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가복음 10:38~42
38 그들이 길 갈 때에 예수께서 한 마을에 들어가시매 마르다라 이름하는 한 여자가 자기 집으로 영접하더라
39 그에게 마리아라 하는 동생이 있어 주의 발치에 앉아 그의 말씀을 듣더니
40 마르다는 3)준비하는 일이 많아 마음이 분주한지라 예수께 나아가 이르되 주여 내 동생이 나 혼자 일하게 두는 것을 생각하지 아니하시나이까 그를 명하사 나를 도와 주라 하소서
41 주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마르다야 마르다야 네가 많은 일로 염려하고 근심하나
42 몇 가지만 하든지 혹은 한 가지만이라도 족하니라 마리아는 이 좋은 편을 택하였으니 빼앗기지 아니하리라 하시니라
제가 처음 교회를 다니기 시작하던 때가 1980년대 중후반 이었습니다. 당시에는 교회에서 예배할 때 지금처럼 강단앞에 영상과 자막을 비춰주는 ‘빔 프로젝터’ 같은 영사기 같은 건 교회에선 볼 수 없었습니다.

그러다가 1980년대 후반에서 90년대 초반으로 넘어가던 시절에는 일명 ‘OHP’라고 불리던 ‘Over Head Projector’가 등장하고, 각 교회마다 찬양을 부르고 예배할 때, 이 영사기를 사용했습니다. 당시만 해도 신문물이었습니다.
투명 플라스틱 필름에 유성 매직으로 쓰거나, 나중엔 프린터로도 인쇄가 가능했는데 그 필름에 찬양 가사를 써 놓고 OHP에 비춰지는 자막을 보며 찬양했었습니다. 지금처럼 좋은 컴퓨터와 파워포인트 같은 게 없었으니, 절이 바뀌거나 가사가 바뀔 때마다 수동으로 필름을 잽싸게 바꿔줘야 했습니다. 그러다가 실수로 필름을 떨어뜨리기도 하고, 다음 절 필름을 올려놨는데, 플라스틱 필름이니 써 있었던 찬양 글씨가 지워져 있는 부분이 있어 당황하기도 했었습니다.
지금과 비교해 보면, 당시의 교회는 보잘 것 없는 장비를 갖추고 있었고, 지금보다는 더 열악한 환경의 교회도 많았습니다. 하지만, 제가 개인적으로 느끼기에 그 당시 그 교회의 영적 온도는 지금보다 더 뜨거웠습니다. 그 예배에 하나님이 계셨고, 성도 안에 뜨거운 눈물이 있었습니다. ‘예수’라는 이름만 불러도 뜨거운 눈물이 흐르던 시절이었습니다.
‘좋은 환경, 값비싼 장비, 화려한 음악…’ 같은 것들은 언제나 사람이 추구하는 것들이었지, 하나님이 찾으시는 예배와 예배자의 모습은 아니었던 것입니다. ‘좋은 환경과 비싼 장비와 잘 준비된 음악이 필요 없다’는 말이 아닙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드려지는 예배는 언제나 최상의 것이어야 할 것 입
니다.
제가 요즘 늘 기도하고 있는 제목이 있습니다. “주님, ‘예수님’하고 그 주님의 이름만 불러도 뜨거운 눈물이 있는 교회와 예배가 되게 해 주옵소서. 사람이 만들어낸 것이 아닌, 사람이 흉내 낸 것이 아닌 하나님의 부흥을 주옵소서. 그 부흥을 볼 수만 있다면 저는 다른 소원이 없습니다.” 라고 기도합니다. 그리고 저는 하나님께서 반드시 이 기도를 응답해 주실 것을 믿습니다.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세부 땅이 반드시 영적 부흥의 땅이 될 것을 믿습니다.

2026년 우리 교회 목회 표어가 “하나님이 찾으시는 예배자”라는 것이고, 주제 성경 구절이 요한복음 4장 23절 말씀입니다.
