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도행전 13:4~12>
– Acts(37) –
우리나라에서 무려 900만부가 팔린 베스트셀러 『개미』를 쓴 프랑스 작가 ‘베르나르 베르베르(Bernard Werber, 1961~)’는 프랑스에서는 무명에 가까웠지만, 한국에서 이 작품이 대히트를 치면서 역으로 프랑스에서 명성을 드높인 인물입니다.
이 분이 쓴 『상대적이며 절대적인 지식의 백과사전(열린책들, 1996)』이란 책에는 ‘순간포착 세상에 이런 일이’에 나올법한 실화가 하나 나와 있습니다.
1950년대에 있었던 일입니다. 영국의 컨테이너 운반선 한 척이 화물을 양육하기 위하여 스코틀랜드의 한 항구에 닻을 내렸습니다. 포르투갈 산(産) 마디라 포도주를 운반하는 배였습니다. 한 선원이 모든 짐이 다 부려졌는지를 확인하려고 어떤 냉동 컨테이너 안으로 들어갔습니다. 그 때 그 안에 사람이 있는 것을 모르고 다른 선원이 밖에서 냉동실 문을 닫아 버린 겁니다. 안에 닫힌 선원은 있는 힘을 다해 벽을 두드렸지만 (냉동 창고 벽이 워낙 두꺼워) 아무도 그 소리를 듣지 못했고, 배는 포르투갈을 향해 다시 떠나게 됩니다.
냉동실 안에 식량은 충분히 있었습니다. 그러나 선원은 자신이 오래 버티지 못할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죽음의 그림자가 점점 그에게 드리우기 시작할 때, 그는 힘을 내어 쇳조각 하나를 들고 냉동실 벽에 죽음의 고통을 꼼꼼하게 기록했습니다. 냉기가 코와 손가락과 발가락을 꽁꽁 얼리고 몸을 마비시키는 과정을 적었고, 찬 공기에 언 부위가 견딜 수 없이 따끔거리는 상처로 변해 가는 과정을 묘사했으며, 자기의 온몸이 조금씩 굳어지면서 하나의 얼음덩어리로 변해가는 과정을 기록했습니다.
배가 리스본에 닻을 내렸을 때, 냉동 컨테이너의 문을 연 선장은 죽어 있는 선원을 발견합니다. 그리고 그 선원이 벽에 꼼꼼하게 새겨 놓은 고통의 일기를 읽게 됩니다. 그 때 선장은 깜짝 놀라게 됩니다. 왜냐하면 그 냉동고에는 냉동이 필요한 화물이 없었기 때문에 스코틀랜드에서 돌아오는 항해 동안 냉동장치가 작동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선장이 온도를 재보자 섭씨 19도를 가리키고 있었습니다. 약간 쌀쌀한 정도의 기온이었습니다.
베르나르 베르베르는 이 실화의 맨 마지막에 이렇게 썼습니다.
“그 선원은 단지 자신이 춥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죽었다. 그는 자기 혼자만의 상상 때문에 죽은 것이다.”
실제 그 냉동고는 영상 19도였고, 충분히 견딜만한 온도였습니다. 그러나 그 선원은 자신은 냉동고에 갇혔고, 앞으로 자신은 저체온증이든, 얼어서든 죽게 될 것이라고 생각했던 것입니다. 그는 자신은 죽게 될 것이라는 두려움 때문에 살아남을 수 있는 조건에서 죽음을 맞게 된 것입니다.
여러분이 갖게 된 어떤 꿈과 비전을 향해 나아갈 때, 지금의 나는 꿈꿀 수 없는 것일 수도 있습니다. 또 그 꿈을 향해 나아갈 때 여러 가지 방해와 저항들이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방해와 저항을 두려워하지 마십시오. 여러분의 꿈의 크기만 한 방해와 저항은 당연히 있을 것입니다. 미리 겁먹지 마십시오. 생각에서부터 패배자가 되지 마십시오. 세찬 강풍과 같은 것이 내 앞을 가로막기도 할 것입니다. 그러나 그 바람의 저항을 잘 이용하기만 하면 내 날개의 힘보다 더 큰 힘을 받아 더 높이 날아오를 수도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 앞에 있는 저항을 두려워 마십시오.
