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원하여 새 시작을 주시는 하나님

시편 114:1~8

1 이스라엘이 애굽에서 나오며 야곱의 집안이 언어가 다른 민족에게서 나올 때에

2 유다는 여호와의 성소가 되고 이스라엘은 그의 영토가 되었도다

3 바다가 보고 도망하며 요단은 물러갔으니

4 산들은 숫양들 같이 뛰놀며 작은 산들은 어린 양들 같이 뛰었도다

5 바다야 네가 도망함은 어찌함이며 요단아 네가 물러감은 어찌함인가

6 너희 산들아 숫양들 같이 뛰놀며 작은 산들아 어린 양들 같이 뛰놂은 어찌함인가

7 땅이여 너는 하나님 앞에서 떨지어다

8 그가 반석을 쳐서 못물이 되게 하시며 차돌로 샘물이 되게 하셨도다

[시편 114편]은 113편과 함께 ‘할렐시(Hallel)’라고 하는 ‘찬양시’로 분류되고 있는데, 이 시는 이스라엘 백성들의 절기 때마다 불려 졌던 것으로 보입니다. 특별히 내용상 이스라엘의 3대 절기 중에 ‘유월절(Passover)’에 이스라엘 건국사에있어 하나님께서 행하신 놀라운 일들을 회상하며 이 찬양을
올려드렸던 것으로 보고 있습니다.

1절 말씀을 보시면, “이스라엘이 애굽에서 나오며 야곱의 집안이 언어가 다른 민족에게서 나올 때에” 이스라엘 민족의 출애굽을 의미하고 있는 말씀입니다. 그런데 ‘이스라엘’이란 말과 함께 ‘야곱의 집안’이란 표현이 동격으로 쓰이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야곱의 집안 즉 그 자손들 70명이 애굽으로 내려간 지 430년이 흐른 뒤 출애굽할 때 그의 자손은 장정만 60만 명에 이르는 큰 민족으로 성장해 있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이스라엘’이란 말과 ‘야곱의 집안’이란 표현을 통해 그 사실을 상기시키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기억하는 사람이 바른 믿음 생활을 할수 있습니다. 여러분이 누군가에게 호의와 은혜를 베풀었는데, 그 사람이 받은 은혜를 잊고 신의를 저버린다면… 그런 사람이 나와 좋은 관계를 유지할 수가 있겠습니까? 마찬가지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큰 은혜를 베푸셨는데, 우리가 그 은혜를 저버리거나 배신하는 삶을 산다면… 어찌 하나님과 좋은 관계라 할 수 있으며, 참된 신앙인의 모습일 수 있겠습니까? 야곱의 집안인 이스라엘 민족은 종되었던 애굽에서 구원하신 하나님의 은혜를 잊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2절을 보시면, “유다는 여호와의 성소가 되고 이스라엘은 그의 영토가 되었도다” 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민족을 출애굽 시키셔서 약속의 땅인 가나안으로 인도하셨고, 유다 지파의 땅인 예루살렘에 여호와의 성소인 거룩한 성전을 주셨고, 이스라엘 땅은 하나님이 통치하시는 신정 왕국으로 삼으셨다는 말씀인 것입니다.

3절부터 6절까지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출애굽 시에 있었던 기적과 광야 생활 중에 있었던 그리고 가나안 입성 시에 있었던 특별한 사건들을 비유적으로 기록하고 있습니다.

3절과 5절을 보시면, “바다가 보고 도망하며 요단은 물러갔으니, 바다야 네가 도망함은 어찌함이며 요단아 네게 물러감은 어찌함인가” 이것은 출애굽 시에 있었던 홍해의 기적과 가나안 입성 시에 있었던 요단강 도하의 기적을 말하고있는 것입니다. 바다가 어떻게 갈라질 수 있겠습니까? 강물이 어떻게 갈라질 수 있겠습니까? 인간의 힘으로 그리고 자연적으로는 절대 불가능한 사건들이 이스라엘의 출애굽 시에 그리고 가나안 입성 시에 있었던 것입니다. 그 초자연적 사건을 통해 하나님은 이스라엘 민족의 구원과 그리고 새로운 시작을 여셨던 것입니다.

저는 열아홉 살 때 처음 교회에 등록하여 출석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믿음은 하나님의 은혜로 주어지는 것이라는 것이 확실한 게 저는 교회에 나가자마자 성경의 모든 내용이 그냥 다 믿어지고, 예수님을 나의 주님으로 영접하게 된것입니다. 저에게 있었던 지독한 가난과 암울한 미래 등등의 상황과 환경은 전혀 변한 게 없는데, 저는 매일 구름 위를 떠다니는 것처럼 너무 행복한 나날을 보냈었습니다.

그렇게 신앙 생활한지 5개월 즈음에 몸이 아프기 시작했는데, 의료보험도 돈도 없었기 때문에 병원엔 갈 수가 없었습니다. 나중엔 숨도 쉴 수 없을 정도로 숨이 가빴고, 열은 40도까지 올라 있었고, 몸무게는 지금보다 20여 kg이나 빠져 있었던 때였습니다. 아무도 저를 돌봐줄 사람은 없었습니다. 그렇게 점점 숨이 넘어가기 직전 병원에 가게 되었는데 폐결핵으로 한쪽 폐 기능이 완전히 망가진 상태였습니다. 다행히 두 달간 병원에 입원하며 치료받고, 그 후 1년 동안 약을 먹으며 회복했습니다. 그때 한번 죽다 살았습니다.

하지만, 제겐 부모님도, 저를 돌봐줄 가족도 없었기 때문에 영양이 결핍했고, 결핵은 2년 뒤에 다시 재발했고, 10개월간 한 줌씩 약을 입에 털어 넣으며 병을 고쳐보려 애썼지만, 병은 점점 심해졌고 제가 점점 죽어가고 있다는 걸 느끼던 때였습니다. 그런데 제가 ‘죽더라도 기도라도 하다가 죽자’라는 마음으로 기도원에 올라가 기도하는데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이 제게 얼마나 큰 은혜로 다가왔는지, 그래서
기도원에 있는 동안 얼마나 많이 울었는지 모릅니다.

그리곤 산에서 내려오는데 기침이 멎고 몸이 점점 좋아지는 겁니다. 그때 하나님께서 제 몸을 고쳐주셨습니다. 그리고 그 사건을 계기로 저는 하나님 앞에 제 삶을 드리기로 결단하고, 신학교에 가고, 이렇게 목사로 제 평생을 헌신하며 살아가게 된 것입니다. 이스라엘이 종되었던 애굽에서 출애굽하고, 광야생활을 했듯이 제 인생의 광야와 같은 시련과 고난은 하나님께서 저를 구원하시고, 새로운 시작을 여셨던 특별한 사건으로 제 마음에 늘 남아 있습니다.

1절에서 ‘야곱의 집안’이라고 표현된 이스라엘은 작은 부족에서 큰 민족으로 성장했고, 애굽에서 종살이 하던 가장 절망적인 상황에서 하나님의 특별한 능력으로 구원하셔서 가나안 땅을 주셨고, 하나님께서 다스리시는 신정 왕국은 건국하여 새로운 시작을 주셨던 것입니다.

혹시 지금 여러분의 인생에 있어 가장 힘들고 어려운 순간을 보내고 있을 수도 있습니다. 내 힘으로 감당할 수 없는 일들 앞에서 피로감에 젖어 있을 수도 있고, 답답한 미래로 인해 낙심과 좌절의 감정으로 힘들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그 절망 중에 있는 나를 구원하여 새로운 시작을 주시는 분이십니다. 내 능력의 끝에서, 내 인생의 끝에서 하나님이 일하셔서 새로운 역사를 이루실 것입니다.

기억해야 할 한 문장
하나님은 그 절망 중에 있는 나를 구원하여 새로운 시작을 주시는 분이십니다. 내 능력의 끝에서, 내 인생의 끝에서 하나님이 일하셔서 새로운 역사를 이루실것입니다.

오늘의 묵상
내게 있는 고난을 통해 하나님께서 어떻게 일하실 지를 묵상해 봅시다.

실패자를 들어 쓰시는 하나님

시편 113:1~9

1 할렐루야, 여호와의 종들아 찬양하라 여호와의 이름을 찬양하라

2 이제부터 영원까지 여호와의 이름을 찬송할지로다

3 해 돋는 데에서부터 해 지는 데에까지 여호와의 이름이 찬양을 받으시리로다

4 여호와는 모든 나라보다 높으시며 그의 영광은 하늘로다 높으시도다

5 여호와 우리 하나님과 같은 이가 누구리요 높은 곳에 앉으셨으나

6 스스로 낮추사 천지를 살피시고

7 가난한 자를 먼지 더미에서 일으키시며 궁핍한 자를 거름더미에서 들어 세워

8 지도자들 곧 그의 백성의 지도자들과 함께 세우시며

9 또 임신하지 못하던 여자를 집에 살게 하사 자녀들을 즐겁게 하는 어머니가 되게 하시는도다 할렐루야

[시편 113편]은 ‘할렐루야’로 시작해서 ‘할렐루야’로 마치기 때문에 ‘할렐시(Hallen)’라고 불리기도 합니다. ‘할렐루야’라는 것은 ‘여호와를 찬양하라’는 뜻을 갖고 있습니다. 시인은 1~3절에서 여호와의 종들에게 하나님을 찬양할 것을 요구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4~9절까지는 그 하나님을 찬양해야 할 이유가 무엇인지를 나열하고 있습니다.

