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태복음 8:14~22>
1979년 10월 26일 TV와 라디오를 통해 우리나라의 5‧6‧7‧8‧9대 대통령을 지냈던 박정희 대통령이 암살되었다는 소식이 온 국민을 충격에 빠뜨렸었습니다. 저는 그 때 초등학생이었기 때문에 왜 그런 비극이 벌어졌는지에 대해서는 구체적으로 알지는 못했었습니다. 하지만 그 때부터가 제가 기억하는 우리나라 역대 대통령의 역사의 시작이었습니다.
그 이후 박정희 대통령의 암살로 인해 혼란 속에서 쿠데타로 집권한 군부 11‧12대 전두환, 13대 노태우 전 대통령은 임기 후 구속 및 수감을 겪었고, 1심에서는 사형 선거까지 받았었습니다. 그리고 14대 김영삼 대통령은 경제위기 문제로 재임 중에 검찰 조사도 받고, 둘째 아들은 대기업 특혜 비리에 연루되어 징역형을 선고 받았습니다. 15대 민주화 운동의 거목인 김대중 대통령은 아들 셋 모두 권력형 비리에 얽혀 뇌물을 받은 혐의로 징역형을 받기도 했습니다. 16대 노무현 대통령은 퇴임 후 1년 뒤에 역시 대기업 뇌물 문제로 검찰에 출석해 조사를 받고, 가족 및 측근들과 얽힌 의혹들로 인해 부담을 느끼다 결국 자살로 생을 마감하게 됩니다. 17대 이명박 대통령 역시 현재 뇌물 및 각종 비리 문제로 구속되어 재판을 받고 있습니다. 18대 박근혜 대통령 은 뇌물수수 혐의 등으로 탄핵이 인용돼 파면된 최초의 대통령이 되어 구속되어 재판을 받고 있습니다.
제가 세상에 태어나 처음 알았던 대통령부터 바로 직전 대통령까지 누구하나 그 결말이 좋았던 분이 없었습니다. 그에 비해 미국의 39대 대통령이었던 ‘지미 카터(James Earl Carter Jr. 1924~)’는 임기 중의 평가는 그리 좋지 못했지만, 현재 미국에서 “가장 훌륭한 전직 대통령”으로 평가되고 있습니다. 독실한 크리스천이기도 한 지미 카터는 대통령 자리에서 물러난 뒤 사랑의 집짓기 운동(Habitat for humanity)에 적극 참여하고, 정치 외교적으로 평화와 중재 역할을 훌륭하게 감당하여 2002년 노벨 평화상을 받기도 했습니다.
왜 이들의 결말은 이렇게 차이가 날 수 밖에 없었을까요? 권력을 힘입어 개인의 사익을 얻은 사람들과 세계 최고의 권력을 지낸 사람의 영향력을 갖고 타인을 위해 희생하고 봉사하는 사람의 차이는 아니었을까요?
오늘 본문은 예수님께서 자기부인의 삶을 사셨었고, 주님을 따르는 제자가 되려는 사람 역시 자기 부인의 삶을 살아야 함을 말씀하시고 있습니다.
14절과 15절에서 예수님께서는 베드로의 장모가 열병으로 앓아누운 것을 보시고 그를 어루만져 치유해 주십니다. 또 16절에서는 수많은 귀신들린 자들과 병든 자들이 예수님 앞에 나올 때 주님께서 말씀으로 귀신들을 쫓아내시고, 병든 자를 치유해 주십니다.
17절 말씀을 보시면,
“이는 선지자 이사야를 통하여 하신 말씀에 우리의 연약한 것을 친히 담당하시고 병을 짊어지셨도다 함을 이루려 하심이더라”
이 구절은 이사야서 53:4절 말씀을 인용하고 있습니다. “그는 실로 우리의 질고를 지고 우리의 슬픔을 당하였거늘 우리는 생각하기를 그는 징벌을 받아 하나님께 맞으며 고난을 당한다 하였노라.” 이사야는 하나님의 아들이시며, 메시야이신 예수께서 이 땅에 오셔서 죄인들인 우리들의 질고(질병과 고통)를 담당하실 것이라고 예언했었습니다. 그리고 마태복음 8장17절에서는 그 이사야의 예언이 성취되고 있는 모습을 설명해 주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셔서 여러 가지 문제로 고통 받고 있었던 이들의 고통과 아픔과 질병을 치유해 주셨던 것입니다.
그리고는 18절부터 22절까지는 예수님을 따르는 제자에 관한 말씀이 나옵니다. 19절에 보면, 한 서기관이 예수님의 가르치심에 크게 감동을 받아 예수님께 “선생님이여 어디로 가시든지 저는 따르리이다”라고 말합니다.
20절 말씀을 보시면,
“예수께서 이르시되 여우도 굴이 있고 공중의 새도 거처가 있으되 인자는 머리 둘 곳이 없다 하시더라”
예수님을 통해서 많은 기적이 일어나자 수많은 사람이 예수님을 따랐고, 그 분에게 놀라운 말씀의 권세까지 있었기에 서기관은 예수님을 따르고 싶었습니다. 그는 예수님 옆에 있을 때 서기관으로서 얻게 될 자신의 이득을 계산했었던 거 같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머리 둘 곳도 없는 노숙자와 같은 희생의 삶을 살고 있기에 그를 따르는 제자의 삶에 안락과 풍요와 명성 같은 것을 기대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21절 이하에 어떤 제자의 부친이 죽었고, 제자는 아버지를 장사하고 온 후 예수님을 따르겠다고 허락을 구합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죽은 자들이 그들의 죽은 자들을 장사하게 하고 너는 나를 따르라”고 하시는 겁니다. 달라스 신학교의 ‘루이스 바비에리’ 교수는 그가 부친 사후의 유산문제를 정리하려는 물질적인 염려를 갖고 있었던 것으로 보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로서 누릴 수 있는 영광을 버리고 이 땅에 오셔서 희생과 봉사의 자기부인의 삶을 보여주셨습니다. 자기부인의 삶을 통해 예수님은 치유와 회복의 역사를 만들어갔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제자의 삶을 살기 원하는 이들이 개인적인 사익을 추구한다는 것은 온전한 자기부인의 삶을 살지 못하는 것이고, 그것은 온전한 제자의 삶도 아니고, 자기부인이 없는 삶은 결코 세상에 치유와 회복의 통로가 될 수 없는 것입니다.
자기부인의 삶이 힘들고 어려울 수 있지만, 자기부인의 삶은 반드시 선하고 아름다운 열매를 맺어가게 되는 것입니다. 그로인해 가정이 살아납니다. 그로인해 교회가 살아납니다. 그로인해 도시가 살아납니다. 자기부인이 아닌 오로지 사익만을 위해 사는 삶의 결말은 선하고 아름다울 수 없는 것입니다. 나는 오늘 내 삶의 영역 중에 어디에서 희생과 봉사의 자기부인의 삶을 살아야 할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