“아버지께 참되게 예배하는 자들은 영과 진리로 예배할 때가 오나니 곧 이 때라 아버지께서는 자기에게 이렇게 예배하는자들을 찾으시느니라”
예나 지금이나 사람들은 ‘더 좋은 환경, 더 좋은 시설, 더 좋은 장비, 더 큰 예배당…’과 같은 것들을 추구하지만, 하나님은 그런 것에는 관심이
없으십니다. 하나님은 오늘도 참으로 하나님께 예배하는 참된 예배자에 목이 말라 계십니다. 그래서 오늘도 하나님은 하나님 앞에 참으로 예배하는 예배를 찾고 계신 것입니다. 2026년, 하나님 앞에 발견되어지는 우리 성도들 되시기를 축복합니다.

1. 무엇에 초점을 두는가?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을 오고 가는 길에 예루살렘에서 3km 정도 거리에
있었던 ‘베다니’라는 마을에 종종 들르셨습니다. 그곳에는 ‘마르다와 마리아 그리고 죽은 지 나흘 뒤에 살아난 나사로’가 살던 곳이었습니다.
이 삼남매 중에 마르다는 책임감이 강하고, 예수님과 그 제자들을 잘 섬기던 훌륭한 여인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 그 마을에 들어오셨다는 소식을 들은 마르다는 이 날도 예수님과 제자들을 초대해 식사를 대접해 드리려 했던 것입니다.
39절을 보시면,
“그에게 마리아라 하는 동생이 있어 주의 발치에 앉아 그의 말씀을 듣더니”
예수님과 제자들이 마르다의 집에 들어와 거실에 앉아서 담소를 나누고 있었고, 특별히 마르다의 동생 마리아는 모처럼 그들의 집에 심방 오신 예수님의 발치에 앉아서 주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이고 있었다는 겁니다. 여기까지는 아무 갈등도, 문제도 없어 보입니다. 그리고 마리아에게는 아무 문제가 될 것도 없었지만, 주방에서 일하고 있었던 마르다는 상황이 달랐습니다.
40절을 보시면,
“마르다는 준비하는 일이 많아 마음이 분주한지라 예수께 나아가 이르되 주여 내 동생이 나 혼자 일하게 두는 것을 생각하지 아니하시나이까 그를 명하사 나를 도와 주라 하소서”

마리아의 언니 마르다는 책임감이 강했고, 예수님과 제자들을 잘 접대하고 싶었던 것입니다. 이 구절의 ‘분주한지라’는 말의 헬라어는 ‘페리에스파토(περιεςπἆτο)’라는 단어를 사용하고 있는데, ‘사방에서 끌어 당기다’는 뜻입니다.마르다는 그날의 손님 접대를 완벽하게 해 내고 싶었고, 예수님께로 부터 ‘음식이 맛있었다. 오늘 참 고마웠다. 오늘 참 잘했다’는 칭찬도 듣고 싶었던 것입니다.
마르다의 계획대로 그대로만 되었다면 얼마나 좋았을까요? 하지만, 갑자기 맞게 된 십여 명의 손님들을 맞이하랴, 웰컴 드링크도 서빙하랴, 손님들이 기다리는 동안 맛있는 음식을 준비하랴… 마르다는 정신이 없을 정도로 너무 분주했던 것입니다.
그러던 차에, 일손 하나가 아쉬울 때에 동생인 마리아가 예수님과 웃으면서 담소를 나누고 있는 모습을 보니 마르다의 감정이 폭발하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주여 내 동생이나 혼자 일하게 두는 것을 생각하지 아니하시나이까 그를 명하사 나를 도와주라 하소서”라고 살짝 짜증 섞인 말투로 예수
님께 컴플레인을 한 겁니다. 마르다 입장에서 보면 충분히 그럴 수도 있는 상황이었습니다.
마르다는 손님 접대도 훌륭하게 잘 해내고 아처럼 예수님과 웃으면서 담소도 나누고 싶었고, 마리 싶었고, 손님들에게 칭찬도 듣고 싶었습니다. 이 구절의 ‘마음이 분주한지라’는 말의 헬라어 ‘페리에스파도’라는 말과 같이 ‘사방에서 마르다의 마음을 끌어 당기고 있는 것’이었습니다.
