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십자가를 바라봐야 하는가?

요한복음 3:9~15

9 니고데모가 대답하여 이르되 어찌 그러한 일이 있을 수 있나이까

10 예수께서 그에게 대답하여 이르시되 너는 이스라엘의 선생으로서 이러한 것들을 알지 못하느냐

11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우리는 아는 것을 말하고 본 것을 증언하노라 그러나 너희가 우리의 증언을 받지 아니하는도다

12 내가 땅의 일을 말하여도 너희가 믿지 아니하거든 하물며 하늘의 일을 말하면 어떻게 믿겠느냐

13 하늘에서 내려온 자 4)곧 인자 외에는 하늘에 올라간 자가 없느니라

14 모세가 광야에서 뱀을 든 것 같이 인자도 들려야 하리니

15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

유대교의 3대 학파 중에 율법에 있어 가장 엄격한 학파인 바리새파 사람이며, 종교와 정치적 최고 의결기관인 산헤드린 공의회 회원인 니고데모가 남들의 시선을 피해 한밤중에 예수님께 찾아왔습니다. 10절 말씀에 의하면 니고데모는 ‘이스라엘의 선생’ 즉 ‘랍비(율법 교사)’이기도 했습니다.

한밤중에 찾아온 니고데모에게 예수님께서는 충격적인 그리고 이해할 수도 없는 말씀을 하시는데,

3절에서
“…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사람이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나님의 나라를 볼 수 없느니라”

하셨던 것입니다. ‘거듭난다’라는 말은 ‘다시 태어난다(Born-again)’는 말인데, 생물학적으로 불가능한 일이었습니다. 그리고 율법이라면 모르는 게 없을 정도였던 랍비이기도 했고, 모든 율법의 규례들을 철저하게 지켜왔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 나라를 갈 수 없다’는 말에 니고데모는 충격을 받을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12절을 보시면,
“내가 땅의 일을 말하여도 너희가 믿지 아니하거든 하물며 하늘의 일을 말하면 어떻게 믿겠느냐”

이 말씀은 8절에서 말씀하셨던
“바람이 임의로 불매 네가 그 소리는 들어도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 알지 못하나니…”

라는 말씀과 관련이 있습니다. 사람이 바람 소리는 듣지만, 그 바람이 어떻게 만들어지고 어디에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와 같은 건 알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깐 12절 말씀은 ‘자연 현상’과 같은 ‘땅의 일을 말하여도 다 이해하지 못하는 인간이 어떻게 하늘의 일을 말하면 그걸 이해할 수 있겠느냐?’라는 말씀입니다. 지난 몇 개월 사이에 세부에도 큰 지진과 태풍이 여러 차례 있었고, 많은 사상자가 발생했고, 큰 재산 피해를 입기도 했습니다. 만약 ‘언제 어디에서 어느 정도의 지진과 태풍이 시작된다’고 예측할 수 있다면, 그 피해를 많이 줄일 수 있겠지만, 아무리 과학이 발전했어도 그런 지진과 태풍을 예측하기 어렵고, 대비하기도 어려운 겁니다.

이렇게 아무리 똑똑한 사람이라 할 지라도 때로 ‘땅의 일’조차도 다 이해하지 못하는데, 저 높고 영광스러운 하늘의 일을 말하면 그걸 어떻게 이해할 수 있겠습니까? 그래서 복음이란 건 ‘이해하고 믿는 게 아니라, 믿으면 이해되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땅의 일도 다 이해하지 못하는 니고데모가 거듭난다는 것을 이해하고 믿으려 했지만, 이해되지도 믿어지지도 않았던 것입니다. 그러나 그가 믿으면 하늘의 일을 포함한 모든 게 이해되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14절, 15절을 보시면,
“모세가 광야에서 뱀을 든 것 같이 인자도 들려야 하리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

예수님께서는 니고데모에게 출애굽 광야 시대에 있었던 특별한 사건을 비유로 말씀하시고 있습니다. 민수기 21장 사건인데, 이스라엘의 40년 간의 광야 생활이 거의 끝나가던 때에 가나안 땅을 향해 가는데 멀리 돌아가게 된 것입니다. 그때 백성들이 하나님과 모세를 향하여 원망하고 불평했던 사건이 나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들 가운데 사막의 독사인 불뱀들을 보내어 그들을 징계하셨고, 불뱀들은 백성들을 물었고, 그로 인해 죽어가던 사람들이 많았던 것입니다. 모세가 그들을 위해 기도할 때,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불뱀(놋으로 만든 뱀) 모양을 만들어 장대 위에 매달고, 누구든 뱀에게 물린 자마다 그것을 보면 살리라’고 하시면서 살길을 만들어 주셨던 것입니다. 정말 장대 위에 높이 달린 놋뱀을 보는 자마다 다시 살아날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14절에서 ‘모세가 광야에서 뱀을 든 것 같이 인자(예수님)도 들려야 하리니’는 말씀을 하셨습니다. ‘광야의 놋뱀 사건’은 ‘이스라엘의 불평과 원망과 불신앙과 불순종이 원인이 된 징계와 저주 사건’입니다. 그런데 자신들의 잘못과 죄를 떠올리게 하는 그 놋뱀을 바라보면 죽어가던 사람도 다시 살아났습니다.

그리고 예수님도 장대 위에 매달린 놋뱀의 모습과 같이 저주의 십자가 위에 높이 달리게 될 것이고, 누구든 저주의 십자가 위에 높이 달리신 예수님을 바라보는 이들마다 다시 살아난다, 거듭난다 즉 영생을 얻는다는 것을 말씀하시고 있는 것입니다. 십자가 역시 우리의 ‘죄와 저주의 상징’인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그 십자가에 달려 죽으셨으니, 그 십자가를 바라보는 이들마다 그 죄와 저주에서 구원받는다는 것입니다.

니고데모가 그동안 갖고 있었던 구원관은 ‘율법적 구원관(율법의 행위로 말미암는 구원)’이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복음은 율법의 행위를 지킴으로 구원받는다고 믿는 니고데모의 구원과는 포커스가 다른 것입니다.

<율법적 구원>은 ‘자기 자신의 의에 포커스를’ 맞추지만, <복음>은 ‘자기 자신의 죄에 포커스를’ 맞추는 것입니다. 사람은 온전할 수가 없기 때문에 선행과 행위로는 결코 구원을 얻을 수 없습니다. 하지만, 죄와 저주를 상징했던 놋뱀을 바라보는 이들이 살았던 것처럼, 우리의 죄를 대신하여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를 바라보는 이들마다 구원을 얻게 되는 것입니다. 자신이 죄인임을 인식하는 사람마다, 나는 자격이 없지만 예수님의 십자가 공로를 의지함으로 구원과 영생을 얻는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도 십자가를 바라봅니다.

기억해야 할 한 문장: <율법적 구원>은 ‘자기 자신의 의에 포커스를’ 맞추지만, <복음>은 ‘자기 자신의 죄에 포커스를’ 맞추는 것입니다. 사람은 온전할 수가 없기 때문에 선행과 행위로는 결코 구원을 얻을 수 없습니다.

오늘의 묵상: 나의 자격이 아닌, 예수님의 십자가와 공로를 묵상해 봅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