
그래서인지 대통령 선거 운동 때부터 대통령이 된 이후에도 그 주변에서 ‘권진 법사’라든지, ‘천공’이라든지 ‘무속 논란’이 끊이지 않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여러 차례의 대통령 선거를 위한 TV 후보 토론회를 할 때마다, 손바닥에 ‘왕(王)’자를 쓴 상태로 토론회를 한 겁니다. 그래서 상대 후보들과 국민들로부터도 많은 비난을 받기도 했습니다. 어찌어찌하여 대통령에 당선은 됐지만, 무속 논란으로 임기 내내 계속 발목을 잡혔고, 불과 1년 전만 해도 대한민국 국군의 최고 통수권자이며, 행정부의 최고 권력자였던 대통령이 지금
은 감옥에 수감되어 재판을 받고 있는 중입니다.
그런데 며칠 전에 대통령의 변호인이 구치소에 접견을 갔다가 윤 전 대통령의 서신을 SNS에 올렸는데, 제가 이 편지를 보고 적잖게 놀랐습니다. 이분이 분명 손에 쓰면서까지 무속 신앙을 꽤 의지했던 분 ‘왕’자를 이었던 거 같은데, 그 편지 내용은 너무나도 신앙적인 내용이었습니다.
『긴 추석 연휴, 운동도 1회밖에 허락되지 않은 1.8평의 독방. 하지만 감옥
이라는 생각보다 기도의 장소를 허락하심에 감사하며 연휴 내내 여러분들이 보내주신 편지와 성경을 읽고 묵상하며 기도했습니다. 눈물로 써 주신 편지들, 이름 모를 중보의 기도들… 그 모든 것이 제힘이요 방패가 됩니다. “주의 말씀이 내 길에 빛이니이다”라는 시편의 말씀이 어둠을 밝혔습니다. 특히 미래세대인 청년들이 꿈과 희망을 놓지 않도록 역사의 주관자이신 하나님과 주 예수 그리스도께 간절히 기도했습니다. 진실과 공의 그리고 믿음으로 이 땅이 다시 일어서기를 국민 여러분을 위해 자유대한민국을 위해 기도합니다. 2025.10.13.』
저는 이 서신을 보면서 ‘이분에게 무슨 일이 일어난 건가? 감옥의 독방에 있는 그 길지 않은 기간 동안 어떤 극적인 역사가 있었나? 이분이 이렇게까지 신앙이 깊었었나?…’ 라는 생각을 했었습니다. 물론, 정치인들과 연예인들의 신앙은 한두 가지 면만을 보고 속단할 수 없지만, 적어도 이분에게 그 감옥의 독방에서 어떤 심적 변화가 일어났고, 지금 이 순간의 중심과 마음은 이 편지의 내용과 같다고 생각됩니다.
하나님이란 분께 전혀 관심이 없다가 그 하나님을 찾게 되는 때 눈에 보이지 않는가 있습니다. 내가 잘나갈 때, 내가 형통할 때, 내가 건강할 때, 내게 근심과 걱정이 없을 때는 내 인생에 하나님이 필요하다고 느끼지 못하기도 합니다. 하지만, 내 인생이 바닥을 치고, 완전히 망했을 때, 나 자신에게 그 어떤 소망과 희망도 남지 않았을 때 우리는 하나님을 구하고 찾게 되어 있는 것입니다. 이것을 ‘망한 예배자’라고 하는 것입니다.

1. 누구에게나 십자가와 가시가 있다
오늘 본문인 [이사야 6장]은 ‘이사야 선지자의 소명장’이라고 분류되기도 합니다. 이사야는 BC.739~681년까지 적어도 58년간 선지자로, 예언자로 활동했습니다. 그렇다면 당시의 평균 연령을 생각해 볼 때, 이사야는 매우 어리거나 젊을 때 하나님의 선지자로 부름을 받았다는 것을 짐작해 볼 수 있습니다. 그리고 남유다 왕국의 웃시야, 요담, 아하스, 히스기야 그리고 므낫세 왕까지 5대에 걸쳐 활동을 하다가 므낫세 왕에 의해 순교 당했다고 합니다.