우리 집사님 한 분이 올해의 결단을 하나 하셨는데, ‘화를 내지 말자!’라는 겁니다. 여기서 사업하고, 필리핀 직원들하고 일하다 보면 ‘욱’하고 감정이 폭발할 때가 종종 있다는 겁니다. 그런데 올해는 정말 예수님의 마음으로, 믿음으로 살고 싶은 마음이 커서 자신의 감정을 잘 다스려서 화를 내지
않는 게 올해의 결단이시라는 겁니다. 그리고 며칠 안 지났지만, 그런대로 잘 해내고 있다는 얘길 들었습니다.
그런데 우리의 감정이 폭발하는 원인은 ‘내 뜻대로 안 돼서’입니다. 내 생각대로, 내 계획대로, 내 욕심대로, 내가 원하는 대로… 하고 싶은데 그게 뜻대로 되지 않으면 자신의 감정이 조절이 안 되는 겁니다.
우리 믿음의 사람들이 감정을 잘 다스리고 조절하는 방법은 ‘내 뜻을 내려놓고, 하나님의 뜻을 바라보는 것’입니다. 내 뜻대로 안 되었지만, 내 생각보다 더 좋은 하나님의 뜻과 계획이 이루어져 가게 될 것을 믿으면 감정이 폭발할 일은 없습니다. 만약 내 뜻대로 되지 않았다 할 지라도, ‘그래 하나님은 내 계획보다 더 좋은 뜻이 있으실 거야. 나는 실패했어도 주님은 가장 선한 길로 인도해 주실 거야 …’라고 마음을 정리해 보면, 화날 일도, 감정이 폭발할 일도 수그러드는 겁니다.
41절, 42절(上) 말씀을 보시면,
“주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마르다야 마르다야 네가 많은 일로 염려하고 근심하나, 몇 가지만 하든지 혹은 한 가지만이라도 족하니라… ”
가지가 많은 나무는 바람 잘 날이 없는 것이고, 일을 많이 벌리면 그만큼 근심하고 걱정할 일이 많을 수밖에 없는 것이고, 욕심이 많으면 그 욕심의 크기만큼 염려와 근심이 더 많아질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마르다에게 ‘네가 많은 일로 염려하고 근심하나, 몇 가지만 하든지 혹은 한 가지만이라도 족하니라’고 말씀하시면서 ‘너는 무엇에 초점을 두고 사느냐?’라고 묻고 계시는 겁니다.

20세기의 선지자’라는 별명을 갖고 있었던 ‘에이든 토저 (A. W. Tozer)’는 현대 교회의 예배를 가리켜 “교회의 잃어버린 보석”이라고 말했습니다. 현대의 많은 교회들이 화려한 교회 건물과 멋진 엔터테이먼트적인 집회에 신경을 쓰고, 여러가지 사역과 사업들을 시도들을 통해 교회의 영향력을 크게 하려는 보면서 토저는 ‘교회는 가장 귀한 보석과 같은 예배를 잃어버린 것과 같다’라고 말했던 것입니다. 현대 교회가 초점을 잃어버린 것입니다.
큰 건물은 없어도 됩니다. 값비싼 기기와 장비 역시 없어도 됩니다. 멋지고 화려한 인테리어도 없어도 됩니다. 꼭 음악을 전공한 찬양팀이 아니어도 됩니다.

토저 목사님의 『십자가에 못 박혀라』는 책에서 “자기 내면에 진짜가 없는 사람은 밖에서 모조품을 찾기 마련이다”라고 말했습니다. 우리의 내면에 진짜가 없으면 자꾸 그럴듯한 것을 뒤집어쓰고 ‘진짜 인 척, 대단한 척, 괜찮은 사람인 척…’한다는 겁니다. 하지만, 그 모든 것들은 모조품에 불
과합니다. 마리아가 오직 예수님과 그분의 말씀에만 집중했듯이, 우리의 믿음이 다른 것이 아닌 오직 하나님께 집중한다면 주님께서 그런 사람에게 주목하지 않으시겠습니까? 하나님께서는 그런 예배자를 찾으시는 것입니다.