먼저, 2절과 3절을 보시면, “이제부터 영원까지 여호와의 이름을 찬송할지로다. 해 돋는 데에서부터 해 지는 데에까지 여호와의 이름이 찬양을 받으시리로다” 시인은 하나님을 찬양하되 ‘이제부터 영원까지’ 그 찬양의 기간이 끝이 없는 영원에 이르기까지 되어야 함을 말하고 있고, ‘해 돋는 데에서부터 해 지는 데에까지’ 즉, 영원이라는 시간을 이해할 수없다면 하루의 날이 시작하면서부터 마치는 데에까지, 인생의 시작부터 마치는 데에까지 하나님은 찬양 받기에 합당하신 분이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4~9절까지 그 이유에 대해서 나열하고 있는데, 4절에서 이 땅에 있는 모든 나라와 권세와 영광보다 높고 심지어 하늘보다 더 높은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 땅의 어떤 고관보다, 어떤 왕들보다 더 높은 분이신데 6절에 의하면, 그 하나님께서 스스로 자신을 낮추어 하늘 아래에 있는 연약한 자들을 살피셨다는 것입니다.

정치적 야망과 권력욕으로 가득한 현대의 정치인들은 수 해나 산불과 같은 어떤 재난 현장에 수행원들과 함께 우르르 몰려가서 사람들 손도 잡아 주고 뭔가 걱정하는 듯한 말들을 하지만, 우리 국민들 중에 그 모습을 진실되게 바라보는 이는 많지 않을 것 같습니다. 과연 그들이 정말 큰 어려움 가운데 있는 이들을 향해 진정으로 걱정하는 것인지 아니면, 누군가의 재난을 자신의 정치적 수단으로 이용하는 것인지… 때로는 그 정치인들의 속이 훤히 들여다보일 때도 있습니다.

7절과 8절을 보시면, “가난한 자를 먼지 더미에서 일으키시며 궁핍한 자를 거름더미에서 들어 세워, 지도자들 곧 그의 백성의 지도자들과 함께 세우시며” 신분제도가 엄연히 존재하던 고대 사회에서 ‘가난한 자, 궁핍한 자’는 가장 비천한 밑바닥 인생이었습니다. 그 인생은 절대 신분 상승의 기회는 주어지지 않고, 그 자식의 자식과 그 후손 대대로 비천한 신분으로 살아야만 했던 시대였습니다.

그런데 성경의 역사를 보시면, 하나님께서는 가난하고, 궁핍하고 비천한 인생을 들어 위대한 역사를 이루셨던 일들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요셉은 열일곱 살에 비천한 노예 신분으로 전락했고, 20대 시절은 감옥의 죄수로 하루하루를 보냈었지만 하나님께서는 그를 들어 애굽의 총리로 세워 온 세상을 구원하는 통로가 되게 하셨습니다. 모세도 40년간 비천한 목동 신분으로 인생의 바닥을 치고 있을 때, 그를 들어 이스라엘 민족의 출애굽 지도자로 사용하셨습니다. 이런 예들이 성경에 얼마나 많이 나옵니까?

9절을 보시면, “또 임신하지 못하던 여자를 집에 살게 하사 자녀들을 즐겁게 하는 어머니가 되게 하시는도다 할렐루야” 어떤 학자는 이 구절을 ‘한나의 노래’와 연관이 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사무엘상 2장의 한나는 임신하지 못하던여인이었으나, 하나님께서 그를 불쌍히 여겨 아들 사무엘과 여러 자녀들을 주셔서 하나님을 찬양하는 여인이 되게 하셨다는 것입니다.

우리 교회 성도인 한 형제님이 필리핀에서 대형 교통사고로 여러 차례의 대수술을 받았지만, 결국은 한쪽 다리를 절단해야만 했고, 다른 다리도 인공관절 수술을 받아야만 했습니다. 목사인 저는 그 형제님을 생각할 때마다 마음이 아프고, ‘다리가 절단되지 않았더라면…’하는 안타까운 마음이 너무나도 큽니다. 본인과 가족들은 어떻겠습니까? 그런데 사고 전 예수님을 믿지 않던 우리 형제가 지금은 믿음 안에서 씩씩하게 이 모든 어려움을 견디며 재활치료도 받고, 직장 출근도 하면서 잘 살아가고 있습니다.

지금은 한국에서 근무하고 있는데, 얼마 전 세부에 잠시 다녀갔습니다. 그래서 함께 식사할 자리가 있었는데, 우리 형제님이 그때 목사인 저한테, ‘제가 목사님의 은혜는 정말 평생 잊지 않을 거예요…’ 하시면서, 눈물짓는 겁니다. 제가 그 말을 듣는데 얼마나 송구했는지 모릅니다. 왜냐하면 제가 그 형제님을 위해 해준 게 없었기 때문입니다.

다만, 병원에 있는 1년 반이라는 긴 시간 동안 함께 걱정해 주고, 함께 울어주고(울긴 참 많이 울었습니다), 함께 기도해 준 것뿐이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결과가 좋지 않은거 같아 저는 목사로서 알 수 없는 미안함 같은 게 지금도 큽니다. 그래서 그 형제님에게 그런 인사를 들을 자격도 없다고 생각되고, 성도가 아픈데 어느 목사님이 그렇게 안 하시겠습니까? 하지만, 우리 형제님은 그런 말로서 제게 고마움을 표현했던 것입니다.

우리 형제님은 지금도 매일 유튜브를 통해 찬양과 설교 말씀을 들으며, 하나님의 은혜를 기억하고, 주님과 인격적인 깊은 관계 안에서 믿음으로 살아가고 있습니다. 저는 하나님께서 우리 형제님을 통해서 새 일을 행하실 것을 믿습니다. 하나님은 가난하고 궁핍한 자, 실패한 자를 통해서 더 큰 영광을 받으실 것입니다. 고난이 크면 클수록, 실패가 크면 클수록 하나님은 더 큰 찬양과 영광을 받으시는 것입니다.

기억해야 할 한 문장
하나님은 가난하고 궁핍한 자, 실패한 자를 통해서 더 큰 영광을 받으실 것입니다. 고난이 크면 클수록, 실패가 크면 클수록 하나님은 더 큰 찬양과 영광을 받으시는 것입니다.

오늘의 묵상
나의 실패 가운데 하나님께서 어떤 찬양을 받으실지 묵상해 봅시다.

너그러운 사람이 복을 받는다

시편 112:5~10

5 은혜를 베풀며 꾸어 주는 자는 잘 되나니 그 일을 정의로 행하리로다

6 그는 영원히 흔들리지 아니함이여 의인은 영원히 기억되리로다

7 그는 흉한 소문을 두려워하지 아니함이여 여호와를 의뢰하고 그의 마음을 굳게 정하였도다

8 그의 마음이 견고하여 두려워하지 아니할 것이라 그의 대적들이 받는 보응을 마침내 보리로다

9 그가 재물을 흩어 빈궁한 자들에게 주었으니 그의 의가 영구히 있고 그의 뿔이 영광 중에 들리리로다

10 악인은 이를 보고 한탄하여 이를 갈면서 소멸되리니 악인들의 욕망은 사라지리로다

[시편 112편]은 ‘누가 복이 있는 사람인가’라는 주제를 다루고 있는데,

1절에서 “… 여호와를 경외하며 그의 계명을 크게 즐거워하는 자는 복이 있도다”라고 말씀하시고 있습니다. 그러니깐 여호와를 경외하는 사람, 하나님의 말씀을 즐거워하며 순종하는 사람이 복이 있다는 것입니다. 1절은시편 112편의 서론 격이라 할 수 있는데, 그렇다면 여호와를 경외하는 사람, 그분의 말씀을 즐거워하며 순종하는 복이있는 사람이 어떤 사람인가? 하는 것을 2절에서 10절까지 두 종류의 사람을 설명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 첫 번째 사람은 2~4절을 통해서 말씀하시고 있는 것처럼 ‘정직한 자가 복이 있다’라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5~10절까지에서 또 복이 있는 또 다른 한 종류의 사람을 구체적으로 말씀하시고 있는 것입니다.

5절을 보시면, “은혜를 베풀며 꾸어 주는 자는 잘되나니 그 일을 정의로 행하리로다” 라고 하셨습니다. 즉, ‘은혜를 베풀며 꾸어 주는 자’ 즉 오늘 말씀의 제목과 같이 “너그러운 사람이 복을 받는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을 믿는다면, 이 사실을 그냥 액면 그대로 믿으시 면 됩니다. 예수님의 산상수훈인 마태복음 5장에 보면, 이 사실을 보증하는 비슷한 말씀이 나옵니다.

