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cts(29)
<사도행전 9:32~43>
한동대학교는 1995년 세워진 기독교 사립 명문입니다. 설립된 지는 20여년 밖에 안 된 역사가 짧은 대학이지만 입시 평균 경쟁률 10:1 정도를 여전히 유지하고, SKY라고 할 수 있는 서울의 명문대학에 들어갈 수 있는 상위 5% 내의 학생들이 입학하는 포항에 있는 명문대학입니다.
대부분의 수업을 영어로 진행하고, 영어와 컴퓨터가 능통하고, 무감독 시험으로 입증된 학생들의 정직성 때문에 졸업 후 여러 대기업들마다 우선적으로 뽑아간다고 합니다.
2016년 대학 정보공시가 전국 137개 대학을 중심으로 자퇴학생(중도탈락률)이 가장 적은 대학을 조사해 봤는데, 1위는 1.1%의 자퇴율을 보인 서울대학이었고, 2위는 1.3%의 중도탈락률을 보인 포항의 한동대학이었습니다. 중도탈락률은 학생들의 학업 만족도, 학교에 대한 만족도를 측정하는 간접척도인 것입니다.
역사가 오래된 명문대학들과 경쟁에서도 조금도 밀리지 않고, 웬만한 신학교보다 더 뜨겁고 충만하다고 하는 한동대학교가 이렇게 기독교의 명문대학으로 우뚝 설 수 있었던 것은 초대 총장을 맡아 19년간 이 학교를 세운 김영길 前총장과 김영애 사모의 역할이 컸습니다. 기독교 정신을 바탕으로 세상의 빛과 소금이 될 크리스천 리더들을 세우고자 하는 설립 목적이 있었는데, 그것을 방해하는 세력들의 공격이 만만치 않았습니다. 셀 수 없는 고소, 고발 사건들과 억울한 일들이 한두 가지가 아니었습니다.
우리가 예수를 믿으면 더 잘되어야 한다고 생각하기도 하고, 그것도 주님의 나라를 위해서 무엇인가 선한 일을 한다고 하면 더더욱 어려움 없이 형통해야 한다고 생각하기도 합니다. 위의 두 분이 왜 그런 생각을 안 하셨겠습니까?
김영길 前총장의 부인인 김영애 사모는 미국의 한 교회에서 이런 말을 남겼습니다.
“처절한 흑암 중에 우리 인생은 나의 공로와 행위가 아닌 하나님을 철저히 의지하게 된다.”
분명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도 고난은 올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 고난 속에는 하나님의 또 다른 뜻이 있다는 것입니다. 고난을 통해 우리의 믿음이 견고하게 되기도 하고, 새로운 역사를 경험케 하시기도 하고, 기적을 경험하게도 하시고, 또 다른 간증거리도 만들어 주시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도 고난과 절망적인 사건에 직면한 성도들의 이야기가 나옵니다. 그들의 고난을 통해 주시는 하나님의 메시지는 무엇이 있을까요?
1. 주께서 너를 낫게 하신다
첫 번째 이야기는 사도 베드로가 예루살렘에서 룻다라는 지방에 있는 성도들을 방문했을 때의 일입니다.
33절을 보시면,
“거기서 애니아라 하는 사람을 만나매 그는 중풍병으로 침상 위에 누운 지 여덟 해라”
‘애니아’라는 이름은 ‘칭찬받는 자’라는 뜻의 이름이었습니다. 성경에서는 이름과 그 이름의 뜻에 의미를 부여하는 경우가 많은데, 룻다 지방의 교회 성도들 중에 애니아 라는 여인이 칭찬 듣던 사람이었을 가능성이 큽니다. 또 36절부터 시작되는 다비다라는 여제자 이야기와 연관해서 볼 때, 그런 추측은 더 가능성 있어 보입니다.
어쨌든 칭찬 듣던 성도 애니아라는 여인에게 갑작스럽게 중풍병이 찾아온 겁니다. 중풍병은 뇌혈관이 막히는 뇌경색, 뇌혈관이 터지는 뇌출혈을 말합니다. 발병했을 때 갑자기 사망하는 경우도 있지만, 반신마비가 오거나, 언어장애가 오는 경우도 많습니다.
