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호수아 2:1~11>
우리가 살아가면서 갖게 되는 감정 중에 ‘두려움’이라는 것이 있습니다. 두려움이란 ‘어떤 현상이나 경험을 예상했을 때 우리가 갖게 되는 불안한 감정’이라고 정의할 수 있겠습니다. 우리가 어떤 상황 앞에서 두려운 마음을 갖게 될 때, 우리의 맥박이 빨라질 수도 있고, 한 없이 무겁고 답답한 마음과 우울함이 몰려올 수도 있을 것입니다.
이런 두려움의 종류 중에 하나는 ‘염려에서 오는 두려움’입니다. 학생들이 오랫동안 준비해 온 입시를 앞두고 두려울 수 있을 겁니다. 수년 동안 준비했지만 그 입시에 실패할까봐, 원하던 학교에 들어갈 수 없을까봐, 나를 향한 가족의 기대에 실망을 줄까봐, 실패한 내가 다른 사람들과 비교될까봐 염려가 될 수 있을 것입니다. 또는 성인들의 경우에도 결혼생활에 대한 염려, 직장과 사업에 관한 염려, 인생 속에서 겪게 되는 수많은 일들 속에 염려와 불안들이 있을 수 있는 것입니다.
또 다른 종류의 두려움은 ‘공포에서 오는 두려움’입니다. 고소공포증이라든가, 폐소공포증 같은 것을 들어보셨을 겁니다. 높은 곳에 올라갔을 때 추락과 어떤 사고로 인해 죽음에 대한 공포가 있을 수 있습니다. 또는 닫힌 좁은 공간에 있을 때 답답하고 숨이 막혀 질식할 것 같은 것 역시 죽음에 대한 공포일 것입니다. 또는 위협적인 어떤 존재(동물, 사람)로 인해 느껴지는 두려움도 여기에 속할 수 있습니다.
미국의 32대 대통령으로서 임기 중에 미국이 대공항에서 벗어나게 한 인물이며, 2차 세계 대전을 승리로 이끈 인물로 인정되는 ‘프랭클린 루즈벨트(Franklin D. Roosevelt, 1882~1945)’가 “우리가 유일하게 두려워해야 할 것은 두려움 그 자체다.”라는 말을 했습니다. 위에서 말씀드린 두 가지 종류의 감정적인 두려움은 우리가 극복해야 할 두려움인 것입니다. 한 해를 살아가면서 우리는 이런 두려움과 싸워야 하고, 우리 내면에서 이 두려움을 몰아내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성경에서 말하는 또 다른 종류의 두려움이 하나 더 있는데, 이 두려움은 하나님을 향한 경외심이라 할 수 있습니다. 이것은 그 분을 향한 존경(존중 : respect)으로 말미암은 두려움입니다. 하나님을 인정하지 않는 사람은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하나님 되심을 마음 깊이 인정하는 사람은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누가 뭐라 해도, 어떤 상황과 조건 속에서도 그 분이 기뻐하시는 삶을 살아가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 1절 말씀을 보시면,
“눈의 아들 여호수아가 싯딤에서 두 사람을 정탐꾼으로 보내며 이르되 가서 그 땅과 여리고를 엿보라 하매 그들이 가서 라합이라 하는 기생의 집에 들어가 거기서 유숙하더니”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나안 정복전쟁을 앞두고 있었습니다. 여호수아는 두 사람의 정탐꾼을 보내 요단강 건너편에 있었던 첫 번째 성인 ‘여리고’를 엿보고 오도록 시켰습니다. 그들은 은밀하게 그 성으로 들어가 기생 라합의 집에 들어가게 됩니다.
그런데 옷차림새와 생김새가 다른 이스라엘 사람이 여리고 성에 들어오니 쉽게 눈에 띄었던 거 같습니다. 그 사실이 여리고 왕에게 보고되었고, 여리고 왕은 체포조를 라합에게 보내 그들을 끌어내라고 명령하게 됩니다. 그런데 기생 라합은 그들을 숨겨주고, 왕이 보낸 군인들을 따돌려 정탐꾼들의 생명을 보호합니다.
그리고 9절~11절을 보시면,
“말하되 여호와께서 이 땅을 너희에게 주신 줄을 내가 아노라 우리가 너희를 심히 두려워하고 이 땅 주민들이 다 너희 앞에서 간담이 녹나니, 이는 너희가 애굽에서 나올 때에 여호와께서 너희 앞에서 홍해 물을 마르게 하신 일과 너희가 요단 저쪽에 있는 아모리 사람의 두 왕 시혼과 옥에게 행한 일 곧 그들을 전멸시킨 일을 우리가 들었음이니라. 우리가 듣자 곧 마음이 녹았고 너희로 말미암아 사람이 정신을 잃었나니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는 위로는 하늘에서도 아래로는 땅에서도 하나님이시니라”
기생 라합은 이스라엘 백성들에 대한 소문을 들었고, 그들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그들을 위해 얼마나 놀라운 일들을 행하셨는지를 듣게 된 것입니다. 그 소식은 여리고성 모든 백성들이 들었고, 그로 인해 큰 두려움과 공포가 여리고 백성들에게 임한 것입니다. “마음이 녹았고 너희로 말미암아 사람이 정신을 잃었다”는 표현만 봐도 그들 가운데 나타난 공포가 얼마나 컸는지를 짐작해 볼 수가 있습니다.
그런데 기생 라합은 여리고 백성들의 공포적인 두려움과 다른 것이 하나 있었습니다. 9절 상반절에서 “여호와께서 이 땅을 너희에게 주신 줄을 내가 아노라”라고 라합은 말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것을 히브리서 11:31절에서
“믿음으로 기생 라합은 정탐꾼을 평안히 영접하였으므로 순종하지 아니한 자와 함께 멸망하지 아니하였도다”
이 구절에서 라합은 순종하지 않아 멸망한 여리고 백성들과 비교하고 있는 것입니다. 누구에게 순종하지 않았다는 것입니까? 여호와 하나님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기생 라합은 하나님의 뜻에 순종했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자신의 동족 여리고 백성들을 멸할 계획이었어도 그 뜻에 순종했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라합은 두려워할 자를 두려워했다는 것입니다. 그녀는 여호와 하나님을 두려워한 것입니다. 그녀는 여리고 왕도 두려워하지 않았고, 이스라엘 백성도 두려움의 대상이 아니었습니다. 그녀는 오직 하나님 여호와를 경외(fear : 두려워하다)하였던 것입니다. 이스라엘은 가나안의 거인족을 두려워했습니다. 반면 여리고 백성들은 이스라엘을 두려워했습니다. 그런데 그들은 서로 두려워하고 있기 때문에 사실 서로에게 진정한 두려움의 대상이 못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비천한 기생(창기) 라합으로 부터 큰 교훈을 받고 있는 것입니다. 그들이 정말 두려워해야 할 대상은 가나안의 거인족이 아닌 것입니다. 우리가 올 한해를 살아가면서 환경과 조건에 대한 두려움, 어떤 사람이나 대상에 대한 두려움과 염려를 할 필요가 없습니다. 오직 우리가 두려워해야 할 분은 우리 하나님뿐이십니다.
마태복음 10:28절 말씀을 읽고 마치겠습니다.
“몸은 죽여도 영혼은 능히 죽이지 못하는 자들을 두려워하지 말고 오직 몸과 영혼을 능히 지옥에 멸하실 수 있는 이를 두려워하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