2. 나만의 예배를 드려라!
우리가 성경에서 <마르다와 마리아의 이야기>를 듣노라면, ‘마리아는 예수님께 칭찬을 들었고, 마르다는 책망을 받은것 같은 생각’이 들기도 합니다. 그래서 ‘일과 사역보다는 예배가 더 중요하다’라고 생각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이 이야기를 흑백논리나 이분법적 사고에 가두어 두어서는 안 됩니다. 예수님께서 이 말씀을 하실 때, 그런 의미로 말씀하시고 있는 게 아닙니다. 그리고 38~42절에서 마리아에 관한 내용보다, 마르다에 관한 내용이 더 많은 분량, 더 많은 비중을 차지하고 있다는 것 역시 예수님께서 마르다에 대한 애정이 있으셨던 것입니다.
41절, 42절 말씀을 다시 한번 보시면,
“주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마르다야 마르다야 네가 많은 일로 염려하고 근심하나, 몇 가지만 하든지 혹은 한 가지만이라도 족하니라 마리아는 이 좋은 편을 택하였으니 빼앗기지 아니 하리라 하시니라” 애쓰고 수고하던 마르다를 향한 주님의 안타까운 마음이 이 말씀 속에서 느껴지십니까? 마르다는 성실하고 부지런한 사람 이었습니다. 무엇을 하든 최선을 다하는 사람 이었습니다. 예수님과 제자들에게 가장 좋은 것을 대접하고 싶은 마음이 있었습니다. 이런 마르다를 예수님께서 책망하실 이유가 없으셨습니다.
단지, 예수님께서는 그렇게 애쓰고 수고하는 마르다가 안쓰럽고 안타까우셨던 것입니다. 그리고 42절에서 “몇 가지만 하든지 혹은 한 가지만이라도 족하니라”고 말씀하신 겁니다. 그리고 “마리아는 이 좋은 편을 택하였으니 빼앗기지 아니하리라”는 말씀을 덧붙이셨는데, 예수님은 마르다에게 ‘나는 이걸로도 충분하다. 마르다야 너무 애쓰지 않아도 된다. 남들이 하는 거 다 하려고 하지 말고 너만의 예배를 드려라’고 말씀하시는 겁니다.
음악적인 재능을 갖고 있었던 한 청년이 자신의 삶을 하나님께 드리기 위해 교회 찬양팀(예배팀)에서 섬기고 싶었습니다. 그래 목사님을 찾아가
자신 안에 있는 예배와 찬양에 대한 강렬한 열망과 하나님의 콜링에 대해서 말씀을 드렸습니다. 그랬더니 목사님께서 교회의 청소 봉사를 제안하셨다고 합니다. 이 청년은 ‘그래 교회 화장실 청소 열심히 하다보면 목사님이 나를 무대에 세워 주시겠지…’라고 생각하며, 정말 열심히 청소를 했습니다. 그런데 어느 정도 시간이 흘렀는데도 목사님은 전혀 그 청년을 예배 인도자로 세우지 않으셨고, 그 청년은 화가 나기 시작했습니다. 왜 목사님은
자신의 은사를 무시하고 누구나 할 수 있는 이런 일을 시키시는지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화장실 물청소를 하고, 교회 카펫을 진공 청소기로 청소하고 있었는데 청소하는 중에 자신이 마음으로 하나님을 경배하고 있는 것을 발견하게 됩니다. 그리고 자신이 무슨 일을 하든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할 수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고, 그것이 참된 경배(예배)라는 것을 느끼
게 됩니다. 그러면서 ‘예배 인도란 무대 위에 서는 것만이 아니라 이렇게 사람들을 섬기는 것 또한 예배구나’는 것을 깨달았다는 것입니다. 이 이야기는 지금은 유명한 예배 인도자가 직접 경험했던 일이었습니다.
