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패자를 들어 쓰시는 하나님

시편 113:1~9

1 할렐루야, 여호와의 종들아 찬양하라 여호와의 이름을 찬양하라

2 이제부터 영원까지 여호와의 이름을 찬송할지로다

3 해 돋는 데에서부터 해 지는 데에까지 여호와의 이름이 찬양을 받으시리로다

4 여호와는 모든 나라보다 높으시며 그의 영광은 하늘로다 높으시도다

5 여호와 우리 하나님과 같은 이가 누구리요 높은 곳에 앉으셨으나

6 스스로 낮추사 천지를 살피시고

7 가난한 자를 먼지 더미에서 일으키시며 궁핍한 자를 거름더미에서 들어 세워

8 지도자들 곧 그의 백성의 지도자들과 함께 세우시며

9 또 임신하지 못하던 여자를 집에 살게 하사 자녀들을 즐겁게 하는 어머니가 되게 하시는도다 할렐루야

[시편 113편]은 ‘할렐루야’로 시작해서 ‘할렐루야’로 마치기 때문에 ‘할렐시(Hallen)’라고 불리기도 합니다. ‘할렐루야’라는 것은 ‘여호와를 찬양하라’는 뜻을 갖고 있습니다. 시인은 1~3절에서 여호와의 종들에게 하나님을 찬양할 것을 요구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4~9절까지는 그 하나님을 찬양해야 할 이유가 무엇인지를 나열하고 있습니다.

먼저, 2절과 3절을 보시면, “이제부터 영원까지 여호와의 이름을 찬송할지로다. 해 돋는 데에서부터 해 지는 데에까지 여호와의 이름이 찬양을 받으시리로다” 시인은 하나님을 찬양하되 ‘이제부터 영원까지’ 그 찬양의 기간이 끝이 없는 영원에 이르기까지 되어야 함을 말하고 있고, ‘해 돋는 데에서부터 해 지는 데에까지’ 즉, 영원이라는 시간을 이해할 수없다면 하루의 날이 시작하면서부터 마치는 데에까지, 인생의 시작부터 마치는 데에까지 하나님은 찬양 받기에 합당하신 분이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4~9절까지 그 이유에 대해서 나열하고 있는데, 4절에서 이 땅에 있는 모든 나라와 권세와 영광보다 높고 심지어 하늘보다 더 높은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 땅의 어떤 고관보다, 어떤 왕들보다 더 높은 분이신데 6절에 의하면, 그 하나님께서 스스로 자신을 낮추어 하늘 아래에 있는 연약한 자들을 살피셨다는 것입니다.

정치적 야망과 권력욕으로 가득한 현대의 정치인들은 수 해나 산불과 같은 어떤 재난 현장에 수행원들과 함께 우르르 몰려가서 사람들 손도 잡아 주고 뭔가 걱정하는 듯한 말들을 하지만, 우리 국민들 중에 그 모습을 진실되게 바라보는 이는 많지 않을 것 같습니다. 과연 그들이 정말 큰 어려움 가운데 있는 이들을 향해 진정으로 걱정하는 것인지 아니면, 누군가의 재난을 자신의 정치적 수단으로 이용하는 것인지… 때로는 그 정치인들의 속이 훤히 들여다보일 때도 있습니다.

7절과 8절을 보시면, “가난한 자를 먼지 더미에서 일으키시며 궁핍한 자를 거름더미에서 들어 세워, 지도자들 곧 그의 백성의 지도자들과 함께 세우시며” 신분제도가 엄연히 존재하던 고대 사회에서 ‘가난한 자, 궁핍한 자’는 가장 비천한 밑바닥 인생이었습니다. 그 인생은 절대 신분 상승의 기회는 주어지지 않고, 그 자식의 자식과 그 후손 대대로 비천한 신분으로 살아야만 했던 시대였습니다.