1. 진짜는 가짜와 충돌한다
바나바와 바울은 안디옥에서 파송 받은 최초의 선교사들입니다. 성령께서는 그들을 바나바의 고향인 ‘구브로(Cyprus)’섬으로 인도하셨습니다. 바나바와 바울은 구브로 섬의 동쪽 도시에서부터 시작해서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6절을 보시면,
“온 섬 가운데로 지나서 바보에 이르러 바예수라 하는 유대인 거짓 선지자인 마술사를 만나니”
바나바와 바울은 그 섬을 가로 질러 서남쪽 아래에 위치한 바보(Paphos)라는 도시까지 이르게 됩니다. 그런데 거기서 ‘바예수’라는 이름의 유대인 거짓 선지자이며, 마술사인 사람을 만나게 됩니다. 바예수라는 이름은 ‘예수(구원)의 아들’이란 뜻입니다. 여호수아와 예수라는 이름이 ‘여호와는 구원이시다’는 의미입니다. 그래서 당시 유대인들이 많이 쓰던 이름이기도 했습니다.
바예수는 ‘구원의 아들’이라는 이름으로 영적으로 좋은 의미를 갖고 있었고, 그는 유대인으로서 거기서 선지자 노릇을 하며, 종종 여러 가지 마술을 행하던 사람이었습니다. 때문에 그 도시에서 영적인 영향력이 상당했던 것으로 보입니다.
그런데 이 구절에서 그를 소개하기를 ‘거짓 선지자’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니깐 그는 ‘가짜’였습니다. 그는 바예수라는 종교적으로 그럴듯한 이름을 갖고 있고, 여러 가지 영적 행위들을 해왔지만 그는 가짜였습니다. 그는 사람들을 속여서 사익을 취하던 사람이었던 것입니다.
그런 사람이 종교적으로, 영적으로 큰 영향력을 갖고 있는 곳에 바울과 바나바가 들어간 겁니다. 그러니깐 가짜가 있는 곳에 진짜가 온 겁니다. 그러면 이 둘 사이에 충돌이 있을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어둠은 빛을 두려워합니다. 비진리는 진리를 싫어합니다. 가짜는 진짜를 증오합니다. 그래서 진리의 길을 방해하기도 하고, 그 도시의 주도권을 빼앗기지 않으려고 강렬하게 저항할 것입니다.
10절 말씀을 보시면,
“이르되 모든 거짓과 악행이 가득한 자요 마귀의 자식이요 모든 의의 원수여 주의 바른 길을 굽게 하기를 그치지 아니하겠느냐”
사도 바울은 성령으로 충만하여 거짓 선지자인 바예수를 향해 ‘모든 거짓과 악행이 가득한 자, 마귀의 자식, 의의 원수, 주의 바른 길을 굽게 하기를 그치지 않는 자’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바나바와 사도 바울이 첫 번째로 들어간 선교지는 구브로 섬이었고, 그 첫 번째 선교지에서부터 그들은 충돌이 있었던 것입니다. ‘선교사님들이 조용히 선교하다 그 도시를 떠나면 그만이지 왜 도시를 소란스럽게 하나?’라고 생각하는 사람도 있을 겁니다. 그러나 진짜는 가짜와 충돌할 수밖에 없습니다.
제가 처음 이곳에 교회를 개척하던 때는 영적으로 이 도시가 참으로 어렵고 힘든 때였다고 말씀드린 적이 있습니다. 6년 전에 이곳에 교회를 개척했는데, 개척 초반부터 얼마나 어려운 일들이 많았는지 모릅니다. 바예수와 같이 어떤 사람은 겉으로는 정말 종교적이고, 영적인 것처럼 보이는 사람도 있었지만 그 중에는 ‘가짜’도 있었습니다.
마태복음 7장15절 말씀에
“거짓 선지자들을 삼가라 양의 옷을 입고 너희에게 나아오나 속에는 노략질하는 이리라”
예수님께서도 ‘양의 옷을 입고 너희에게 나아오나 속에는 노략질하는 이리’를 경계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런데 누가 양인지, 누가 이린지, 누가 진짜인지, 누가 가짜인지를 구분한다는 게 쉽지 않습니다.
여러분, 신앙생활하면서 영적으로 진짜와 가짜를 어떻게 구분할 수 있겠습니까? 몇 가지를 체크해 보시면 됩니다.
첫째, 그는 하나님과 교회를 정말 사랑하는가?
둘째, 그는 삶이 하나님께 영광이 되는가?
셋째, 그는 교회 공동체에 은혜와 덕이 되는가?