마태복음 5장 5절에서 “온유한 자는 복이 있나니 그 들이 땅을 기업으로 받을 것임이요” 어떻게든 내가 한 뼘이라 도 더 차지하려고 악착같이 그리고 험악하게 달려드는 사람 이 당장에는 더 크고 넓은 땅을 차지할 수도 있습니다. 그 런데 결국 하나님께서는 온유한 자에게는 땅을 기업으로 주시 지만, 이기적 욕망에 사로잡혀 있었던 사람은 한순간에 모 든 것을 빼앗길 날이 오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7절을 보시면, “긍휼히 여기는 자는 복이 있 나니 그들이 긍휼히 여김을 받을 것임이요” 내가 누군가를 불 쌍히 여기며, 은혜를 베풀며 살게 될 때 하나님은 그 사람의 행한 일을 기억하시고 그가 곤란한 상황에 빠져 있을 때 그 를 불쌍히 여기시고, 그에게 은혜를 베푸신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 시편 본문 5절에서 말씀하시고 있는 바와 같이 “은혜를 베풀며 꾸어 주는 자”가 결국은 잘 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시편 112편 9절 말씀을 보시면, “그가 재물 을 흩어 빈궁한 자들에게 주었으니 그의 의가 영구히 있고 그 의 뿔이 영광 중에 들리리로다” 역사적으로 성경이 기록되던 수천 년 전이나 지금이나 세상에는 항상 부자와 가난한 자가있어 왔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더 강한 자와 더 많이 가진 자가 약한 자와 가난한 자를 돌아보도록 하셨습니다.

간혹 우리의 마음에는 ‘약한 자와 가난한 자’에 대해서 매몰찬 생각이 가득할 때가 있습니다. ‘저 사람은 게을러서, 자기 관리를 제대로 못 해서, 노력하지 않아서 저렇게 된 거야. 뿌린 대로 거둔 거지 뭐. 저런 사람 자꾸 도와주면 습관되니 도울 필요 없어…!’ 라고 생각하는 겁니다. 물론, 전혀 틀린 말은 아닐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어떤 사람의 경우 잘 해보고 싶은데 그것 자체가 잘 안되는 경우가 있습니다. 공부도 잘하고 싶고, 여러 가지 재능도 갖고 싶고, 잠도 안 자면서 열심히 노력이란 것도 해보고 싶은데… 그게 생각처럼 잘 안되는 사람이있는 겁니다. 어떤 뛰어난 사람이나, 성공하는 사람들과 같은 굳은 의지라는 것 자체가 없는 겁니다.

반면에 어떤 사람의 경우 맘먹은 것은 꼭 해내고야 마는 뛰어난 능력을 갖고 있습니다. 그래서 그 사람은 인생을 살면서 여러 좋은 것을 소유하기도 하고, 영광스러운 자리에 오르기도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사람은 어딜 가나 칭찬을 듣고, 좋고 풍요로운 환경을 누리기도 하는 겁니다. 의지박약과 무기력과 무능력한 사람이 볼 때, 그 뛰어난 사람은 항상 부러움의 대상이 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때문에 가진 자들, 잘난 자들, 능력 있는 자들, 성공한 자들은 연약한 자와 가난한 자를 향해서 매몰찬 마음을 거두시길 바랍니다. 왜냐하면 사도행전 2장에서 오순절 성령 강림으로 인해 예루살렘 초대교회가 탄생했습니다. 그런데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으로 변화된 사람들에게 나타난 첫 번째 증상들은 그들이 연약하고 가난한 이들을 돌아보는 것이었습니다.

로마서 15장 1절에서도 “믿음이 강한 우리는 마땅히 믿음이 약한 자의 약점을 담당하고 자기를 기쁘게 하지 아니할 것이라”는 말씀도 있습니다. 연약한 사람을 정죄하고 비난하고 멸시하는 일은 하나님께서 기뻐하지 않습니다. 도리어 믿음이 연약한 자를 돌아보고, 그들의 약한 점을 커버해 줄 수 있는 것이 참된 믿음의 사람의 도리인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불쌍히 여기시지 않으신다면 과연 우리 중에 멀쩡하게 서 있을 사람이 있을까요? 우리가 연약해도, 실수가 많아도 심지어 죄가 많아도 우리의 연약함을 불쌍히 여기시고, 동정하셔서 우리가 이렇게 하나님의 은혜의 그늘 아래 머무는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은 우리에게도 연약한 자를 향해 매몰찬 마음을 거두고, 불쌍히 여기는 마음, 너그러운 마음으로 그에게 은혜를 베풀길 원하시는 것입니다. 너그러운 주님의 마음으로 살아가는 사람들이 결국 복을 받게 될 사람인 것입니다.

기억해야 할 한 문장
연약한 사람을 정죄하고 비난하고 멸시하는 일은 하나님께서 기뻐하지 않습니다. 도리어 믿음이 연약한 자를 돌아보고, 그들의 약한 점을 커버해 줄 수 있는 것이 참된 믿음의 사람의 도리인 것입니다.

오늘의 묵상
내가 너그러운 마음으로 대해야 할 사람이 있습니까?

결국 복을 받는 사람은

시편 112:1~4

1 할렐루야, 여호와를 경외하며 그의 계명을 크게 즐거워하는 자는 복이 있도다

2 그의 후손이 땅에서 강성함이여 정직한 자들의 후손에게 복이 있으리로다

3 부와 재물이 그의 집에 있음이여 그의 공의가 영구히 서 있으리로다

4 정직한 자들에게는 흑암 중에 빛이 일어나나니 그는 자비롭고 긍휼이 많으며 의로운 이시로다

제가 한두 주 전 주일 설교를 시작하면서 ‘잘산다 & 못산다’라는 말과 두 단어 사이에 한 칸을 띄어 쓰면서
‘잘 산다 & 못 산다’라는 말의 의미를 성도님과 나눈 적이 있습니다. 두 단어가 하나로 묶인 합성어 <잘산다 = 부유하 다>는 뜻입니다. 반대로 <못산다 = 가난하다>는 뜻이 되는 겁니다. 그리고 띄어쓰기가 있는 <잘 산다 = 행복하게 잘 살 아가고 있다>라는 의미이고, 반대로 <못 산다 = 인생을 잘 살 아가지 못하고 있다>라고 말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물질적인 부의 유무(有無)와는 관계없이 인생을 행복하게 잘 살아갈 수도 있고, 그렇지 않을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인생을 잘 살아가느냐? 또는 그렇지 않는냐? 에 대한 정확한 기준은 이 세상의가치에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 확인해 볼 수 있습니다. [시편 1편]의 주제는 ‘복 있는 사람은’이라고 할 수 있는데, 오늘 본문인 [시편 112편]의 주제는 ‘누가 복이 있는 사람인가’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1절 말씀을 보시면, “할렐루야, 여호와를 경외하며 그의 계명을 크게 즐거워하는 자는 복이 있도다” 라고 말씀하 시고 있습니다. 복이 있는 사람은 돈의 많고 적음이 아니 라, ‘여호와를 경외하는 사람 그리고 그 말씀을 크게 즐거워하 는 사람이 복이 있다.’라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여호와를 경 외하는 사람 그리고 그분의 말씀을 즐거워하며 순종하며 살 아가는 사람은 어떤 사람입니까? 시편 112편에서는 두 종 류의 사람을 구체적으로 말씀하시고 있습니다.

오늘 살펴볼 본문에서는 <정직하게 사는 사람 = 복 이 있는 사람 즉 결국은 복을 받는 사람>이라고 말씀하시고 있습니다.

2절을 보시면, “그의 후손이 땅에서 강성함이여 정직한 자들의 후손에게 복이 있으리로다”라고 하셨습니다. 하 나님 앞에서 그리고 사람 앞에서도 정직하게 살아가는 사람 은 점점 잘 될 수밖에 없습니다. 그와 그의 후손이 이 땅에 서도 점점 힘을 얻게 되고, 영향력이 있게 되고, 후손의 후 손에 이르기까지 계속해서 그 복이 그 가문을 따르게 될 것 입니다.

3절도 보시면, “부와 재물이 그의 집에 있음이여 그 의 공의가 영구히 서 있으리로다” 나는 이 말씀을 믿습니다. 정직한 사람이 결국은 복을 받을 것을 믿습니다. 그런데 그 여러 가지 복 안에 있는 한 부분이 되겠지만, 오늘 본문에서 는 ‘물질적인 부와 재물’에 대한 것도 약속하시고 있습니다.

우리 크리스천들은 세속적인 욕망과 야망에 대한 것을 추구하지는 않습니다. 우리는 나그네로 이 땅에서 살다가 주신 사명 잘 감당하다 천국에 갈 것을 소망하기 때문입니다. 목회자인 저 역시 물질적인 부자가 되고 싶은 마음은 손톱 만큼도 없습니다. 다만, 하나님께서 제게 맡겨 주신 물질이 있다면 제대로 좋은 일에 잘 사용하다가 주님 앞에 서고 싶습니다.

세상적으로 크게 성공해 큰 부자가 된 두 사람이 있습니다. ‘A’라는 부자는 개인적인 안위와 자랑만을 위해서 그 물질을 사용합니다. ‘B’라는 부자는 그 부와 성공을 통해 사회적으로 선하고 좋은 일에 사용합니다. 그런데 우리가 아무리 큰 부자라고 하더라도 자신의 안위와 자랑만을 위해서 그 부를 사용하는 사람을 향해 ‘훌륭한 사람’이라고 말하지는 않습니다. 하지만, 자신이 이룬 그 부와 성공으로 누군가를 이롭게 하고 돕는 삶을 살아가는 사람을 향해서는 ‘훌륭한사람’이라고 말합니다.