그런데 애니아는 중풍병으로 침상 위에 누운 지 8년이 된 것입니다. 침상 위에 누워있다는 표현을 보면, 애니아의 중풍병은 반신마비 정도가 아니라 매우 심각한 상태였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것도 8년 동안이나 지속되고 있었다면, 운동도 제대로 못하고 식사도 제대로 못하니 체력은 점점 떨어져 가고 있었을 것이고, 어쩌면 죽음을 앞두고 있는 절망적인 상황이었을 수도 있습니다.
중풍병이니 당시 의술로 치료할 방법도 없었고, 그녀는 죽을 때까지 평생을 그렇게 살아야 했습니다. 누구도 그녀가 다시 일어나게 될 것이라는 것은 기대하지 못했을 것입니다. 베드로가 룻다의 성도들을 돌아보는 중에 이 애니아를 만나게 된 것입니다.
그리고 34절을 보시면,
“베드로가 이르되 애니아야 예수 그리스도께서 너를 낫게 하시니 일어나 네 자리를 정돈하라 한대 곧 일어나니”
베드로의 마음에 그 순간 하나님의 감동이 있었던 거 같습니다. 그리고 베드로는 그 자리에서 애니아에게 “예수 그리스도께서 너를 낫게 하시니 일어나 네 자리를 정돈하라”고 선포한 것입니다. 그랬더니 애니아가 중풍병으로 쓰러진 지 8년 만에 침상에서 일어나는 것입니다.
칭찬 듣는 자였던 애니아라는 성도의 고난을 주님께서도 안타까워하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여인을 질병의 사슬로부터 해방시켜 주시겠다는 것입니다. 그 병은 8년간 절대 치유할 수 없었던 중병이었습니다. 이 여인을 침상에서 한 발자국도 못 나가도록 막았던 장애였습니다. 그러나 주님께서 그 여인을 낫게 하시겠다는 것입니다. 주께서 그 여인의 육체와 그녀의 인생을 치유하시겠다는 것입니다.
애니아는 8년간 침상에 누워 매일 매일 건강을 다시 회복하는 것을 누구보다 소망하고 또 소망했었습니다. 그러나 방법이 없었습니다. 아무리 애를 쓰고 애를 써도 인간의 힘으로 안 되는 것은 안 되는 일이었습니다.
그렇게 절망적인 시간이 흐르게 되면 사람은 더 이상의 소망을 갖지 않게 됩니다. 기대하는 만큼 실망감이 크기 때문에 아예 더 이상 기대하지도 않는 것입니다.
그런데 주님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 “내가 너를 낫게 하리라!”
– “내가 너의 인생을 고쳐 주리라!”
– “내가 너의 가정을 치유하리라!”
– “내가 너의 기업을 일으키리라!”
– “내가 너의 꿈을 이뤄 주리라!”
– “내가 너의 기도를 들어주리라!”
– “내가 너를 다시 일으키리라!”
저는 이 구절에서 이 부분을 우리가 유의해 보면 좋겠습니다.
“일어나 네 자리를 정돈하라(Get up and take care of your mat.)”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낫게 하시는데, 우리에게 명령하시는 것을 우리가 믿고 그대로 순종해야 하는 것입니다. 베드로가 ‘애니아야 예수께서 너를 낫게 하시니 일어나라’ 그러는데, 애니아가 ‘아이~ 무슨 말씀이세요? 8년 동안 저는 일어나 본 적이 없어요. 농담하지 마세요.’ 이러고 있으면 기적은 안 일어나는 겁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말씀하실 때, 그 말씀을 믿고, 그 말씀에 반응하고, 그 말씀에 순종해야 할 것은 우리가 할 몫인 것입니다. 주님은 우리를 치료하신다면, 우리는 그 말씀에 믿음으로 반응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가 그 동안 실패의 자리, 낙심의 자리, 절망의 자리, 패배감과 우울감과 열등감의 그 자리를 이제 정리해야 하는 것입니다. 다시 그 자리로 돌아가면 안 되는 것입니다. 다시 그 실패를 반복하면 안 되는 것입니다. 다시 그 절망의 자리로 돌아가면 안 되는 것입니다.
이제 정리해야 합니다. 이제 그런 부정적이고, 비관적이고, 우리를 낙망케 하는 그런 마음과 작별해야 합니다.