그런데 성경의 역사를 보시면, 하나님께서는 가난하고, 궁핍하고 비천한 인생을 들어 위대한 역사를 이루셨던 일들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요셉은 열일곱 살에 비천한 노예 신분으로 전락했고, 20대 시절은 감옥의 죄수로 하루하루를 보냈었지만 하나님께서는 그를 들어 애굽의 총리로 세워 온 세상을 구원하는 통로가 되게 하셨습니다. 모세도 40년간 비천한 목동 신분으로 인생의 바닥을 치고 있을 때, 그를 들어 이스라엘 민족의 출애굽 지도자로 사용하셨습니다. 이런 예들이 성경에 얼마나 많이 나옵니까?

9절을 보시면, “또 임신하지 못하던 여자를 집에 살게 하사 자녀들을 즐겁게 하는 어머니가 되게 하시는도다 할렐루야” 어떤 학자는 이 구절을 ‘한나의 노래’와 연관이 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사무엘상 2장의 한나는 임신하지 못하던여인이었으나, 하나님께서 그를 불쌍히 여겨 아들 사무엘과 여러 자녀들을 주셔서 하나님을 찬양하는 여인이 되게 하셨다는 것입니다.

우리 교회 성도인 한 형제님이 필리핀에서 대형 교통사고로 여러 차례의 대수술을 받았지만, 결국은 한쪽 다리를 절단해야만 했고, 다른 다리도 인공관절 수술을 받아야만 했습니다. 목사인 저는 그 형제님을 생각할 때마다 마음이 아프고, ‘다리가 절단되지 않았더라면…’하는 안타까운 마음이 너무나도 큽니다. 본인과 가족들은 어떻겠습니까? 그런데 사고 전 예수님을 믿지 않던 우리 형제가 지금은 믿음 안에서 씩씩하게 이 모든 어려움을 견디며 재활치료도 받고, 직장 출근도 하면서 잘 살아가고 있습니다.

지금은 한국에서 근무하고 있는데, 얼마 전 세부에 잠시 다녀갔습니다. 그래서 함께 식사할 자리가 있었는데, 우리 형제님이 그때 목사인 저한테, ‘제가 목사님의 은혜는 정말 평생 잊지 않을 거예요…’ 하시면서, 눈물짓는 겁니다. 제가 그 말을 듣는데 얼마나 송구했는지 모릅니다. 왜냐하면 제가 그 형제님을 위해 해준 게 없었기 때문입니다.

다만, 병원에 있는 1년 반이라는 긴 시간 동안 함께 걱정해 주고, 함께 울어주고(울긴 참 많이 울었습니다), 함께 기도해 준 것뿐이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결과가 좋지 않은거 같아 저는 목사로서 알 수 없는 미안함 같은 게 지금도 큽니다. 그래서 그 형제님에게 그런 인사를 들을 자격도 없다고 생각되고, 성도가 아픈데 어느 목사님이 그렇게 안 하시겠습니까? 하지만, 우리 형제님은 그런 말로서 제게 고마움을 표현했던 것입니다.

우리 형제님은 지금도 매일 유튜브를 통해 찬양과 설교 말씀을 들으며, 하나님의 은혜를 기억하고, 주님과 인격적인 깊은 관계 안에서 믿음으로 살아가고 있습니다. 저는 하나님께서 우리 형제님을 통해서 새 일을 행하실 것을 믿습니다. 하나님은 가난하고 궁핍한 자, 실패한 자를 통해서 더 큰 영광을 받으실 것입니다. 고난이 크면 클수록, 실패가 크면 클수록 하나님은 더 큰 찬양과 영광을 받으시는 것입니다.

기억해야 할 한 문장
하나님은 가난하고 궁핍한 자, 실패한 자를 통해서 더 큰 영광을 받으실 것입니다. 고난이 크면 클수록, 실패가 크면 클수록 하나님은 더 큰 찬양과 영광을 받으시는 것입니다.

오늘의 묵상
나의 실패 가운데 하나님께서 어떤 찬양을 받으실지 묵상해 봅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