그러니깐 물질적인 부와 성공은 그것을 ‘어떻게 사용하느냐?’에 따라서 ‘부자와 훌륭한 사람이 구분’될 수 있는 것입니다. 물론, 세상적으로 큰 성공과 부를 이루지 못했어도 꼭 물질적인 것이 아니어도 자신의 재능을 어떻게 사용하며, 어떤 인생을 살아가느냐에 따라서 그가 훌륭한 사람이었는지 아니었는지도 평가되는 것입니다.

4절을 보시면, “정직한 자들에게는 흑암 중에 빛이 일어나나니 그는 자비롭고 긍휼이 많으며 의로운 이로다” 하나님께서는 정직한 자를 기뻐하십니다. 그래서 결국은 그에게 복을 주실 것입니다. 그러나 때때로 그 정직한 자에게도 고난과 시련은 올 수 있습니다. 인생의 깊은 흑암 가운데 던져지기도 할 것입니다. 마치 인생이 다 끝난 것처럼 느껴질 만큼 그 시련의 강도가 클 수도 있을 것입니다. 다니엘의 친구들이 풀무불에 던져졌던 것처럼, 다니엘이 사자굴에 던져졌던 것처럼 최악의 상황에 처해 지기도 할 것입니다.

그러나 이 구절을 통해서 자비롭고 긍휼이 많으시며 의로우신 하나님은 그 시험과 환난에서 반드시 건져주실 것을 약속하시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흑암 중에 빛이 일어나게 하실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 정직한 자의 편에 서 계십니다. 그렇게 끝나게 하지 않으실 것입니다. 정직한 자가 최후의 승리자가 되게 하실 것입니다. 그 사람이 ‘잘 사는 사람’이고, 그 사람이 ‘결국 복을 받는 사람’이 되게 하실 것입니다. 우리 하나님 앞에 정직하게 살아가고 있다면, 여러분은 지금 제대로 잘 살아가고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하나님 앞에서 진정으로 복을 받을 사람이고, 복이 있는 사람인것입니다.

기억해야 할 한 문장
하나님은 그 정직한 자의 편에 서 계십니다. 그렇게 끝나게 하지 않으실 것입니다. 정직한 자가 최후의 승리자가 되게 하실 것입니다. 그 사람이 ‘잘 사는 사람’이고, 그 사람이 ‘결국 복을 받는 사람’이 되게 하실 것입니다.

오늘의 묵상
하나님께서 믿음으로 살아가는 당신을 결국은 복을 주실 것을 묵상 해봅시다.

훌륭한 지각을 가진 자

시편 111:1~10

1 할렐루야, 내가 정직한 자들의 모임과 회중 가운데에서 전심으로 여호와께 감사하리로다

2 여호와께서 행하시는 일들이 크시오니 이를 즐거워하는 자들이 다 기리는도다

3 그의 행하시는 일이 존귀하고 엄위하며 그의 공의가 영원히 서 있도다

4 그의 기적을 사람이 기억하게 하셨으니 여호와는 은혜로우시고 자비로우시도다

5 여호와께서 자기를 경외하는 자들에게 양식을 주시며 그의 언약을 영원히 기억하시리로다

6 그가 그들에게 뭇 나라의 기업을 주사 그가 행하시는 일의 능력을 그들에게 알리셨도다

7 그의 손이 하는 일은 진실과 정의이며 그의 법도는 다 확실하니

8 영원무궁토록 정하신 바요 진실과 정의로 행하신 바로다

9 여호와께서 그의 백성을 속량하시며 그의 언약을 영원히 세우셨으니 그의 이름이 거룩하고 지존하시도다

10 여호와를 경외함이 지혜의 근본이라 그의 계명을 지키는 자는 다 훌륭한 지각을 가진 자이니 여호와를 찬양함이 영원히 계속되리로다

얼마 전, 2000년생(올해 25세)의 아역 배역 출신 여배우가 극단적인 선택으로 세상을 떠났습니다. 그런데 이 여배우의 극단적 선택의 원인을 둘러싼 논란이 계속되고 있습니다. 특별히 12살 차이가 나는 한류스타인 유명 남자 배우가 이 여배우의 중학교 3학년 미성년자 시절부터 이성 교제한 의혹이 제기되었고, 미성년자와의 이성 교제만으로도 비난 받을 일이지만, 그가 100% 지분을 소유하고 있는 연예기획사와 관련된 비도덕적 행위로 인해 어린 여배우를 자살로 내몬 것은 아닌가? 라는 의혹이 불거졌던 것입니다.

양측의 주장이 다르니 아직 진실이 뭔지는 정확히 밝혀지지는 않았지만, 사회적 여론은 그리 좋지 않은 거 같습니다. 때문에 국내와 국외의 광고와 드라마, 방송, 영화사들은 이 남자 배우로 인한 이미지 손상으로 인해 계약을 해지하고 있고, 이 배우가 앞으로 물어야 할 위약금은 점점 불어나고 있습니다. 디즈니플러스라는 곳에서 드라마를 9부작으로 찍었는데 이 사건이 터져서 방송 자체가 어렵다는 겁니다. 그래서 디즈니플러스에 물어야 할 위약금이 최대 2천억 원에 이를 수도 있다고 예측되고 있습니다.

‘지각(知覺)’이란 말은 ‘알 지(知)’에 ‘깨달을 각(覺)’자를 쓰고 있어서 ‘알아서 깨닫는 능력, 사물의 이치나 도리를 분별하는 능력’이란 뜻입니다. 위에서 말씀드린 이 연예인에 관한 내용이 사실이라면, 그래서 정말 그 어린 여배우를 죽음으로 내몰게 된 원인이 되었다면 열두 살이나 많았던 그 성인 남자 배우가 지각이 없었다는 생각이 드는 겁니다.

[시편 111편]은 ‘여호와께서 얼마나 크고 위대한 참 하나님이신지, 지각이 있는 모든 자들은 마땅히 그분을 찬양해야 함을 노래하는 시’라고 할 수 있습니다.

시편 111편 1절을 보시면, “할렐루야, 내가 정직한 자들의 모임과 회중 가운데에서 전심으로 여호와께 감사하리로다” 이 구절에서 ‘정직한 자들의 모임과 회중’은 하나님께서 선택하신 선민 이스라엘을 염두해 둔 표현일 것입니다. 하나님의 선택과 사랑과 은혜를 입은 이스라엘은 하나님께서 얼마나 크시고 위대한 분이신지를 경험한 민족이기 때문에 마땅히 하나님께 감사하고 그분을 찬양해야 하는 것입니다. 지각이 있다면 그 은혜를 잊지 말아야 하는 것입니다.

5절과 6절을 보시면, “여호와께서 자기를 경외하는 자들에게 양식을 주시며 그의 언약을 영원히 기억하시리로다. 그가 그들에게 뭇 나라의 기업을 주사 그가 행하시는 일의 능력을 그들에게 알리셨도다” 5절의 경우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출애굽했을 때, 40년간 만나와 메추라기로 그들을 먹이셨던 것을 연상하게 합니다. 그리고 6절의 경우는 그들이 가나안 땅에 들어갔을 때, 그들이 농사짓지 않았고 그들이 경작하지 않은 땅과 그들이 건축하지 않은 성읍들을 기업으로 얻게 되었던 것을 의미하고 있습니다.

철없는 자식이 부모의 가슴에 큰 대못을 박는 것과 같은 상처를 주는 말 중에 하나가 “아빠가, 엄마가 나한테 해준 게 뭐가 있어요?”라는 말일 것입니다. 물론, 부모 중에 성숙하지 못하고, 인격적으로도 부족함에도 불구하고 어쩌다 보니 부모가 되어 자식을 낳았는데, 여러 가지 이유로 인해서 자식에게 인격적으로 미성숙하여 부족한 부모일 수도 있고, 풍요롭고 넉넉하게 해 주지 못했을 수도 있을 겁니다. 하지만, 일반적으로 대부분의 부모는 자기 자식에게 가장 좋은 것을 주려고 했다는 것만큼은 사실일 것입니다.

그리고 에스겔 16장 4절을 보시면, “네가 난 것을 말하건대 네가 날 때에 네 배꼽 줄을 자르지 아니하였고 너를 물로 씻어 정결하게 하지 아니하였고 네게 소금을 뿌리지 아니하였고 너를 강보로 싸지도 아니하였나니” 아기가 막 태어났을 때, 그냥 그대로 내버려두면 어떤 아기도 스스로의 힘으로 살 수 있는 아기는 없습니다.

에스겔 16장 5절도 보시면, “아무도 너를 돌보아 이 중에 한 가지라도 네게 행하여 너를 불쌍히 여긴 자가 없었으므로 네가 나던 날에 네 몸이 천하게 여겨져 네가 들에 버려 졌느니라” 지금 막 출생한 아기를 그대로 두면 죽을 수밖에 없지만, 그래도 누군가가 그 아기를 불쌍히 여겨 그를 씻기고, 강보를 둘러 안아 돌봤기 때문에 건강하게 성장할 수 있는 것입니다. 이 구절들은 하나님께서 버려진 예루살렘과 이스라엘을 불쌍히 여겨 돌보시고 은혜를 베푸셨음을 비유하고 있는 말씀입니다.

저 역시 대여섯 살 때부터 부모로부터 유기되어 제가 성장기를 어떻게 지나왔는지 모르겠습니다. 그때는 부모님을 원망하며 성장기를 보냈지만, 나중에 예수님을 믿고 나서 그리고 제가 좀 더 성숙한 성인이 되어서는 저의 부모님이 이해가 되기도 하고, 얼마나 힘든 인생들을 사셨을까… 안쓰러운 마음도 들고, 더 나아가 그런 중에도 핏덩이였던 저를 거두셨던 것에 대한 감사한 마음도 갖게 되었습니다.