주님께서는 이미 여러분을 치유하셨는데, 왜 자꾸 과거로 돌아가려 합니까? 여러분은 이제 하나님께서 치유하신 아들들이요, 딸들입니다. 더 이상 과거로 돌아가지 마십시오.
고린도후서 5:17절 말씀에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 것이 되었도다”
주님께서 나를 새롭게 하셨습니다. 이제 주님 안에 여러분은 새로운 피조물이 되었습니다. 주님께서
– 내가 너를 낫게 했으니 이제 네 자리를 정리하라,
– 그 과거의 자리를 정리하라.
– 이제 더 이상 그 과거의 실패에 머물러 있지 말라!
– 이제 더 이상 그 과거의 상처에 머물러 있지 말라’
라고 말씀하시고 있는 것입니다.
2. 주께서 너를 기억 하신다
오늘 본문은 두 번째 이야기로 이어집니다. 룻다라는 지역에서 서쪽으로 18km 정도만 가면 욥바라는 해안마을이 나옵니다.
36절, 37절을 보시면
“욥바에 다비다라 하는 여제자가 있으니 그 이름을 번역하면 도르가라 선행과 구제하는 일이 심히 많더니, 그 때에 병들어 죽으매 시체를 씻어 다락에 누이니라”
욥바에는 다비다라는 여성도 한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녀는 선행과 구제하는 일이 심히 많다고 기록된 것을 보니, 어느 정도의 물질을 소유했던 사람이었고, 불쌍한 사람을 보면 그냥 지나칠 수 없는 사람이었습니다. 그의 선행과 구제활동은 그 마을 모든 사람들이 칭찬할 정도였습니다.
그런데 베드로가 룻다에서 사역하고 있을 때, 다비다가 갑자기 병들어 죽게 된 것입니다. 가족과 지인들은 그의 몸을 씻어 다락에 누이게 됩니다. 그 마을의 성도들은 사도 베드로가 룻다에서 사역하고 있다는 소문을 들었고, 급히 두 사람을 룻다로 보내서 베드로에게 지체 말고 욥바로 와 달라 청하게 됩니다.
베드로가 급히 일어나 욥바로 가서 죽은 다비다가 있는 방에 올라가 봅니다. 그곳에는 그 마을의 가난한 사람들이 울면서 다비다의 죽음을 슬퍼하고 있었습니다. 그 사람들은 다비다가 손수 지어준 옷들을 베드로에게 보여주면서(2천 년 전에는 옷은 너무 비싸고 귀한 것들이었다. 옷이 없어 추위에 떨다 죽는 사람도 있었다.) 다비다가 얼마나 착한 여인이었는지를 말했습니다.
40절을 보시면,
“베드로가 사람을 다 내보내고 무릎을 꿇고 기도하고 돌이켜 시체를 향하여 이르되 다비다야 일어나라 하니 그가 눈을 떠 베드로를 보고 일어나 앉는지라”
베드로는 사람들을 다 내보내고 무릎을 꿇고 기도했습니다. 그리고 시체를 향하여 ‘다비다야 일어나라’ 하니 그녀가 다시 살아나는 기적이 일어났습니다.
그런데 저는 오늘 본문의 두 가지 이야기에서 하나의 공통적인 분위기가 느껴집니다.
32절에서 35절에 등장하는 ‘애니아’ 이 성도의 이름은 ‘칭찬 받는 자’라는 뜻이었습니다.
그리고 36절에서 42절까지에 등장하는 ‘다비다’ 역시 ‘선행과 구제하는 일이 심히 많은’ 사람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녀에게 도움을 받았던 그 마을의 가난한 사람들이 모두 그녀의 죽음을 슬퍼하는 장면을 우리가 봤습니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 신실하게 살고, 교회를 사랑하고, 교회에 충성하고, 영혼을 사랑하고, 봉사하고, 구제하며 사는데도 고난과 시련이 찾아올 수 있습니다. 그럴 때마다 우리는 ‘하나님 왜 이러시는 거예요?’라고 의문을 갖게 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오늘 본문을 통해서 믿어야 할 사실 한 가지는 하나님께서 그 성도의 선행과 구제를 기억하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그가 하나님 앞에 어떻게 살아왔는지를 기억하신다는 것입니다.