청년 이사야는 어느 날 특별한 환상을 보게 됩니다. 여호와 하나님께서 천국의 보좌에 앉아 계시고, 그의 옷자락이 그 성전 가득히 휘날리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 주변에는 여섯 날개를 갖고 있는 천사들이 있는데, 두 날개로는 자기의 얼굴을 가리었고, 또 다른 두 날개로는 발을 가리었고, 나머지 두 날개로는 하늘을 날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3절을 보시면,
“서로 불러 이르되 거룩하다 거룩하다 거룩하다 만군의 여호와여 그의 영광이 온 땅에 충만하도다 하더라”
수 많은 천사들은 ‘거룩하다 거룩하다 거룩하다 만군의 여호와여 그의 영광이 온 땅에 충만하도다’라고 찬양했습니다.
그때 4절에 의하면 마치 지진과 같은 큰 진동이 있으면서 영광의 구름과 같은 연기가 하나님의 보좌 주변에 가득했던 것입니다.
그리고 5절을 보시면,
“그 때에 내가 말하되 화로다 나여 망하게 되었도다 나는 입술이 부정한 사람이요 나는 입술이 부정한 백성 중에 거주하면서 만군의 여호와이신 왕을 뵈었음이로다 하였더라”
천사들도 두 날개로 얼굴을 가리울 정도로 하나님의 영광을 직접 본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이사야가 ‘나는 입술이 부정한 사람이요 나는 입술이 부정한 백성 중에 거주하는 죄인으로서 여호와 하나님을 보게된 것’을 깨닫게 되면서 동시에 “화로다 나여 망하게 되었도
다” 이것의 히브리어 문장을 직역하면 “나에게 화로다. 왜냐하면 나는 끝장났기 때문이다”라는 의미인 것입니다.
이것과 비슷한 장면이 또 있는데, [누가복음 5장]에 보면 밤새 한 마리의 물고기도 잡지 못한 베드로의 배에 예수님께서 오르셔서 말씀을 전하신 뒤, “깊은 데로 가서 그물을 내려 고기를 잡으라”고 말씀하셨는데, 시몬 베드로가 순종함으로 깊은 데로 가서 그물을 던졌는데 그물이 찢어질 정도로 많이 잡혀 두 배에 물고기가 가득 차게 된 사건이 나옵니다.
그 순간 베드로는 자신이 율법 선생님인 줄로만 알았던 예수님의 존재가 메시야로 믿어지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그전엔 ‘랍비여(선생님)’라고 불렀던 베드로가 갑자기 예수님 앞에 엎드려 “주여 나를 떠나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눅5:8)”라고 고백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베드로가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신 메시야로 믿어지는 순간 갑자기 자신의 더러운 죄들이 다 드러나고, 주님 앞에 자신이 죄인임을 고백하며 엎드렸던 것입니다.
지난 금요일 저녁 집회 때, 제가 성도님들께 ‘마지막 찬양을 부르면서 개인적으로 기도하다가 집에 돌아가시라.’고 말씀드리면서 부른 찬양이 ‘주님만이 왕이 십니다’라는 단순한 고백이었습니다. 제가 목도 많이 쉬어 있는 상태였고 해서 우리 찬양팀이 강단에 올라와서 함께 찬양하고, 모든 성도들도
하나님 앞에 무릎을 꿇고 찬양과 기도하다 돌아가자 했습니다.
그런데 이 단순한 찬양과 고백을 드리는데 우리 안에 성령의 기름 부음이
있었던 겁니다. 여기저기서 눈물로 찬양하고 기도하는 분들이 있었고, 은혜가 충만했던 겁니다. 특별히 강단에 올라와 무릎꿇고 함께 찬양하고 기도하던 분들에겐 더 강한 기름 부음이 있어 대부분의 성도들이 다 돌아간 이후에도 계속 강단에 무릎꿇고 예배하고, 찬양하고, 기도했었습니다.
하나님의 영광에 가까이 가면 가까이 갈수록 우리의 죄가 더 밝히 드러납니다. 때문에 하나님의 영광이 크게 느껴질수록 그분 앞에 엎드릴 수밖에 없습니다. 심하게는 베드로처럼 ‘주여 나를 떠나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라고도 하고, 이사야와 같이 ‘화로다 나여 망하게 되었도다’라고 느껴질 수도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렇게 자신에 대해서 ‘망한 자’라고 느껴질 때, 두 가지 마음이 들 수 있는데, 하나는 ‘자신에 대해서 절망’ 하게 되는 겁니다. 더 이상 소망이 없는
겁니다. 하지만, 두번째 마음은 자신에 대해서 더 이상 소망이 없으니 전능하시고 살아계신 하나님만을 의지하고 바라보는 ‘망한 예배자’가 되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있는 무거운 십자가와 육체의 가시와 같은 아픔과 고통은 우리로 하여금 ‘망한 예배자’가 되게 돕는 도구가 되기도 합니다. 누구나 크고 작은 십자가와 찌르는 가시를 갖고 있을 것입니다.
