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태복음 22:23~33>
복음서에 보면 대표적인 유대교의 분파 중에 바리새파와 사두개파가 나옵니다. 바리새파는 포로귀환 이후 에스라 선지자 이후에 등장한 ‘구약의 청교도’라고 할 만큼 그들은 철저한 율법 준수를 강조했고, 조상들의 율법 해석과 전통을 매우 중요시했습니다. 이로 인해 이들은 율법적 구원관을 갖게 되었고, 율법의 내면적인 의미보다 외면적인 형식을 중요시하면서 점점 위선과 외식적인 신앙으로 변질됩니다. 때문에 예수님께 많은 책망을 받은 사람들이기도 합니다.
그리고 사두개인들은 다윗 시대의 제사장 사독의 이름에서 유래한 것으로 보는데, 사독의 후손들이 솔로몬 시대 이후 계속해서 제사장의 직무를 맡아왔던 것으로 보입니다. 때문에 대제사장은 항상 사두개파에서 나왔고, 그들은 산헤드린 공회에서 매우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었고, 유대 사회의 종교적, 정치적, 사회적 지위와 부와 권세를 누리던 귀족들이었습니다.
그런데 바리새파의 경우는 천사의 존재와 영혼의 불멸 그리고 부활과 내세의 삶을 믿었습니다. 하지만 사두개파의 경우는 거의 모든 부분에서 바리새파와 대조적이었습니다. 그들은 죽은 자의 부활, 내세의 삶, 천사, 영의 존재를 인정하지 않고 현세적 종교를 강조하는 유대교의 분파였습니다.
오늘 본문은 죽은 자의 부활을 믿지 않는 사두개파가 까다로운 질문을 통해서 예수님을 곤경에 빠뜨리려고 하는 모습이 나옵니다. 그들은 부활을 믿지 않았기 때문에 성경의 난제를 들고 나와 예수님과 논쟁을 하게 된 것입니다.
24절을 보시면,
“선생님이여 모세가 일렀으되 사람이 만일 자식이 없이 죽으면 그 동생이 그 아내에게 장가 들어 형을 위하여 상속자를 세울지니라 하였나이다”
사두개인들은 신명기 25장 5절과 6절의 ‘수혼법(嫂婚法)’ 혹은 ‘형사취수제(兄死取嫂制)’를 논쟁거리로 가지고 온 겁니다. 수혼법이라고 하면 ‘형수와 결혼하는 제도’를 말하고, 형사취수제라는 것은 ‘형이 죽었을 때 형수와 결혼하는 것’을 말합니다. 요즘 사회에는 이해할 수 없는 제도이겠지만, 고대사회에서 대가 끊기지 않게 하기 위해 그 문화 속에서 주어졌던 제도였습니다. 그러니깐 형이 장가갔는데, 대를 이을 자손이 없이 죽게 되면 동생이 형수와 혼인해서 낳게 되는 첫 번째 아들은 형의 이름으로 대를 잇게 되는 겁니다. 그리고 둘째부터는 그 동생의 대를 잇는 제도였습니다.
그런데 25절부터 27절에서 사두개인들이 이런 얘기를 합니다. 어떤 아버지에게 7형제가 있는데, 맏이가 장가들었다가 상속자가 없이 죽었고, 그래서 둘째가 형수와 결혼했는데 역시 상속자가 없이 죽었고, 그렇게 셋째, 넷째… 일곱째까지 형수와 혼인했다가 상속자 없이 모두 죽었는데, 부활 때에 일곱 중의 누구의 아내가 될 것인가? 라는 질문을 예수님께 한 것입니다. 왜냐하면 사두개인들은 부활을 믿지 않기 때문에 그런 질문을 하고 있는 겁니다. ‘부활은 없다’라는 논리를 펼치기 위해서 그런 질문을 한 겁니다.
그때 예수님께서 그들이 성경도, 하나님의 능력도 알지 못해 오해하고 있음을 말씀하시고, 부활 때에는 장가도 아니 가고 시집도 아니 가고 하늘에 있는 천사들과 같은 상태가 된다는 것을 말씀하셨습니다.
32절을 보시면,
“나는 아브라함의 하나님이요 이삭의 하나님이요 야곱의 하나님이로라 하신 것을 읽어 보지 못하였느냐 하나님은 죽은 자의 하나님이 아니요 살아 있는 자의 하나님이시니라 하시니”
그리고는 사두개인들이 믿고 있는 모세의 율법인 출애굽기 3장6절을 근거로 말씀하시는데, 모세가 여호와 하나님을 만났을 때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자신을 소개하실 때 “나는 아브라함의 하나님이요 이삭의 하나님이요 야곱의 하나님이로라”고 하셨다는 것입니다. 모세가 태어나기 400년 훨씬 이전에 살았었던 이스라엘의 족장들이 아브라함, 이삭, 야곱인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죽은 자의 하나님이 아니요 살아 있는 자의 하나님이시니라”는 것입니다. 즉 아브라함, 이삭, 야곱이 지금 살아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깐 부활은 있다는 것입니다.
이사야 26:19절에 보시면,
“주의 죽은 자들은 살아나고 그들의 시체들은 일어나리이다 티끌에 누운 자들아 너희는 깨어 노래하라 주의 이슬은 빛난 이슬이니 땅이 죽은 자들을 내놓으리로다”
그리고 다니엘 12:2절에도
“땅의 티끌 가운데에서 자는 자 중에서 많은 사람이 깨어나 영생을 받는 자도 있겠고 수치를 당하여서 영원히 부끄러움을 당할 자도 있을 것이며”
모세오경만을 믿고 있었던 사두개인들은 부활을 믿지 않았지만, 모세가 기록한 출애굽기에도 그리고 이사야와 다니엘서에도 그 부활을 증거하고 있다는 것을 말씀하셨습니다.
그런데 부활 즉 내세에 관한 믿음을 갖고 있는 것과 그런 믿음이 없는 것에 어떤 차이가 있겠습니까? 이생이 전부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이생의 삶에 집중할 겁니다. 그러나 부활과 내세를 믿는 이들은 이 땅의 삶에 너무 집착하지는 않게 될 것입니다. 왜냐하면 이생이 전부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사두개인들은 부활과 내세를 안 믿었던 겁니다. 그들은 많은 재물을 갖고 있었고, 제사장과 같은 위치의 사회지도층 인사였고, 부족할 것이 없는 귀족생활을 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이생이 너무 풍족하고 좋은데 굳이 부활과 내생을 사모하고 싶겠습니까?
그러나 부활과 내생을 믿는 이들은 이 땅의 삶에 너무 연연해하지 않게 됩니다. 그리고 우리가 장차 갈 곳이 있다는 것은 하나님 앞에 설 날이 오게 될 것을 믿고 있다는 것이기 때문에 그 분을 경외하는 마음으로 살게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는 이 땅에서 최선을 다하고, 의미 있는 삶을 살다가 하나님 앞에 서게 될 날이 오게 될 것입니다. 때문에 부활과 내생의 삶을 사모하며 이 땅에서 부끄럽지 않은 삶을 살다가 주님 앞에 나아가야 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