시편 139:3절에서
“나의 모든 길과 내가 눕는 것을 살펴 보셨으므로 나의 모든 행위를 익히 아시오니”
하나님께서 우리의 모든 길과 우리의 모든 행위를 너무나도 잘 알고 계시는 것입니다. 때문에 여러분이 하나님 앞에서 선하게 살고, 그 분 앞에서 최선을 다해서 살아가는 그 중심과 마음을 기뻐하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사람을 기억하시는 것입니다. 전혀 기대하지 않았던 중풍병자 애니아도 살리셨고, 이미 병으로 죽어버린 다비다까지도 살리셨던 것입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내가 주님을 사랑하고, 그 분의 말씀대로 살고, 교회를 사랑하고, 열심히 섬기고 봉사하며 살고 있다면, 내 삶에 고난이 전혀 없어야 한다’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래서 갑작스러운 시련과 고난과 실패 앞에서 당황하게 되는 것입니다.
몇 년 전에 2002년 월드컵 영웅인 이영표 선수가 청년들에게 하나의 영상 메시지를 전했던 적이 있었습니다. 이 분이 20대 초반에 예수를 믿고, 늘 궁금했던 것이 하나 있었다는 겁니다. 똑같이 신실한 크리스천인데 어떤 사람은 눈에 보이는 큰 성공을 거두고, 어떤 사람은 실패했는데… 이것을 크리스천으로서 어떻게 바라봐야 하는가? 하는 의문이었습니다.
그런데 신앙생활을 쭉 해오다 보니깐 어떤 사람은 성공이라는 이름으로 인생을 시작하는데, 그 성공 때문에 오히려 실패로 끝나는 경우를 너무나도 많이 봤다는 겁니다. 또 어떤 사람들은 실패라는 이름으로 인생을 시작하지만 그 실패를 딛고 일어나 성공으로 가는 것 역시 참 많이 봤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사실에서 크리스천으로서 우리의 인생은 하나님의 계획 속에 있는데, “성공과 실패는 전혀 반대말이 아니라 축복이라는 한 가지 의미”라는 것을 깨달았다는 겁니다. 그러니깐 하나님 안에서는 ‘성공도 축복이고, 실패도 축복이 되는 것’이라는 거죠. 그러니깐 눈에 보여 지는 성공이 성공이 아닐 수도 있고, 지금 당장의 실패가 실패가 아닐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때문에 이런 믿음과 이해가 우리에게 있으면,
“성공했다고 자만하지 않게 되고, 실패했다고 해서 좌절하지도 않게 되는 것”
이라는 것입니다. 성공 자체와 실패 자체에 흔들리지 않는 겁니다. 왜냐하면 그 사람의 중심과 뿌리가 하나님과 그 분의 말씀에 대한 믿음 위에 놓여져 있기 때문입니다.
마지막에 이런 말을 덧붙입니다. “(왜냐하면 우리 인생은 지금으로써 끝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우리 각자에게 계획이 있으시고, 그 계획을 이뤄가는 시간과 때는 다 다르기 때문입니다.”
어떤 사람은 하나님과 전혀 관계없는 삶을 살아가고 있지만, 우리가 하나님 안에 있고, 그 분 안에서 신실한 삶을 살아가고 있다면, 하나님은 우리를 기억하고 계십니다. 결코 우리를 잊지 않으시고, 우리를 향한 당신의 선하심을 보이실 것입니다.
3. 주께서 너를 사용 하신다
우리 성도들의 고난과 시련 속에 무슨 의미가 담겨 있는 지 도무지 이해되지 않을 때가 많습니다. 오늘 본문의 두 가지 이야기 역시, 그 고난과 시련을 당할 때는 애니아도, 다비다도 하나님의 뜻을 알 수 없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지금 당장의 그 시련의 크기만이 크게 느껴졌을 것입니다.
35절 말씀을 보시면,
“룻다와 사론에 사는 사람들이 다 그(애니아)를 보고 주께로 돌아오니라”
마을 사람들로부터 칭찬 듣는 사람 애니아가 중풍병으로 쓰러졌을 때, 많은 사람들은 분명 안타까워했을 겁니다. ‘왜 벌 받을 사람은 따로 있는데 저렇게 착하고 선한 분이 저런 병에 걸렸을까?…’ 그렇게 함께 속상해했을 겁니다.