오늘 본문 시편 111편 10절을 보시면, “여호와를 경외함이 지혜의 근본이라 그의 계명을 지키는 자는 다 훌륭한 지각을 가진 자이니 여호와를 찬양함이 영원히 계속되리로다” 일반적인 자녀라면 핏덩이였던 자신을 거두고 양육한 부모를 향해 감사한 마음을 갖고 있을 겁니다. 마찬가지로 하나님께서 지금까지 우리에게 행하신 일을 믿고 감사하고 찬양하는 사람을 이 구절에서 “훌륭한 지각을 가진 자”라고 말씀 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존재를 인정할 뿐 아니라, 모든것이 하나님의 은혜임을 인정하며 감사하는 것이 참된 믿음인 것입니다. 그가 바로 훌륭한 지각을 가진 자인 것입니다.

기억해야 할 한 문장
하나님의 존재를 인정할 뿐 아니라,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은혜임을 인정하며 감사하는 것이 참된 믿음인 것입니다. 그가 바로 훌륭한 지각을 가진 자인 것입니다.

오늘의 묵상
오늘 하나님 앞에서 감사해야 할 은혜가 무엇인지 묵상해 봅시다.

    심판하시는 그리스도

    시편 110: 5~7

    5 주의 오른쪽에 계신 주께서 그의 노하시는 날에 왕들을 쳐서 깨뜨리실 것이라

    6 뭇 나라를 심판하여 시체로 가득하게 하시고 여러 나라의 머리를 쳐서 깨뜨리시며

    7 길 가의 시냇물을 마시므로 그의 머리를 드시리로다

    인류의 역사가 시작되고 정말 오랜 세월 동안 세상은 특별한 사람이나 또는 어떤 권력과 폭력에 의해 지배되었습니다. 그렇다고 세상에 ‘법(法)’이란 게 없었던 건 아니지만, 그 법조차도 왕과 같은 특별한 권력보다는 힘이 없었던 겁니다.

    하지만, 지금 우리는 ‘법치주의(法治主義 : rule of low)’ 아래에서 살아가고 있습니다. 특별한 어떤 권력자가 아니라 모든 권력도, 사람도 모두 ‘법의 지배’를 통해서 통치되는 시대인 것입니다. 우리나라에도 <헌법재판소>라는 기관이 있어서 국가의 최고 통수권자인 대통령마저도 헌법에 의해 재판을 받아 생사의 운명이 갈릴 수도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아무리 무소불위(無所不爲)의 권력자라 할 지라도 우리나라의 통치 근간인 ‘헌법’에 의해 재판도 받고, 심판도 받게 된다 라는 사실을 알기 때문에 고대 사회의 군주들과 같이 자신의 욕망과 뜻에 따라 마음대로 할 수 없다는 겁니다. 그 법의 준엄한 심판을 알기 때문에 그 누구도 함부로 자신의 권력을 휘두를 수 없는 것입니다.

    시편 안에서 대표적인 메시야 예언시로 구분되는 [시편 110편]을 살펴보고 있는데, 1~3절은 ‘메시야의 통치’에 대해서 말씀하시고 있고, 4절은 ‘메시야의 영원한 대제사장직’에 대해서 말씀하시고 있고, 오늘 본문인 5~7절은 ‘세상을 심판하시는 메시야(그리스도)’에 대해서 말씀하시고 있습니다. 이 세상의 아무리 강대한 나라와 강력한 권력을 쥔 왕이라 할지라도 모두 메시야의 심판 앞에 서게 된다는 것입니다.

    시편 110편 5절에서 “주의 오른쪽에 계신 주께서 그의 노하시는 날에 왕들을 쳐서 깨뜨리실 것이라” 하셨습니다. 다윗은 ‘주(主)의 오른쪽에 계신 주(主)께서…’라고 말하고 있는데, 여기서 첫 번째 ‘주’는 ‘여호와 하나님’이시고, 두 번째 ‘주’는 ‘그리스도(메시야 예수)’를 가리킵니다. 그러니깐 다윗은 성령의 영감으로 이 시편을 기록할 때, 자신의 후손으로 오실 메시야 그리스도 예수께서 하나님 우편에 계신 것을 보면서 이 시편을 쓰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 우편에 계신 메시야(그리스도)께서 ‘진노하시는 날에 (열방의) 왕들을 쳐서 깨뜨리실 것이라’는 것입니다. 즉, 메시야는 믿는 자들에게는 구원자로 오시지만, 불순종하는 자들에게는 심판자로 임하시는 것입니다. 심판자로 오시는 메시야가 진노하시는 날이 열방의 왕들을 심판할 날이되는 것입니다. 그 메시야께서 ‘왕들을 쳐서 깨뜨리실 것이라’고 말씀하시고 있는데, 그릇이 산산이 깨지면 복구가 불가능하듯, 그 심판은 치명적이라는 것을 말합니다.

    그들은 고대 사회의 절대 권력자들로 그 권력은 말 그대로 ‘무소불위의 권력’이었을 것입니다. 그들을 가로막는 건 누구도 아무것도 없었을 것이고, 그 나라 안의 모든 영화와 영광을 독차지했을 것입니다. 모든 신하와 백성들이 그 왕앞에 머리를 조아렸을 것입니다. 왕들은 자신들이 절대적 권력을 갖고 있는, 자신을 가로막을 존재는 아무도 없는 최고 권력자라고 생각했을지 모릅니다. 하지만, 그 왕들을 심판할
    하늘의 주가 계시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됩니다.

    6절을 보시면, “뭇 나라를 심판하여 시체로 가득하게 하시고 여러 나라의 머리를 쳐서 깨뜨리시며” 메시야의 심판이 어떤 모양으로 나타나는지를 간략히 말하고 있는데, ‘뭇 나라를 심판하여 시체로 가득하게 하신다. 여러 나라의 머리를 쳐서 깨뜨리신다’는 것입니다. 머리가 깨졌다면 완전히 끝난 겁니다. 더 이상 소생의 가능성도 없는 것입니다. 그들이 자랑하던 모든 것들이 산산이 부서져 사라지게 될 것입니
    다.

    세계 최초의 제국을 역사학자들은 ‘바벨론 제국’으로 봅니다. 그리고 그 바벨론을 건설한 사람이 ‘느브갓네살 왕’입니다. 그 바벨론의 최전성기에 느브갓네살 왕은 크게 교만했었는데, 그때 하늘로부터 소리가 들리기를 “… 느브갓네살 왕아 네게 말하노니 나라의 왕위가 네게서 떠났느니라. 네가 사람에게서 쫓겨나서 들짐승과 함께 살면서 소처럼 풀을 먹을 것이요 이와같이 일곱 때를 지내서 지극히 높으신 이가 사람의 나라를 다스리시며 자기의 뜻대로 그것을 누구에게든지 주시는 줄을 알기까지 이르리라(단4:31,32)” 하셨습니다.

    즉시로 세계 최초의 대제국 바벨론을 건설한 느브갓네살은 왕궁에서 쫓겨나 소처럼 풀을 먹으며 7년간을 방랑하게 되는 내용이 성경에 나옵니다.

    32절에 보면, “지극히 높으신 이가 사람의 나라를 다스리시며 자기의 뜻대로 그것을 누구에게든지 주시는 줄을 알기까지”라는 표현이 있습니다. 이 세상에 아무리 큰 권력자도 그 위에 더 높은 분이 계시다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이 시대에도 모든 사람, 대기업을 소유한 재벌도, 한나라의 대통령도, 그 누구도 ‘헌법’ 아래에 있는 것입니다. 잘못하면, 불법을 저지르면 그 법에 의해 심판을 받는 것입니다. 세상의 권력자도 법 아래에서 겸손해야 합니다. 그러니 우리와 같은 보통 사람들은 어떻겠습니까? 자랑하지 말아야합니다. 교만하지 말아야 합니다. 진실하고 정직하며 거룩해야 합니다. 우리를 심판하신 그리스도 앞에 겸손해야 합니
    다. 하나님의 주님 되심을 인정하는 종의 삶을 사시길 축복합니다.

    기억해야 할 한 문장
    자랑하지 말아야 합니다. 교만하지 말아야 합니다. 진실하고 정직하며 거룩해야 합니다. 우리를 심판하신 그리스도 앞에 겸손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주님 되심을 인정하는 종의 삶을 사시길 축복합니다.

    오늘의 묵상
    나를 심판하실 더 높으신 주님을 묵상해 봅시다.

    누가 날 위해 울어줄 것인가?

    시편 110: 4

    4 여호와는 맹세하고 변하지 아니 하시리라 이르시기를 너는 멜기세덱의 서열을 따라 영원한 제사장이라 하셨도다

    [시편 110편]은 시편 속에 있는 대표적인 ‘메시야 예언시’ 중에 하나입니다. 1~7절까지의 짧은 시편이지만, 이 시편을 통해 메시야(그리스도)의 직책과 사역의 특징을 간단히 소개하고 있습니다.