교회에서 앞에 서고, 무대에 서고, 사람들에게 보여지고, 더 칭찬받게 되는 봉사와 역할들이 있습니다. 그런 사람에 비해서 내가 하는 일과 봉사들은 잘 드러나지도 않고, 사람들도 잘 몰라 줄 수도 있을 겁니다. 때론 그래서 힘이 빠지기도 하고, 의욕이 점점 시들기도 할 겁니다.
그런데 우리가 두 가지를 생각해야 하는데, 하나는 우리가 이 세상에서 사람들에게 다 인정받고 칭찬은 칭찬대로 다 받으면… 이미 이 땅에서 다 받았으니 천국에 가서 받을 상이 없을 수도 있다는 겁니다.
또 다른 것 하나는 우리가 교회에서 하는 일과 여러 가지 봉사의 일은 누구를 위해서 한 일입니까? 누구를 기쁘시게 하기 위해 한 일입니까? 누구의 영광을 위해서 한 일입니까? 내 영광을 위해서도, 내 자랑과 칭찬을 위해서도, 내가 인정받고, 높임 받으려고한 것도 아니지 않습니까?
앞에 나서서 하는 일이든, 남들도 잘 모르게 하는 일이든… 무슨 일이든 우리는 그 일을 통해 하나님을 섬긴 것입니다.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기 위해 했던 일인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여러분의 그 섬김과 그 예배를 받으신 것
입니다. 그것이 여러분이 하나님을 섬긴, 여러분만의 예배인 것입니다.
코로나 팬데믹이 시작되고, 우리 교회 성도들도 90%가 모두 철수하고, 우리는 뿔뿔이 흩어지게 되었습니다. 그때 흩어져 있는 성도들이 어디에서든 경건 생활과 예배하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굿모닝 채플>이란 영상 예배를 만들어 유튜브에 올리기 시작했습니다. 지금도 여러 가지 사정으로 매일 교회를 갈 수 없는 성도들이 굿모닝 채플을 통해 나만의 예배를 드리며 하루를 살아가고 있다는 소식을 듣고 있습니다. 지난 연말에 여러 성도님들이 감사 인사를 주셨는데, 어떤 성도님은 “목사님의 말씀이 한국 / 싱가폴의 여러분 들에게 전달 되고 있고, 목사님의 말씀을 기다리는 사람이 많구
요. 그 말씀에 힘을 얻고 있습니다”라고 하셨고, 어떤 성도님은 “매일 아침 채플로 영적 무장을 시켜 주셔서 감사합니다.”라고 하셨고, 어떤 성도님은 “몸은 세부광명교회를 가지 못하는 아쉬운 마음이 들지만 영상으로 함께 예배 드리는 시간이 너무 행복하고 하나님과 교제하는 시간이 감사할 뿐입니다.”라고 하셨고, 한국의 어떤 중년의 남자 성도님은 “한 해 동안 생명의 말씀으로 매일 아침 은혜 주셔서 감사합니다. 하루의 시작을 목사님의 설교 말씀과 찬양과 기도로 할 수 있어서 너무 감사했고, 지치고 힘들 때마다 다시 회복시켜 주시는 은혜를 받았습니다.”라고도 보내오셨습니다.
이분들은 한국과 여러 나라에서 바쁘고 분주하게 살아가면서 잠시 잠깐 시간을 내어 출근길에, 버스 안에서, 전철 안에서, 작은 골방에서 ‘나만의 예배’를 드리며 살아가고 계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내게 허락하신 시간과 장소와 환경이 어떠하든지, 나를 부르신 그곳에서 하나님을 예배하는 이들
의 예배를 주님은 기쁘게 받으시는 것입니다. 2026년 새해가 밝았습니다. 여러분이 어디에 계시든, 무엇을 하시든…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예배자, 하나님께 발견되어지는 예배자 되시기를 축복합니다.

- 무엇에 초점을 두는가?
- 나만의 예배를 드려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