사도행전에 보면, 예루살렘 초대 교회와 크리스천들을 박해했던 대표적인 인물이 바리새파의 전도유망한 청년 리더‘사울(바울)’이었습니다. 하지만, 그가 역사상 가장 위대한 사도로 부름 받기 전에 통과해야 했던 과정이 있었는데, 그것이 ‘망한 예배자’의 시기였습니다.
사울은 다메섹으로 도피한 그리스도인들을 박해하러가던 중에 예수 그리스도의 강력한 빛 앞에 눈이 멀어 버립니다. 그전까지는 교만하고 거만하고 믿는 자를 박해하던 사람이 눈이 멀어 버리니 ‘이제 나는 끝났구나’라고 생각했던 것입니다. 그때 그 마음에 주님이 찾아가셨고, 그 거만하고교만했던 사울은 예수님을 마음에 영접하고, 평생을 주님을 위한 전도자로 헌신하게 됩니다. 그리고 평생토록 고칠 수 없었던 육체의 가시인 불치병을 하나 갖고 있었던 사울은 평생 겸손하게 주님을 섬기는 ‘망한 예배자’로 살아가게 됩니다.
때로 여러분의 어깨를 짓누르는 무거운 십자가가 있을 것입니다. 종종 여러분의 육체와 마음을 찌르는 가시와 같은 것들도 있을 것입니다. ‘나에겐 더 이상 소망이 없다. 나는 이제 끝났다. 나는 망했다.…’라고 할만한 상황들과 문제들도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 육체의 가시와 무거운 십자가 때문에 나 자신에 대해서 더 이상 소망을 갖지 못하고, 오직 하나님만 바라보고 그 은혜를 구하는 ‘망한 예배자’로 살아가게 됩니다. 만약 너무나도 안락하고 평안한 삶을 살았다면, 더 이상 하나님을 구하거나 의지하지도 않고, 내가 뭐라도 되는 양 교만과 거
만 속에 살았을 것입니다. 때문에 나의 십자가와 가시가 있어 망한 예배자로 살 수 있으니 감사한 것입니다.

2. 망한 예배자만이 사명에 헌신한다
이사야는 5절에서 ‘나는 이제 끝났다. 입술이 부정한 사람으로서 거룩하신 하나님을 봤기 때문이다’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6절과 7절을 보시면,
“그 때에 그 스랍 중의 하나가 부젓가락으로 제단에서 집은바 핀 숯을 손에 가지고 내게로 날아와서, 그것을 내 입술에 대며 이르되 보라 이것이 네 입에 닿았으니 네 악이 제하여졌고 네 죄가 사하여졌느니라 하더라”
이사야는 ‘나는 내 죄 때문에 끝장났다. 더 이상 소망이 없다. 나는 죽었다’라고 했는데, 하나님께서 천사를 보내셔서 그 천사가 그의 부정한 입의 죄와 악을 소멸했다는 것입니다.
사람마다 각자에게 주어지 복과 환경이 다를 수 있지만, 저는 불우하고 불행한 성장기를 보낼 수밖에 없었습니다. 나중에 병으로 몇 차례 죽음의 고비도 넘겨야 했고, 지독한 가난을 겪어야 했고, 깨어진 가정에서 자라며 정서적으로 늘 불안정한 상황 속에 살아야 했습니다. 그러니 저에겐 어떤 소망도
없었습니다.
그런데 제가 열아홉 살에 예수님을 믿게 되면서 제 삶에는 많은 변화들이 일어났습니다. 저의 모든 죄를 용서받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어 천국의 소망을 갖고 살아가게 해 주셨을 뿐만 아니라, 병들어 죽어가던 저를 하나님께서 살려 주셔서 벌써 40년 가까이 생명을 연장시켜 주셨습니다. 제가 어린 성장기 때 경험해 본 적이 없었던 아름다운 믿음의 가정도 누리게 해 주셨습니다. 아무 꿈도 없이, 의미 없이 살던 저에게 하나님 나라의 꿈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부르심과 사명을 받아 평생을 복음을 위해 살게 해 주셨습니다.