      1~3절 : 영원한 왕 되신 그리스도

      4절 : 중보자로서의 제사장 되신 그리스도

      5~7절 : 세상을 심판하실 그리스도

      오늘 본문인 4절을 보시면, “여호와는 맹세하고 변하지 아니하시리라 이르시기를 너는 멜기세덱의 서열을 따라 영원한 제사장이라 하셨도다” 이 구절은 [메시야의 대제사장직]에 대한 내용을 말하고 있습니다. 우리 성도님들에게 조금은 어려운 내용일 수도 있는데, 예수님의 제사장직에 대한 아주 중요한 내용이기도 합니다. 오늘 본문의 이해를 돕기위해 간단히 설명을 드려야 할 거 같습니다.

      ‘멜기세덱(Melchizedek)’이란 이름이 처음 등장한 것은 창세기 14장입니다. 아브라함이 조카 롯을 잡아간 북방의 연합군과 싸워 승리한 후 집으로 돌아오던 길에 ‘살렘 왕’ 멜기세덱이 아브라함을 맞아 주면서 축복해 주는 장면이 나옵니다. 히브리서 7장에서 그 멜기세덱에 대한 구체적인 내용이 나오는데, 그는 ‘지극히 높은 하나님의 제사장’인데, 그가 아브라함을 축복하자 아브라함이 그에게 십일조를 바쳤고, 그는 의의 왕이며 평강의 왕이고, 아비도 어미도 족보도 그리고 생명의 시작도 끝도 나오지 않는 신비한 존재입니다.

      히브리서 6장 20절에 의하면, “그리로 앞서 가신 예수께서 멜기세덱의 반차를 따라 영원히 대제사장이 되어 우리를 위하여 들어 가셨느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멜기세덱이란 신비한 인물이 누구인지에 대해서는 우리가 정확히는 알 수 없어도, 그는 예수 그리스도의 사역의 모형을 보여주는 신비한 제사장이었습니다.

      브리서 7장 25절을 보시면, “그러므로 자기를 힘입어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들은 온전히 구원하실 수 있으니 이는 그가 항상 살아 계셔서 그들을 위하여 간구하심이라” 제사장의 역할은 백성들의 죄와 연약함을 대신하여 하나님께 희생의 제사를 통해 죄 용서함을 받도록 돕는 일을 합니다.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중보와 다리 역할을 제사장이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구절을 통해서는 의의 왕이며, 평강의 왕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멜기세댁과 같은 영원한 제사장으로서 연약한 우리를 위해 친히 중보하며 간구하고 계신다라는 말씀인 것입니다.

      그런데 요한복음 14장 26절에서 “보혜사 곧 아버지께서 내 이름으로 보내실 성령…” 이라고 말씀하셨는데, 예수님께서 부활 승천 하시면서 하나님 아버지께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성령으로 보내신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성령의 특별한 사역 중에 하나가 예수님께서 하시는 ‘중보 사역’인 것입니다.

      그래서 로마서 8장 26절을 보시면, “이와 같이 성령도 우리의 연약함을 도우시나니 우리는 마땅히 기도할 바를 알지 못하나 오직 성령이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를 위하여 친히 간구하시느니라” 하셨습니다. 때로 우리는 어떻게 기도해야 할지 모를 때도 있습니다. 다만 마음이 괴롭고 힘든데 ‘내가 이렇게 기도하는 게 옳은지 그른지…’ 조차도 판단이 서지 않는 겁니다. 다만 하나님 앞에 그냥 답답함 속에 눈물만 흘릴 때도 있는 겁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이름으로 오신 성령님께서는 우리의 연약함을 아시고,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를 위해 친히 간구하신다는 것입니다. 성령님은 우리를 위해 대신 울어주시는 중보자십니다.

      누군가 나를 위해서 울어주는 사람이 있다는 것 자체만으로도 우리에겐 엄청난 위로가 됩니다. 나를 위해 울어준다는 것은 그만큼 나의 마음의 아픔을 공감해 준다는 것을 말하는 겁니다. 그래서 나를 위해 울어주는 사람에 대해서 얼마나 고마운 마음이 듭니까? 그런데 우리의 대제사장이신 예수님 그리고 그분의 이름으로 오신 성령께서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를 위해 간구하시는 것입니다.

      저에게도 어느 누구에게 말하기 힘들고 어려운 상황들이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때마다 그 위기를 넘어가고 또 넘어간 일들을 생각해 보면, 내 힘으로 된 것이 아니었습니다. 하나님의 은혜 가운데 나를 위해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간구하시는 중보자가 계셨던 것입니다. 여러분이 지금 너무 지치고 힘들어 기도할 힘조차 없는 상황일 수 있습니다. 하지만, 지금도 여러분을 위해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간구하며, 날 위해 울어주시는 분이 계심을 믿으십시오.

      기억해야 할 한 문장
      예수님의 이름으로 오신 성령님께서는 우리의 연약함을 아시고,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를 위해 친히 간구하신다는 것입니다. 성령님은 우리를 위해 대신
      울어주시는 중보자십니다.

      오늘의 묵상
      지금도 나를 위해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간구하시는 보혜사를 묵상해 봅시다.

        누가 진짜 왕 인가?

        시편 110: 1~3

        1 여호와께서 내 주께 말씀하시기를 내가 네 원수들로 네 발판이 되게 하기까지 너는 내 오른쪽에 앉아 있으라 하셨도다

        2 여호와께서 시온에서부터 주의 권능의 규를 내보내시리니 주는 원수들 중에서 다스리소서

        3 주의 권능의 날에 주의 백성이 거룩한 옷을 입고 즐거이 헌신하니 새벽 이슬 같은 주의 청년들이 주께 나오는도다

        [2차 세계대전] 이후부터 미국과 소련(소비에트연방) 간에 ‘냉전 시대’가 소련이 붕괴되기까지 약 50년 동안 지속 되었습니다. 민주주의와 자본주의의 대표격이라 할 수 있는 미국 그리고 사회주의와 공산주의의 대표격이라 할 수 있는 소련 사이의 세계 패권 경쟁이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21세기에 들어서는 미국과 중국 간의 ‘신(新) 냉전 시대’가 시작되었습니다. 세계의 질서는 미국이라는 초강대국에 의해서 유지되고 있는 편인데, 경제 강국으로 올라선 중국이 그 패권을 잡으려고 하는 겁니다. 그런데 상식적인 나라와 비상식적인 나라 중에 상식적인 나라가 패권을 쥐면 그나마 세계 질서가 유지되지만, 2차 세계대전에서 독일제국과 일본제국이 패권을 쥐었을 때처럼 비상식적인 나라가 패권을 쥐게 될 때 얼마나 끔찍한 일이 벌어 지는지 우리는 역사 속에서 이미 경험했습니다.

        세계와 인류의 역사는 ‘누가 진짜 왕인가? 누가 세계의 진짜 주인인가?’라는 것의 각축전(角逐戰)과 같습니다. 거시적으로 세계의 패권 경쟁을 보면 알 수 있고, 미시적으로는 우리 각 개인의 삶도 결국은 ‘누가 내 인생의 주인인가? 누가 내 소유의 진짜 주인인가?’를 놓고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 다투고 있는 것이기도 합니다.

        창세기 3장 5절을 보시면, “너희가 그것을 먹는 날에는 너희 눈이 밝아져 하나님과 같이 되어(you will be like GOD) 선악을 알 줄 하나님이 아심이니라” 뱀 속에 들어간 사탄이 최초의 사람인 아담과 하와를 유혹했을 때 했던 말입니다. 뱀은 ‘너희 눈이 밝아져 하나님과 같이 되어(you will be like GOD)’라고 속였습니다.

        또 창세기 11장 4절에서 “또 말하되 자, 성읍과 탑을 건설하여 그 탑 꼭대기를 하늘에 닿게 하여 우리 이름을 내고(that reaches to the heavens, so that we may make a name for ourselves) 온 지면에 흩어짐을 면하자” 노아 홍수 이후에 세상에 퍼져나갔던 새로운 인류가 바벨탑을 쌓았던 이유는 그 탑을 ‘하늘에 닿게 하여 그들의 이름을 널리 알리는데’ 있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이 계신 하늘에까지 높아지고자 하는 마음 즉, 자신들의 전능함을 보여줌으로 스스로 신적 존재가 되려 했던 것입니다.

        천사장 중 하나였던 마귀가 타락했던 장면을 기록하고 있는, 이사야 14장 13절, 14절을 보시면, “네가 네 마음에 이르기를 내가 하늘에 올라 하나님의 뭇별 위에 내 자리를 높이리라 내가 북극 집회의 산 위에 앉으리라. 가장 높은 구름에 올라가 지극히 높은 이와 같아지리라 하는도다”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인류 역사 뿐만 아니라, 영적인 세계에서도 ‘누가 진짜 왕인가?’라는 도전과 싸움이 계속되고 있는 것입니다.

        다윗의 시인 [시편 110편]은 시편 속에 있는 대표적인 <메시야 예언시>라고 할 수 있습니다.

        1절을 보시면, “여호와께서 내 주에게 말씀하시기를 내가 네 원수들로 네 발판이 되게 하기까지 너는 내 오른쪽에 앉아 있으라 하셨도다” 다윗은 성령의 영감과 환상 가운데 하늘에서 여호와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 사이의 대화를 듣게 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그 아들 예수 그리스도에게 세상의 통치권을 주시는 장면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진정한 온 우주의 왕이시라는 것입니다.