넷째, 그는 진실만을 말하는가?(거짓의 아비 : 마귀)
다섯째, 그는 교회를 분열되게 하지는 않는가?
여섯째, 그는 교회와 성도들의 화합에 힘쓰는가?
일곱째, 그는 성도들을 사랑으로 섬기는가?
여덟째, 그는 사익을 따라 살고 있지는 않은가?
아홉째, 그는 진실하게 봉사하고 헌신하는가?
열째, 그는 트러블메이커인가? 피스메이커인가?
이러한 내용들만 여러분이 체크해 보셔도 어느 정도는 영적으로 분별이 가능할 것입니다. 예수님의 열두 제자 중에서도 돈 받고 예수님을 팔아넘긴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교회라고 가룟 유다 같은 사람이 없겠습니까? 교회는 누구나 들어올 수 있는 곳이고, 누구든 등록만 하면 교인이 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교회 다닌다고 모두가 진정한 크리스천은 아닐 수도 있는 것입니다.
제가 처음에 이민교회를 하면서 싸웠던 부분이 있었습니다. 이민교회 특성상 어떤 사람들은 교회에 신앙생활을 위해 오지 않고, 비즈니스를 위해 오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교회 와서 동업할 사람을 찾기도 하고, 자본 대줄 사람을 찾기도 하고, 간혹 나쁜 마음으로 다른 사람을 속이고 물질을 갈취하려는 자도 있었습니다.
저는 담임목사로서 우리 성도들이 이곳에서 평안함 중에 신앙생활을 이어가고, 영적으로 잘 성장해 나갈 수 있도록 돕는 목사의 직임을 갖고 있습니다. 때문에 간혹 그런 세속적인 생각을 갖고 들어오는 이들로부터 우리 성도들이 피해보지 않도록 보호하고 경계해야 하는 일도 해야 했습니다.
그래서 초기에 제가 어떤 교인을 향해서 ‘우리 교회에서는 비즈니스 하면 안 된다. 동업하면 안 된다. 돈 거래 하면 안 된다.’라고 경계했더니, 그 분이 발끈하면서 ‘아니 그럼 한인교인들 대상으로 장사 하지 않으면 누구를 대상으로 장사합니까?’하면서 큰 소리 치는 사람도 있었습니다.
당연히 우리 성도들 거 팔아주고, 도와줘야 합니다. 여러분 그렇게 하셔야만 합니다. 그러나 그런 사랑의 마음과 달리, 비즈니스가 목적이 되거나, 교회를 이용하려고 하거나, 성도를 물질적으로 이용하려고 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는 ‘가짜’일 수 있다는 사실을 기억하시길 바랍니다.
그런 사람들은 저 같은 목사가 마음에 안 드는 겁니다. 싫은 겁니다. 목사가 그들하고 손발이 좀 맞아야 좋을 텐데, 제가 너무 고지식한 겁니다. 그래서 초기 몇 년은 그런 충돌이 종종 있었고, 저는 그런 사람들에게 미운 목사였습니다. 하지만 이후로도 마찬가지입니다. 저는 우리 교회 공동체를 순수한 신앙공동체로 지켜 나가야 하는 사명을 받았습니다.
저와 여러분이 이 땅에 주님의 교회를 세워가고, 이 땅을 향한 주님의 뜻을 이뤄가는 과정 속에 있습니다. 그리고 분명 힘들고 어려운 일들도 있고, 내 능력으로는 감당하기 벅찬 장애물들도 만나게 될 것입니다. 진짜는 가짜와 충돌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그런 저항을 두려워하지 마십시오.
2. 저항 중에도 열매를 맺는다
구브로 섬의 바보에는 바예수라고 하는 거짓 선지자 같은 사람도 있었지만, 복음을 위해 예비 된 영혼도 있었습니다.
7절 말씀입니다.
“그가 총독 서기오 바울과 함께 있으니 서기오 바울은 지혜 있는 사람이라 바나바와 사울을 불러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자 하더라”
로마 황제로부터 파견된 섬의 총독 ‘서기오 바울’이란 사람이 있었는데, 그는 바나바와 사울을 불러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자 했습니다. 그는 복음에 관심을 갖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바예수라고 하는 거짓 선지자가 총독 서기오 바울과 아주 가까운 사이였다는 것입니다. 아마도 총독에게 종교적이고, 영적인 참모 역할을 한 사람이었을 것 같습니다. 그 거짓 선지자는 총독을 통해서 여러 가지 특혜를 받아 누렸을 것입니다. 하지만, 총독이 복음에 관심을 보이고, 바나바와 바울을 불러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자 했던 것입니다.