욥이 재산을 다 잃고, 자식이 다 죽고, 불치병에 걸려 고통 속에 있는 모습을 보고 그의 친구들도 처음엔 그 모습을 안타까워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욥의 세 친구는 이내 욥을 정죄하기 시작합니다. ‘아마 죄가 있어서 저런 벌을 받았을 거야. 우리가 모르는 어떤 죄가 없이는 이럴 수가 없지…’하면서 그들은 욥을 정죄했습니다.
애니아가 중풍병으로 쓰러지자 마을 사람들은 처음에는 안타까워했지만, 사람의 마음이 간사한 지라 어떤 사람들은 ‘저렇게 교회 열심히 다니고, 봉사하고, 충성하는 사람이 어떻게 이런 못 쓸 병에 걸렸을까? 교회 다녀도 소용 없네…’ 이렇게 생각하는 사람들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렇게 세월은 8년 이란 시간이 흘렀던 것입니다. 병이 치료된다는 것은 도저히 불가능한 상황인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애니아를 치료하시는 기적을 보고, ‘룻다’와 그 옆의 마을인 ‘사론’에 사는 사람들까지 다 주께로 돌아오는 역사가 일어난 것입니다.
그리고 42절을 보시면,
“온 욥바 사람이 알고 많은 사람이 주를 믿더라”
애니아와는 비교 안 될 정도로 더 열심히 주를 섬기고, 예수의 사랑을 몸으로 실천했던 다비다가 갑자기 병 걸려 죽었으니 그 주변에 있던 사람들 모두가 충격을 받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부활의 주님께서 다비다 역시 죽은 자 가운데서 살려내셨습니다. 그래서 그 마을의 수많은 사람들이 주님을 믿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어떤 고난과 시련이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우리가 고장 나 버린 인생이고, 이제 다 끝난 인생이고, 실패한 인생이고, 미련하고, 무능력한 사람일 지라도 그 모든 것들을 선으로 바꾸어 우리를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낼 자로 사용하시는 것입니다.
헨리 스미스(Henry Smith)라고 하는 한 청년은 시력을 점점 잃어가는 퇴행성 안구질환을 갖고 있었던 시각장애인이었습니다. 시력문제 때문에 일반적인 직장에서 그를 받아주는 곳이 없었습니다. 생계를 해결하기 위해 그는 미국 버지니아 윌리엄스버그의 한 교회에서 임시직으로 일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주일 날 예배시간에 목사님을 통해 들려지는 성경 구절이 하나 있었습니다.
고린도후서 8장 9절 말씀인데,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를 너희가 알거니와 부요하신 이로서 너희를 위하여 가난하게 되심은 그의 가난함으로 말미암아 너희를 부요하게 하려 하심이라”
이 말씀은 시간이 흐를수록 헨리의 마음을 감동케 했습니다. 생각해 보니 눈이 보이지 않는 중에도 무사히 학교를 졸업한 것도 감사하고, 하나님의 임재를 느끼며 교회 일을 하고, 친구들과 함께 예배드릴 수 있는 것도 감사했습니다. 교회에서 한 자매와 만나 교제하게 된 것도 감사했습니다. 이런 감사의 고백이 넘치자 그는 한 번도 노래를 만들어 본 적이 없었지만, 그 감사의 고백을 올려드리고 싶은 마음에 찬양을 한곡 지었습니다.
그 노래가 ‘거룩하신 하나님(Give Thanks)’라는 노래입니다.
거룩하신 하나님 주께 감사드리세
날 위해 이 땅에 오신 독생자 예수
나의 맘과 뜻 다해 주를 사랑합니다
날 위해 이 땅에 오신 독생자 예수
내가 약할 때 강함 주고
가난할 때 우리를 부요케 하신 나의 주 감사
그가 마지막으로 이렇게 말합니다.
“장애는 나를 더디게 만들었지만, 결코 나를 멈추게 할 수는 없습니다.”
이 분이 만든 이 찬양은 지금도 전 세계 사람들의 마음을 위로하고, 치유하는 대중적인 찬양으로 불리어지고 있습니다. 우리의 아픔과 시련과 고난 그리고 여러 가지 인생의 문제가 있을 지라도 하나님은 우리를 위대하게 사용하시는 것입니다.
“주께서 너를…”
- 주께서 너를 낫게 하신다
- 주께서 너를 기억 하신다
- 주께서 너를 사용 하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