        2절을 보시면, “여호와께서 시온에서부터 주의 권능의 규를 내보내시리니 주는 원수들 중에서 다스리소서” 여호와 하나님께서 모든 사람과 왕들과 나라들 중에 진정한 통치자로 그리스도를 세우셨다는 말씀입니다.

        3절을 보시면, “주의 권능의 날에 주의 백성이 거룩한 옷을 입고 즐거이 헌신하니 새벽이슬 같은 주의 청년들이 주께 나오는도다” 새벽에 온 대지를 수분으로 촉촉이 적시며 내리는 이슬과 같이 진정한 통치자와 왕이신 그리스도를 섬기는 수 많은 주의 백성들이 일어날 것을 예고하고 있는 것입니다.

        세계와 인류의 역사는 ‘누가 진짜 왕인가?’를 다투며, 자신이 패권을 갖고, 왕이 되려고 하는 이들의 각축전입니다. 성경의 역사도 그 사실을 말하고 있고, 영적인 영역에서도 마찬가지며, 우리 개인의 삶에서도 하나님을 주인으로 모시느냐? 아니면 내가 주인이 되느냐? 의 갈등 구조 속에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새벽에 내리는 이슬은 아침의 햇빛 앞에서 찬란하게 반짝이며 수증기가 되어 증발합니다. 이것은 3절의 “거룩한 옷을 입고 즐거이 헌신하니 새벽이슬 같은 주의 청년들이”라는 표현을 생각나게 합니다. 하나님을 자신의 인생의 참된 왕으로 모시는 인생은 나는 새벽이슬처럼 빛 되신 주님 앞에서 사라지고, 오직 빛 되신 주님의 영광이 내 삶을 통해 나타나는 삶인 것입니다. 저 역시도 다른 욕심이 없습니다. 주께 즐거이 헌신하는 새벽이슬과 같이 나의 삶을 통해 주님의 영광만이 세상에 가득하기를 소망합니다.

        기억해야 할 한 문장
        하나님을 자신의 인생의 참된 왕으로 모시는 인생은 나는 새벽이슬처럼 빛 되신 주님 앞에서 사라지고, 오직 빛 되신 주님의 영광이 내 삶을 통해 나타나는 삶인 것입니다.

        오늘의 묵상
        내 삶의 영역 속에 주님이 왕이심을 인정해야 할 것은 무엇입니까?

        복수하시는 하나님

        시편 109: 21~31

        21 그러나 주 여호와여 주의 이름으로 말미암아 나를 선대하소서 주의 인자하심이 선하시오니 나를 건지소서

        22 나는 가난하고 궁핍하여 나의 중심이 상함이니이다

        23 나는 석양 그림자 같이 지나가고 또 메뚜기 같이 불려 가오며

        24 금식하므로 내 무릎이 흔들리고 내 육체는 수척하오며

        25 나는 또 그들의 비방거리라 그들이 나를 보면 머리를 흔드나이다

        26 여호와 나의 하나님이여 나를 도우시며 주의 인자하심을 따라 나를 구원하소서

        27 이것이 주의 손이 하신 일인 줄을 그들이 알게 하소서 주 여호와께서 이를 행하셨나이다

        28 그들은 내게 저주하여도 주는 내게 복을 주소서 그들은 일어날 때에 수치를 당할지라도 주의 종은 즐거워하리이다

        29 나의 대적들이 욕을 옷 입듯 하게 하시며 자기 수치를 겉옷 같이 입게 하소서

        30 내가 입으로 여호와께 크게 감사하며 많은 사람 중에서 찬송하리니

        31 그가 궁핍한 자의 오른쪽에 서사 그의 영혼을 심판하려 하는 자들에게서 구원하실 것임이로다

        오늘 본문인 시편 109편은 다윗이 큰 시련과 고통 가운데 빠져 있었을 때 지은 시입니다. 특별히 1절부터 20절까지의 내용 중에는 대적들이 여러 거짓말을 퍼트리고, 온갖 악한 말과 저주를 퍼붓고, 그리고 공격적인 험한 말들을 통해서 다윗을 괴롭히고 있음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23절, 24절을 보시면, “나는 석양 그림자같이 지나
        가고 또 메뚜기 같이 불려 가오며, 금식하므로 내 무릎이 흔들
        리고 내 육체는 수척하오며” 다윗은 109편 4절에서

          … 나는 기도할 뿐이라”는 고백을 했었던 것처럼, 예기치 않았던 고난과 시련 앞에 다만 기도로 하나님의 은혜를 구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24절을 보니깐 그는 금식하며 기도하고 있었는데, 그 기간이 꽤 긴 시간 동안이었던 것 같습니다. 육체적으로 수척해지고, 무릎이 흔들려 일어날 힘조차 없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그리고 지금 자신의 처지가 잠시 잠깐 있다가 없어질 석양의 그림자와 같다는 것입니다. 그 석양의 그림자는 해가 지는 동시에 시작되는 캄캄한 어둠 속에 사라져 버리는 것입니다. 그리고 강풍에 불려 사라지는 메뚜기와 같다고 다윗은 자신의 비참한 처지를 비유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오늘 본문 25절 말씀은 시편 22편 6절과 7절 말씀과 비슷한데, “나는 벌레요 사람이 아니라 사람의 비방 거리요 백성의 조롱 거리니이다. 나를 보는 자는 다 나를 비웃으며 입술을 비쭉거리고 머리를 흔들며 말하되”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 구절에서 말하고 있듯이 다윗은 대적들의 엄청난 비난과 조롱과 모욕 속에 너무 큰 고통을 겪고 있었던 것입니다.

          28절과 29절을 보시면, “그들은 내게 저주하여도 주는 내게 복을 주소서 그들은 일어날 때에 수치를 당할지라도 주의 종은 즐거워 하리이다. 나의 대적들이 욕을 옷 입듯 하게 하시며 자기 수치를 겉옷같이 입게 하소서” 대적들의 험악한 공격을 온몸으로 받고 있었지만, 다윗이 할 수 있는 것이 없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다윗은 기도할 수밖에 없었고 26절 에서 29절까지를 통해서 하나님께 맡기는 기도를 하고 있는 것입니다.

          특별히 이 구절들을 통해서 다윗은 ‘복수하시는 하나님’에 대한 믿음이 그 안에 확고하게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복수(復讎)’라는 말은 우리 믿는 사람에게는 그리 어울리지 않는 단어입니다. 왜냐하면

          마태복음 5장 44절에서 예수님께서는 “… 너희 원수를 사랑하며 너희를 박해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고 하셨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원수를 사랑하라’고 하셨는데, 다윗이 갖고 있었던 믿음과 오늘 설교의 제목처럼 ‘복수하시는 하나님’이란 말은 그리 어울려 보이지 않습니다.

          그런데 로마서 12장 19절을 보시면, “내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가 친히 원수를 갚지 말고 하나님의 진노하심에 맡기라 기록되었으되 원수 갚는 것이 내게 있으니 내가 갚으리라고 주께서 말씀하시니라”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어떤 억울한 일을 겪더라도 ‘친히 복수하지 말 것’을 말씀하시고 있습니다.

          세 가지 이유 때문입니다. 첫째는 내가 재판장이 되어서는 안 된다. 는 것입니다. 사회적 질서 유지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인간 세계에 재판장이 있지만, 인간 재판장은 공정과 공의롭지 못할 때가 있는 겁니다. 진정한 재판장과 심판자는 오직 하나님뿐이십니다. 내가 재판자와 심판자가 되어 누군가를 복수하는 것을 하나님께서 원치 않으십니다.

          둘째, 복수는 끊임없는 복수를 부른다. 지금도 세계 역사 속에 나라와 나라, 민족과 민족의 조상 대대로부터 내려오던 원한에 대한 복수의 복수가 계속 이어지고 있는 것 입니다. 이 땅에 전쟁이 끊이지 않는 이유 중에 하나이기도 한 것입니다. 이것이 나와 타인과의 관계에서도 동일하게 이어질 수 있기 때문입니다.

          셋째, 복수심은 결국 내 마음과 인생을 파괴한다. 누군가를 미워하는 마음, 복수하고자 하는 마음, 본때를 보여 주려고 하는 마음… 같은 것을 계속 품고 있다면 그 사람의 마음은 파괴적이고, 미움과 분노 속에 자신을 가두고 있는 것과 같은 겁니다. 그래서 신명기 32장 35절 말씀을 인용한, 로마서 12장 19절 말씀을 통해서 “원수 갚는 것이 내게 있으니 내가 갚으리라”고 말씀하시고 있는 것입니다. 복수는 내 영역의 것이 아닙니다. 내가 복수하려는 것은 월권입니다.

          그래서 다윗의 또 다른 시인 시편 94편 1절에 보시면, “여호와여 복수하시는 하나님이여 복수하시는 하나님이여 빛을 비추어 주소서”라고 기도하고 있는 것입니다. 다윗은 스스로 복수할 수 없었고, 기도 외에 아무것도 할 수 없었지만, 다윗의 모든 억울함을 풀어주시고, 대신 복수하시고, 심판하실 공의로우신 하나님을 신뢰했던 것입니다.