8절입니다.
“이 마술사 엘루마는 (이 이름을 번역하면 마술사라) 그들을 대적하여 총독으로 믿지 못하게 힘쓰니”
거짓 선지자 바예수는 총독이 믿지 못하도록 힘썼습니다. 바울과 바나바의 복음을 듣고 총독이 믿음을 가질 것 같으니깐 여러 가지 거짓과 술수를 통해 그걸 방해했던 것으로 보입니다. 가짜 선지자였던 바예수 입장에서는 총독이 믿음을 갖게 되면, 자기 밥줄이 끊기는 거였기 때문에 극렬하게 방해했던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12절에 보면, 총독은 복음을 받아들이고 예수 그리스도를 믿게 되었다는 사실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 사진이 무슨 그림일 거 같습니까? 지금 건물 위에 있는 커다란 십자가에 불이 붙었습니다. 작년 중국 베이징에서 놀랍게 부흥하고 있던 교회의 십자가를 중국 정부에서 불태우고 있는 장면입니다. 70명의 공안들이 들어가 교회 집기를 몰수하고, 성도들을 쫓아내고, 교회 이름을 지워버렸고, 교회를 폐쇄하고, 약 2억원의 벌금을 물렸습니다.
1949년 중국 공산정권이 시작되면서 중국의 기독교는 박해와 탄압 그리고 소멸의 길을 걷기 시작했습니다. 교회들은 폐쇄되고, 재산은 몰수되고, 목사들은 재판을 받고 감옥에 가뒀습니다.
이런 기독교 교회의 박해는 지금까지 계속 이어지고 있습니다. 허난성에서는 2014년~2016년까지 4천개의 교회 십자가가 철거됐습니다. 설교하던 목사님들은 붙잡혀 가고, 교회 재산은 몰수되고 있습니다. 국가에서 교회를 폐쇄시켜 버린 겁니다. 시진핑이 다스리는 중국 공산정권은 교회를 중국 땅에서 완전히 소멸시키려고 시도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1949년부터 지금까지 그런 일들은 계속 이어지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1949년 중국의 기독교 인구는 70만 명밖에 없었습니다. 복음은 공산주의라는 이데올로기를 통해 극렬한 저항과 훼방을 받았습니다. 하지만 그 엄청난 박해와 핍박 중에도 중국의 기독교는 폭발적으로 성장하고 있습니다. 현재 중국의 기독교 인구는 약 1억 명 내외라고 합니다. 1949년에 비해 140배 이상 성장한 겁니다. 앞으로 2030년 경에는 중국이 미국보다 기독교 인구가 더 많아져 세계 최대의 기독교인을 보유한 국가가 될 것이라는 보고가 있습니다.
극렬한 방해가 있었지만, 진리는 살아서 더 놀랍게 역사하고 있는 것입니다. 거짓 선지자 바예수의 극렬한 방해에도 불구하고 구브로 섬의 총독은 예수를 믿게 된 것입니다. 저항 중에도 열매를 맺게 된 것입니다.
여러분이 하나님의 말씀으로 살고, 하나님의 뜻대로 살려고 하고, 믿음으로 살려고 함에도 불구하고 여러 가지 방해들이 있을 수 있습니다.
박해 받는 중국 상하이의 한 목사님은
“이것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선물이라고 생각한다”
라고 고백했습니다. 여러분에게 오는 예상치 못했던 어려움들이 있을 겁니다. 그것이 내 힘과 능력으로 감당할 수 없을 만큼 힘든 일일 수도 있을 겁니다. 그러나 여러분이 믿음으로 살고 있으며,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살아가고 있음에도 여러분을 가로막는 여러 가지 방해물들과 저항들과 훼방이 있지만 두려워하지 마십시오. 그런 저항 중에도 반드시 열매를 맺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일하시는 것을 보시게 될 것입니다.
3. 하나님의 개입을 믿으라
왜냐하면 우리의 힘으로, 능력으로 감당할 수 없는 상황 속에 하나님께서 개입하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저 역시도 살아가면서 제 힘으로 감당할 수 없는 상황들을 만나기도 합니다. 그런 상황에서는 정말 제가 할 수 있는 게 없습니다. 다만 하나님께서 개입해 주시기만을 바랄 뿐입니다.