하나님이 아니셨다면 저는 지금 이 세상 사람이 아니었을 겁니다. 제 삶은 완전히 망한 인생이었고, 실패한 인생이었습니다. 병이 치료되지 않아 일찍 죽었을 수도 있고, 살아있 었어도 인생의 깊은 절망과 고뇌 속에 괴로워하며 겨우 겨우 죽지 못해 사는 삶을 살고 있었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주님이 저를 찾아와 주셔서 은혜를 베푸시고, 다시 기회를 주신 것입니다.
때문에 저는 제 삶이 ‘제 것’이라고 생각해 본 적이 없습니다. 제 시간도, 제 건강도, 제 생명도, 제 꿈도, 제 소유도, 제 지식과 지혜도… 저의 모든 것은 이미 오래전에 ‘하나님의 것’으로 소유권이 이전 된 것입니다. 때문에 저는 저 자신의 영광과 부귀와 즐거움을 위해 살지 않고, 주님께서 맡겨 주신 사명을 위해 살아가고 있는 것입니다.
갈라디아서 2장 20절에서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이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자신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
제가 이 말씀과 같이 완벽하게 산다고는 자신있게 말할 수는 없을지라도, 하나님은 제 안에 계시고, 저는 그 주님 안에 거하며 그 믿음 안에서, 주님의 나라와 그 복음을 위해서 살아가기로 결심한 것입니다. 왜냐하면 과거의 나는 이미 죽었고, 이제 예수 안에 새로운 기회를 얻은 내가 살아가고 있기 때문입니다.

‘프랑소아 페넬론(François Fénelon, 1651~1715)’은 “우리의 모든 몰
락은 그 몰락으로 우리가 하나님을 계속해서 신뢰하고 겸손을 버리지 않으면서, 우리 자신에 대한 비참한 확신에서 벗어나게 된다면 유용한 것이다.” 문장이 약간 복잡해 보이지만, 우리가 어떤 상황으로 망했는데 그로 인해 우리가 자기 자신에 대해서 교만함과 거만함을 버리고, 그 일을 통해 계속해서
주님을 더 신뢰하고 더 겸손하게 섬기게 된다면 그 몰락은 우리에게 유용한 것이라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또 이런 말도 했습니다. “당신의 마음 깊은 곳에 있는 자아를 없애라!”
망한 예배자는 마음 깊은 곳에 있는 자아가 때, 내가 몰락할 때 함께 죽게 내가 망할 됩니다. 그래서 망한 예배자는 사명을 감당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사명을 감당하지 못하는 이유는 여전히 우리 안에 내 자아가 살아 꿈틀대기 때문인 것입니다.
이사야 6장 8절을 보시면,
“내가 또 주의 목소리를 들으니 주께서 이르시되 내가 누구를 보내며 누가 우리를 위하여 갈꼬 하시니 그 때에 내가 이르되 내가 여기 있나이다 나를 보내소서 하였더니”
망한 예배자였던 이사야가 하나님의 부르심과 사명에 응답하는 장면입니다. 모세도 80세에 광야의 떨기나무 불꽃 가운데서 출애굽의 지도자로 부름 받았습니다. 그때 모세는 그 광야의 마른 떨기나무와 같은 상태 즉 망한 예배자의 상태였기 때문에 그 부르심에 응답했던 것입니다.
나는 우리 성도들이 모두 다 잘 되고, 형통하고, 성공도 하길 바랍니다. 그리고 그렇게 되기를 늘 기도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믿음의 준비, 인격의 준비, 마음의 준비, 기도의 준비가 되지 않은 상태로 성공하는 모습을 보면… 그리 기쁘지가 않습니다. 아니 오히려 그 모습이 불안하고 걱정될 때가 많습니다.

영국의 영적 부흥기를 이끌던 설교의 황태자 ‘찰스 스펄전(Charles H. Spurgeon, 1834~1892)’은 “기도하지 않고 성공했다면, 성공한 그것 때문에 망한다!”라고 말했습니다.
오히려 철저히 부서지고, 무너지고, 실패하고, 망하고, 몰락해서 그의 마음이 겸손해지고, 낮아지고, 오직 하나님만을 바라보는 망한 예배자, 망한 기도자의 모습으로 마음의 준비, 믿음의 준비, 인격의 준비, 기도의 준비가 될 때 주어지는 성공이 진정한 성공, 진정한 복이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런 망한 예배자가 쓰임 받고, 그런 망한 예배자만이 끝까지 사명을 감당할 수 있는 것입니다.

- 누구에게나 십자가와 가시가 있다
 - 망한 예배자만이 사명에 헌신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