          시편 109편 31절을 [쉬운성경]의 번역으로 보시면, “왜냐하면 주는 연약한 자의 오른편에 서서, 그가 죄 있다고 하는 자들로부터 그의 생명을 구원하시기 때문입니다.”라고 다윗은 고백하고 있습니다. 공의로운 재판자와 심판자 되시는 하나님께서 연약한 여러분의 모든 억울함을 풀어주시고, 그 악한 자로부터 여러분의 생명을 구원하실 것이라는 겁니다. 너무 억울하고 분한 마음이 들지만, 내가 복수하고 원수를 갚으려 하지 말고 공의로우신 하나님께 맡기십시오.

          기억해야 할 한 문장
          너무 억울하고 분한 마음이 들지만, 내가 복수하고 원수를 갚으려 하지 말고 공의로우신 하나님께 맡기십시오.

          오늘의 묵상
          내가 재판장과 심판자로 행하려고 하는 마음을 내려놓읍시다.

            내 입에서 나오는 말

            시편 109:6~20

            6 악인이 그를 다스리게 하시며 사탄이 그의 오른쪽에 서게 하소서

            7 그가 심판을 받을 때에 죄인이 되어 나오게 하시며 그의 기도가 죄로 변하게 하시며

            8 그의 연수를 짧게 하시며 그의 직분을 타인이 빼앗게 하시며

            9 그의 자녀는 고아가 되고 그의 아내는 과부가 되며

            10 그의 자녀들은 유리하며 구걸하고 그들의 황폐한 집을 떠나 빌어먹게 하소서

            11 고리대금하는 자가 그의 소유를 다 빼앗게 하시며 그가 수고한 것을 낯선 사람이 탈취하게 하시며

            12 그에게 인애를 베풀 자가 없게 하시며 그의 고아에게 은혜를 베풀 자도 없게 하시며

            13 그의 자손이 끊어지게 하시며 후대에 그들의 이름이 지워지게 하소서

            14 여호와는 그의 조상들의 죄악을 기억하시며 그의 어머니의 죄를 지워 버리지 마시고

            15 그 죄악을 항상 여호와 앞에 있게 하사 그들의 기억을 땅에서 끊으소서

            16 그가 인자를 베풀 일을 생각하지 아니하고 가난하고 궁핍한 자와 마음이 상한 자를 핍박하여 죽이려 하였기 때문이니이다

            17 그가 저주하기를 좋아하더니 그것이 자기에게 임하고 축복하기를 기뻐하지 아니하더니 복이 그를 멀리 떠났으며

            18 또 저주하기를 옷 입듯 하더니 저주가 물 같이 그의 몸 속으로 들어가며 기름 같이 그의 뼈 속으로 들어갔나이다

            19 저주가 그에게는 입는 옷 같고 항상 띠는 띠와 같게 하소서

            20 이는 나의 대적들이 곧 내 영혼을 대적하여 악담하는 자들이 여호와께 받는 보응이니이다

            우리는 하루에도 다 세기 어려울 만큼 많은 말을 하며 살아갑니다. 그런데 우리의 ‘말’에는 엄청난 힘이 있습니다. 다윗이 1~5절에서 고백했던 바와 같이, 거짓과 악한 말로 의로운 다윗이 얼마나 고통을 받았습니까? 누군가의 말한 마디가 때로는 누군가에게 엄청난 상처와 피해를 줄 수도 있다는 겁니다. 그러나 믿음의 말과 긍정적인 말과 선하고아름다운 말을 통해서 누군가는 큰 힘을 얻고, 소망을 갖게되고, 다시 일어날 능력을 얻게도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 내 입에서 어떤 말이 나오는지가 얼마나 중요한지 모릅니다. 여러분이 가정에서 가족에게 무심코 했던 말한 마디가 평생의 상처가 되기도 하고, 평생을 살아갈 힘이 되기도 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어린 자녀가 아무 생각이 없는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 마음이 병든 엄마의 말 한 마디는 자녀의 평생에 가슴에 상처로 남아 있을 수도 있다는 것을기억한다면 우리는 더 신중하게 말하게 될 것입니다.

            시편 109편 6절을 보시면, “악인이 그를 다스리게 하시며 사탄이 그의 오른쪽에 서게 하소서” 다윗은 악한 자들이 온갖 악한 말로서 까닭없이 그를 고통 속에 빠뜨리고, 괴롭혔지만 그는 4절에서 “나는 사랑하나 그들은 나를 대적하니 나는 기도할 뿐이라”라고 고백하며, 얼마나 영적으로 성숙한 모습을 보여주고 있습니까?

            하지만, 6절부터 갑자기 다윗의 감정이 요동치며 방금전, 사랑으로 충만한 믿음의 사람은 온데간데없고, 악인들을 향하여 온갖 저주를 퍼붓는 사람으로 격변한 거 같은 겁니다. 하지만, 6~15절까지의 마치 저주와 같은 내용은 다윗이 개인적인 원한과 복수 감정을 초월하여 하나님의 공의로운 심판에 호소하는 장면이라 이해하시면 됩니다.

            이 부분은 마음에 악이 가득하고, 사탄의 다스림 아래에 있는 사람에게 결국 일어날 일들을 나열하고 있는 것입니다.

            간략하게 정리해 보면,

              • 죄인으로 심판받게 된다(7절)
              • 수명이 짧아 직분을 뺏긴다(8절)
              • 가정이 파탄 난다(9절)
              • 자녀는 빌어먹고 산다(10절)
              • 고리대금 하는 자가 소유를 다 뺏는다(11절)
              • 누구도 그를 불쌍히 여기지 않는다(12절)
              • 자손이 없이 대가 끊긴다(13절)
              • 그의 죄가 대대로 기억된다(14절)
              • 하나님 앞에 영원한 죄인이 된다(15절)

              왜 이들은 이렇게 될 수밖에 없을까요? 16절에서 “그가 인자를 베풀 일을 생각하지 아니하고 가난하고 궁핍한 자와 마음이 상한 자를 핍박하여 죽이려 하였기 때문이니이다” 하나님께서는 가난하고 궁핍하며 마음이 상한 자에게 은혜를 베풀기를 원하시는데, 악한 자들은 긍휼을 베풀지 않고 도리어 약자들을 더 괴롭히고 고통을 줬다는 것입니다.

              마태복음 5장 7절에서 “긍휼히 여기는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긍휼히 여김을 받을 것임이요”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누군가를 불쌍히 여기고 도울 때, 나도 하나님께로부터 긍휼히 여김을 받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여러분이 누군가에게 도움을 주고, 누군가를 불쌍히 여겼다면 내게 도움받은 그 사람이 내게 은혜를 보답하지는 않을 수 있지만, 하나님께서 나에게 은혜와 긍휼을 베푸신다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 시편 109편 17절을 보시면, “그가 저주하기를 좋아하더니 그것이 자기에게 임하고 축복하기를 기뻐하지 아니하더니 복이 그를 멀리 떠났으며” 17절부터 시작해서 20절까지는 악인들의 특징이며, 그들의 장기라 할 수 있는‘말로서 누군가를 해롭게 하는 것’에 대해서 말씀하시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이 세상에 만들어놓으신 하나의 질서를 이구절을 통해서 발견하게 되는데, 그것은 내가(우리가) ‘어떤말을 하느냐에 따라서 복을 받기도 하고, 저주를 받기도 한다’라는 것입니다. 저주하기를 좋아하는 사람에겐 자기가 뱉었던 저주의 말이 자신에게 임하고, 축복하기를 기뻐하지 않았더니 그 복이 그 사람에게서 멀리 떠났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우리가 어떻게 살아야겠습니까? 우리가 어떤말을 하며 살아가야 하겠습니까? 누군가를 저주하기를 좋아하면 그 저주가 나에게 임하고, 누군가가 잘 되기를 바라며 축복하기를 싫어하면 복이라는 게 나에게서 점점 더 멀리 떠나버린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반대로 내가 누군가를 축복하기를 좋아하면 그 축복이 나에게 임한다는 말입니다.

              제가 열아홉 살에 예수님을 믿으면서 첫 번째로 변했던 것이 제 입에서 ‘욕’이란 게 사라졌다는 겁니다. 그리고 신앙이 점점 성숙해 가면서 ‘부정적인 말’이 사라지기 시작했다는 겁니다. 지금도 자주 실수도 하고 여전히 부족하지만, 제입에서 누군가에 대해서 부정적인 말이 나올 거 같으면 그냥 입을 닫고 침묵합니다. 일단, 부정적인 말이든, 누군가를 험담하는 말이든… 시작되면 우린 연약해서 잘 멈춰지지 않게 됩니다. 그리고 그 이후에는 마음이 얼마나 무거운지 모릅니다. 왜냐하면 우리 안에 성령이 계시기 때문입니다.

              잠언 18장 21절에서 “죽고 사는 것이 혀의 힘에 달렸나니 혀를 쓰기 좋아하는 자는 혀의 열매를 먹으리라” 하셨습니다. 성경은 이미 우리가 어떤 말을 하며, 어떻게 살아야 복을 받으며 살아갈지 알려주시고 있습니다. 우리는 매일 내 입의 열매를 먹고 살게 되는 것입니다. 아름답고 선한 말을 통해 동일한 열매를 먹게 되시기를 바랍니다.

              기억해야 할 한 문장
              성경은 이미 우리가 어떤 말을 하며, 어떻게 살아야 복을 받으며 살아갈지 알려주시고 있습니다. 우리는 매일 내 입의 열매를 먹고 살게 되는 것입니다.

              오늘의 묵상
              내가 버려야 할 말의 잘못된 습관이 무엇이 있을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