바나바와 바울은 선교사로 파송 받아 구브로 섬을 두루 다니며 복음을 전했습니다. 그러나 거짓 선지자 바예수를 통해 브레이크가 걸린 겁니다. 그는 그 섬의 로마 총독을 배경으로 삼고 대단한 권세와 영향력을 행사하던 사람이었습니다. 어쩌면 바나바와 바울은 외부에서 왔기 때문에 그런 든든한 배경이 없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9절을 보시면,
“바울이라고 하는 사울이 성령이 충만하여 그를 주목하고”
바울은 정치적인 힘도, 배경도, 권세자도 없었지만 성령 하나님이 그에게 있었던 것입니다. 그가 성령 충만하여 그를 주목해봤습니다. 성령께서 바울을 통해 무엇인가를 말씀하시고자 하셨던 겁니다.
10절을 보시면,
“이르되 모든 거짓과 악행이 가득한 자요 마귀의 자식이요 모든 의의 원수여 주의 바른 길을 굽게 하기를 그치지 아니하겠느냐”
모든 거짓과 악행은 반드시 심판을 받게 되어 있습니다. 마귀의 종과 자식 노릇하는 것 역시 심판을 받게 되어 있습니다. 주님의 복음을 훼방하고, 교회를 훼방하고, 주의 바른 길을 어그러지게 하는 일들은 반드시 심판 받게 되어 있는 것입니다.
이런 무시무시한 말씀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요즘 사회에서 또 교회 안에서 조차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교회를 훼방하고, 하나님의 이름을 훼방하는 일들이 많습니까? 정말 우리가 두려워해야 할 말씀인 것입니다.
11절 말씀을 보시면,
“보라 이제 주의 손이 네 위에 있으니 네가 맹인이 되어 얼마 동안 해를 보지 못하리라 하니 즉시 안개와 어둠이 그를 덮어 인도할 사람을 두루 구하는지라”
성령께서 바울의 입을 통해서 거짓 선지자 바예수가 맹인이 될 것이라고 예언했던 것입니다. 그리고 즉시 그는 안개와 어둠이 그를 덮어 인도할 사람을 두루 구했습니다.
‘하나님을 경외한다’는 말은 ‘하나님을 두려워한다’는 말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잘 섬긴다는 것은 하나님을 두려워할 줄 아는 삶을 사는 것을 말합니다. 하나님이 무서운 줄 모르고 날뛰던 거짓 선지자를 하나님께서 더는 참으실 수 없으셨던 것입니다. 그리고 그에게 하나님께서 개입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그를 심판하신 것입니다.
그 섬의 로마 총독을 등에 업고 영향력을 행사하던 거짓 선지자로 인해서 바울과 바나바는 여러 가지 곤란한 상황 속에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런 권세자들 앞에서 무슨 일을 할 수 있겠습니까? 그러나 하나님께서 개입하시자 모든 방해물은 한 순간에 사라져 버린 것입니다.
전세계 모든 음악사역자들로부터 가장 존경받는 아티스트 중에 한 사람인 ‘존 마이클 탈봇(John Michael Talbot, 1954~)’이 우리에게 이런 말을 남겼습니다.
“나의 가장 어두웠던 시절을 되돌아보면, 그 때야 말로 하나님이 나를 가장 꼭 붙들고 계셨음을 깨닫는다”
“하지만 그 때 나는 주님의 얼굴을 볼 수 없었다. 내 얼굴을 그분의 가슴 깊이 묻고 있었기 때문이다. 한 없이 울면서…”
고아들의 아버지이며, 5만번 기도 응답의 주인공인 ‘조지 뮬러(George Muller, 1805~1898)’는 이렇게 말합니다.
“믿음은 우리 힘으로 할 수 있는 영역에서는 역사하지 않습니다”
“사람이 할 수 있는 곳에서는 하나님께 돌릴 영광이 없습니다. 믿음은 사람의 능력이 끝나는 곳에서 시작됩니다”
우리가 나아가는 길에 여러 가지 방해물과 저항이 있을 것입니다. 그 중에는 내 힘으로 도저히 감당할 수 없는 문제들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 저항을 두려워하지 마십시오. 왜냐하면 사람의 능력이 끝나는 곳에서 하나님의 역사는 시작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개입을 믿으십시오. 내 삶에 하나님께서 일하심을 믿으시길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