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가복음 2:1~12>
제가 필리핀 세부에 교회를 개척하기 위해서 왔을 때 참 막막했었습니다. 아는 사람도 없었고, 저는 교회 개척이나 선교를 위해 준비된 사람도 아니었고 그렇다고 든든한 개척 자금을 갖고 있는 것도 아니고, 개척 멤버도 없고, 언어와 문화도 다르고… 요즘 한국에서도 개척교회는 힘들다고 하는데 그것도 아무 연고도 없는 필리핀 세부에 와서 한인교회를 개척한다는 것은 저에게는 막연했던 거 같습니다. 그냥 하나님께서 저를 한국에서 쏙 뽑으셔서 바다를 건너 이곳 세부에 툭하고 떨어뜨려놓으신 거 같았습니다. 그리고 방금 전에 나열했던 것처럼 ‘~없고, ~없고, ~아니고, ~없고, ~아니고…’ 이런 부정적인 요소들과 환경들이 개척 전에 저에게 크게 느껴졌습니다.
그런데 이 문제를 놓고 엎드려 기도만 하면 하나님께서 저에게 용기와 꿈과 비전과 소망을 주시는 것입니다. 분명 뭐도 없고, 뭐도 안 되고, 뭐도 아니고… 이런 부정적인 환경 때문에 낙심되어 있었는데, 기도의 무릎만 꿇으면 새로운 꿈과 비전과 용기와 소망을 주시는 것이었습니다.
기도할 때 하나님께서 저에게 자꾸 믿음을 주시는 겁니다. 불가능할 것 같은 환경들이 제 마음을 지배하려고 할 때, 하나님께서는 저에게 그 부정적인 환경들보다 큰 믿음을 주셔서 믿음이 환경을 지배하게 하셨던 것입니다. 여러분의 믿음의 크기가 여러분 앞에 있는 부정적인 환경의 크기보다 크면 여러분의 믿음이 환경을 지배하기 시작할 것입니다. 그러면 환경은 큰 문제가 되지 않는 것입니다.
2차 세계대전을 승리로 이끈 영국의 42대 총리 윈스턴 처칠(Sir Winston L. S. Churchill, 1874~1965) 경은 영국인들이 가장 존경하는 정치인이기도 합니다. 그가 이런 말을 남겼습니다.
“비관론자는 모든 기회에서 어려움을 찾아내고, 낙관론자는 모든 어려움에서 기회를 찾아낸다.”
비관론자의 눈에는 모든 환경은 불가능하게만 보이는 겁니다. 비관론자의 시력은 용케도 안 될 것만, 불가능할 수밖에 없는 것만 찾아내는 것입니다. 하지만 낙관론자는 어려운 환경 속에서도 새로운 기회를 찾아내는 것입니다. 관점의 차이인 것입니다. 비관론자의 마음은 환경에 지배 받지만, 낙관론자의 마음은 환경을 지배하는 것입니다.
제가 처음 세부에 와서 이곳 교민들 숫자를 알아보니 꽤 많았습니다. 반면 한인교회는 교민 수에 비해 너무 적었습니다. 비관론자의 관점으로는 ‘여기가 얼마나 교회 자립이 어려우면 그렇겠는가?’라는 결론이고, 낙관론자의 관점으로는 ‘아직 전도해야 할 사람은 많고, 얼마든지 교회는 부흥할 수 있다.’라는 결론에 이를 수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갈릴리 지역의 여러 마을을 다니며 전도와 치유와 가르치는 사역을 하시다가 다시 가버나움으로 돌아오셔서 한 집에 머무르게 되셨습니다. 그 소문은 가버나움 사람들에게 삽시간에 퍼졌습니다. 많은 사람들은 예수님을 보기 위해 그 집으로 몰려들게 되었고, 문 앞까지도 들어설 자리가 없을 만큼 사람들이 가득했습니다.
오늘 본문 3절과 4절을 보시면
“사람들이 한 중풍병자를 네 사람에게 메워 가지고 예수께로 올새, 무리들 때문에 예수께 데려갈 수 없으므로 그 계신 곳의 지붕을 뜯어 구멍을 내고 중풍병자가 누운 상을 달아 내리니”
어떤 사람들이 한 중풍병자를 네 사람에게 메워 가지고 예수님이 계신 집을 찾아온 겁니다. 예수님의 치유의 소문을 듣고 찾아온 것입니다. 아마도 이 중풍병자의 가족이나 아니면 지인들이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 집 앞에 너무 많은 사람들이 몰려 있어서 사람들에게 부탁도 하고 소리도 쳐 보지만 사람들은 꿈쩍도 하지 않았습니다. 하는 수 없이 그들은 예수님이 계신 곳의 지붕을 뜯어 구멍을 내고 중풍병자가 누운 침상을 달아 내리게 된 것입니다.
이 얼마나 무례한 행동입니까?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남의 집 지붕을 뜯어가면서까지 이 소란을 일으킨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었던 것입니다. 집 주인을 비롯해서, 그곳에 예수님을 보러 왔던 사람들 사이에 큰 소란이 일어났을 것입니다.
그런데 5절을 보시면,
“예수께서 그들의 믿음을 보시고 중풍병자에게 이르시되 작은 자야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 하시니”
진흙과 건초를 이겨 만든 지붕이 뚫렸으니 그 집 안에 계셨던 예수님과 사람들은 먼지를 뒤집어썼고, 먼지 때문에 숨쉬기도 힘들 정도였을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님께서는 그들의 믿음을 보시고 중풍병자의 죄를 사하시고, 그의 중풍병을 치료해 주시는 것입니다(11,12절). 그들을 가로막고 있는 환경들(사람들과 지붕)은 믿음의 사람들에게는 문제가 되지 않았습니다. 예수님께서 치료해 주실 것을 믿었고, 그 중풍병자를 치료하기 위한 간절함과 절박함이 그 어려운 환경들을 뛰어넘었던 것입니다. 남들이 보기에는 과격하고 무모해 보일지라도 이들은 진짜 믿었기 때문에 그렇게 했던 것입니다.
진짜 믿음은 모든 환경을 뛰어넘습니다. 환경이라는 벽에 부딪쳤을 때 그 환경을 돌파해 버리는 것입니다. 우리는 현실이라는 환경 속에 살아가고 있습니다. 때문에 그 환경의 영향을 많이 받는 게 사실입니다. 환경이 ‘안 된다’ 그러면 포기하는 겁니다. 환경이 ‘가능하다’라고 하면 한 번 시도해 보는 겁니다. 이것은 철저히 환경에 지배받는 삶인 것입니다.
그러나 믿음이 환경을 지배하기 시작하면, 환경은 내가 넘어가야 할 하나의 산과 같은 것입니다. 시간이 좀 더 걸릴 뿐이지 내가 넘지 못할 산은 없는 것입니다. 불가능해 보이는 환경보다 내 믿음의 크기를 더 키워버리면 됩니다. 믿음의 크기가 환경보다 커지면 환경을 지배하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환경에 지배당하고 있습니까? 믿음이 환경을 지배하고 있습니까? 믿음의 크기를 키워 환경을 초월하는 인생을 사시기를 축복합니다.